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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1-24 14:24
[한국사] 구월산(九月山)은 아사달(阿斯達)인가?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1,929  

현 한중일 동북아 삼국 사학계의 통설은 공히 서북한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것이요 그곳에 역시 위만조선이 있었다는 것이다. 현 평양 대성리 토성을 낙랑군 치소, 즉 위만조선의 왕성인 왕검성으로 확정해 놓은 상태이다.

중국사서에서 위만조선과 낙랑군의 위치가 난하, 대릉하, 요하 근처로 기록하고 있는 형편이고 일제가 발굴보고, 확증으로 삼은 서북한 출토 유적 및 유물이 일부는 조작, 또 일부는 토착계로 판명되고 있는 상황에서 현 황해도 신천군 소재 구월산의 존재는 따지고 넘어가야 할 대상이다.

본인은 십수 년 전부터 어원학적인 관점에서 `구월산=아사달`론을 의심해 왔는데 이 글은 그간의 의심을 다소 체계화 해 풀고 훗날의 본격 논증을 위한 이정표로 삼기 위한 것이다.

황해도 신천의 구월산이 아사달이요 그 근처에 장당경과 유사한 이름의 지명이 있고 구비문학적으로도 황해도 일원부터 남한에 걸쳐 단군과 대홍수 관련 설화정보가 있으니 이러한 유래의 정황을 보자면 영락없이 전조선부터 후조선, 위만조선에 이르기까지 서북한에 붙박이 된 형국이다.

먼저 구월산과 왕검조선 관련 기록을 검토해 보자

1. 삼국유사 기이편 왕검조선(王儉朝鮮)

1) 『위서(魏書)』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지금부터 2천여 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어서, 아사달(阿斯達)[『경(經)』에서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였고 또 백악(白岳)이라고도 하였는데 백주(白州)에 있다. 혹은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 이것이다.]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하였으니, 바로 중국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였다.”

2) 왕검은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요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년(기원전 2333)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도 사실이 아닌 듯하다.]에 평양성(平壤城)[지금의 서경(西京)이다.]에 도읍하고 비로소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이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도읍을 옮겼다. 이곳을 궁홀산(弓忽山)[방홀산(方忽山)으로 된 것도 있다.]이라고도 하고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2.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帝王韻紀》

1) 제요(帝堯)와 함께 무진년에 일어나(竝與帝高興戊辰) 우순(禹舜)을 지나 하(夏)를 거치도록 왕위에 계시더니(經虞歷夏居中宸) 은(殷) 무정(武丁) 8년 을미에(於殷虎丁八乙未)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셨네(入阿斯達山爲神)

2) 위 구절의 아사달산에 단 주석
ㅡ 지금의 구월산이다. 궁홀(宮忽) 또는 삼위(三危)라고도 하니, 그 사당이 아직도 있다(今九月山也. 一名宮忽, 又名三危, 祠堂猶存).

삼국유사는 1281 년, 제왕운기는 1287 년에 출간됐으니 비슷한 시기, 또 비슷한 시대의 지리정보와 지리인식이 반영돼 있다 볼 수 있다.

이보다 더 오래된 기록을 찾아보자 하니 구월산, 또는 관련 유적 삼성사의 기록은 찾을 수 없었고 지금의 평양에 소재한 기자묘와 관련한 기록은 찾을 수 있었다.

3. 『고려사』예지(禮志) 잡사조(雜祀條)

ㅡ 숙종 7년(1102년)  10월 초하루 임자일. 예부에서, “우리나라의 교화와 예의는 기자(箕子)로부터 비롯되었으나 기자에 관한 일은 사전(祀典)에 실려 있지 않습니다. 바라옵건대, 그 무덤을 찾아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도록 하십시다.”하고 아뢰자 그 말을 좇았다.

4. 『신증동국여지승람』 권51, 평양부, 사묘, 기자사.

ㅡ 고려 숙종 때 정문(鄭文)이 건의하여 서경(西京)의 성안에 세운 기자사(箕子祠)를 말한다.

3과 4의 기록은 1과 2의 기록보다 근 2 세기 전 것으로 비록 구월산 및 삼성사 정보를 다루고 있지는 않으나 조선 초(태종)에 구월산 삼성사의 신위를 지금 평양의 단군묘에 합사했다가 후에(세조) 다시 분리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하므로 그 관련성에서 눈여겨 볼 기록이다.

고려 숙종 때에 조성된 기자신사는 그 후대에도 계속 배향되어 조선시대까지 그 전통이 이어진다.

5. 『고려사』예지(禮志) 잡사조(雜祀條)

ㅡ 충숙왕 12년(1325) 10월. 평양부에 명하여 기자(箕子)의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게 했다.

6. 1428년(세종 10) 우의정을 지낸 유관(柳觀)의 상소

문화현(文化縣)은 신(臣)의 본향인데, 구월산은 이 고을의 주산(主山)입니다. 단군 때는 아사달산이라 이름하였는데, 산의 동쪽 고개가 높고 크게 굽이쳤으며, 산허리에 신당(神堂)이 있으나 어느 때 세운 것인지는 모릅니다. 북벽에 단인천제(檀因天帝)를 모셨으며, 동벽에 단웅천왕(檀雄天王)을 모셨으며, 서벽에 단군부왕(檀君父王)을 모셨으니 고을사람들이 삼성당이라 부르고, 그 산 아래를 또한 성당리(聖堂里)라 부릅니다

5에서 보듯 사당을 세워(다시 세운 것인지 중건한 것인지 모르나 세웠다 기록돼 있다) 제사를 지내는데 기사신사 제사 기록은  그 후대인 공민왕 대에도 나타나며 조선시대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배향된다. 또 6에서는 조선 전기에 구월산 유래사가 더욱 구체화돼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단 위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 기자
ㅡ 기자신사는 고려 숙종 때인 1102 년에 처음 서경에 세워졌으며 기록 상으로는 그곳에 실제 기자의 무덤이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또한 만약 그곳에 기자의 무덤이 있었다면 "우리나라의 교화와 예의는 기자(箕子)로부터 비롯되었으나 기자에 관한 일은 사전(祀典)에 실려 있지 않습니다."는 발언, 즉 기자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지내는 제례에 관한 것이 없었다는 발언이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2. 구월산

ㅡ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쓰여질 당시(또 이들 일연과 이승휴가 참고한 자료에)인 13 세기에는 지금의 황해도 신천군 소재 구월산을 아사달로 보고 있었고 그곳에 단군관련 성지가 있고 또 사당이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ㅡ 상국유사의 기록은 두 가지 상이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데 1) 아사달에 도읍했다 2) 평양성에 도읍했다가 후에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다는 것이 그것으로 제왕운기의 내용은 후자의 설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그대로 보자면 기자신사는 1102 년에 처음 세워졌으나 13 세기 당시까지 당대 대표적인 지식인이 지금의 구월산을 아사달로 보고, 또 민간에서 오래도록 숭배돼 왔으니 서북한이 전후조선의 중심지요 위만조선의 중심지요 낙랑군이 있었던 게 명백해 보인다

그러나 우선 기자묘의 경우 다음의 사실에 의해 논파가 된다

ㅡ 서북한에서 기자 관련 유물ㆍ유적이 전혀 나오지 않고
ㅡ 기자 관련 유적과 유물이 현 하북성을 넘지 못 하며
ㅡ 『사기』송세가(宋世家) 두예조(杜預條)의 주에 현 중국 하남성(河南省)의 양국몽현(梁國蒙縣)에 기자총(箕子塚)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기자의 일로 `구월산=아사달`설에 크게 영향을 준다 볼 수 없다.

그렇다면 구월산의 내력을 지리정보를 근거로 따져서 과연 구월산이 아사달을 나타낸 것인지를 확인해 봐야 할 것이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

1. 고려사 지리지 풍주

ㅡ 본래 고구려의 구을현(仇乙縣)【굴천(屈遷)이라고도 함】으로,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 14년(995)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현종 9년(1018)에 방어사를 두었다. 별호는 서하(西河)이다【성종이 정함】. 초도(椒島)와 석도(席島)가 있다. 속군이 1개, 속현이 5개이다.

2. 고려사 지리지 풍주의 속주 유주(儒州)

ㅡ 본래 고구려의 궐구(闕口)로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9년(1018)에 내속시켰다. 예종 원년(1106)에 감무를 두었다. 고종 46년(1259)에 위사공신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1) 유경(柳璥)2)의 내향이라 하여 문화현령관(文化縣令官)으로 승격시켰다.
별호는 시령(始寧)이다【성종이 정함】. 구월산(九月山)【세상에 전하기를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고 한다.】·장장평(庄庄坪)【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한 곳이라고 한다. 곧 당장경(唐莊京)3)이 와전된 것이다.】·삼성사(三聖祠)【단인(檀因)4)·단웅(檀雄)5)·단군의 사당이 있다.】가 있다.

3. 한민족문화대백과 문화

ㅡ 본래 고구려의 궐구현(闕口縣)이었는데, 고려 초 유주(儒州)로 고쳤다. 1018년(현종 9) 풍주(豊州, 또는 豊川)에 속하였으나, 1259년(고종 46)문화현으로 바꾸고 감무를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 현령을 두었고, 1895년(고종 32)문화군(文化郡)으로 승격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신천군에 편입되어 문화면이 되었다.

구월산이 아사달이라 주장하는 이들의 논지는
구월산(九月山)의 九月이 九는 아침을 뜻하는 아사를, 月은 땅을 뜻하는 달을 훈차했다는 것입니다

月은 그럴 듯 한데 九가 아사라는 것은 미심쩍습니다

우리 고중세국어의 어휘에 대한 비교적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계림유사에 마침 관련 내용이 있습니다. 계림유사는 송(宋)나라 손목이 1103년 사신 유규(劉逵)와 오식(吳拭)을 수행하여 고려에 다녀간 뒤 편찬된 것으로 학계에 고증돼 있는데 제왕운기와 삼국유사보다 근 200 년 전의 우리말 수사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1. 九曰鴉好

ㅡ 구는 아호라 한다

2. 九十曰鴉順

ㅡ 구십은 아순이라 한다

당대음으로
好는 호와 차이가 없고
順은 순이 아니라 훈에 가깝게 재구됩니다
ㅎ이 단독으로 발음되는 경우도 있지만 고중세어는 유기음으로 엉겨 있는 경우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칸/간/한, 지/치/키 등이 있지요

또 우리말에서 동물의 셀 때에 아홉 마리를 아습이라 하는 사례,

또 이두의 경우 2음절어는 앞의 1음절만 차자한 사례도 염두할 수 있습니다

하여 구월산이 아사달을 이두로 표기했다 확언할 수는 없으나 그 소리값만 놓고 보면 타당성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정식 지명의 변천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고려사 지리지 풍주

본래 고구려의 구을현(仇乙縣)【굴천(屈遷)이라고도 함】으로,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 14년(995)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현종 9년(1018)에 방어사를 두었다. 별호는 서하(西河)이다【성종이 정함】. 초도(椒島)와 석도(席島)가 있다. 속군이 1개, 속현이 5개이다.

2. 고려사 지리지 풍주 속 유주

본래 고구려의 궐구(闕口)로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9년(1018)에 내속시켰다. 예종 원년(1106)에 감무를 두었다. 고종 46년(1259)에 위사공신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1) 유경(柳璥)2)의 내향이라 하여 문화현령관(文化縣令官)으로 승격시켰다.
별호는 시령(始寧)이다【성종이 정함】. 구월산(九月山)【세상에 전하기를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고 한다.】·장장평(庄庄坪)【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한 곳이라고 한다. 곧 당장경(唐莊京)3)이 와전된 것이다.】·삼성사(三聖祠)【단인(檀因)4)·단웅(檀雄)5)·단군의 사당이 있다.】가 있다.

3. 한민족문화대백과 문화

본래 고구려의 궐구현(闕口縣)이었는데, 고려 초유주(儒州)로 고쳤다. 1018년(현종 9) 풍주(豊州, 또는 豊川)에 속하였으나, 1259년(고종 46)문화현으로 바꾸고 감무를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 현령을 두었고, 1895년(고종 32)문화군(文化郡)으로 승격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신천군에 편입되어 문화면이 되었다.

구월산이 소재한 황해도 신천군 문화현은

1. 고려시대에 유주에 속했는데 그 유주가 다시 풍주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풍주는 고구려 시대에
구을현(仇乙縣), 또는 굴천(屈遷)이라 했습니다.

2. 또 문화현은 고구려 시대에 궁홀(弓忽)ㆍ궁올(弓兀) 로 불리다가 궐구(闕口)로, 다시 고려시대에 문화현(文化縣)으로 변경됐습니다.

다음을 유심히 보십시오.

궁홀(弓忽)ㅡ궁올(弓兀)ㅡ궐구(闕口)ㅡ문화(文化)

1. 구(口)는 말(마을)을 표기할 때에 보통으로 사용됐습니다.

2. 궁홀(弓忽)과 궁올(弓兀)이 궐(闕)로 취음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문화(文化)에서 문(文)은 글월, 화(化)는 될’입니다

4. 궁 (弓)이 활을 음차했을 가능성도 거의 없습니다.

"나라[國]를 방(邦)이라 하고, 활[弓]을 호(弧)라 하고"
ㅡ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한

고구려에서 성이나 너른 땅을 구루라 한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문화현이 속한 풍주의 고구려 적 명칭이 구을현(仇乙縣), 또는 굴천(屈遷)인 것에서 같은 맥락의 지명 감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이 지명 변천의 사실에서 아홉이든 아사든 고조선 관련 유착 단서든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을 보십시오.

궁홀(弓忽)ㅡ궁올(弓兀)ㅡ궐(闕)ㅡ문화(文化)ㅡ구월(九月)

즉 구월(九月)은 아사달을 표기한 것이 아니라 구루/궐/골/ㄱㆍㄹ을 표기했다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보입니다.

ㆍ궁홀산(弓忽山) ㅡ 궁홀산(宮忽山)) ㅡ 구월산(九月山)
ㆍ궁홀(弓忽)ㅡ궁올(弓兀)ㅡ궐구(闕口)

몽골에 저항하고자 하는 공동체의 정신적 노력이 역사의 단편적 사실, 그리고 민간어원작설 기제와 만나 구체화한 것이 지금에 이르는 저 구월산의 단군관련 구비 전승 및 유적이라 판단 됩니다

구월산 뿐만 아니라 전국에 산재한 태백산, 백운산, 박달산 등의 지명도 이와 일정 관련이 있으리라 보입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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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hbin타냐 17-11-24 19:53
   
제가 이부분에 대해서 몰라서 길게 답변할수없지만,
적어도 일본어 朝「あさ」는 고조선의 아삼(아침)에서 왔다는게 제 견해입니다.
아사달은 아침수도 정도로 번역할수있을지..

그리고 아사달은 현재 학계에서는 평양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물론 현 요동의 요령도 있겠지요.

전 잘 모르겠네요.
     
감방친구 17-11-24 20:06
   
일본어 잘 하신다니 일본어의 다께 있죠?
그 다께의 어원이 된 게 아사달의 달입니다
일본어 아사는
아사가 아니라 이 사가 ㅅ과 ㅈ, ㅊ 의 어중간한 발음인 것으로 알아요

아침의 옛말은 아ㅊㆍㅁ이고 또 아져도 쓰였습니다
그 옛 소리값은 앚/앛으로 재구가 되구요
결국 ㅇㆍ까지 올라갑니다

하여
아침은
오늘의 오, 올해의 올과 동원어로 보이고

여진ㆍ만주어의 어러(지금), 얼더 (아침, 이르다), 아냐 (year)
일어의 아사와 관련이 있을 거로 봅니다
          
Ichbin타냐 17-11-24 20:14
   
다께는 たけ[竹、丈、武]중 뭘 말하는건가요?
다츠 아닌가요? たつ「達」

즉, 아사달에서 ~達이 타츠,타치란 말임?

그리고 제가 국문쪽에는 잘 몰라서 ㅎㅎ;

흠, 여기서 또 여진어가 나오는군요...
               
감방친구 17-11-24 20:23
   
높은 산을 뜻하는 악(岳, 嶽)을 다께라고 하죠
                    
Ichbin타냐 17-11-24 20:33
   
일단 다께 하니까 생각나는게 위에 3가지라 적어봤습니다.
たけ의 訓을 가지는것은 이것 외에도 많기때문에;;
岳、嶽、茸、椎茸「しいたけ」
버섯 이 자로 쓰인건 타케로도 읽히지만 주로 키노코(버섯)이라고 하며
맨뒤에는 시이타케라 해서 표고버섯을 나타냅니다.
저는 타케가 달 발음관느 연관이 없어보이는데;
이쪽부분에서는 제가 식견이 좁아서 뭐라 말을 할수없네요.
     
감방친구 17-11-24 20:08
   
아침의 수도가 아니라 해 뜨는 땅, 왕이 사는 땅, 나라의 시작(뿌리)가 되는 땅이라는 뜻으로 보시면 됩니다
          
Ichbin타냐 17-11-24 20:15
   
그렇군요.
해가 떠오르니까 상징적으로 시작이라고 본거군요.
시작되는땅.
감방친구 17-11-24 22:01
   
사실 기자묘 (물론 가묘) 와 기자신사의 존재는 고려시대 서경의 위치에 걸립니다

서경은 결국 지금의 평양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교치된 것인지
야차 18-02-19 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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