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7-11-10 23:15
[기타] 고안승과 검모잠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481  


폐허 속에 다시 핀 고구려의 혼


오랜 세월 동안 당나라의 자존심을 짓밟아 온 고구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긴 세월 동안 엄청난 물량과 인원을 동원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고구려의 내분과 신라의 도움을 얻어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였기에 고구려가 다시 부흥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파괴했다. 특히 왕족과 귀족들, 부유한 상인들, 뛰어난 기술자, 지식인 등을 중심으로 무려 20만 명 이상을 당나라로 끌고 갔다.

당나라로 끌려가지 않은 사람들은 당나라와 신라 군대를 피해서 산속으로 도망치거나 돌궐, 일본 등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하지만 고구려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요동성, 신성, 안시성, 백석성, 북부여성 등을 굳게 지키며 당군과 치열하게 싸움을 지속한 사람들이 있었다. 비록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끌려갔지만 다시 나라를 세울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수림성 출신의 대형 검모잠이었다.

검모잠은 자신의 부하들을 추스르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평양 인근의 궁모성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검모잠의 부흥운동은 고구려 수도인 장안성의 회복에 맞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전쟁통에 농사도 짓지 못하고 폐허가 된 평양 일대에서 엄청난 숫자의 당군과 싸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검모잠은 부하들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새로운 모색을 했다.

“지금 우리의 힘으로 장안성을 회복하고 곧장 나라를 되찾기는 어렵소이다.”

“오히려 우리의 궁모성은 당군의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우리가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우리가 근거지를 옮겨서 부흥운동을 계속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보장대왕님의 아드님이신 고안승 왕자가 서해 사치섬에 피난해 계신다고 합니다. 그분을 모셔와서 왕으로 추대한다면 많은 고구려 백성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성으로 갑시다. 그곳에서 고안승 왕자님을 모셔와서 정식으로 고구려 부흥을 내세우고 백성들을 모아 당군과 싸우도록 합시다.”

아마도 이러한 논의를 거쳐 검모잠의 부흥운동은 670년에 이르러 고구려 3개 수도의 하나인 한성, 즉 지금의 황해도 재령 부근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검모잠이 황해도 지역을 부흥운동의 기지로 택한 것은 이곳이 당군의 침입을 가장 적게 받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검모잠 무리는 궁모성에서 대동강을 건너 이동하는 중에도 당나라 관리와 고구려를 배반한 승려 법안 등을 습격해서 죽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게다가 한성에서 고안승 왕자를 왕으로 추대하게 되자 급속히 부흥운동의 구심체로 등장하게 되었다.


고안승과 검모잠의 갈등


고안승은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의 아들, 혹은 보장왕의 서자, 혹은 외손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고안승이 고구려인의 구심적 역할을 한 것을 보면 보장왕의 서자라는 기록이 가장 믿을 만하다.

보장왕에게는 덕무, 임무, 복남 등의 아들이 있었다. 다른 왕자들은 대개 당나라로 끌려갔다. 그런데 유독 안승만큼은 서해 사치도에 피신해 있었기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고안승이 서자라고 한 것을 보아 고구려가 망하지 않았다면 왕위에 오를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왕실의 자손이기에 그는 고구려 부흥군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고안승은 분명 고구려 부흥군의 왕이었다. 하지만 실권은 실질적으로 부흥군을 이끌어 온 검모잠이 갖고 있었다. 따라서 두 사람간에는 갈등이 생길 소지가 있었다. 백제 부흥군에서도 실질적인 부흥군 지도자인 부여복신과 의자왕의 아들로 왕으로 추대된 부여풍과의 갈등으로 인해 부여복신이 살해되고 부흥군의 전력이 약화된 전례가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 부흥군에서도 이와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일의 발단은 당의 대군이 공격해 온 사건이었다.

검모잠과 고안승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당에서는 고구려 부흥군이 더 커지지 못하도록 고간과 이근행을 행군총관으로 삼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이근행은 말갈 출신이었고, 고간도 고구려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고구려 사정을 잘 아는 자들이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부흥운동을 저지하러 왔으니 고구려 부흥군으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적을 만난 셈이었다.

이때 검모잠은 부흥운동을 이끌어 왔던 주역답게 전면전을 내세웠을 것이다. 반면 고안승은 당군의 숫자가 너무 많음을 들어 부흥군만으로는 막기 어렵다는 현실론을 내세우며 신라의 도움을 요청하자는 주장을 내세웠던 것 같다.

여기서 고안승의 태도와 관련지어 주목되는 것은 검모잠보다 앞서 등장한 고연무의 행동이다. 고연무는 관등이 태대형으로 대형인 검모잠보다 훨씬 높은 관등을 갖고 있었고, 성이 고씨인 것으로 보아 왕족일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그는 680년 안승의 부하로 대장군 태대형의 직위를 갖고 신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그렇다면 고연무는 안승이 부흥군의 왕으로 추대된 직후 안승의 휘하에 들어왔다고 볼 수 있겠다.

그는 670년 3월 신라 사찬 설오유와 함께 각각 1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압록강 옥골 지역에서 당나라의 군대와 맞서 싸운 적이 있다. 그의 이런 경력은 그가 안승처럼 신라와는 협력하고 당과는 대결하자는 정치노선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고안승은 당군이 밀려오자 이대로 가면 고구려 부흥군이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침내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조국을 살리겠다는 의지로 부흥군을 이끌었던 검모잠은 자신이 믿고 모셨던 고안승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부흥군을 일으킨 지 불과 몇 달도 되지 않아서 불운한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고안승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검모잠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음에도 부흥군에서 주도세력이 되지 못한 고연무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라의 속국인 보덕국


고안승은 6월에 소형 다식 등을 신라에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왕대를 잇는 것은 천하의 공의이니, 오직 대국이 이를 허락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 선왕이 도를 잃어 멸망하였으나 이제 저희들이 고구려의 고안승 왕자를 찾아 임금으로 모시고 신라의 속국이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자 신라 문무왕은 이들을 이용하여 당군을 몰아낼 계획을 마련했다. 즉 지금의 전북 익산 지역으로 추정되는 금마저를 내주어 고구려 부흥군의 근거지로 삼게 한다는 것이었다. 당이 백제 고토를 지배하기 위해 마련한 웅진도독부를 배후에서 위협하면서 백제 지역을 당나라의 관할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신라 문무왕은 7월 웅진도독부에 머물고 있는 당나라 장군 유인원에게 대아찬 김유돈을 보내 고구려 유민들을 금마저에 머물게 할 것임을 통보했다. 그러나 당나라 유인원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즉각 웅진도독부 사마 예군을 서라벌로 보내 거부의사를 밝히고 문무왕을 비난했다. 그러나 문무왕은 예군을 잡아 두고 군대를 보내 옛 백제의 80여 성을 당에게서 빼앗아 버렸다.

8월 1일에 신라 문무왕은 일길찬 김수미산을 고안승에게 보내어 그를 고구려 왕으로 책봉했다. 문무왕은 고안승에게 대왕의 권한으로 속국왕에게 행하는 책봉을 한 셈이었다. 멥쌀 2천 석, 무장마 1필, 능직비단 5필, 견직과 베 각 10필, 면화 15칭을 책봉선물로 고안승에게 보냈다.

고안승은 이로써 고구려라는 나라를 겉으로는 다시 세운 셈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한 독립국도 아니었고 고구려를 부흥시킬 수 있는 올바른 길도 아니었다. 우선 그들이 거점을 마련한 지역부터 옛 백제의 땅이었다. 비록 고구려 고토에서 당나라와 맞서 싸우는 것이 힘들다고 하지만 그곳에서 나라를 일으켰어야 했다.

결국 고안승의 고구려국은 신라의 속국이 될 수밖에 없었고, 신라의 야심에 의해 이용될 수밖에 없었다. 고안승은 우선은 당군의 예봉을 피할 수 있었지만, 곧 신라군과 함께 당군과 싸워야 했다. 당나라 장수 유인원이 백제 유민들과 합세해서 신라군과 전쟁을 벌였고, 또 당나라에서 증원군이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고안승의 고구려군이 이 과정에서 어떤 전투에 어떻게 참여했는지는 뚜렷하게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674년에 신라가 고안승을 보덕국 왕으로 책봉한 것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의 군사들이 당나라를 무찌르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을 알려 준다.

또 하나, 671년 7월 당나라 장군 설인귀가 신라 문무왕에게 보낸 서찰에서 고안승에 관해 언급한 내용이 있다. 설인귀는 신라가 당과 맞선 것에 대해 크게 항의하는 편지에서 고구려 고안승은 아직도 나이가 어리며, 패망 후의 마을과 성읍에는 주민이 반이나 줄어서 자신의 거취에 스스로 의심을 품고 있으므로 왕의 직위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신라가 고구려의 도움을 받고 당과 대항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 당은 신라가 고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한 것을 고안승의 자질문제를 갖고서 비난했지만, 실제로는 고구려 부흥군의 힘을 몹시 꺼리고 있음을 실토한 셈이다.

고안승의 고구려군은 신라가 당을 몰아내는 데 일정한 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자신의 완전한 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실패했다.


고안승과 보덕국의 최후


고안승의 고구려, 즉 보덕국이 나름의 국가로서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일본과의 외교관계 자료다. 즉 일본측 사서에 의하면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 이후 고구려의 이름으로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된 사람들이 등장한다.

671년 일본에 사신으로 간 상부 출신 대상 가루, 다음해에 사신으로 간 전부 출신 부가변이 있다.

그리고 674년에는 상부 출신 위두대형 감자와 전부 출신 대형 석간이 기록에 보인다. 675년에는 대형 부간과 대형 다무, 676년에는 후부 출신 주부 아간과 대형 덕부가, 679년에는 상부 출신 대형 환부와 하부 출신 대상 사수루가 보인다. 그리고 680년에는 남부 출신 대사 묘문과 서부 출신 대형 준덕, 682년에는 하부 출신 조유와 괘루 출신 모절, 묘가 등이 기록에 보인다.

그러나 보덕국의 외교활동은 신라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680년 3월 문무왕은 고안승에게 금은으로 만든 그릇과 잡색 비단 100단을 내리고, 왕의 조카를 아내로 삼게 하면서 교서를 내렸다.

“인륜의 근본은 부부가 제일이며, 교화의 기초는 자손을 잇는 것이다. 왕은 아내가 없으므로 아내를 맞이할 생각이 많을 것이다. 내조할 자리를 오래도록 비워 두어 가문을 일으킬 도리를 영원히 없애는 것은 옳지 않다. 이제 좋은 때 길한 날을 맞이하여 옛날의 예절에 따라 나의 생질로 배필을 삼게 할 것이니, 왕이 그녀와 더불어 정의를 두터이 하고,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자손을 크게 융성토록 하라.”

문무왕은 고안승을 고구려 왕실의 전통을 잇는 가문의 하나로만 여겼다. 신라에서는 고구려 유민들이 반기를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고안승이 필요했을 뿐이다.

5월에는 고안승이 대장군 연무 등을 시켜 문무왕에게 글을 올렸다.

“신 고안승은 아뢰나이다. 대아찬 김관장이 와서 교지를 받들어 전하고 동시에 교서를 내렸으며, 동시에 왕의 생질을 우리 작은 마을의 안주인으로 삼기 위해 4월 15일 이곳에 도착하였으니, 기쁘고 두려운 생각이 교차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왕의 인척이 누추한 저의 집안으로 출가를 하게 되니, 억년을 살아도 만나기 어려운 일을 하루아침에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원래 바라지도 못한 것이요, 이 기쁨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고안승은 신라에 대항할 생각도 못하고 그저 자신의 집안이 그나마 왕족답게 살아가게 된 것만으로 만족해 했다. 하지만 신라는 보덕국이 독자적인 외교를 하고 있고, 혹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신문왕 3년인 683년 10월에 그를 신라 수도인 경주로 초청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소판의 관등과 김씨 성을 부여하고 좋은 집과 땅을 주어 신라 귀족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자 다음해 11월 고안승의 조카뻘 되는 장군 대문이 금마저에서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보덕국의 남은 사람들은 대문이 처형된 것을 보고 분노하여 신라의 관리를 죽이고 저항하였다. 그러나 곧 신라가 보낸 군대에 의해 토벌되고 말았다. 보덕국은 683년 고안승이 보덕국 왕의 직위를 버리고 신라 귀족이 된 순간에 이미 망한 것이고, 684년에 실질적으로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것이다. 신라는 이때 살아 남은 고구려 사람들을 남쪽의 주와 군에 옮겨 살게 했는데, 그곳을 금마군이라고도 한다.

보덕국의 유적으로는 사적 92호로 지정된 보덕성을 지목하는 견해가 있어 왔다. 16세기 중엽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서도 익산군 보덕성을 보덕국의 성으로 보았다. 그러나 80년 발굴조사 결과는 백제 무왕시대의 성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보덕국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모르고 있는 셈이다.

고안승 그는 고구려 왕족으로 태어나 호화로운 생활에 익숙했던 탓인지 진정 고구려인의 열망을 담아낸 부흥운동을 하지 못했다. 신라에 의지해서 겨우 자신의 왕의 권위만을 지켰을 뿐이다. 오히려 그는 고구려 부흥운동에 큰 장애가 되어 검모잠을 죽이는 행동까지 했다.

그를 받들던 사람들은 언젠가는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당과 맞서 싸웠고, 일본과 외교를 통해 나라를 찾을 방법도 모색했고, 마침내는 신라와도 전쟁을 했지만 이미 한계가 분명한 싸움이었다. 한번 죽은 나라를 다시 살리기란 이토록 어려운 일이다. 고구려의 부흥은 대조영의 발해를 기다려야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안승과 검모잠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초판1쇄 2001., 3쇄 2007., 도서출판 창해)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6시내고환 17-11-12 16:44
   
자신들을 당과 함께 멸망시킨 신라의 도움보다는 고구려의 고토에서 항쟁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Total 19,980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5727
19872 [한국사] [FACT] 황현필 - 드라마에서 다루지 않은 거란의 1차 … 아비바스 12-02 1470
19871 [한국사] [FACT] KBS 호평일색 "고려거란전쟁" ‘역사고증에 첨단… 아비바스 12-01 1661
19870 [한국사] [FACT] 역사유튜버 글림킴, 규원사화 원문 번역문 아비바스 11-29 1355
19869 [한국사] 고려영토 논란 종결. 지도, 고려사<고려거란전쟁?>… (9) 하늘하늘섬 11-27 2617
19868 [한국사] 우리가 몰랐던 사실 탐라와 임나가라. "왜국은 대방… (1) 하늘하늘섬 11-27 1264
19867 [한국사] 놀라운 사실! 대륙백제! 요서백제. 최초백제는 북경… 하늘하늘섬 11-27 1433
19866 [한국사] 100년 전 지도에 표기된 고려 지명 (1) 하늘하늘섬 11-27 1299
19865 [한국사] 거란군을 궤멸시킨 귀주대첩, 그 역사의 현장은 어디… (1) 하늘하늘섬 11-26 1261
19864 [기타] 흑룡강을 국경으로 그린 조선의 고지도 (2) 관심병자 11-26 1425
19863 [기타] 우리가 알고있던 고려영토는 가짜 관심병자 11-26 1148
19862 [한국사] [FACT] 역사학자 임용한, 침착맨 "전쟁사에 대한 오해… 아비바스 11-26 759
19861 [세계사] [FACT] SBS - 과학박사 궤도가 다룬 영화 오펜하이머 아비바스 11-26 679
19860 [세계사] [FACT] 문화평론가 이동진, 영화 오펜하이머 다루다. 아비바스 11-26 617
19859 [한국사] [FACT] 캘리포니아 석사 썬킴, 정형돈 - 해병대는 왜 귀… 아비바스 11-26 627
19858 [한국사] [FACT] 역사학자 김재원, 정형돈 - 한국사 희대 매국노,… 아비바스 11-26 599
19857 [한국사] [FACT] 역사학자 임용한, 정형돈 한국사 훑어보기 아비바스 11-26 514
19856 [한국사] 번조선의 반역자 5명이 받았던 봉지封地는 어디인가 (1) 하늘하늘섬 11-25 452
19855 [한국사] 새로운 광개토대왕비 탁본, 프랑스서 발견 Korisent 11-25 622
19854 [기타] [고증甲]프로 불편러들 때문에 사라졌던 고구려모드 … (1) 아비바스 11-25 538
19853 [기타] 일본, 중국, 한국의 고조선에 관한 역사기록들 검토 관심병자 11-24 538
19852 [기타] 식민사학자들의 임나일본부의 허구 (1) 관심병자 11-24 475
19851 [기타] 거란족, 거란 8부의 기원 관심병자 11-24 529
19850 [한국사] [FACT] 우리나라 사극에서 병력 고증 불가능한 이유 (1) 아비바스 11-24 489
19849 [기타] [FACT] 우리나라 사람이 병력 수에 둔감한 이유 아비바스 11-24 382
19848 [세계사] [FACT] 인류 최악의 선동꾼 "요제프 괴벨스" / 거짓말도… 아비바스 11-24 352
19847 [세계사] [FACT] 파멸을 위한 교육 : 2차 세계 대전 시절. 디즈니… 아비바스 11-24 301
19846 [기타] 황제헌원의 정체, 금살치우의 진실 관심병자 11-23 481
 1  2  3  4  5  6  7  8  9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