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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2-06 22:53
[한국사] 3세기 이후 고구려의 팽창과 그 서쪽 영역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1,140  

이 글은 아래의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위세와 평양의 위치'에 붙이는 글입니다. 애초에 해당 글에 댓글로서 붙이고자 했으나 분량이 많고 근거보다는 심증이 앞섰기에 보다 더 숙고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미루었습니다.

이 글은 고구려 평양의 위치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학계 통설이 수의 고구려 대침공을 야기한 고구려 영양왕 9년, 서기 598 년의 요서 타격이 지금의 유성을 공격한 것이라 하는 것을 접하고 강한 의문을 품게 되면서 비롯하였습니다. 여러 수나라 지도에서 그 영역이 지금의 조양이 아니라 난하 서쪽에 그치게 표시함에도, 또 수나라 동북 영역이 수서 지리지를 근거로 하여 볼 때에 난하 서쪽, 혹은 영정하 근방으로 비정되는 유성현에서 끝남에도 학계 통설에서는 영양왕이 지금의 조양을 공격했으며, 그 조양이 수나라의 요서군 유성현이라고 주장하여 온 것입니다.

이미 이곳에서 도배시러님과 함께 모용선비의 화룡성의 위치를 고찰한 바 있기에 이러한 학계의 통설에 강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고찰은 댓글로 붙여 하겠습니다.


1. 동천왕(3세기) ~ 장수왕(5세기) 시기의 모용선비 및 중원계 세력과 고구려의 대결

# 기사 출전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광개토대왕 395년 기사는 광개토태왕비에서)

1) 동천왕
16년(서기 242), 임금이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깨뜨렸다.

20년(서기 246) 가을 8월, 위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에서 나와 침입하였다.

21년(서기 247) 봄 2월, 임금은 환도성이 병란을 겪어서 다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2) 중천왕

12년(서기 259) 위나라 장수 위지해(尉遲楷)[이름(楷)이 장릉(長陵, 고려 인종)의 이름에 저촉된다.]가 병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임금이 정예 기병 5천 명을 선발하여 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 싸워 이기고, 8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3) 서천왕

11년(서기 280) 양맥(서)과 숙신(동북)의 난 평정과 복속

4) 봉상왕

2년(서기 293) 가을 8월, 모용외(慕容廆)가 침입하였다. 신성 태수인 북부(北部) 소형(小兄) 고노자(高奴子)가 기병 5백을 거느리고 임금을 맞이하고, 적군과 만나 분발해 그들을 공격하니, 모용외의 군사가 패하여 물러났다.

5년(서기 296) 가을 8월, 모용외가 침입하여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렀다. 임금은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았다. 고노자가 선정을 베풀어 권력과 명성이 높아지니, 모용외는 다시 쳐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5) 미천왕

3년(서기 302) 가을 9월, 임금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공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12년(서기 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14년(서기 313)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15년(서기 314)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帶方郡)을 침공하였다.

16년(서기 315) 봄 2월, 현도성을 침공하여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20년(서기 319) 겨울 12월, 진(晉)나라 평주자사(平州刺使) 최비(崔毖)가 도망쳐왔다. (그후 최비가 단씨, 우문씨, 고구려와 함께 연의 극성을 공격하려다 실패) 우리나라 장수 여노(如孥)가 하성(河城)을 막아 지키고 있었는데, 모용외가 장군 장통(張統)을 보내 공격하여 그를 사로잡고, 그 무리 천여 가(家)를 포로로 잡아 극성으로 돌아갔다. 임금은 자주 병사를 보내 요동을 침공하였다. 모용외는 모용한(慕容翰)과 모용인(慕容仁)을 보내 우리를 치게 하였는데, 임금이 동맹을 구하자 모용한과 모용인이 곧 돌아갔다.

21년(서기 320) 겨울 12월, 병사를 보내 요동을 침공하였는데, 모용인이 막아 싸워 우리가 패하였다.

6) 고국원왕

5년(서기 335) 봄 정월, 북쪽에 신성(新城)을 쌓았다.

9년(서기 339), 연(燕)나라의 왕 모용황(慕容皝)이 침입하여 그의 병사가 신성에 이르렀다. 임금이 동맹을 요청하자 그들이 곧 돌아갔다.

12년(서기 342) 봄 2월,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았다.
가을 8월, 임금이 환도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겨울 10월, 연나라 왕 모용황이 용성(龍城)으로 수도를 옮겼다. 11 월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입해)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싣고, 궁궐 창고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보물을 훔쳤으며,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운 뒤에 환도성을 무너뜨리고 돌아갔다.

15년(서기 345) 겨울 10월, 연나라 왕 모용황이 모용각(慕容恪)에게 우리나라를 침공케 하여 남소(南蘇)를 무너뜨린 후 수비군을 남겨두고 돌아갔다.

25년(서기 355) 봄 정월, 임금이 왕자 구부(丘夫)를 왕태자로 삼았다.
겨울 12월, 임금이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볼모와 공물을 바치면서 그 어머니를 돌려보내 주도록 요청하였다. 연나라 왕 모용준이 이를 허락하고, 전중장군(殿中將軍) 조감(刁龕)에게 왕의 어머니 주씨를 호송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임금에게 이전과 동일하게 정동대장군영주자사(征東大將軍營州刺史)의 작호를 주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하였다.

40년(서기 370), 진(秦)나라의 왕맹(王猛)이 연나라를 격파하였다. 이에 연나라의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우리나라로 쫓겨 왔다. 임금이 그를 붙잡아 진나라로 보냈다.

7) 고국양왕

2년(서기 385) 여름 6월, 임금이 병사 4만을 출동시켜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연나라 왕 모용수(慕容垂)가 대방의 왕 모용좌(慕容佐)에게 용성(龍城)을 수비하게 하였다. 모용좌는 우리 병사가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사마(司馬) 학경(郝景)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돕도록 하였다. 그러나 우리 병사가 이들을 격파하였다.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키고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겨울 11월, 연나라의 모용농(慕容農)이 병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요동과 현도 두 군을 회복하였다. 예전에 유주(幽州), 기주(冀州) 등지에서 다수의 유랑민이 우리에게 투항했었는데, 모용농이 범양(范陽)의 방연(龐淵)을 요동의 태수로 삼아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8) 광개토태왕

391 년 9월, 임금이 병사를 보내 북쪽으로 거란을 공격하여 남녀 5백 명을 사로잡고, 또한 본국에서 거란으로 도망갔던 백성 1만 명을 달래어 데리고 돌아왔다.

패려(稗麗)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이 그치지 않으므로), 영락(永樂) 5년(395) 을미(乙未)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部落) 600∼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五備□)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11년(서기 402), 임금이 병사를 보내 연나라의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였다. 연나라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13년(서기 404) 겨울 11월, 군사를 출동시켜 연나라를 공격하였다.

14년(서기 405) 봄 정월, 연나라 왕 모용희가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성이 함락될 즈음에 모용희가 장병들에게 명령하였다.
“성에 먼저 오르지 말라. 성이 평정되면 내가 황후와 함께 가마를 타고 들어가리라.”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성 안에서는 삼엄한 대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끝내 성을 빼앗지 못하고 물러갔다.

15년(서기 406) 겨울 12월, 연나라의 왕 모용희가 거란을 공격하기 위하여 형북(陘北)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거란의 병사가 많은 것을 겁내어 돌아가려 하다가, 수레의 무거운 군수품을 버리고 가벼운 몸차림을 한 병사들을 데리고 우리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연나라는 3천여 리를 행군하여 왔기 때문에 병사와 말이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는 병사들이 길에 줄을 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17년(서기 408) 봄 3월, 북연(北燕)에 사신을 보내 같은 종족으로서의 예를 베풀었다. 북연의 왕 모용운(慕容雲)이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어 답례하였다. 모용운의 조부 고화(高和)는 고구려의 방계 혈족인데, 자칭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이라 하여, ‘고’를 성씨로 삼았다. 예전에 모용보(慕容寶)가 태자가 되었을 때 모용운이 무예가 뛰어나서 태자를 모시도록 하였는데, 모용보가 모용운을 아들로 삼아 모용씨라는 성을 주었다.

9) 장수왕

장수왕 15년(서기 427)
15년(서기 427), 평양(平壤)으로 수도를 옮겼다.

장수왕 23년(서기 435)
23년(서기 435) 여름 6월, 임금이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역대 황제의 이름을 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위나라의 세조(世祖)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서 황제들의 계보와 이름을 기록하여 보내게 하였으며,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보내 임금을 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영호동이중랑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임금이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였다. 위나라의 사람들이 연나라를 자주 공격하였기 때문에 연나라의 형세가 나날이 위급해졌다. 연나라 왕 풍홍(馮弘)이 말하였다.
“만일 사태가 위급하면 동쪽에 위치한 고구려에 잠시 의존하며, 미래를 위한 대책과 방법을 세우겠다.”
비밀리에 상서(尙書) 양이(陽伊)를 우리나라에 보내 받아주기를 요청하였다.

장수왕 24년(서기 436)
24년(서기 436), 연나라왕이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자제를 인질로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위나라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병사를 동원하여 연나라를 침입하기 직전에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려 주었다.

여름 4월, 위나라가 연나라의 백낭성(白狼城)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임금은 장수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에게 병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연나라 사신 양이를 따라 화룡(和龍)에 가서 연나라왕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갈로와 맹광이 연나라의 성에 들어가, 병사들에게 헌 옷을 벗게 하고, 연나라의 무기고에 있는 정교한 의장을 내주어 입게 하였다. 그들은 대규모로 성을 약탈하였다.

5월, 연나라왕이 용성(龍城)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동쪽 고구려로 이주하도록 하고, 궁전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열흘 동안 꺼지지 않았다. 이동하는 부녀자들에게는 갑옷을 입혀 행렬의 안쪽에 서게 하고, 양이 등은 병사를 거느리고 행렬의 바깥 쪽에 서게 하였으며, 갈로와 맹광은 기병을 거느리고 행렬의 끝에 서서 수레를 나란히 몰아 진군하였다. 행렬의 길이가 80여 리에 이어졌다. 위나라왕이 이 소문을 듣고, 산기상시(散騎常侍) 봉발(封撥)을 고구려에 보내 연나라왕을 위나라로 보내달라고 하였다. 임금이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왕에게 편지를 바치면서, 연나라왕 풍홍과 함께 위나라왕의 교화를 받들겠다고 하였다. 위나라왕은 임금이 자신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논의하였다. 그는 농우(隴右) 지방의 기병을 출동시키려 하였으나, 유혈(劉絜)ㆍ 낙평왕((樂平王) 비(丕) 등이 반대하자 이를 중지하였다.


2. 고구려 왕에게 선비족 및 중원계 국가에서 내린 직위

0) 고국원왕
ㅡ 정동대장군영주자사(征東大將軍營州刺史) 낙랑공(樂浪公) (연, 355 년, 모용준)

1) 광개토태왕
"모용보(慕容寶)는 고구려 왕 안(安 ; 광개토왕)을 평주목(平州牧)에 임명하여 거주케 하였다."
ㅡ 요사 지리지 동경요양부

2) 장수왕
ㅡ 고구려왕낙랑군공(高句麗王樂浪郡公) (진, 413 년)
ㅡ 진(晋) 안제(安帝) 義熙 9년(A.D.413; 高句麗 長壽王 1), 고연을 사지절 도독영주 제군사 정동장군 고구려왕 낙랑공(使持節 都督營州 諸軍事 征東將軍 高句驪王 樂浪公)으로 삼았다. (송서)
ㅡ 永初 3년(A.D.422; 高句麗 長壽王 10)에 璉에게 散騎常侍와 督平州 諸軍事라는 벼슬을 더해 주었다.(송서)
ㅡ 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영호동이중랑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북위, 435 년)
ㅡ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남제, 480 년)
ㅡ 거기대장군태부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車騎大將軍太傅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북위, 491 년)

3) 문자명왕
ㅡ 사지절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령호동이중랑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使持節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북위, 492 년)
ㅡ 사지절산기상시도독영평이주정동대장군낙랑공(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征東大將軍樂浪公) (제, 494 년)
ㅡ 거기장군(車騎將軍) (제, 496 년)
ㅡ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양, 502 년)
ㅡ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북위, 519 년)

4) 안장왕
ㅡ 영동장군도독영평이주제군사고구려왕(寧東將軍都督營平二州諸軍事高句麗王) (양, 520 년)



3. 고구려의 강역에 대한 중국 사서의 기록

1) 구당서(舊唐書)
“西北으로는 遼水를 건너 營州에 이르렀다”

2) 원사(元史)
“서북으로 遼水를 지나 營州에 접하였다”



4. 상기 1~3에 대한 학계의 통설

1) 위치

ㅡ 연(燕) 숙군성(宿軍城) : 현 요녕성 醫巫閭山 동쪽
ㅡ 연(燕) 극성(棘城) : 현 요령성 부신시
ㅡ 연(燕) 용성(龍城) : 현 요령성 조양시
ㅡ ~ 수(隋) 요서군 유성현 : 현 요령성 조양시

2) 견해

ㅡ 영주(營州)는 북위ㆍ수ㆍ당 시대에 지금의 조양시에 있었다
ㅡ 요ㆍ금 시대에 하북성 창려현으로 옮겨갔다
ㅡ 광개토왕 12 년에 후연의 숙군성(현 의무려산 동쪽 비정)을 공략하고 이어 후연이 반격했으나 고구려가 효과적으로 반격하였으므로 이 시기 이후 고구려가 요동(지금의 요하 동쪽)을 실질적으로 차지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수ㆍ당 시대까지 유지되었다고 보인다
ㅡ 도독이란 군사권을 장악한다는 의미로 역시 漢代에서 비롯되었는데 일정지역의 군사통수권을 위임받는 것을 의미하는 가호(加號)였다. 사지절도독영주제군사(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에 고련(高璉 장수왕)을 제수함은 곧 동진(東晋)이 高句麗의 長壽王에게 營州의 軍事的 統帥權을 위임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영주(학계 통설 지금의 조양)는 당시 북연의 영역이었으므로 실질이 아니라 형식적 직위였을 것으로 보인다
ㅡ 그런데 한편으로 광개토대왕이 후연의 숙군성을 개척하고 장수왕이 북연의 지배층을 받아들인 사실 정황에서 지금의 조양 지역에 대하여 고구려가 영향력내지 지배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도 있다

3) 학계 통설 요약
ㅡ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말기부터 장수왕 시대에 의무려산 동쪽, 혹은 조양 근처까지 영향력을 미쳤거나 지배했고 그것이 수ㆍ당 대에까지 이어졌다
ㅡ 학계 통설에서는 고구려 최전성기의 서쪽 영역을 의무려산 동쪽에서 조양 근처까지로 보고 있으며 지도에도 요하의 서쪽을 살짝 지배하였다는 식으로 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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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7-12-06 23:15
 
일단 학계 통설의 문제는 한서, 후한서, 진서, 위서, 수서에 이르는 사서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중국계 국가 및 세력의 동북 영역 축소와 그 교치 상', 그리고 그것을 따라 '서쪽으로 뻗어가는 고구려의 활동상과 그 영역의 상'을 무시하는 데에서 비롯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한사군 서북한설에 아주 깊고 견고한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한사군 재 서북한설, 위만조선 재 서북한설을 옹위하려다 보니
학계의 통설은 사료 기록을 편취하고 또 무시하며 엉망진창이 돼 버린 것입니다
감방친구 17-12-06 23:24
 
낙랑군이 서북한에 있어야 하니 거기에 궤를 맞춰서 한군현을 배치해야 하고

낙랑군 치소가 왕검성이니 지금의 평양은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이 돼야 하며

또 압록강 하구 북안이 서안평이 돼야 하며

낙랑군이 서북한에 있으니 만리장성도 서북한까지 뻗어내려와야 하며

고구려는 4세기 중반까지 지금의 요동은 차지하지도 못 했고
그러다 보니 요녕성에서 나오는 고분과 벽화와 유물은 고구려 것과 극히 유사함에도 선비족 것이 돼야 하며

요동과 현도가 지금의 요서를 거쳐 나중에는 하북성까지 밀려감에도 곧 죽어도 요동군과 현도군은 요동반도에 끝까지 있어야 하며

고구려 세력을 이렇게 축소하다 보니 중원계 세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세력이었던 선비족의 연나라는 하북성과 하남성에서 멀리 수천 리 지금의 요동까지 강대한 영토를 지니고 있어야 하며

이 모든 게 평양낙랑군설이 그 시발점입니다
도배시러 17-12-06 23:28
 
화룡성 문제는 정정 하겠습니다.
당나라 통전에서 고죽국 영역은 북평군(고죽성, 노룡, 비여, 영지)에서 유성현(영주 치소)까지 입니다.
유성현의 동쪽에 도하가 있습니다. 이 도하를 조양으로 볼수있습니다.

화룡성의 위치는 오늘날 노룡현과 조양의 중간 지점입니다. 유성현 백랑산, 대릉하가 시작되는곳.
포장도로 기준으로 화룡성을 공격하려면 백랑산의 백랑성을 점령해야 화룡성으로 진격이 가능합니다.
     
감방친구 17-12-06 23:34
 
예, 그 문제는 유성현 주변의 유수, 백랑수 등을 어디로 보느냐도 걸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노룡현과 조양의 중간지점으로 보더라도 일단은 현 조양은 아닌 것이죠

그리고 수서와 구당서, 신당서 지리지를 비교해 보면 신당서에 유성현의 동쪽 영역이 의무려산까지 늘어난 것이 관찰됩니다

이것도 염두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도배시러 17-12-06 23:37
 
요사지리지를 보면 금주, 요동군 무려현이 의무려산의 서쪽에 있습니다. 대릉하의 동쪽.
요동요서의 기준은 대릉하로 보입니다.
               
감방친구 17-12-06 23:39
 
제가 지금 밥을 먹고 있는데
고찰은 쫌 있다가 댓글로 이어하겠습니다
               
감방친구 17-12-07 01:05
 
지금 다시 보니
확실히 무려현은 요동군에 속했고
수서와 신당서를 비교해 보니
신당서에 처음으로
유성현에 대해 의무려산이 언급되는데
이는 주ㆍ군ㆍ현이 늘고 줆에 따라 신당서에 추가 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신당서에서는 류성현에 갈석(동쪽), 의무려산 (동북)을 함께 언급하고 있네요
     
감방친구 17-12-06 23:35
 
또 도배시러님 견해는 이 기록을 고찰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네요

ㅡㅡㅡ

고국양왕

2년(서기 385) 여름 6월, 임금이 병사 4만을 출동시켜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연나라 왕 모용수(慕容垂)가 대방의 왕 모용좌(慕容佐)에게 용성(龍城)을 수비하게 하였다. 모용좌는 우리 병사가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사마(司馬) 학경(郝景)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돕도록 하였다. 그러나 우리 병사가 이들을 격파하였다.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키고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겨울 11월, 연나라의 모용농(慕容農)이 병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요동과 현도 두 군을 회복하였다. 예전에 유주(幽州), 기주(冀州) 등지에서 다수의 유랑민이 우리에게 투항했었는데, 모용농이 범양(范陽)의 방연(龐淵)을 요동의 태수로 삼아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도배시러 17-12-06 23:43
 
동호에서 선비, 오환이 떨어져 나왔다고 하지만, 동호는 유목민입니다.
오환은 여기에 해당하는데... 선비족은 짬뽕이라 애매하네요.
대부분의 선비족은 유목민인데... 모용씨 선비족은 고구려 옆에서 알짱거리던 수렵생활을 하던
선비족으로 보입니다. 맥족의 한갈래가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모용외가 한때 도하현의 청산(조양)을 거점으로 활동했던 시기도 있습니다.
도배시러 17-12-06 23:35
 
고구려는 근본적으로 의무려산의 서쪽을 꾸준히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의무려산이 졸본부여이고 홀승골승입니다. 왕들이 꾸준히 졸본을 방문하고 시조묘에 제사를 한달간 지내지요.
그 지역을 빼앗긴 시기는 모용씨의 전연과 후연 시기이죠.
     
감방친구 17-12-06 23:38
 
저도 그 견해에 동조하는 쪽입니다

현도와 환도 역시 같이 놓고 봐야 한다고 봅니다

일단 기존 학설은 다 내려놓고 1차 사료만 놓고 위치를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방친구 17-12-06 23:47
 
애초의 오녀산성은 발굴조사 결과 3세기 이전 유적ㆍ유물이 없어서 잠정 폐기된 것으로 압니다
          
도배시러 17-12-06 23:50
 
후한말의 인물 응소가 현도군은 진번국이라 햇는데...
일본인이 한사군을 비정하면서 현도와 진번을 남북으로 갈라 놓았죠.
진번의 위치를 황해도로 비정했는데... 관련 유물이 없어서 폐기상태에 이르고 있다 합니다.
도배시러 17-12-06 23:48
 
아시다시피 사서를 보면 하천의 명칭, 산악의 명칭은 수시로 변합니다.
건축물 위주로 접근하는게 지리정보의 기준을 잡기 쉽습니다. 고죽성, 안문관
     
감방친구 17-12-06 23:57
 
골치 아프네요
일단 커피 타서 담배 한 대 태우고 있습니다
감방친구 17-12-07 02:28
 
일단 구당서ㆍ신당서의 유성현과 그 이전 사서의 유성현은 다른 지역인 것으로 보입니다
당서의 유성은 현 조양 지역으로 볼 여지가 있으나
그 이전 시대는 그곳으로 볼 수 없다 여겨지네요

후한서 군국지에서는 유성현을 비롯한 여러 현들이 사라집니다
이는 각 군현의 인구가 절반 가량 줄어드는 것과 연관이 있어보이고 이를 설명할 지식이 제게는 없네요

그러나 랑수, 유수, 영지현, 비여현, 임유현, 창려, 고죽성 등이 당나라 이전의 유성현의 위치를 찾는 데에 이정표가 될 것으로 봅니다
감방친구 17-12-07 02:30
 
아ㅡ 보통 일이 아니네
꼬마러브 17-12-07 10:06
 
고구려 후기를 기점으로 요동을 포함한 지명의 위치가 변하는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에서 태조왕 때 요서에 성을 쌓을 기록이나 모본왕 때 북평, 어양, 상곡 등을 공격한 기록 등을 보면, 지금의 요동과는 위치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꼬마러브 17-12-07 10:25
 
또한 학계의 통설에 따르면 광개토왕 때, 고구려는 요동을 이미 차지했는데...

<십육국춘추>를 보면 407년에 후연의 고운이 모용귀를 요동공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慕容歸為遼東公,立燕之宗社

https://zh.wikisource.org/wiki/%E5%8D%81%E5%85%AD%E5%9C%8B%E6%98%A5%E7%A7%8B/%E5%8D%B711

이는 고구려의 요동과 중국의 요동군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한서>에서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燕王盧綰反,勃以相國代樊噲將,擊下薊,得綰大將抵、丞相偃、守陘、太尉弱、御史大夫施屠渾都。破綰軍上蘭,後擊綰軍沮陽。追至長城,定上谷十二縣,右北平十六縣,遼東二十九縣,漁陽二十二縣。

(연왕 노관이 반기를 드니, 발은 상국으로써 버쾌 장군을 대신하여 계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노관의 대장 지, 승상 언, 수 형, 태 위 약, 어사대부 시도혼도 등을 붙잡았다. 노관의 군대를 상란에서 격파한 뒤 노관의 군대를 저양에서 공격하였으며, 이들을 추격하여 장성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상곡 12현, 우북평 16현, 요동 29현, 어양 22현을 평정하였다.')

https://zh.wikisource.org/wiki/%E6%BC%A2%E6%9B%B8/%E5%8D%B7040

이는 고구려의 모본왕이 북평, 어양, 상곡과 함께 요동을 공격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교차되는 것으로, 요동이란 장성의 안과 밖을 모두 통칭했음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도배시러 17-12-08 14:54
 
신당서 지리지3 營州柳城郡,上都督府。本遼西郡
又有汝羅、懷遠、巫閭、襄平四守捉城。
柳城。中。西北接奚,北接契丹。有東 北鎮 醫巫閭山祠,又東有碣石山。===>갈석산
유성현의 동쪽에 북진 의무려산,  갈석산이 있다고 하네요.

신당서는 갈석산 개념이 엉망으로 변하는데... 유성군 서쪽의 평주 북평군에도 갈석산이 있다하지요.
平州北平郡,下。初治臨渝,武德元年徙治盧龍。土貢:熊郭、蔓荊實、人。戶三千一百一十三,口二萬五千八十六。縣三:有府一,
曰盧龍。有盧龍軍,天寶二載置;又有柳城軍,永泰元年置;有溫溝、白望、西狹石、東狹石、綠疇、米磚、長楊、黃花、紫蒙、白狼、昌黎、遼西等十二戍,愛川、周夔二鎮城;東北有明垤關、鶻湖城、牛毛城。盧龍,中。本肥如,武德二年更名,又置撫寧縣,七年省。
石城,中。本臨渝,武德七年省,貞觀十五年復置,萬歲通天二年更名。
有臨渝關,一名臨閭關;有大海關。有碣石山;有溫昌鎮。===========>갈석산
馬城。中。古海陽城也,開元二十八年置,以通水運。東北有千金冶;城東有茂鄉鎮城。

같은 갈석산이라면 서쪽에 유성군 동쪽에 북평군 갈석산인데... 통전은 서 북평, 동 유성이라 하니 혼란스럽네요.

신당서 유성군의 갈석산 언급은 오류로 보입니다.
아니면 유성군을 고죽성 서쪽으로 옮겨야 한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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