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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2-04 08:27
[한국사] 삼국사기 지리지로 본 평양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411  

고려사 지리지 서경유수관 평양부에서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15년(427)에 국내성(國內城)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보장왕 27년(668)에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와 협공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니 결국 이 지역은 신라로 편입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 지역은 신라로 편입되었다."라고 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 편과 신라의 삭주, 한주, 하슬라주에는 평양을 신라로 편입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지리지 고구려 편에서 평양의 위치 비정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도 고구려 평양이 고려의 서경이라는 쪽으로 논리를 몰아가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태도는 고려사에서 더욱 강화되어 나타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 상에서 신라가 편입한 고구려 영토에는 평양이 없고 고구려의 대부분의 땅이 북조(北朝), 즉 발해의 경내에 있었기에 알기 어렵다 진술하고 있으므로

왕건의 고려가 신라 땅에서 일어났기에 그 경내에 고구려의 평양이 없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고려사 지리지 서경유수관 평양부의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15년(427)에 국내성(國內城)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보장왕 27년(668)에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와 협공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니 결국 이 지역은 신라로 편입되었다."는 진술이 삼국사기 지리지와의 교차검증을 통하여 신빙성이 제거되므로

요사 지리지 동경요양부의 진술에 신빙성이 더해진다고 할 수 있다. 요나라 동경요양부는 발해와 고구려 대부분의 영토를 총괄하는 행정지로, 요나라는 고구려를 이은 발해의 행정정보를 그대로 맞계승하여 그 땅을 직접 근 200 년을 통치하였다.

요사 지리지 동경요양부는 "원위(元魏 ; 북위) 태무제(太武帝)가 그들이 거주하는 평양성(平壤城)에 사신을 보냈으니, 요(遼)나라 동경(東京)이 바로 이곳이다.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지만, 나중에 발해(渤海)의 대씨(大氏)가 차지하였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안장왕이 건설하고 평원왕이 도읍한 장안성에 대한 직접 진술은 없으나 지리적, 시기적으로 해당 지역에 대한 요사 지리지의 정보는 그 어느 사서보다 직접적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 편에서 13 세기 사서 편찬자들이 고구려 평양의 위치를 고찰한 것과 그것을 논리 비약을 통하여 고려의 서경으로 연결하려한 노력의 정황을 살펴 보고 그것이 고려사 지리지에서 어떻게 강화됐는지 살펴보자


1.

삼국사기 제37권 잡지 제6(三國史記 卷第三十七 雜志 第六) 고구려

『통전(通典)』에는 “주몽(朱蒙)이 한(漢)나라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에 북부여(北扶餘)로부터 동남방으로 나와서 보술수(普述水)를 건너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국호를 구려(句麗)라 하고 성씨를 ‘고(高)’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기(古記)에는 “주몽이 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홀승골성과 졸본은 같은 지방인 듯하다.

『한서지(漢書志)』에는 “요동군(遼東郡)은 낙양(洛陽)과의 거리가 3천6백 리이며 이에 속한 현으로써 무려(無慮)현이 있었으니 바로 『주례(周禮)』에 이른바 북진(北鎭)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이며 대요(大遼) 때는 그 아래쪽에 의주(醫州)를 설치하였다. 현도군(玄菟郡)은 낙양과 동북으로 4천 리 떨어져 있었고 이에 속한 현은 셋이다. 고구려가 그 중의 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즉 주몽이 도읍을 정한 곳이라고 하는 흘승골과 졸본이란 지방은 아마도 한나라 현도군의 경내이고 대요국 동경의 서쪽인 듯하며, 『한서지』에 이른바 현도군의 속현으로써의 고구려가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싶다. 옛날 대요가 멸망하기 이전에 요제가 연경(燕京)에 있었으므로 우리 사신들이 동경(東京)을 지나 요수(遼水)를 건너 하루 이틀 사이에 의주에 당도하여 연계(燕薊)로 향하였기 때문에 『한서지』의 기록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몽이 흘승골성에 도읍을 정한 때로부터 40년이 지나서 유류왕(孺留王) 22년(서기 3)에 도읍을 국내성(國內城)[혹은 위나암성(尉那巖城)이라 하고 혹은 불이성(不而城)이라고도 한다.]로 옮겼다.

『한서(漢書)』에는 “낙랑군(樂浪郡)에 속한 현으로 불이현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총장(總章) 2년(서기 669)에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이 칙명에 의하여 고구려의 모든 성에 도독부와 주현(州縣)을 설치하였다. 그 목록에는 “압록(鴨淥)강 이북에서 이미 항복한 성이 열 하나인데 그 중 하나가 국내성이며, 평양(平壤)으로부터 국내성까지는 17개의 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 성도 역시 북조(北朝) 경내에 있었으나 다만 어느 곳인지를 알 수 없을 뿐이다.

고구려는 국내성에 도읍한 지 425년이 지난 장수왕(長壽王) 15년(서기 427)에 평양으로 서울을 옮겼으며, 평양에서 156년이 지난 평원왕(平原王) 28년(서기 586)에 장안성(長安城)으로 서울을 옮겼으며, 장안성에서 83년이 지난 보장왕(寶臧王) 27년(서기 668)에 멸망하였다.[옛 사람들의 기록에는 시조 주몽으로부터 보장왕에 이르기까지의 연대가 이와 같이 분명하고 상세하다. 그러나 혹자는 “고국원왕(故國原王) 13년(서기 343)에 평양 동쪽 황성(黃城)으로 옮겼는데 그 성은 지금 서경의 동쪽 목멱산(木覓山) 가운데 있었다.”고 말하니 어느 말이 옳은지를 알 수 없다.] 평양성은 지금의 서경(西京)인 듯하고 패수(浿水)는 바로 대동강(大同江)이다. 어떻게 이를 알 수 있는가?

『당서(唐書)』에는 “평양성은 한나라의 낙랑군으로서 산굽이를 따라 성을 둘러쌓았고 남으로 패수가 놓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한지』에는 “등주(登州)에서 동북쪽 바닷길로 나서서 남쪽으로 해변을 끼고 패강 어귀에 있는 초도(椒島)를 지나면 신라의 서북 지방에 도달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한 수 양제(煬帝)의 동방정벌조서에는 “창해 방면 군사는 선박이 천 리에 뻗쳤는데 높직한 돛은 번개같이 달리고 커다란 전함들은 구름같이 날아서 패강을 횡단하여 멀리 평양에 다다랐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렇게 보면 지금의 대동강이 패수인 것이 명백하며 서경이 평양이라는 것도 또한 알 수 있다.

『당서』에는 “평양성도 장안이라고도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고 고기(古記)에는 “평양으로부터 장안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으니 두 성이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고구려는 처음에 중국 북부 지역에 있다가 점점 동방의 패수 옆으로 이동하였다. 발해(渤海) 사람 무예(武藝)는 “옛날 고구려의 전성시대에는 군사 30만으로 당과 대적하였다.”고 말하였으니 고구려의 지세가 유리하고 군사가 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 말기에 이르러 임금과 신하가 우매하고 포악하여 각자가 자신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자, 당이 다시 군사를 출동시키고 신라가 이를 도와 그들을 쳐서 평정했던 것이다. 그 지역의 대부분이 발해와 말갈로 편입되고 신라에서도 그 남쪽 지방을 차지하여 한주(漢州), 삭주(朔州), 명주(溟州)의 3주와 군현을 두어 아홉 주를 설치하였다.


2.

고려사 지리지 서경유수관 평양부 (西京留守官 平壤府)

본래 삼조선(三朝鮮)의 옛 도읍이다. 당뇨(唐堯) 무진년(戊辰年, 기원전 2333)에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옹립해 평양에 도읍하니 단군(檀君)이라 불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殷))나라를 정벌하고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다. 그 41대손 기준(箕準) 때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무리 1천여 명을 모아 망명해 와서 기준의 땅을 빼앗고 왕험성(王險城)【‘험(險)’은 ‘검(儉)’으로도 적으며 평양을 말함】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다. 그 손자 우거가 중국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한나라 무제가 원봉(元封) 2년(B.C. 109)에 장수를 보내 토벌하고 사군(四郡)을 획정하면서 왕험(王險)을 낙랑군(樂浪郡)으로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15년(427)에 국내성(國內城)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보장왕 27년(668)에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와 협공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니 결국 이 지역은 신라로 편입되었다.

태조 원년(918)에 평양이 황폐하다하여 염주·백주·황주·해주·봉주의 백성을 이주시켜 민호를 채우고 대도호부로 삼았다가 얼마 후 서경(西京)으로 하였다. 광종 11년(960)에 서도(西都)로 명칭을 고쳤다. 성종 14년(995)에 서경유수(西京留守)를 칭하였다. 목종 원년(998)에 또 호경(鎬京)이라고 고쳤다. 문종 16년(1062)에 다시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이라 칭하면서 경기(京畿) 4도(道)를 설치했다. 숙종 7년(1102)에 문반(文班)·무반(武班)과 오부(五部)를 두었다.

인종 13년(1135)에 서경의 승려 묘청(妙淸)과 유참(柳旵),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서 군사를 보내 절령(岊嶺)을 통과하는 도로를 끊었다. 이에 원수 김부식(金富軾) 등에게 명하여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토벌하게 하여 평정하였다. 이 때 유수(留守)·감군(監軍)·분사어사(分司御史) 외에는 관반(官班)을 모두 없앴다가 얼마 후 경기 4도(道)를 삭제하고 6개 현(縣)을 두었다.

원종 10년(1269)에 서북면병마사영(西北面兵馬使營)의 기관(記官) 최탄(崔坦)과 삼화현(三和縣)의 교위(校尉) 이연령(李延齡) 등이 반란을 일으켜 유수를 죽이고 서경과 여러 성들을 바치며 몽고에 귀부했다. 몽고는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로 삼고 관리를 두었으며, 자비령(慈悲嶺(岊嶺))을 경계로 획정하였다.

충렬왕 16년(1290)에 원나라가 서경과 여러 성들을 돌려주므로 마침내 다시 서경유수관으로 하였다. 공민왕 18년(1369)에 만호부를 설치했다가 뒤에 평양부(平壤府)로 고쳤다.

대동강(大同江)이 있다.【곧 패강(浿江)으로 왕성강(王城江)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강의 하류는 구진익수(九津溺水)가 된다】 대성산(大城山)이 있다.【구룡산(九龍山), 혹은 노양산(魯陽山)이라고도 부른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평양성(平壤城)의 동북쪽에 노양산이 있다.”고 기록했는데, 바로 이 산을 일컬은 것이다. 산정에는 연못이 세 개가있다】. 옛 성터가 2개 있다.【하나는 기자(箕子) 때 쌓은 것으로서 성안을 정전제(井田制)를 써서 구획한 것이다. 또 하나는 고려 성종 때 쌓은 것이다】. 기자묘(箕子墓)가 있다.【부성(府城)의 북쪽 토산(土山) 위에 있다】.

동명왕묘(東明王墓)가 있다.【부(府)의 동남쪽 중화(中和)지역인 용산(龍山)에 있으며, 민간에서 진주묘(珍珠墓)라고 부른다. 또 인리방(仁里坊)에 동명왕의 사당이 있는데, 고려에서 절후에 맞추어 어압(御押)을 내려주어 제사를 지나게 했으며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도 역시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지금까지도 고을 사람들이 소원을 빌 일이 있으면 이곳에서 기도를 올린다. 세상에 전하기를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사당이라고 한다】. 을밀대(乙密臺)가 있다.【금수산(錦繡山) 정상에 위치하며, 그 아래 층층절벽 곁에 있는 영명사(永明寺)는 옛날 동명왕의 구제궁(九梯宮)이다. 그 안에 기린굴(麒麟窟)이 있고, 굴의 남쪽 백은탄(白銀灘)에는 바위가 조수(潮水)에 따라 드러났다가 잠겼다가 하는데 조천석(朝天石)이라 부른다.】. 속현이 4개이다.

ㅡ 하략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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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7-12-04 08:43
 
발해의 5경과 고구려의 졸본/흘승골성, 국내성 등은 모두 근세에 학자들 사이에 제론이 쟁쟁하다가 20 세기에 들어서 일제식민사학자들이 주도해 비정된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인류제국 17-12-04 08:56
 
결론은 조선시대 이전의 압록강은 요하이고

평양은 중국 랴오닝성 일대라는 말이네요
     
감방친구 17-12-04 08:59
 
요하의 여러 지류 가운데에 하나로 보입니다
감방친구 17-12-04 08:58
 
서경과 평양을 고찰하며 잡히는 윤곽은
고려시대의 서경은 지금의 평양이 맞다는 것과
고려시대의 서경은 고구려의 평양(장수왕의 평양이든 평원왕의 장안성이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평양이라는 명칭이 여러 곳에서 나오는 사실로 비출 때에 고려 서경 지역이 고구려 수도인 평양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평양으로 불리웠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삼국사기 지리지 그 어디에서도 그 비슷한 지명이 확인되지 않으므로 지극히 낮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한나라 우북평군(右北平郡) 평명현(平明縣)을 왕망은 평양(平陽)이라 했다.
     
도배시러 17-12-04 12:23
 
중국에도 평양이란 지명이 있지요. - 통전 돌궐
负於 西海 之东,止於山上。其山在高昌西北,有洞穴,狼入其中,遇得 平壤茂草,地方二百馀里。
중국의 서쪽에 서해도 있고... 평양平壤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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