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음력7월16일
칠천량 해전
1593년 2차 진주성 전투 이후 전쟁을 점점 소강상태에 빠졌고,
1594년에는 손에 꼽을 정도로만 전투를 벌이다가
결국 조명연합군과 왜군은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1596년 음력7월6일
왜란 개전 이래 최대의 반란이었던 왕족 서얼 출신의 이몽학의 난,
초기에 7백여명으로 시작했던 반란은 점점 그 수를 불려 수만명에 이르는 군세가 되었었으며,
이를 간신히 제압한 조선군이었지만 이때 많은 전쟁영웅들이 반란에 가담되었다는 의혹을 받으며
체포되었었고,
대부분은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의병장 김덕령은 고문 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는 조선의 민심이 바닥을 기고있었다는 반증이었다
게다가 이 사건으로 인해 선조는 정치에 대한 자신감을 모두 잃고 말았으며,
또한 백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얻은 장수가 병력을 끌어모아 자신을 죽이는게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란 것을 깨달았다
결국 그런 선조에게 남은 것은 자신을 위협할 만한 모든 전쟁영웅들에 대한 의심뿐이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1597년 정유년이 다가왔다
1597년이 되자 왜군은 슬금슬금 병력을 전진배치하며 다시 전투의지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와 사이가 좋지 않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신의 손을 이용하지 않고 가토를 제거하기 위해서
음력 1월 11일에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왜로 돌아갔던 가토가 바다를 건너 다시 부산으로 들어온다. 배타고 있을때 죽여버려라"
라는 첩보를 알려주었다
음력 1월19일에 이 첩보를 보고받은 조정은 당장에 '웬 떡이냐'를 외치며
도원수 권율에게 이 일을 처리할 것을 지시했고,
권율은 서둘러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영을 방문하여 임무를 맡아줄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당시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의 공무를 처리하기 위해 여수에 있었고,
갑지기 거쳐진 풍랑으로 인해 복귀가 늦어졌다
결국 이순신이 한산도로 돌아와 명령을 받았을 때는 이미
가토는 육지에 상륙한지 오래였다
거기다가 가토의 육지 상륙일은 사실 음력1월13일.
애초에 불가능한 임무였다
결국 수군의 입장에선 '가토은 이미 육지에 있는데요? '라는 보고밖에 올릴 수 없었고
조정 역시 상황을 이해하여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라는 반응을 보였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직후 조정은 가토는 놓쳤지만 부산포를 압박하면 다른 부대는 못 건너올 것이라 판단하였고,
이순신의 수군은 그 논리에 수긍하여 음력 2월9일에
충실히 부산포까지 출정하여 무력시위를 하였다
여기까지도 문제는 없었다
사건의 발단은 음력 1월21일
원균이 올린 '저라면 할 수 있었는데, 이순신이라서 실패한겁니다' 라는 내용의 장계를 올렸고,
이몽학의 난으로 잔뜩 전쟁영웅들에 대해 의심병이 심각하게 도져있던 선조는 23일에 대뜸
'왜 하늘이 준 기회를 저버렸지, 혹시 그 자가 나를 무시하는가?' 라며 화를 내었다
결국 음력 2월4일, 선조의 눈치를 버티지 못한 사헌부가 이순신의 탄핵 절차에 들어갔고
음력 2월6일에 이순신의 파직이 최종 결정되었다
부산포에서 무력시위를 마치고 음력 2월26일에 한산도로 귀항한
이순신은 갑옷을 벗기도 전에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당하였다
그의 후임은 바로 원균으로 내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