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든 사회집단이든 나아가 국가든 국가연합이든 연맹이든 그 다투고 싸우는 모든 원인은 이익과 손실에서 비롯한다.
가진 자는 더 얻기 위해, 잃지 않기 위해
없는 자는 가지기 위해, 더 빼앗기 위해 싸우고 다툰다.
앞서서 요나라가 100 여 년을 넘게 그렇게 집요하게 강동 6주를 탐을 낸 이유가
ㅡ 산재한 금광, 철광
ㅡ 물산이 풍부하게 모여드는 교통
ㅡ 여진과 고려를 제어하고 방어하기에 필요한 입지
때문이었다는 것을 고찰한 바 있다.
공손씨, 여러 선비족과 그들이 세운 나라들, 진, 북위, 고구려가 다툰 것은, 그리하여 싸운 곳은 지금의 요동이 아니라 지금의 요서이다
북방과 동방과 중원의 문물이 모이고 만나는 길목이자 또한 세 방향으로 뻗어가는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이기에 이들은 싸운 것이다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침공한 이유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설치한 요동군(은 진나라가 처음 설치했으나 실제 운영한 것은 한나라가 처음이다), 현도군, 낙랑군의 세 군의 인구가 자그만치 100 만에 육박하였다
기원전 2~1 셰기에 그 지역에 100 만이 몰려있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인구 5,000 만인 오늘 대한민국에서도 인구 100 만이라 하면 많은 인구이고 인구가 많다는 것은 그 인구를 먹여살릴 근거가 있기에 그러한 것이다
이 100 만에 달하던 인구가 후한 시대에 가면 절반으로 뚝 떨어지고 진나라와 북위에 이르러서는 1/10 밑으로 감소한다
이 인구 감소는 영토의 축소와 교치에 따른 것으로 4세기 진나라에 이르러서는 진이 설치한 요서군 동북방의 주와 군과 현이 모두 요서군 서쪽으로 교치가 되고 이 상태는 수나라 때까지 계속 되었다
사료가 증언하는 이 사실은 그 지역이 2~4 세기를 거치며 급격히 중원계 국가가 아닌 외타 세력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는 것을 웅변해준다.
그 외타 세력이 누구겠는가? 바로 선비족, 특히 모용선비와 고구려(, 그리고 검토가 필요하겠으나 백제까지)이다.
그리고 이 다툼에서 고구려는 광개토왕 말년에서 장수왕 시대에 최종 승리자가 되어 그 이후 근 200 년을 번영한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 고구려 수도 평양은 있는 것이다.
고래로 한 나라의 도읍지는 교통이 사통팔달 하고 물산과 인구가 풍부하게 모여 번성한 지역의 중심에 있어서
그 이득을 세금으로 거두어 들이기 수월하고 외적의 방어에 유리한, 넓은 땅으로 삼았다.
고구려는 개국 이래 계속하여 서쪽으로 뻗어가려 했으며 서쪽 세력과 국가의 존망을 건 투쟁을 하였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고구려 수도 평양은 탐색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