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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1-08 22:16
[한국사] 강동 6주와 고려 서북계 연구 종합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2,302  

저 혼자서 요사, 요사 지리지, 고려사를 중심하여 궁리하고 연구한 내용을 정리하였습니다.

보다 더 내용을 다듬고 또 추가해 보려했으나 저도 생업이 있는지라 이것만 붙잡고 있을 수 없어서 여기에서 일단 정리를 하고 후일을 기약하기로 하였습니다.

보잘 것 없는 글이지만 많은 시간이 투자된 것이니 부디 찬찬히 잘 읽어보시고 지도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글을 퍼가실 때에는 반드시 가생이닷컴 감방친구로 출처를 명확히 해주시길 바랍니다.

이곳에 게시하는 제 모든 글은 스마트폰 상에서 작성한 것으로 이 글 역시 그러합니다. 따라서 편집과 구성이 깔끔하지 못 한 점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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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강동 6 주는 어디인가?

(1) 遼史  二國外記  高麗

聖宗 統和 3년(A.D.985; 高麗 成宗 4) 가을 7월에 모든 道에 詔勅을 내려 武器를 정비하여 동쪽으로 高麗를 정벌하는데 대비하도록 하였다가 8월에 遼나라 진펄이 卑濕한 까닭으로 出兵을 중지하였다.

統和 10년(A.D.992; 高麗 成宗 11)에 東京留守 蕭恒德으로 하여금 高麗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統和 11년(A.D.993; 高麗 成宗 12)에 王治가 朴浪柔를 파견하여 表를 올려 罪를 自認하므로 詔勅을 내려 女直國 鴨綠江(원문에는 鴨淥江이라 돼 있음)  동쪽 수백리 땅을 주었다

十一年, 王治遣朴良柔奉表請罪, 詔取女直國鴨淥江東數百里地賜之

(2) 고려사 열전 서희
ㅡ 서희가 다시 계책을 건의했다.
“거란(契丹)의 동경(東京)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의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살던 곳인데, 광종이 그것을 빼앗아 가주(嘉州 : 지금의 평안북도 운전군 가산)·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은 것입니다. 지금 거란이 내침한 뜻은 이 두 성을 차지하려는 것에 불과한데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겠다고 떠벌리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ㅡ 서희가,
“제가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깨끗이 평정하고 옛 땅을 수복한 뒤에야 조빙이 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겨우 강 안을 수복하였으니 강 밖의 영토까지 획득하고 나서 수교를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렸으나, 성종은 “오래 수교하지 않으면 후환이 생길까 두렵다.”고 하며 끝내 박양유를 보냈다. 서희는 평장사(平章事)로 전임되었다.
13년(994)에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쫓아낸 다음 장흥진(長興鎭 : 지금의 평안북도 태천군 동쪽)·귀화진(歸化鎭)의 두 진과 곽주(郭州 : 지금의 평안북도 곽산군)·귀주(龜州 :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시)의 두 주에 성을 쌓았다. 이듬해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안의진(安義鎭 :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시)·흥화진(興化鎭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피현군 백마 동쪽)의 두 진에 성을 쌓았고, 그 이듬해 선주(宣州 :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군)·맹주(孟州 : 지금의 평안남도 맹산군)의 두 주에 성을 쌓았다.

(3) 『宋史』卷487 列傳246 外國3 高麗 宋 眞宗 大中祥符 2年 1009년 미상(음)

목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다
왕송(王誦, 목종)이 죽고 아우 왕순(王詢, 현종)이 권지국사(權知國事)가 되었다. 이 보다 앞서 거란이 고려를 공격하자 〈고려가〉 마침내 여섯 개의 성을 쌓았으니, 경계에 있는 흥주(興州), 철주(鐵州), 통주(通州), 용주(龍州), 구주(龜州), 곽주(郭州)이다. 거란은 〈고려가〉 자신들을 배반한다고 여겨서 사신을 보내 6성을 요구하였으나, 왕순이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거란이〉 군사를 일으켜 갑자기 〈고려의〉 도성에까지 가서 궁실을 불사르고 백성을 겁탈하니, 왕순이 승라주(昇羅州)로 옮겨서 피하였다. 거란의 군대가 물러나자 이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거란이 굳게 6성을 양보하라고 하였으나, 이때로부터 〈고려가〉 병사를 내어 6성을 지켰다.

(4) 고려사 세가 현종(顯宗) 3년 6월
1012년 6월 28일(음) 갑자(甲子)

갑자 형부시랑(刑部侍郞) 전공지(田拱之)를 거란(契丹)에 보내 여름철 안부를 묻고, 또 왕이 병이 나서 친조(親朝)하지 못함을 알렸다. 거란주(契丹主)가 분노하여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흥화(興化)·통주(通州)·용주(龍州)·철주(鐵州)·곽주(郭州)·귀주(龜州) 등 6개 성을 빼앗으라고 하였다.


(5) 고려사 세가 현종(顯宗) 10년
1019년 2월 1일(음) 기축(己丑)

2월 기축 초하루 거란군[丹兵]이 귀주(龜州)를 지나가는데, 강감찬(姜邯贊) 등이 맞아 싸워 크게 무찔러서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다

(6) 遼史  二國外記  高麗 
聖宗 統和 28년(A.D.1010; 高麗 顯宗 1)

誦이 魏守愚 등을 보내와 [承天皇太后]의 제사를 올렸다. 3월에 사신이 와서 장례에 참석하였다.
5월에 高麗의 西京留守 康肇가 그 임금 誦을 弑害하고 제마음대로 誦의 從兄 詢을 임금으로 세웠다.
8월에 聖宗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高麗를 정벌하면서 宋나라에 통보하는 한편 引進使 韓杞를 파견하여 詢에게 宣問하였다. [이에] 詢이 表를 올려 出兵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11월에 大軍이 鴨淥江을 건너 康肇가 銅州에서 항거하였으나 패퇴하였다. 康肇가 다시 [싸우려고] 나오자 右皮室 詳穩 耶律敵魯가 康肇 등을 사로잡고, 도망하는 [군사들을] 수십리 추격하여 [그들이] 버린 군량ㆍ갑옷ㆍ무기 따위를 노획하니 銅州ㆍ霍州ㆍ貴州ㆍ寧州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에 詢이 表를 올려 朝會하겠다고 하니 이를 허락하고, 군사들에게 사로잡거나 노략질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7) 『遼史』卷115 列傳45 二國外記 高麗 統和 29年 1月 1011년 1월 미상(음)

통화(統和) 29년(1011) 정월에 군대를 철수시키자 항복하였던 여러 성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귀주(貴州) 남쪽 산골짜기에 이르렀는데 여러 날 동안 큰 비가 내려서 날이 갠 다음에 겨우 건널 수 있었다. 말과 낙타가 모두 피로해지자 갑옷과 병장기도 많이 버리게 되었다. 압록강(鴨淥江)에 주둔하고 사로잡은 사람들을 여러 능묘(陵廟)에 나누어 배치하고, 나머지는 내척(內戚)·대신(大臣)에게 하사하였다.

(‘貴州’는 본래 ‘貴德州’로 기록되어 있다. ‘南嶺谷’은 『遼史』 卷15 本紀15 聖宗6 統和 29年 春正月 乙亥朔에는 ‘南峻嶺谷’으로 기재되어 있다.)

(8) 遼史  >  二國外記  >  高麗  >  開泰元年(1012)

開泰 원년(A.D.1012; 高麗 顯宗 3) 에 詢이 蔡忠順을 보내와 옛날처럼 稱臣하겠다고 청하므로 詢에게 詔書를 내려 親朝하도록 하였다.
8월에 田拱之를 보내와 表를 올리고 병을 칭하여 朝會하지 못하겠다고 하니, 詔勅을 내려 다시 [高麗의] 6州를 빼앗도록 하였다.

(9) 고려사 세가 선종 5년(1088) 무진년 9월

태복소경(太僕少卿) 김선석(金先錫)을 요나라에 보내 각장(榷場)의 설치를 중지해 줄 것을 간청했는데 그 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ㅡ중략ㅡ
제가 삼가 살펴보건대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께서 조정에서 섭정하실 때 봉토를 획정해 내려주시니 저희들은 그 문덕에 감화해 복종하였으며 제후로서의 의무와 충성을 다해왔습니다. 이에 태후께서는 저의 충절을 어여삐 여기사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의 강역은 서쪽으로는 화표주(華表柱)가 있는 요동성 건너 강안(江岸)으로부터 동쪽으로는 옛 고주몽(高朱蒙)이 건넜던 개사수(蓋斯水)로 확정되었습니다. 또한 통화(統和) 12년 갑오년에는 사신으로 갔던 정위(正位) 고량(高良)이 다음과 같은 천보(天輔)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귀국한 바 있습니다. ‘고려국왕 왕치(王治)에게 알리노라. 동경유수 소손녕(蕭遜寧)의 보고를 살펴보고 경이 9월 초에 일꾼들을 동원하여 성책을 수축해 10월 상순에 준공했음을 알았다. 경은 천부적인 재능과 임기응변하는 지혜의 소유자로 상국을 정성으로 섬겨 왔으며 우리 조정에 사신을 보내 제후로서의 예의를 다해왔다. 마침 농한기를 이용하여 일꾼들을 두루 모아서 벌판으로부터 침구해 오는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 요해지에 진지를 구축했으니 이는 우리 조정의 뜻과도 부합되는 일이며 현재의 정세를 깊이 고려한 것으로 본다. 더군다나 저 여진은 진작 우리의 감화를 받아 귀순했기 때문에 감히 딴 마음을 먹지 못할 것이다. 축성을 속히 완수해 영원한 안정을 누리도록 하라.’
황제가 보내주신 그 간곡한 관심을 어찌 한시라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당시 저의 신하인 서희(徐熙)가 국경을 관장하고 있었던 바, 동경 유수 소손녕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서로 상의한 결과 각자 양쪽 국경을 분담하여 성책들을 축조하였습니다.
ㅡ 하략 ㅡ

(10) 요사 지리지 동경요양부 (직할) 학야현(鶴野縣).

본래 한의 거취현(居就縣) 땅인데, 발해가 계산현(雞山縣)으로 하였다. 예전에 정령위(丁令威)가 이곳에 집을 지었는데, 집을 떠난 지 천년 만에 학으로 변해서 돌아와 화표주(華表柱)에 내려앉아서 부리로 화표주에 새겨 말하기를, ‘새여, 새여, 정령위여! 집 떠난지 천년 만에 이제야 돌아왔구나. 성곽은 비록 그대로이나 사람은 아니니, 어찌하여 신선술을 배우지 않아 무덤만이 즐비한가?’라고 하였다. 호수는 1,200이다.


B. 곽주는 어디인가?

(1) 『遼史』卷15 本紀15 聖宗6 開泰 2年 冬10月 丙寅 1013년 10월 8일(음)

상온(詳穩) 장마류(張馬留)가 고려의 사정을 아는 여진인[女直人]을 바쳤다. 황제가 물으니 말하기를, “신은 3년 전에 고려에 포로가 되었다가 낭관(郞官)이 되었던 까닭에 고려에 대하여 아는 것입니다. 개경(開京) 동쪽으로 말로 7일을 가면 큰 성채가 있는데 넓기는 개경과 같습니다. 주변의 주(州)에서 바치는 진귀한 것들은 모두 여기에 쌓아둡니다. 승주(勝州)·나주(羅州) 등 주의 남쪽에도 역시 2개의 큰 성채가 있는데 쌓아두는 것은 같습니다. 만약 대군이 앞 길을 경유하면 갈소관여진(曷蘇館女直)의 북쪽을 취할 수 있고, 바로 압록강(鴨淥江)을 건너 대하(大河)와 나란히 올라가면 곽주(郭州)에 이르러 큰 길을 만나게 될 것이니, 그러면 고려를 취할 수 있사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 말을 받아들였다.


(2) 고려사 지리지 북계 안북대도호부 곽주

곽주(郭州)는 본래 고려의 장리현(長利縣)이다. 성종 13년(994)에 평장사(平章事) 서희(徐熙)에 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여진(女眞)을 쳐서 쫓아내고 곽주(郭州)에 성(城)을 쌓았다. 현종 9년(1018)에 방어사(防禦使)로 하였다. 고종 8년(1221)에 반역이 있었다 하여 정양(定襄)으로 강등시켰다. 〈고종〉18년(1231)에 몽고병을 피해 해도(海島)에 들어갔다. 원종 2년(1261)에 육지로 나와 수주(隨州)에 예속되었다. 공민왕 20년(1371)에 군(郡) 이름을 복구하였다.



(3) 고려사 세가 현종(顯宗) 원년 1010년 12월 6일(음) 경술(庚戌)

경술 거란군[丹兵]이 곽주(郭州)를 함락하였다.


(4) 고려사 세가 현종 7年 1016년 1월 5일(음) 경술(庚戌)

병진 7년(1016) 봄 정월 경술 거란(契丹)의 야율세량(耶律世良)과 소굴열(蕭屈烈)이 곽주(郭州)를 침략하자, 우리 군대가 맞서 싸우다 죽은 자가 수만 명이었으며 〈거란군은〉 군수품을 탈취하여 돌아갔다.

(5) 『요사』권15 본기15 성종(聖宗) 1016년 1월 5일(음)

야율세량(耶律世良)과 소굴렬(蕭屈烈)이 곽주(郭州)의 서쪽에서 고려와 싸워서 격파하고, 수만 급을 참수하고 군수품[輜重]을 전부 노획하였다.



C. 동주는 어디인가?

(1) 『遼史』卷15 本紀15 聖宗6 統和 28年 11月 乙酉 1010년 11월 10일(음)

대군이 압록강(鴨淥江)을 건너자 강조(康肇)가 맞서 싸웠으나 패배시키자, 물러나서 동주(銅州)에 주둔하였다


(2) 『遼史』卷15 本紀15 聖宗6 統和 28年 11月 戊子 1010년 11월 13일(음)

〈고려의〉 동주(銅州)·곽주(霍州)·귀주(貴州)·영주(寧州)가 모두 항복하였다. 소배압(蕭排押)이 노고달령(奴古達嶺)에 이르러 적병을 만나자 싸워서 패배시켰다.


(3) 요사 지리지 동경도 통주(通州)

안원군(安遠軍)이 설치되었으며 절도를 두었다. 본래 부여국(扶餘國)의 수도였으며 발해는 부여성(扶餘城)이라고 불렀다. 태조가 용주(龍州)로 고쳤고 성종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보녕(保寧) 7년(975) 황룡부(黃龍府)의 반란인 연파(燕頗)의 잔당 천여호로 설치하였다가 절도로 승격시켰다. 관할 현은 넷이다.

(4) 『遼史』卷38 志8 地理志2 東京道 銅州

동주(銅州) 광리군(廣利軍). 자사(刺史)를 두었다. 발해가 설치하였다. 병사(兵事)는 북명마사(北兵馬司)에 예속되었다. 현(縣) 1곳을 통할하였다.
석목현(析木縣). 본래 한(漢)의 망평현(望平縣) 땅이며, 발해가 화산현(花山縣)으로 하였다. 처음에는 동경(東京)에 예속되었다가 나중에 여기에 속하였다.


(5) 녕주(寧州) 관찰을 두었다. 통화 29년 고려를 정벌할 때 발해의 항복 민호로 설치하였다. 군사와 관련된 일은 동경통군사에 예속되었다.관할 현은 신안현(新安縣) 하나이다.


D. 귀주는 어디인가?

(1) 銅·霍·貴·寧等州 : 銅州는 앞에서 언급한 通州이다. 또 霍州와 貴州는『高麗史』「地理志」의 安北都護府屬州에 郭州·龜州가 있는데 霍州가 바로 郭州(지금의 郭山)이고, 貴州가 바로 龜州(지금 龜城)이다. 그리고 寧州는『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成宗稱寧州安北大都護府’라 하였다고 한다. 寧이나 安이나 뜻은 같다. 그러므로 寧州는 곧 安州이다. 李弘稙도 寧州를 오늘의 安州로 보았다. 그러나 興化鎭이 靈州로 되고 靈이 寧으로 되었다면 寧州는 安州가 아니라 義州 附近이 되어야 한다.
≪參考文獻≫
『新增東國輿地勝覽』卷52 安州牧建置沿革條.
李丙燾,『韓國史』(中世篇), 1961

(2) 『遼史』卷115 列傳45 二國外記 高麗 統和 29年 1月 1011년 1월 미상(음)

통화(統和) 29년(1011) 정월에 군대를 철수시키자 항복하였던 여러 성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귀주(貴州) 남쪽 산골짜기에 이르렀는데 여러 날 동안 큰 비가 내려서 날이 갠 다음에 겨우 건널 수 있었다. 말과 낙타가 모두 피로해지자 갑옷과 병장기도 많이 버리게 되었다. 압록강(鴨淥江)에 주둔하고 사로잡은 사람들을 여러 능묘(陵廟)에 나누어 배치하고, 나머지는 내척(內戚)·대신(大臣)에게 하사하였다.

(‘貴州’는 본래 ‘貴德州’로 기록되어 있다. ‘南嶺谷’은 『遼史』 卷15 本紀15 聖宗6 統和 29年 春正月 乙亥朔에는 ‘南峻嶺谷’으로 기재되어 있다.)


(3) 『遼史』卷38 志8 地理志2


귀덕주(貴德州) 영원군(寧遠軍). 하등 주(州)이며 절도사(節度使)를 두었다. 성종(聖宗)이 귀덕군(貴德軍)을 세웠으며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 현(縣) 2곳을 통할한다.
귀덕현(貴德縣). 본래 한(漢)의 양평현(襄平縣)인데 발해가 숭산현(崇山縣)으로 삼았다.
봉덕현(奉德縣). 본래 발해의 연성현(緣城縣) 땅인데, 일찍이 봉덕주(奉德州)를 설치하였다.

(4) 『遼史』卷28 本紀28 天祚皇帝2 天慶 6年 閏正月 戊午 1116년 윤1월 23일(음)

귀덕주(貴德州) 수장(守將) 야율여도(耶律余睹)가 광주발해(廣州渤海)를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고영창(高永昌)에게 귀부하였으므로 우리 군대가 그를 공격하여 패배시켰다.

(5) 집주(集州)

회중군(懷衆軍)이 설치되었고 하급으로 자사를 두었다. 옛 비리군(陴離郡) 지역으로 한나라 때 험독현(險瀆縣)에 속하였고, 고구려 때는 상암현이며 발해가 주를 설치하였다. 관할 현은 하나이다. 봉집현(奉集縣), 발해가 설치하였다.

(6) 『金史』卷24 志5 地理上 東京路 貴德州 奉集

귀덕주(貴德州). 자사(刺史)를 두었으며 하등 주(州)이다. 요(遼)의 귀덕주 영원군(寧遠軍)이었는데, 국초에 군(軍)을 폐지하고 강등시켜 자사군(刺史郡)으로 삼았다. 호(戶) 수는 20,896이고, 현(縣) 2개를 관할한다.

귀덕주 봉집현(奉集縣)【요(遼)의 집주(集州) 회원군(懷遠軍) 봉집현(奉集縣)이며, 본래 발해(渤海)의 옛 현이었다. 혼하(渾河)가 있다.】


E. 타하(陀河)는 어디인가?

(1)  遼史 二國外記 高麗

開泰 7년(A.D.1018; 高麗 顯宗 9) 에 詔勅을 내려 東平郡王 蕭排押을 都統, 蕭虛烈을 副都統, 東京留守 耶律八哥를 都監으로 삼아 다시 高麗를 정벌하게 하였다.
12월에 蕭排押이 [高麗와] 茶河ㆍ陀河 사이에서 싸웠는데, 遼나라 군사가 불리하여 天雲ㆍ右皮室 2軍에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으며, 天雲軍 詳穩 海里ㆍ遙輦 帳詳穩 阿果達ㆍ客省使 酌古ㆍ渤海詳穩 高淸明 등은 싸움터에서 모두 전사하였다.


(2)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十二月 蕭排押與戰于茶·陀二河之間 : 『遼史』「聖宗紀」開泰 7年條에 ‘詔以東平郡王蕭排押爲都統 殿前都點檢蕭虛列爲副統 東京留守耶律八哥爲都監伐高麗 仍諭高麗守吏 能率衆自歸者 厚賞 堅壁相拒者追悔無及’이라 하였다.『高麗史』顯宗 9年條에 ‘契丹蕭遜寧以兵十萬來侵’이라 하였다. 그러나『高麗史』나『高麗史節要』에는 모두 蕭遜寧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遼史』「蕭恒德列傳」중에는 이 해에는 高麗를 침범한 記事가 보이지 않으나,「蕭排押列傳」에는 이 해에 高麗를 침략한 記事가 나온다. 즉,『遼史』「蕭排押列傳」에 ‘七年 再伐高麗 至開京 敵奔潰 縱兵俘掠而還 渡茶·陀二河 敵來射 排押委甲仗走 坐是免官’이라는 기사가 있다. 이로 보아『遼史』의 記錄이 맞다고 하겠다.
또 茶·陀二河에 대한 기록은『遼史』의 資料는 모두 茶·陀二河이다. 그러나『高麗史』나『高麗史節要』에는 모두 茶·陀라는 지명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遼史』에는 한차례의 茶·陀河戰을 치루어서 敗退한 것처럼 ‘茶·陀河之敗’라고 하지만,『高麗史』나『高麗史節要』에는 두차례 激戰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맨 먼저 戰爭은 顯宗 9年 12月로 城東大川에서 契丹兵을 만나 大敗시켰다.『高麗史節要』에는 그 狀況을 ‘……伏山谷中 又以大繩貫牛皮 塞城東大川 以待之 賊至 決塞發伏 大敗之 遜寧 引兵 直趍京城’이라 하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大敗하고도 開京까지 쳐들어 왔다가 顯宗 10年(開泰 8) 2月 退却길에 龜州에서 姜邯贊에게 大敗하고 겨우 수천명만 살아 돌아갔다고 한다. 이 상황을『高麗史』에는 ‘丹兵過龜州 邯贊等激戰 大敗之 生還者僅數千人’이라 하였다. ‘茶·陀河之敗’를『遼史』에는 開泰 7年(顯宗 9) 12月로 記錄하였고,『高麗史節要』의 ‘城東大川之敗’도 開泰 7年(顯宗 9) 12月로 記錄하였다. 그러면 바로 두 기록이 일치되는 듯하다. 그러나「蕭排押列傳」을 보면 ‘七年 再伐高麗 至開京 敵奔潰 縱兵俘掠而還 渡茶·陀二河 敵夾射 排押委甲仗走 坐是免官’이라 하였다. 그러면 時間的으로 開泰 7年은 一致하나 歸路에 夾攻당한 것이므로『高麗史』의 龜州大捷이 된다.
『遼史』의 記錄은 ‘茶·陀河之敗’만 적어서 이 一戰으로 끝이 난것처럼 보이지만 開京까지 進攻하여 왔음이 틀림이 없다.『高麗史』「姜邯贊列傳」에 ‘契丹主聞之大怒遣使責遜寧曰 汝輕敵深入以至於此 何面目見我乎 朕當皮面然後戮之’라는 기사를 보아도 알 수 있으며, 開京까지 進攻해 온 기사가 『高麗史』의 數處에 많이 남아 있다. 대체로 事件內容으로 보아 歸路의 敗戰이 『遼史』의 ‘茶·陀河之敗’요, 『高麗史』의 龜州大捷이라 하겠다. 그러나 전후를 막론하고 茶水와 陀水之間에서 패한 것이므로 이 모두 합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茶·陀河의 位置比定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나온다.『讀史方輿紀要』에 의하면 ‘蛇水在平壤西境 唐龍朔初 龐孝恭等擊高麗 以嶺南兵壁於蛇水 爲蓋蘇文所攻一軍沒 或謂之陀水 宋天禧二年 契丹伐高麗 戰於茶·陀二水 敗而還 志云二水俱在平壤西北’라 하였다. 陀水가 곧 蛇水라면 蓋蘇文의 戰勝이 薩水大捷인데 곧 蛇水가 薩水요, 薩水가 곧 淸川江이 된다. 그러면 主戰地를 龜州라고 할 때 淸川江 以北 鴨綠江 以南 즉, 江東六州之地가 된다. 그렇다면 地形上으로 보아 茶水가 혹 鴨綠江支流인 삼교천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二河之間은 곧 淸川江 以北 삼교천 이남인 龜州地方이 될 것이다.
≪參考文獻≫
『高麗史』卷4「世家」4 顯宗 9年條; 卷94「姜邯贊列傳」
『高麗史節要』卷3 顯宗元文大王 9年條.
『遼史』卷16「聖宗紀」7 開泰 7年條; 卷88「蕭排押列傳」
顧祖禹,『讀史方輿紀要』卷38「山東」9 附考外國 蛇水條.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3) 요사지리지 동경도 요주(遼州)

시평군(始平軍)이 설치되었고 하급으로 절도를 두었다. 본래 불녈국(拂涅國)의 성으로 발해 때는 동평부(東平府)이었다.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이세적(李世勣)이 요동성을 함락시켰고, 고종(高宗)이 조서를 내려 정진(程振)과 소정방(蘇定方)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신성(新城)에 이르러 대파한 곳이 모두 이곳이다. 태조가 발해를 정벌할 때 먼저 동평부를 격파하고 백성을 옮겨 채웠다. 그러므로 동평부는 이주(伊州)•몽주(蒙州)•타주(陀州)•흑주(黑州)•북주(北州, 비주比)의 5주를 관할하고, 모두 18현을 관할하였는데 모두 폐지되었다. 태조가 주로 고치고 군을 동평(東平)으로 하였는데, 태종이 다시 시평군(始平軍)으로 고쳤다. 요하•양장하(羊腸河)•추자하(錐子河)•사산(蛇山)•낭산(狼山)•흑산(黑山)•건자산(巾子山) 등이 있다. 장녕궁(長寧宮)에 예속시켰으며, 군사와 관련된 일은 북여진병마사(北女直兵馬司)에 소속시켰다. 1주 2현을 관할하였다.


(3) 요사지리지 동경도 귀덕주(貴德州)

영원군(寧遠軍)이 설치되었고 하급으로 절도를 두었다. 본래 한나라 양평현(襄平縣)이 있던 곳으로 공손탁(公孫度)이 점거하였다. 태종 때에 찰할(察割)이 노략한 한인(漢人)으로 설치하였다. 나중에 반역죄로 죽임을 당하고 몰수되었다. 성종이 귀덕군(貴德軍)을 세우고 나중에 이름을 바꾸었다. 타하(陀河)와 대보산(大寶山)이 있다. 숭덕궁(崇德宮)에 예속되었으며 군사와 관련된 일은 동경도부서사에 속하게 하였다. 관할 현은 둘이다.
귀덕현(貴德縣) 본래 한나라 양평현(襄平縣)이며 발해 때는 숭산현(崇山縣)이다.
봉덕현(奉德縣) 본래 발해 연성현(緣城縣, 록성현緑城縣)으로 일찍이 봉덕주(奉德州)를 설치하였다.

(4) 요사 지리지 집주 회중군
집주(集州) 회중군(懷衆軍)이 설치되었고 하급으로 자사를 두었다. 옛 비리군(陴離郡) 지역으로 한나라 때 험독현(險瀆縣)에 속하였고, 고구려 때는 상암현이며 발해가 주를 설치하였다. 관할 현은 하나이다.
봉집현(奉集縣) 발해가 설치하였다.


F. 압록강은 어디인가?

(1) 요사 지리지 동경요양부

요하(遼河)는 동북쪽 산어귀로 나아가 범하(范河)가 되고, 서남쪽으로 흘러 대구(大口)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동량하(東梁河)는 동쪽산에서 서쪽으로 흘러 혼하(渾河)와 합하여 소구(小口)가 되어 요하와 만나 바다로 들어가니, 태자하(太子河)라고 하며 또한 대량수(大梁水)라고도 한다. 혼하는 동량하와 범하 사이에 있다. 사하(沙河)는 동남산에서 서북쪽으로 흘러 개주(蓋州)를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또 포하(蒲河), 청하(淸河), 패수(浿水)가 있다. 패수는 니하(泥河) 또는 한우력(蓒芋濼)이라고도 하는데, 강에 한우초가 많기 때문이다.

(2) 요사 지리지 동경도

정주 보녕군(定州 保寧軍)
정주(定州) 보녕군(保寧軍)은 고려가 설치한 주이다. 옛 현은 하나로 그 이름은 정동(定東)이다. 성종 통화(統和) 13년(995)에 군으로 승격되어 요서 지역의 백성을 옮겨 채웠다. 동경유수사에 예속되었다. 관할 현은 하나이다. 정동현(定東縣) 고려가 설치한 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요나라 때 요서 지역의 백성을 옮겨 거주케 하였다. 호구수는 800이다.

(3) 요사 지리지 동경도

보주 선의군(保州 宣義軍)
보주(保州) 선의군(宣義軍)이 설치되었으며 절도를 두었다. 고려가 설치한 주이며 옛 현은 래원(來遠) 하나이다. 성종이 고려의 국왕 순(詢 ; 현종)이 멋대로 즉위한 것을 문죄하였으나 불복하였다. 개태(開泰) 3년에 보주(保州)와 정주(定州)를 취하였다. 통화 말년에 고려가 항복하였는데 그곳(보주 정주)에 각장(搉場 ; 고려 시대에, 지금의 의주와 정평에 두고 거란•여진과 무역하던 장)을 두었다. 동경통군사에 예속되었으며, 주와 군 두개와 현 하나를 관할하였다 내원현(來遠縣) 처음 요서 지역의 백성을 옮겨 채웠고, 다시 해(奚)와 한(漢)의 병사 700명을 옮겨 지키게 하였다. 호구수는 1,000이다. 선주(宣州) 정원군(定遠軍)이 설치되어 있으며 자사를 두었다. 개태 3년(1014)에 한(漢)의 호구를 옮겨 설치하였다. 보주에 예속되었다. 회화군(懷化軍)은 하급이며, 자사를 두었다. 개태 3년 설치하였고 보주에 예속되었다.

(4) 요사 지리지 동경도

흥주 중흥군
흥주(興州) 중흥군(中興軍)이 설치되었으며 절도를 두었다. 본래 한나라 해명현(海冥縣)이며 발해가 주를 설치하였다. 옛 현은 성길(盛吉)•산산(蒜山)•철산(鐵山) 등 셋이었는데 모두 폐지되었다. 호구수는 200이며, 동경에서 서남쪽으로 300리 떨어져 있다.

(5) 요사 지리지 동경도

녹주 압록군
녹주(淥州) 압록군(鴨淥軍)은 절도를 두었다. 본래 고구려 고국(故國)이며 발해는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라고 불렀다. 성의 높이는 3길이며 너비는 20리나 된다. 신주(神州)•환주(桓州)•풍주(豐州)•정주(正州) 등 4주의 일을 관할하였다. 옛 현은 신록(神鹿)•신화(神化)•검문(劍門) 등 셋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대연림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나머지 잔당들을 상경으로 옮겨 역속현(易俗縣)을 두어 거주시켰다. 호구수는 2,000이며, 동경유수사에 예속되었다. 4주와 2현을 관할하였다.

G. 요사 지리지 상의 한나라 양평현과 망평현

(1) 한나라 양평현

ㅡ 탕주(湯州) 본래 한나라 양평현(襄平縣)으로 발해가 주를 설치하였다. 옛 현은 영봉(靈峰)•상풍(常豐)•백석(白石)•균곡(均谷)•가리(嘉利) 등 다섯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호구수는 500이며 동경에서 서북쪽으로 100리 떨어져 있다.

ㅡ 귀덕주(貴德州) 영원군(寧遠軍)이 설치되었고 하급으로 절도를 두었다. 본래 한나라 양평현(襄平縣)이 있던 곳으로 공손탁(公孫度)이 점거하였다.

ㅡ 귀덕주(貴德州) 귀덕현(貴德縣) 본래 한나라 양평현(襄平縣)이며 발해 때는 숭산현(崇山縣)이다.

ㅡ 광주(廣州) 방어(防禦)를 두었다. 한나라 때 양평현(襄平縣)에 속하였고 고구려 때는 당산현(當山縣)이며 발해 때는 철리군(鐵利郡)이었다. 태조가 발해인을 옮겨 거주시키며 철리주(鐵利州)를 세웠다.

ㅡ 동주(同州) 진안군(鎭安軍, 진원군逺)이 설치되었으며 하급으로 절도를 두었다. 본래 한나라 양평현(襄平縣) 지역이며 발해 때는 동평채(東平寨)이다. 태조가 주를 설치하고 군 이름을 진동(鎭東)이라 하였다가 나중에 이름을 바꾸었다.

ㅡ 동주(同州) 동평현(東平縣) 본래 한나라 양평현 지역이다. 철 산지라 300호를 징발하여 채취와 단련 작업을 시켰고 그에 따라 세금을 징수하였다.


(2) 한나라 망평현

ㅡ (동경의) 외성(外城)을 한성(漢城)이라고도 하는데 ~ 동쪽으로 북오로호극(北烏魯虎克: 北烏爾呼赫)까지 400리, 남쪽으로 해변의 철산(鐵山)까지 860리, 서쪽으로 망평현(望平縣) 해구(海口)까지 360리, 북쪽으로 읍루현(挹婁縣)과 범하(范河)까지 270리 걸린다. 동, 서, 남쪽 3면이 바다를 싸고 있다.

ㅡ (동경요양부 직할의) 석목현(析木縣) 본래 한나라 망평현(望平縣)인데, 발해 때는 화산현(花山縣)이었다. 호구수는 1,000호이다.

ㅡ 현주(顯州) 산동현(山東縣) 본래 한나라 망평현(望平縣)이다. 목종이 발해 영풍현의 백성을 나누어 능을 지키는 민호로 삼아 적경궁에 예속시켰다.

ㅡ 동주(銅州) 석목현(析木縣) 본래 한나라 망평현(望平縣) 지역이고 발해 때는 화산현(花山縣)이다. 처음 동경(東京)에 예속되었다가 나중에 (이곳으로) 소속되었다.

H. 거란, 즉 요나라는 왜 그토록 강동 6주에 집착했는가?

(1) 『요사』권60 지29 식화지(食貨志)下

갱야(坑冶)는,
태조(太祖)가 처음 실위(室韋)를 병합한 이래로 그 지역에서 구리[銅]·철(鐵)·금(金)·은(銀)을 생산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그 지역 사람들은 동기(銅器)와 철기(鐵器)를 잘 만들었다.
또 갈출부(曷朮部)라는 곳이 있는데 철이 많았다. ‘갈출’은 국어로는 ‘철’이다. 〈갈출〉부에 3야(冶)를 설치하였는데, 유습하(柳濕河), 삼출고사(三黜古斯), 수산(手山)이라고 한다.

신책(神冊) 초년(916)에 발해를 평정하고 광주(廣州)를 획득하였는데, 본래 발해 철리부(鐵利府)이다. 고쳐서 철리주(鐵利州)라고 하였는데 그 지역에도 철이 많았다. 동평현(東平縣)은 본래 한(漢)의 양평현(襄平縣) 옛 땅인데, 철광(鐵鑛)을 생산하므로 채련자(採煉者) 300호(戶)를 두어 부세에 따라 공급하고 납부하게 하였다.

여러 갱야가 나라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동경(東京)에 호부사(戶部司)를 설치하고 장춘주(長春州)에 전백사(錢帛司)를 두었다. 태조가 유주(幽州)와 계주(薊州)를 정벌하고 군사가 돌아올 때 산록(山麓)에 잠시 머물렀는데, 은광·철광을 발견하게 되자 갱야를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성종(聖宗) 태평(太平) 연간(1021~1030)에 황하(潢河)의 북쪽 음산(陰山) 및 요하(遼河)의 원류에서 각각 금광과 은광을 발견하자 갱야를 두어 채련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천조제(天祚帝 : 1101~1125) 때에 이르기까지 국가는 모두 그 광물의 이로움에 힘입었다.


(2)  『遼史』卷38 志8 地理志2  광주


광주(廣州).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한(漢) 때는 양평현(襄平縣)에 속하였으며 고구려[高麗]가 당산현(當山縣)으로 삼았고, 발해가 철리군(鐵利郡)으로 삼았다. 태조(太祖)가 발해인들을 옮겨서 이곳에 거주하게 하고 철리주(鐵利州)를 세웠다. 통화(統和) 8년(990)에 없앴다가 개태(開泰) 7년(1018)에 한족 민호[漢戶]로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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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 강동 6주
ㅡ 女直國鴨淥江東數百里 (1)
ㅡ 장흥진(長興鎭), 귀화진(歸化鎭), 곽주(郭州), 귀주(龜州), 안의진(安義鎭), 흥화진(興化鎭), (宣州), 맹주(孟州) (2)
ㅡ 흥주(興州), 철주(鐵州), 통주(通州), 용주(龍州), 구주(龜州), 곽주(郭州) (3)
ㅡ 흥화(興化)·통주(通州)·용주(龍州)·철주(鐵州)·곽주(郭州)·귀주(龜州) (4)
ㅡ 銅州ㆍ霍州ㆍ貴州ㆍ寧州 등 (6)
ㅡ 화표주(華表柱)가 있는 요동성 건너 강안(江岸)으로부터 동쪽으로는 옛 고주몽(高朱蒙)이 건넜던 개사수(蓋斯水)까지 (9)

동주 (銅州)는 통주(通州), 곽주(霍州)는 곽주(郭州), 귀주 (貴州)는 귀주(龜州) 임을 알 수 있다. 비록 위 지명을 한반도 서북한 북계로 모두 비정하고 있기는 하나 D-1에 제시된 이병도의 견해도 이와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다.


B-a 곽주

ㅡ 곽주는 압록강 바로 옆에 있으며 거란의 침입을 자주 받은 곳이다.
ㅡ 갈소관여진(曷蘇館女直)의 북쪽이 압록강(鴨淥江)을 건너는 길목이며, 압록강을 건너 물길을 따라 나란히 오르면 곽주(郭州)에 이른다. (1)
ㅡ 서희가 994 ~ 에 개척하여 쌓았고 거란이 수차례 침입한 전장 (2)(3)(4)(5)
ㅡ 곽주(霍州)는 곽주(郭州) D-1, A

C-a 동주

ㅡ 압록강 구역 (1)(2)
ㅡ 한(漢)의 망평현(望平縣), 발해의 화산현(花山縣) (4)

# 부여국의 수도. 발해의 부여성. 본래 용주(龍州) (3)
ㅡ A를 보면 통주와 용주는 다른 곳으로 모두 강동 6주에 포함.
ㅡ 銅州는 通州 D-1, A
# 녕주(寧州) 관찰을 두었다. 통화 29년(1011년) 고려를 정벌할 때 발해의 항복 민호로 설치. 강동 6주의 하나거나 그 인근지로 보인다. (5)
ㅡ D-1에서 이병도는 의주 부근으로, 이홍식은 안주로 보았으니 모두 현 압록강 이남이다


D-a 귀주

ㅡ 귀주 (貴州)는 귀주(龜州) D-1, A
ㅡ 귀주는 압록강 옆. 귀주가 있는 압록강 건너가 요나라이며, 또한 압록강 건너에 요나라의 중심이 되는 곳이 있음 (2)
ㅡ 귀주는 원래 귀덕주 (2)
ㅡ 발해의 봉덕주
ㅡ 한의 양평현 (3)
ㅡ 고영창의 대원국은 요양 (4)
ㅡ 집주는 한나라 험독현 (5)
ㅡ 요의 귀덕주와 집주 자리에 금이 귀덕주 설치 (6)
ㅡ 봉집현은 혼하 근처 (6)


E- a 타하

ㅡ 강감찬 귀주대첩과 연관. 귀주거나 귀주 근방 (1)
ㅡ 김위현은 다하는 삼교천, 타하는 청천강에 비정 (2)
ㅡ 김위현은 독사방여기요의 기록에 근거해 陀水가 곧 蛇水라는 논리를 세웠고 압록강 이남 강동 6주에 궤를 맞춰 타하가 청천강이라는 주장을 하는데 (3)을 보면 요나라 동경도 요주 시평군에 발해 동평부의 옛 주로서 타주(陀州)가 있었고 또 그 지역에 요하와 함께 사산(蛇山)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니 김위현의 논리를 대입하면 타하는 청천강이 아니라 요동의 사산 근처의 강으로 비정할 수 있다 (3)
ㅡ 타하(陀河)는 귀덕주에 있다 (4)
ㅡ 귀덕주에는 한나라 양평현이 있었다 (4)
ㅡ 요나라 귀덕주 근처에 집주가 있고, 집주에 봉집현이 있으며 그 근처에 혼하가 있다 (5), (6), D-6

F-a 압록

ㅡ 요사에서는 압록강을 꼭 淥을 써서 적었다
ㅡ 요사 지리지에는 압록강이 나오지 않는다 (1)
ㅡ 고려와 국경을 맞댄 강이며 압록강 건너의 고려땅인 보주와 정주를 빼앗아 100 년 이상 경영했으니 압록걍은 또한 요나라의 영토 안을 흐르기도 하는 강인데 지리지에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압록강은 보이지 않는다.
ㅡ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ㅡ 다만 발해의 서경압록부만을 녹주 압록군이라 하여 설명해 뒀을 뿐으로 압록강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5)
ㅡ 요사에서 여진ㆍ고려와 분쟁하며 멸망하기 전까지 무수히 넘나들었던 강으로, 요사에는 역시 무수히 등장함에도 어찌하여 지리지에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일까?
ㅡ 이는 압록강이라는 말이 애초에 특정한 강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고구려에서 고려 전기에 이르는 시대에 우리 강역의 서북계를 천참으로서 흐르는 큰 강을 가리키는 당시의 그 지역의 입말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을 낳는다
ㅡ 엄리대수, 엄체수, 아리수 등과 마찬가지로 大江을 이르는 말에서 나온 일종의 별칭 말이다
ㅡ 고려 전기 요와 고려의 경계를 흐르던 강이 지금의 압록강이 아닐 수 있음을, 아니 아님은 A로부터 H까지 살펴본 바로 충분히 주장 가능하다 보며 이 시기의 압록강은 혼하와 요하 일대의 특정 강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고 본다.

G-a 양평현과 망평현

ㅡ  한의 양평현을 지금 요양일대로 비정할 때에 망평현은 요하를 경계로 그 서남쪽에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ㅡ 상기의 분석을 통하여 고려와 거란의 분쟁 및 거란의 동방 활동이 모두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ㅡ 그러나 이는 한사군 위치비정 쟁점과 연결되므로 신중할 필요가 있다.

H-a 거란은 왜 그토록 강동 6주에 집착했나?

ㅡ 현 학계 통설로 비정된 평북 지방으로 강동 6주를 보고, 또 의주 지방으로 보주ㆍ정주 등을 보자면 거란이 왜 그토록 그 일대에 집착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ㅡ 거란의 2차에서 3차에 이르는 근 10 년의 침략,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된 군사적 도발은 모두 강동 6주를 차지하기 위한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ㅡ 그 강동 6주의 6성은 1차 거란 침입 이후 강화조건으로 거란이 양보, 또는 할양하여 고려가 직접 여진을 몰아내고 주를 개척하고 성을 쌓은 것으로
ㅡ 압록강(鴨淥江)을 따라 그 주변에 포진해 있으며 압록강(鴨淥江)은 고려와 요의 경계를 이룬다는 것 또한 상기해야 한다.
ㅡ 또한 거란은 2차 침입에서 압록강의 고려영토인 보주와 정주를 차지하고 훗날 금에게 그 지역을 빼앗기까지 그곳을 고려에 돌려주지 않았다
ㅡ 또한 거란은 보주, 정주에 강장, 즉 시장을 개설하여 고려와 만주의 물산과 재화가 이곳에 모여들게 햤다
ㅡ 이는 이 지역이 교통이 활달한  곳임을 짐작케 한다
ㅡ 고려는 근 100 여 동안 보주ㆍ정주를 다시 돌려줄 것과 993에 약속하여 고려의 강역으로 확정된 강동 6주를 위협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ㅡ 고려와 요의 100 여 년의 외교사ㆍ전쟁사는 모두 보주ㆍ정주 및 강동 6주가 그 중심에 있다.
ㅡ 요사와 고려사의 기록을 면밀히 보면 애초에 거란이 고려에 강동 6주를 할양한 이유는 그 이면적 이유가 강동 6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여진족을 정리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즉 손 안 대고 코를 풀려한 것이다.
ㅡ 고려가 여진족을 몰아낸 뒤에 성을 쌓고 지역을 안정화 하자 강동 6주를 되돌려달라 하며 수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재침략을 한 것이다
ㅡ 2차 침략과 3차 침략은 분절돼 있는 게 아니라 계속적인 하나의 전쟁이라고 해야 옳다.
ㅡ 1010에서 1019까지 거란은 계속하여 침략하였다
ㅡ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도발은 계속되었다
ㅡ 거란이 금나라에 쫓겨가며 보주를 고려에 잠시 맡길 때에 고려가 그 성에 들어가 보니 금은보화가 가득하여 무척 기뻐하며 그 금은보화를 털어오는 장면이 고려사에는 기록돼 있다
ㅡ H를 보면 알겠지만 강동 6주와 그 인근지역은 철, 금, 은의 산지였다
ㅡ 거란은 그것을 독차지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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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제국 17-11-08 22:36
   
그 경계선의 서북쪽은 당나라 이래로 압록강을 경계로 하였고, 동북쪽은 선춘령을 경계로 하였다.
대개 서북쪽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동북쪽은 고구려의 경계를 넘었다.

-《고려사》











(윤 5월) 갑자일에 거란에서 오윤판관 야율골타를 파견하여 동북 여진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 하였으나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고려사 5권, 현종 17년












(원풍 5년) '선조 시기에는 여진이 등주에 와서 항상 말을 팔았는데, 뒤에 마행도가 고려에 속하게 되어 막혀서 끊겨 오래도록 오지 않았다고 들었다.
지금 조정이 고려와 왕래를 하는 데, (고려)왕에게 조서를 내려 여진이 만일 중국에 말을 팔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길을 허락하도록 하겠다.'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끝내 여진의 사신은 오지 않았다.

-속자치통감장편










동북면병마사가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삼산·대란·지즐 등 9개 촌락 및 소을포촌의 번장 염한과 소지즐의 전리 번장 아반이와 대지즐의 여나기나오, 안무이주의 골아이 번장 소은두 등 1238호가 와서 호적에 편입시켜 달라고 요청해 왔습니다. 대지즐로부터 소지즐 요응포 해변까지는 700 리에 걸쳐 장성이 수축되어 있으며 지금 오랑캐들이 줄을 이어 귀부해오고 있는 마당에 관방을 설치하여 그들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해당 관리로 하여금 주(州)의 명칭을 정해 보고하게 한 후 밀봉한 공문을 내려 주십시오.”
왕이 이를 허락했다.

-《고려사》, 문종 27년 6월
 










​한림원에서,
“동여진의 대란 등 11개 촌락에서 귀부해온 자들이 자기들의 거주 지역을 빈주·이주·복주·항주·서주·습주·민주·대주·경주·부주·완주 등 11개 주로 정해줄 것을 요청해 왔으니 그들에게 각각 밀봉된 공문을 내려 귀주와 순주에 소속시켜 주십시오.”
라고 건의하자 왕이 이를 허락했다.

-《고려사》, 문종 27년 9월
 











서북면 병마사가 아뢰기를,
"서여진의 추장 만두불 등이 동번(동여진)의 예에 의하여 주•군을 나누어 설치해 달라고 청하며
평로진 근처의 유원 장군 골어부 및 멱해촌의 요결 등 역시 부적하여 영원히 번병이 되겠다고 원하므로 호수가 35호이고 인구가 252명입니다. 청컨대 판도에 등재하소서."

-《동국통감》, 문종 27년 5월
 














동북면 병마사가 아뢰기를,
"삼산, 대란, 지즐 등의 마을 번장이 1238호를 가지고 와서 부적해주기를 청하니, 청컨대 유사로 하여금 주호를 아뢰어 정하게 하고 또 주기를 내리소서."

-《동국통감》, 문종 27년 6월
 










서북면 병마사가 아뢰기를,
"장성 밖에 개간한 전답 11494 경은 청컨대 가을 수확을 기다려 군량에 보태게 하소서."
하니, 제가하였다.

-《동국통감》, 문종 27년 2월


추가요
     
감방친구 17-11-08 22:42
   
고맙습니다
사실 자료 근거를 대자면 더 많은데 그렇게 해서 쓰자면 생업을 접어야 할 것 같아서 저 정도로 그쳤습니다

고려시대 서북계와 동북계가 지금의 압록강과 함경남도가 아님을 알려주는 기록은 아주 많습니다

다만 이 글에서는
ㅡ 강동 6주의 위치
ㅡ 강동 6주의 위치로 본 압록강의 위치
ㅡ 거란이 강동 6주에 집착한 이유
ㅡ 타하의 위치

를 포인트로 잡았으며 저 혼자 사료만을 보고 연구해 얻은 견해입니다
감방친구 17-11-08 22:45
   
다음 글은 신당서와 삼국사기를 근거로 본 압록강의 위치입니다

일을 해야 해서 미루고 있는데 며칠 내로 게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감방친구 17-11-09 14:54
   
참고로 요서ㆍ요동의 지리를 설명하며 바다(海)라는 표현이 종종 나오는데
중국 고대 사서에서 海는 다음의 뜻이 있다
ㅡ 바다
ㅡ 땅
ㅡ 바다와 같이 너른 강

따라서 문맥을 보고, 또 여타 지리정보를 참고해야 한다

요사 지리지에서 동경요양부를 설명하며' 삼면을 바다가/삼면이 바다를' 싸고 있다는 표현은 바다가 아니라 요하이다

요하는 넓어서 요해( - 海)라고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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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4 [한국사] 역사학자가 말하는 고구려가 삼국 통일을 한다면? (1) 아비바스 11-13 525
19813 [기타] 인도 타밀 고고학 발굴성과 (ft.아라가야 도부호)및 … (5) 조지아나 11-13 556
19812 [일본] [FACT] 일본에서 올린 논란의 영상 "This is a Pen" (1) 아비바스 11-12 588
19811 [한국사] [FACT] 이 세상 모든 발음을 정복하자! – IPA(국제음성… (3) 아비바스 11-12 506
19810 [기타] 일제 잔재중 가장 시급하게 정리되야 할것 (7) 관심병자 11-12 589
19809 [기타] 일본계 인도인추정 85만유투버. 일본인 논문을 내세… (4) 조지아나 11-12 776
19808 [한국사] [FACT] 일본의 가타카나는 한국의 구결에서 왔다 (1) 아비바스 11-11 528
19807 [한국사] [FACT] 한중일 언어의 변화 (1) 아비바스 11-11 500
19806 [한국사] [FACT] 고대 한국어, 만주어와 일본어 속의 옛 한국어 … (2) 아비바스 11-11 532
19805 [한국사] [FACT] 인도어(타밀어, 드라비다어)와 한국어 비교 검… (6) 아비바스 11-11 460
19804 [한국사] 옛 한글중 일부가 사라진 배경이 일본정부에 의해… (2) 조지아나 11-11 519
19803 [한국사] [FACT] 세계적 과학저널 "네이쳐(NATURE)" 한국어의 기원… (1) 아비바스 11-10 582
19802 [한국사] [FACT] 세계적 과학저널 "네이쳐(NATURE)" 트렌스유라시… (1) 아비바스 11-10 432
19801 [한국사] [FACT] 세계적 과학저널 "네이쳐(NATURE)" 요하문명은 트… (14) 아비바스 11-10 474
19800 [한국사] 사실은 유전자전쟁중인 5000년 한국사 (3) 금성신라 11-09 907
19799 [한국사] [충격] 연구가 필요한 태극과 금성 (1) 금성신라 11-09 651
19798 [한국사] 티벳 장족" 그리움 " 곡 도입부 "아리랑"과 유사 (1) 조지아나 11-08 982
19797 [한국사] 성헌식 인터뷰 - 산서성의 지배자 고구리 하늘하늘섬 11-08 484
19796 [한국사] 티벳의 Relpa dance ( 삼태극 소고 무용) (3) 조지아나 11-08 477
19795 [기타] 딱 걸린 조작 ! 중국왕조 영토지도 관심병자 11-08 626
19794 [기타] 5백년전 명나라 지도, 明과 高麗 등 지명 분석 관심병자 11-06 1216
19793 [한국사] 합단의 침입 경로로 살펴본 고려의 동북 영토 (지도 … (4) 보리스진 11-04 974
19792 [한국사] 고려 후기 의주의 영토: 형제산, 청수구자 (지도 첨부 (3) 보리스진 11-03 989
19791 [기타] 우리가 알고 있던 고구려 평양성은 가짜다! 원사(元… (1) 관심병자 11-02 937
19790 [한국사] [FACT] 역사 유튜버중에 이분만큼 정리 잘하는 사람 없… (1) 아비바스 11-01 989
19789 [기타] 일제 강점기 지명 변경 (1) 관심병자 10-31 985
19788 [기타] 한반도로 줄어든, 우리영토의 비밀 (4) 관심병자 10-30 1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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