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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1-09 19:49
[중국] 장수왕에게 굴복한 북연의 화룡성 위치
 글쓴이 : 도배시러
조회 : 2,326  

20171109_193344.jpg
.

7. 장수왕 23년(서기 435)

23년(서기 435) 여름 6월, 임금이 [북위]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역대 황제의 이름을 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위나라의 세조(世祖)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서 황제들의 계보와 이름을 기록하여 보내게 하였으며,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보내 임금을 
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영호동이중랑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임금이 사신을 [북위]위나라에 보내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였다. 

위나라의 사람들이 [북연]연나라를 자주 공격하였기 때문에 연나라의 형세가 나날이 위급해졌다. 
연나라 왕 풍홍(馮弘)이 말하였다.

“만일 사태가 위급하면 동쪽에 위치한 고구려에 잠시 의존하며, 미래를 위한 대책과 방법을 세우겠다.”
비밀리에 상서(尙書) 양이(陽伊)를 우리나라에 보내 받아주기를 요청하였다.



8. 장수왕 24년(서기 436)

24년(서기 436), [북연]연나라왕이 [북위]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자제를 인질로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위나라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병사를 동원하여 연나라를 침입하기 직전에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려 주었다.

여름 4월, 위나라가 연나라의 백랑성(白狼城)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임금은 장수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에게 병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연나라 사신 양이를 따라 
화룡(和龍)에 가서 연나라왕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갈로와 맹광이 연나라의 성에 들어가, 병사들에게 헌 옷을 벗게 하고, 
연나라의 무기고에 있는 정교한 의장을 내주어 입게 하였다. 그들은 대규모로 성을 약탈하였다.

5월, 연나라왕이 용성(龍城)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동쪽 고구려로 이주하도록 하고, 궁전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열흘 동안 꺼지지 않았다. 이동하는 부녀자들에게는 갑옷을 입혀 행렬의 안쪽에 서게 하고, 
양이 등은 병사를 거느리고 행렬의 바깥 쪽에 서게 하였으며, 갈로와 맹광은 기병을 거느리고 
행렬의 끝에 서서 수레를 나란히 몰아 진군하였다. 행렬의 길이가 80여 리에 이어졌다. 
위나라왕이 이 소문을 듣고, 산기상시(散騎常侍) 봉발(封撥)을 고구려에 보내 
연나라왕을 위나라로 보내달라고 하였다. 임금이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왕에게 편지를 바치면서, 
연나라왕 풍홍과 함께 위나라왕의 교화를 받들겠다고 하였다. 
위나라왕은 임금이 자신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논의하였다. 
그는 농우(隴右) 지방의 기병을 출동시키려 하였으나, 유혈(劉絜)ㆍ 낙평왕((樂平王) 비(丕) 등이 반대하자 
이를 중지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수왕 [長壽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 요사 지리지 중경도
興中府。本霸州彰武軍,節度。古孤竹國。漢 柳城縣地。
慕容皝以柳城之北,龍山之南,福德之地,乃築龍城,構宮廟,改柳城為龍城縣,遂遷都,號曰和龍宮
慕容垂復居焉,後為北跋所滅。元魏取為遼西郡

흥중부는 본래 패주장무군이다. 옛 고죽국 과 한의 유성현 자리이다.
모용황은 유성의 북쪽, 용산의 남쪽을 복과 덕이 넘치는 자리라고 하여, 용성을 축성하고
궁실과 조정을 구성하고, 유성현을 용성현이라 개명했다. 도성을 이전하여 화룡궁이라 불렀다.


고구려 장수왕이 산해관을 넘어서 노룡현의 화룡성까지 왔네요.

.
※ 일제치하의 일본인 학자는 근거없이 화룡성의 위치를 "조양(차오양시)"이라고 했었습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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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7-11-09 19:55
   
한서 지리지 유주 요서군

 ㅡ신안평(新安平), 이수(夷水)가 동쪽으로 새(塞) 밖으로 들어간다.
ㅡ유성현(栁城縣), 마수산(馬首山)이 현의 서남쪽에 있다. 참류수(參栁水)가 북쪽으로 海로 들어간다. 서부도위(西部都尉)가 다스린다.
ㅡ영지현(令支縣), 고죽성(孤竹城)이 있다. 망(莽)은 령씨정(令氏亭)이라고 하였다
ㅡ임유현(臨渝縣), 유수(渝水)가 상류에서 백랑수(白狼水)를 받고 동쪽으로 새(塞) 밖으로 들어간다. 또한 후수(侯水)가 있는데 북쪽으로 유수(渝水)로 들어간다. 왕망은 풍덕(馮徳)이라 했다
감방친구 17-11-09 20:02
   
요사 지리지 남경도

ㅡ영주(營州) 린해군(隣海軍) 원래 상(商) 고죽국(孤竹國)이다. 진(秦)에서는 요서군(遼西郡)에 속했다. 한(漢)은 창려군(昌黎郡)으로 삼았었다. 전연(前燕) 모용황(慕容皝)은 이곳에 도읍을 옮겼었다. 북위(元魏)는 영주(營州)를 세우고 창려(昌黎) 건덕(建徳) 요동(遼東) 낙랑(樂浪) 익양(翼陽)  영구(營丘) 등 6개의 군을 다스렸다. 후주(後周)때에는 고보녕(髙寳寧)이 점고한 곳이었다. 수(隋) 개황(開皇) 년간에 주를 설치하였고 대업(大業) 년간에 요서군(遼西郡)으로 고쳤다. 당(唐) 무덕(武徳) 원년에 영주(營州)로 고쳤고 만세통천(萬歳通天) 원년에 처음으로 거란의 땅이 되었다. 성력(聖厯) 2년에는 어양군에 붙여서 다스렸다. 개원(開元) 5년에 돌아와 유성(柳城)에서 다스렸다. 천보(天寳) 원년에 유성군(柳城郡)으로 고쳤다. 후당(後唐)에서는 다시 영주(營州)로 삼았다. 태조(太祖)가 정주(定州)의 포로들이 살도록 하였다. 현은 한 개이다.

광녕현(廣寧縣). 한(漢)의 유성현(柳城縣)인데 요서군(遼西郡)에 속했다. 동북쪽으로는 해(奚)와 거란(契丹)과 맞붙어 있다. 만세통천(萬歳通天) 원년에 거란 이만영(李萬營)의 손으로 들어갔다. 신룡(神龍) 원년에 유주(幽州)의 경계로 이주하였다. 개원(開元) 4년에 다시 옛 땅으로 돌아왔다. 요(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가구수는 3000이다.
감방친구 17-11-09 20:06
   
요사 지리지 중경도

ㅡ興中府(흥중부). 원래 覇州(패주) 彰武軍(창무군), 節度이다. 옛날 孤竹國(고죽국)이며 漢의 柳城縣(류성현)의 땅이다. 慕容皝(모용황)이 柳城(류성)의 북쪽과 龍山(룡산)의 남쪽을 福徳(복덕)의 땅이라고 하여 龍城(룡성)을 쌓고 궁궐과 사당을 만들고 류성을 고쳐 龍城縣(룡성현)이라 하고 드디어 도읍을 옮겼고 和龍宫(화룡궁)이라고 불렀다.

慕容垂(모용수)가 돌아와 거하였지만 후에 馮跋(풍발)에게 멸망당하였다. 북위(元魏)가 취하여 遼西郡(료서군)이라고 하였다.
감방친구 17-11-09 20:11
   
학계 통설에서는 지금의 조양과 금주 어드메로 화룡성을 잡고 있고 북연의 영토가 지금의 산동ㆍ하북성부터 요동까지에 이르는 대국으로 설정한 것을 기억합니다

고대사를 추적해 나아갈 때에 지금의 요서로 중심으로 동서 1만리의 대제국을 이룬 요사와 요사 지리지를 기본으로 하여 전후를 추적하는 게 효과적이라 봅니다
     
도배시러 17-11-09 20:22
   
통전에도 화룡성과 극성의 위치가 나오는데 일부러 안보는듯...
사학은 보는게 맞는거구, 유사 고고학은 이런거 잘 안보는듯... ㅋㅋㅋ
          
감방친구 17-11-09 20:29
   
ㅋㅋㅋ 댓츠롸잇
도배시러 17-11-09 20:12
   
통전에서도 유성군 설명이 나오네요.
 柳城(有龍山、鲜卑山,在县东南二百里,棘城之东塞外亦有鲜卑山,在辽西之北一百里,未详孰是。
青山、石门山、白狼山、白狼水。又有汉扶黎县故城,在东南。其龙山,即慕容皝祭龍所也。
有饶乐水、汉故徒河县城、和龍城。 후한 요동속국의 도하徒河현이 있던 자리네요.
室韦、靺鞨诸部并在东北,远者六千里,近者二千馀里,西北与奚接,北与契丹相接。)
감방친구 17-11-09 20:12
   
따라서 이러한 진실된 실증사학이 우리 역사에 제대로 반영되길 바랍니다
도배시러 17-11-09 20:15
   
통전의 대륙백제 지리에 나오는 유성
  百济,即后汉末夫馀王尉仇台之后,(后魏时百济王上表云:"臣与高丽先出夫馀。")初以百家济海,因号百济。
晋时句丽既略有辽东,百济亦据有辽西、晋平二郡。(今柳城、北平之间。)自晋以后,吞并诸国,据有马韩故地。其国东西四百里,南北九百里,南接新罗,北拒高丽千馀里,西限大海,处小海之南。
自晋代受蕃爵,自置百济郡。义熙中,以百济王夫馀腆(佗典反)为使持节、都督百济诸军事。
宋、齐并遣使朝贡,授官,封其人。
백제의 요서 진평 2군은 유성 ~ 북평 사이에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북경 ~ 노룡현
     
감방친구 17-11-09 20:22
   
그런데 이 묘사는
지금의 서남한이네요

其国东西四百里,南北九百里,南接新罗,北拒高丽千馀里,西限大海,处小海之南。
          
도배시러 17-11-09 20:26
   
西限大海,处小海之南 의 해석은 요동반도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감방친구 17-11-09 20:30
   
이거는 전부터 님과 제가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이네요 ㅎㅎ
     
감방친구 17-11-09 20:24
   
그러나 또한 분명히 적힌 이 기록을 학계는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요

晋时句丽既略有辽东,百济亦据有辽西、晋平二郡。(今柳城、北平之间。)
도배시러 17-11-09 20:20
   
유성과 북평의 거리는
柳城郡
  (东至辽河四百八十里。南至海二百六十里。西至北平郡七百里。北至契丹界五十里。
东南到安东府二百七十里。西南到北平郡七百里。西北到契丹界七十里。东北到契丹界九十里,契丹衙帐四百里。去西京五千里,去东京四千一百十里。户八百七十四,口三千。)
.
西至北平郡七百里 유성~북평 700리 입니다. 이 사이에 대륙백제가 있었다면 동서 500리 정도의 영역일까요 ?
     
감방친구 17-11-09 20:27
   
그런데 말입니다
대륙백제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낙랑군 교치 시기와 맞춰 봐야 하고
또 그 시기 기록을 찾아봐야 하지 않나요?

어느 시기에 어떻게 진출했는가
또 개로왕은 어떻게 대방태수 장무를 보냈으며
당시의 대방은 어디인가
     
도배시러 17-11-09 20:31
   
오홋... 요하의 위치도 나오네요.
柳城郡  (东至辽河四百八十里。유성군에서 동쪽으로 480리를 가면 요하가 나온다.
후한서 군국지에서 요서군~요동군 거리가 300리인데... ㅋ
          
감방친구 17-11-09 20:36
   
그러니까 개풀딱지라는 거죠

후한 때에 고구려에 개처발리고 요서ㆍ요동군 등을 서쪽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입니다
               
도배시러 17-11-09 21:58
   
후한 초기에 요동, 현도의 교치가 있었던 정황이죠.
          
촐라롱콘 17-11-09 23:46
   
유성군이 용성이 있었던 조양일대가 아니던가요...???

위의 도배시러님의 주장은 유성군을 난하일대로 비정하시는 것 같고

따라서 유성군에서 500리 가량 동쪽에 위치한 요하를

오늘날의 대릉하근처로 비정하고 계시는 듯 한데.........
.
.
수나라 시기를 기준으로 유성군이 설치된 지역이 정작 대릉하근처이자 조양일대이고...

대릉하유역 또는 조양에서 500리 동쪽으로 가면 오늘날의 요하와 별 차이가 없다고 여겨집니다만....
               
감방친구 17-11-09 23:51
   
북위, 북연, 고구려 장수왕 때 얘기하는 거예요
북연의 화룡성이 어디있었느냐 이 얘기

댓글과 본문의
위서
진서
통전
요사
기록을 보세요
               
감방친구 17-11-09 23:58
   
용성은 고죽국이 있던 유성현 자리에 있었어요

ㅡ 요사 지리지 중경도

興中府(흥중부). 원래 覇州(패주) 彰武軍(창무군), 節度이다. 옛날 孤竹國(고죽국)이며 漢의 柳城縣(류성현)의 땅이다. 慕容皝(모용황)이 柳城(류성)의 북쪽과 龍山(룡산)의 남쪽을 福徳(복덕)의 땅이라고 하여 龍城(룡성)을 쌓고 궁궐과 사당을 만들고 류성을 고쳐 龍城縣(룡성현)이라 하고 드디어 도읍을 옮겼고 和龍宫(화룡궁)이라고 불렀다.

慕容垂(모용수)가 돌아와 거하였지만 후에 馮跋(풍발)에게 멸망당하였다. 북위(元魏)가 취하여 遼西郡(료서군)이라고 하였다.
도배시러 17-11-09 20:24
   
참고로 번역에서 빼먹었지만... 유성의 북쪽에는 선비족의 선비산鲜卑山 이 있다는것.
     
감방친구 17-11-09 20:28
   
예, 위에 댓글에 있네요
          
도배시러 17-11-10 09:41
   
실수... 유성의 북쪽에는 룡산, 동남 방향에 선비산과 모용외의 극성이 있네요.
감방친구 17-11-09 20:38
   
위서 지형지


ㅡ 낙랑군(樂浪郡), 전한(前漢) 무제(武帝)가 설치하였고 두 한(漢)과 진(晉)에서 낙랑(樂浪)이라 했으며 후에 고쳤다가 폐하였다.
정광(正光) 말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연성(連城)에서 다스린다.
다스리는 현은 2개이고 가수수는 219이고 인구수는 1008명이다.

ㅡ영락현(永洛縣), 정광(正光) 말년에 설치하였다. 조산(鳥山)이 있다.

ㅡ대방현(帶方縣), 두 한(漢)에 속했고 진(晉)에서는 대방군(帶方郡)에 속했으며 후에 폐하였다가 정광(正光) 말년에 다시 속하였다.
     
감방친구 17-11-09 20:40
   
정광(正光) 연호 520~525에 사용
북위 효명제의 세 번째 연호

고구려 안장왕
백제 무령왕
     
감방친구 17-11-09 23:15
   
학계 통설에서는
조산(鳥山)을 금주로 비정
     
감방친구 17-11-09 23:21
   
화룡성은 조양에
조산은 금주에 비정하는 게

현 우리 학계 통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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