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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1-17 17:39
[한국사] 43000명 vs 71000명 벽제관 전투
 글쓴이 : 레스토랑스
조회 : 3,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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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음력 1월 27일

벽제관 전투

 

음력 1월9일, 치열합 접전 끝에 조명연합군이 평양성 탈환에 성공하자

황해도와 경기도 각지의 왜군부대는 그 기세가 꺾여

조금씩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왜6군장 고바야카와 다카카케가 개성에서 방어선을 펼 것을 주장하였으나

왜8군장 우키타 히데이에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대다수 왜군 장수들의 의견에 따라

왜군은 한양에 집결하였다

그수가 약 7만이 넘었다

 

한편 평양성에서 대승을 거둔 명군 제독 이여송은 기세가 등등했다

평양성에서 명군 4만3천을 이끌고 남하한 이여송은

음력 1월 10일 무리없이 개성을 점령했다

 

음력1월25일

명군 부총병 사대수의 정찰대가

왜병 60명을 베는 승리를 거두자 점점 왜군을 깔보게 되었다

그는 단번에 한양을 탈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이여송을 부대를 이끌고

음력 1월26일

순식간에 파주까지 남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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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1월26일

명군은 선봉대로 기병대 3천을 차출하여 진격로를 탐색하였다

왜군은 수색대를 이용하여 명군의 진격로를 파악하여

명군이 진출하는 곳마다 막아섰다

이날 명군과 왜군은 서로 밀렸다 밀었다가 하며

별 소득이 없는 전투를 벌였다

 

음력 1월 27일

이여송의 본대가 벽제관에 도착하였다

이여송은 명군에 차고 넘치는 포병대와 보병을 이용하지 않고

호위기병 1천만 대동하여 한양으로 향했다

도중 왜군의 기습으로 대다수의 호위대가 전멸하고

그의 부관인 이유승이 이여송을 대신하여 사망하는 등

명군의 피해가 속출하였다

 

이여송은 계속해서 밀려오는 왜군의 수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후퇴하였고

이를 추격하려는 왜군을 명군 장수 양원이 나서서 막아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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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의 기록은 조선, 명, 왜 3국이 달랐다

명나라는 이 전투를 대대적인 승리로 기록하였고,

전투에 직접적인 기여가 없었던 조선은 명나라의 통보만 받고 마찬가지로 승전으로 기록하였다

 

하지만 왜의 기록에서는 왜군이 타격은 있었지만,

명군을 무사히 패퇴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군 중 누가 승리하였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여러가지 정황상 명군이 대패하였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기세등등하던 명군은 이 전투로 사기가 저하하여 후퇴한 이후

왜와의 협상에 주력하게 되었다

 

 

한편,

북쪽에서 남하하는 대규모의 명군과 협력하여 한양을 공격하기 위해

행주에 주둔 중이던 조선군 4천에게 이러한 결과는

결코 바라지 않던 상황이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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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롱콘 17-11-17 18:03
   
[[음력 1월 9일, 치열한 접전 끝에 조명연합군이 평양성 탈환에 성공하자.....
..... 음력 1월 10일 무리없이 개성을 점령했다]].................???
.
.
.
평양과 개성은 어림잡아도 대충 150km 가까운 거리인데 평양을 탈환한 바로 다음날
개성까지 진출했다는 것은 오류입니다.

조명연합군은 평양을 함락하고 난 후 평양에서 며칠간의 휴식과 정비를 거친 다음 남하를 시작했고
개성이 탈환된 시기는 1월 25일로 알고 있습니다.

1월 26일에는 파주까지 진출하고,
1월 27일에 벽제관에서부터 고양시 덕양구 지축-삼송 일대까지 이르는 길목에서
일본군과 맞부딪히게 됩니다. 이것이 이른바 벽제관 전투지요....!!!
     
꼬꼬동아리 17-11-18 14:42
   
촐라롱콘씨  제발 태국 싸이트가서 놀아요
태국이 친일쪽이고 혐한인건 아는데
그리고  한글 실력도 많이 늘었네요
예전에는 참 어색했는데
제발 좀 우리나라 싸이트 좀 오지마세요
황금 17-11-17 18:41
   
이여송 참 맘에 안 드는 명나라 인물이네요.
국산아몬드 17-11-17 21:11
   
명군이 왜군을 물리치는데 엄청난 기여를 했고 명군이 없었으면 임진왜란에서 졌을꺼라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죠. 팩트는 명의 기여는 평양성전투밖에 없읍니다. 그런데도 미신처럼 명이 엄청난 기여를 한것처럼 주장합니다. 진짜 어이가 없는 노릇이죠
     
황금 17-11-17 21:15
   
명군이 온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 건 사실입니다. 일단 그 존재만으로 왜군의 기세가 크게 꺾였으니까요. 그리고 정유재란 때는 거의 명군이 주력군으로 싸웠고 명나라가 지원해 준 쌀도 엄청난 도움이 됐고요. 임진왜란 초기에 명군이 깽판 친 이유도 조선이 식량을 지원해준다 해 놓고선 제대로 지원도 안 해준 탓이 큽니다. 물론 명군이 조선 백성들을 괴롭혔던 사실들과 삽질한 것들은 까여야 마땅하죠.
          
국산아몬드 17-11-17 22:29
   
객관적인 근거없는 주장입니다. 명군의 등장으로 일본군의 기세가 꺽였다는 근거는 무었인가요? 정유재란때 명군이 싸운 전투가 무었인가요?고작 직산전투 말입니까? 전라도 말아먹은 남원성전투 말인가요? 정유재란때는 전투자체가 별로 없었습니다. 명랑해전이후 남해안에 틀어밖혀서 나오지를 않았으니 전투라고 할만한게 없었습니다. 정유재란의 결정적 전투는 명랑해전이었습니다. 명랑에서의 패전이후 일본군은 전투의욕을 잃었습니다. 명이 기여한건 직산에서의 소규모 전투밖에 없습니다
               
감찰실장 17-11-17 23:16
   
존재와 비존재의 차이는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비록 명군이 전투에 소극적이고, 삽질을 했더라도 존재자체가 왜군에게는
운신의 폭이 크게 줄고, 수많은 경우의 수를 추가 해야 하는 부담이 되는겁니다.

만약 님의 어떤 사람이랑 1:1로 싸우고 있다 가정할때 상대편에 험상궂은사람
하나가 떡하고 추가된다면? 그가 님이랑 싸울지 그렇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님의 기세는 당연히 꺾이지 않겠습니까? 1:2 상황에서 함부로 하지 못하실겁니다.
                    
국산아몬드 17-11-19 00:07
   
그건 님 생각이고 님 생각을 증명해줄 객관적인사료나 정황적인 증거가 있나요?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 때 명과 일전을 각오했을 텐데 고작 명군이 참여했다고
조선 정벌을 주저한다는 건 말이 안되지 않나요?
                         
감찰실장 17-11-19 01:09
   
예 물론 제 사견입니다.

역사에서 100%답은 없습니다.
아! 참... 제 글이 짧았던 관계로 명군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지 않아 혹 오해의 요지가 있어
간단하게 제 생각을 정리해서 소개 해드리자면,

첫째, 명군은 전란의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전장을 조선으로 선택했다.
둘째, 명군은 위의 동일한 이유로 소극적인 전투와, 모호한 전략을 고수했다.
셋째, 명군은 위의 이유로 실제 활동과 활약은 미비했다.
넷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군의 참전은, 조선에서의 초기계획이 틀어져 당황하고 있던 왜군이
        진퇴양란을 겪고 있는 시점에서 흔들리던 전의에 쐐기를 박았다.

정리 내용으로 보면, 명이 실제 일을 별로 하지 않았다는 것에는 아몬드님과 동일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조선군의 저항자체만으로 계획이 틀어지고,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던 왜군이 명군의 참전으로
(명나라의 규모와 국력을 생각할때 앞으로 얼마만큼의 병력이 더 증원될지 모르는등 왜군입장에서는 앞길이 캄캄)
전의를 상실했다고 봅니다.  명 참전 이후엔 거의 왜성을 쌓고 농성전모드로 들어갔습니다.

게다가 만약 아몬드님 말씀대로 왜군이 명군따위 크게 생각 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조선을 배제하고
명나라와 화친협상했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명군에게 느꼈던 왜군의 심리적 압박이 어땠는지는 누구나 유추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선조들이 잘싸워서 왜적을 막아낸것은 천번도 만번도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명군의 참전자체가 왜군의 조선정벌 의지를 와해시켰다는 것에 적지않은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것에는
충분히 긍정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산아몬드 17-11-19 11:01
   
감찰실장님
"명군의 참전으로 (명나라의 규모와 국력을 생각할때 앞으로 얼마만큼의 병력이 더 증원될지 모르는등 왜군입장에서는 앞길이 캄캄)전의를 상실했다고 봅니다.  명 참전 이후엔 거의 왜성을 쌓고 농성전모드로 들어갔습니다"라는 주장은 당시 전쟁상황과 맞지 않는것 같습니다

명군참전으로 앞길이 캄캄했다고 일본 사서에 나오던가요?
오로지 님의 사견과 추측일 뿐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명의 조승훈 군대와 평양성전투에서 맞붙었을 때부터 철수했어야 하고
정유재란은 일어나지 않았어야죠. 명나라가 참전할 가능성이 큰 전쟁이었으니까요

일본군은 조선에 온 명군에만 집중했습니다.
명나라에 있는 배후의 명군까지 고려하고 두려워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2차대전때 미국에게도 선공을 하여 전쟁을 시작한 무대포 일본입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명군이 무제한 병력으로 참전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을까요?
일본은 전쟁으로만 1백년을 보냈습니다.
남의나라에 파병 할려면 얼마나 많은 인적,물적 부담이 되는지 몰랐겠습니까?
그런데 명이 막대한 전비를 부담하며 자국 백성인 명군을 무제한으로 희생해가면서
조선을 도와줄꺼야라고 일본군이 생각했겠습니까?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바보입니까?
하급신분으로 태어나 백년간의 전국시대를 끝장낸 희대의 천재입니다
그들도 현대의 군인 못지않은 전략가들입니다
너무 순진하게 생각하시는 군요

일본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을 박살내었고 이여송은 더이상 왜군과 싸우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만큼 일본군은 서울 사수의지가 강했고 일본에게 아주 유리한 전황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명군을 이기면서 전황을 유리하게 만들어 놓았는데 명군때문에 남해안으로 철수한다는건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일본군이 왜성에 처박히게 만든 결정적인 이유는 행주산성전투로 많은 병력을 잃었고
조선군이 행주산성,파주산성에서 주둔하는 것을 허용하여 배후가 위험했고 식량이 조선군에 의해 다 타버렸으며 조선해군에 의해 보급이 막혀 더이상 버티기가 힘들었기 때문이고
진주성전투 패전으로 전라도,충청도의 배후지 확보도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독안데 든 쥐신세가 되었던 겁니다

조선해군이 몇달만 더 보급을 막았다면 평양성의 고니시도 스스로 자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먹을것,입을 것이 없는데 무슨수로 전투를 하겠습니까?

오로지 조선군의 압박과 공로에 의해 왜군이 남해안까지 몰렸던 건데
실력도 아닌 명군의 위엄으로 왜군이 스스로 남해안까지 철수했다니 어이가 없습니다.
상대군대의 위엄이 두려워 점령지를 스스로 물리는 군대가 어디있습니까?
그런 시각이 상식적이라고 보시나요?
일본군은 명군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명과 종전협상을 한 이유는 조선이 명에게 전쟁지휘권을 양보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이 양보하지 않았다면 조선과 협상을 했겠죠.
               
촐라롱콘 17-11-17 23:17
   
코니시의 제1군이 평양에서 진격을 멈춘 것 자체가 명나라를 의식한 것이 가장 큰
배경입니다.

그리고 어찌되었건 평양과 황해도에 주둔했던 일본군이 한양방면으로 철수한 계기 또한
명나라군의 대규모 개입 때문이며, 더불어 함경도의 가토군 또한 퇴로가 끊길 것을 우려해
한양으로 철수하게 되지요!

그리고 한양에 집결한 일본군들이 전면적으로 남해안으로 철수하게 된 계기 또한
명나라군의 존재와 명나라와 일본간의 협상에 따른 결과입니다.
물론 행주대첩과 한양일대에 주둔한 일본군들의 군량창고인 용산창을 조선군-의병
부대가 불태워버린 이유도 명나라군이 일본군과 협상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그리고 정유재란은 우선적으로 병력규모 자체부터 명나라군 9만명 규모인데 비해
조선군은 2만에 불과하여 명나라군의 보조전력 역할에 머물었으며...
임진왜란 당시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의병활동 또한 뜸했습니다.

직산전투부터가 명나라군-일본군 쌍방이 수 천명씩 맞붙은 중급규모 전투에 불과하고
무승부로 끝난 셈이지만.... 직산전투를 기점으로 명나라의 적극적인 개입의지를 확인한
일본군들이  이 시기부터 남해안으로 철수하게 됩니다.

직산전투가 벌어진 지 9일 이후에 일어났던 명량해전에서 비록 일본군의 예봉을 꺾기는 했지만
워낙 전력차가 극심하여 이순신함대는 전력보전을 위해 서해안에서도 상당히 북쪽인
오늘날의 전북북단의 고군산군도에 들어가 은신하게 되며
일본수군은 서해안으로 진입하여 적어도 전남 북단인 영광앞바다까지 진출하고
이 시기 강항일가가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일본수군이 더 이상 북상하지 않은 배경 또한 직산전투 이후 후방으로 철수하던
일본육군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순신의 조선함대가 이후 전력을 향상시키기는 하지만, 일본수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로 나서게 된 시기는 진린의 명나라함대가 합류하여 규모를 키운 이후부터입니다.

남해안으로 철수하여 왜성에 은신한 일본군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한 주체는
조선군이 아니라 명나라군입니다. 울산,사천,순천 등 크게 3방면의 왜성 공략에는
명나라군은 각 방면마다 3만 전후의 병력을 동원한 반면 조선군은 각각 수 천명 수준에
불과하여 모두 합쳐도 1만여명에 불과했을 정도로 보조전력에 머물렀습니다. 

또한 왜란이 끝나고도 명나라군 일부병력이나마 왜란 이후 수 년 동안이나 주둔하도록
강력하게 요청한 것은 명나라가 아닌 조선이었습니다.

만약 명나라군이 아무런 도움도 안되고 밥만 축내는 존재였다면, 당시 조선이
뭐하러 전란 후에도 상당기간을 머물러 달라고 명나라에 간청했을까요...???
.
.
결론적으로 명나라군이 왜란 기간의 여러 전투에서 여러차례 삽질을 연출하기는 했지만
일단 명나라군의 적극적인 개입만으로도 일본군의 북진의지를 저지하고 철수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으며....
이러한 계기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한 방은 명나라군 단독이던지 조명연합군이던지
어찌되었건 명나라군이 존재했을 때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국산아몬드 17-11-18 02:06
   
코니시의 제1군이 평양에서 진격을 멈춘 것 자체가 명나라를 의식한 것이 가장 큰
배경입니다.
-> 그건 님만의 생각이고 사료에 그렇게 적혀있는 것도 아닙니다

님이 그 전 댓글에 적어놓았듯이 고니시는 평양 도착 당시 이미 1만  채 안되었어요
게다가 조선 수군에 의해 보급이 끊어진 상태에서 화약도 더이상 없고 때는 한겨울인데
의복도 여름옷밖에 없어 제대로 움직일수도 없어요. 게다가 먹을것조차 변변히 없는데
무슨수로 진격을합니까?
평양성까지가 공세 종말점이었어요
만약 조선수군이 없어서 병사와 군수품이 충분히 보급되었더라면 고니시는 의주까지 공격했을 겁니다. 고니시가 서신에서 밝혔잖아요.
서해를 거슬러 병사와 보급품이 충원된다면 선조가 어떻게 막겠냐면서 놀리듯이  편지에서 밝혔습니다

왜군은 이미 명나라와 일전을 각오하고 조선을 쳐들어 왔는데 명이 무서워 공격을 못한다는게 말이됩니까?
토요토미는 명을 정복하겠다고 공언을 했습니다. 망상인줄 아세요? 망상으로 추정할 수 있는 사료라도 있나요?
일본은 명나라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명의 해안가는 고작 왜구 수백명에 의해 명나라 남해안이 초토화 되었거든요. 그 수백 왜구에 의해 남경 수비군 수만명이 두려워 쩔쩔 매었거든요
척계광이 왜구를 물리쳤다고 해도 조총도 없는 왜구상대로 그것도 고작 수천에 불과한 규모입니다
만약 수십만 일본 정규군이 제대로 공격해 들어왔다면 척계광 군대가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고작 왜구때문에 명의 수만 군사가 무서워 벌벌 떠는것을 아는 일본이 명의 군사력을 두려워했겠습니까?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갔다고 해도 병사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수시로 몇만을 동원해서 평양성을 공격할만큼 병사들은 끊임없이 충원하였습니다

따라서 고니시가 평양에서 진격을 멈춘 이유는 조선수군 때문에 조선 정부를 공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 명군 때문에 공격을 스스로 자제한 결과가 아닙니다

그리고 일본군이 서울에서 후퇴한 이유도 행주산성 패전과 군량미 때문입니다
이미 벽제관에서 명군을 패퇴시켰고 이여송은 일본군이 두려워 전투를 기피한 상황입니다
단지 명군 때문이라면 전황이 유리한데 왜 한양에서 철수했겠습니까?
그리고 명군이 두려워 이미 철수할 생각이었다면 왜 쓸데없이 행주산성을 공격하겠습니까? 말이 안되잖아요

왜군이 행주산성을 공격한 이유는 서울이 위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행주 산성 전투에서 많은 군인들이 죽고 주요 장수들도 다치고
많은 군량미도 조선 특공대에 의해 불타 사라진판에 보급도 안되고 행주산성에서 조선병사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님같으면 그런 위태로운 지역에서 주둔하겠습니까?

모든 전황이 유리했다면 명나라 군이 무서워 서울에서 후퇴하겠습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왜군은 벽제관에서 명군을 이겼습니다. 그것도 처참하게요
명군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직산전투이후 왜군이 철수하다니요?
직산전투는 일본에서도 승전으로 묘사할만큼 일진일퇴한 전투입니다
15만이 쳐들어왔는데 고작 수천이 맞붙어서 무승부로 끝났다고 후퇴할까요?
게다가 남원성전투로 전라도를 장악한 상태인데?
왜군은  재침할 때 명군과 맞부딪힐 것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는 주장을 하세요

왜군이 철수한 이유는 명량해전에서 패했기 때문입니다
왜군은 임진왜란의 기억때문에 보급의 중요성을 너무나 뼈져리게 느끼고 있었는데
명량전투으로 보급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조선수군이 서해로 일시 후퇴는 했지만 보급은 더이상 불가능할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왜군은 얼마간은 전라도에서 버텼지만 다시 그 악몽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 철수한 겁니다

왜군을 평양에서 그리고 함경도 경성에서 남해안까지 후퇴시킨 주역은 조선군이었습니다

전쟁말 명의 사로병진에 대해서는 평을 하고 싶지는 않군요
성공도 실패도 하지 않은 전투니까요
많은 조선군과 명군이 죽어갔고 승리한 전투가 없었습니다
좋은 전략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만 그 전투이후 왜군의 일본철수가 본격화된 계기가 된것은 맞습니다. 다만 댓가가 너무 컸죠
               
자기자신 17-11-18 03:05
   
맞아요 명나라군이 한것 평양성전투뿐이였습니다 그렇다가 기고만장했어 무리하게 갔다가 벽제관에서 일본군에게 대패를 당했고 이여송도 죽을뻔하다가 부하장수에 희생으로 간신히 살아서 도망쳤죠 그리고 온갖 핑계를 대고 명나라로 돌아가버리죠 오히려 조선관군과의병들이 훨씬더 잘싸워어요 솔직히 정유재란도 심유경이란 명나라짱깨놈때문에 일어난전쟁 국서을 조작했어 히데요시 속일렸다가 오히려 들통났어 히데요시가 격분했어 일어났죠 임진왜란때 명군이 한것 평양성전투뿐이였죠 그의외 나머진 전투는 조선관군과 의병들이 한것군요
                    
자기자신 17-11-18 06:14
   
이여송에 명군도 또다른 의혹을 받고있지요  명군이 베어서 명나라조정에 바친 일본군수급이 사실 일본군머리가 아니라 조선인 즉 조선민간인.백성들 머리라는점이죠 죽은조선인이나 지나갔던 조선백성을 몰래 죽였어 머리를 벤다음 앞머리 모두 깍고 뒷머리만 남겨서 일본군인것처럼 꾸며다고 의혹도 받고있죠 일본역 조선사인가 하는 일제강점기때 일본육군본부가 쓴 책이 있는데 여기서 임진왜란과정유재란때 조선군이 주도한 전투가 많았다고 적혀있고 일본군피해도 만만치 않다고 나옴 그만큼 조선측저항이 얼마나 완강했는지 알수있는 대목이죠
          
자기자신 17-11-18 06:33
   
황금//정유재란때도 그다지 명나라군이 승리한전투도 얼마 없습니다 남원성전투도 명나라장수 양원이 천혜의요새인 교룡산성을 버리고  남원성을 선택하는 바람에 참패당했죠  넓은평야에 있는 남원성에서 56,000여명 일본군과 싸우다가 조선인전원이 모두 전사하고  명나라장수 양원만 수백명에 패잔병과 함께 도망감 3,000여명 병력중에서 겨우 살아남은 명나라군은 100여명정도라고 할정도로 명나라군은 그야말로 괴멸수준이였죠 양원은 기마부대 승부볼렸고 했다는데 결과는 대실패였다죠 양원이 이끌고온 명나라군 대부분이 기마부대였다고 하네요 사천왜성전투도 초반에는 조명연합군이 승기잡는듯 했지만 명나라군진영에서 잘못했어 화약에 불붙었어 폭발하는 바람에 조명연합군은 우왕좌왕하다가 일본군에 총공격으로 참패를 당했군요 명나라군이 승리한전투는 직산전투밖에 없네요 뭐 명나라군도 이때 많이 죽었다나 뭐라나
뭐꼬이떡밥 17-11-18 02:53
   
둘다 맞아요.
어느 한쪽도 아니고..
고기방패라도 있는게 낫지요.

병력도 없고 먹을것도 없는데 싸움은 무슨..

왜군 입장에서 임진왜란은 참 껄끄러운 전쟁이였습니다
히데요시가 옛일을 기억못하고 악수를 둔건데.

병력은 1만석당 100명을 징집령을 내렸습니다
석수로 따지면 고니시 1군은 180만석의 병력인거죠.

문제는 군량과 군비인데. 저도 잘 모릅니다만.
히데요시 혼자 이 비용을 댈수가 없습니다.
총병력이 18만명에 배며 군량 화약 말 말먹이등등
각 영주가 알아서 전비를 마련해야 한다는거죠.

여기서 갈등이 생깁니다
1. 명나라 정벌에 실패할경우 전비는 보상받을수 있는가 x
2. 그동안 영지는 어찌돌아가고 있는가?
3. 전장에 나왔지만 보급이며 병사의 충원이 어렵다.
4. 영주들간의 파벌과 원한 경쟁심으로 좋지 않다.
5. 히데요시는 진군하라 명하는데 정작 자신은 오지 않는다.
6. 명나라에 가기도 전에 명군과 조선군에 의해 막혔다.

싸우고 싶지 않죠. 싸우자니 힘에겹고 안싸우자니 히데요시가 무섭고.
그런상황에서 후퇴를 하는겁니다.

또한가지.

규슈 남단의 시마즈나 간또의 호죠를 공략할때는 거창하고 어마어마 한 병력으로 밀어붙여 이겼는데
여기도 어마어마한 병력으로 대응했다.
히데요시의 전략이 통하지 않는다 라는걸 보여준경우죠.
가남 17-11-20 15:52
   
제가 지도에 표시된 지역들을 자전거로 돌아보았는데 도중에 숯돌고개 이야기 라는 현판이 있길래
읽어보니 숯돌고개는 덕양구 삼송동, 오금동, 신원동의 경계에 있고 이여송이 왜놈들의 매복에 걸려
크게 패했다고 전하네요. 이여송이가 그 고개에 있는 바위에 칼을 갈았기에 숯돌고개 라고 하네요.

http://www.mygoy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27152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72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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