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학과 음운학에서 말하는 소리는 전혀 의미가 다르다. 음성학은 객관적인 말소리 자체를 다룬다. 그러나 음운학에서는 주관적이고 교육된 말소리를 다룬다. 경상도 분들 가운데 ‘살’과 ‘쌀’을 구분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 이 말소리를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에 구분을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음운학에서는 교육되어서 사람들에 의해 구분되어지는 말소리를 다룬다. 영어의 fan이나 pan은 한국인들의 대부분이 구분하지 못했다. 요즘은 어릴 때부터의 영어교육으로 구분이 가능한 젊은이들이 많다. 음운학적으로 /f, p/는 한국어 체계에서 모두 /ㅍ/로 같은 말소리일 뿐이다.
자음 체계를 말할 때도 음성이 아닌 음운을 말한다. 교육되어서 다른 닿소리와 구별되어지는 말소리를 뜻하는 것이지 실제로 그런 말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고대국어의 자음 체계는 현대에 비해 매우 단순하다. 된소리가 없다. 유기음도 없다. 우리말의 특징인 평음, 격음, 경음의 구분이 없다는 얘기다. /ㄱ, ㅋ, ㄲ/의 구분이 없이 그냥 /ㄱ/ 소리만 있다. 삼항 대립이라고 하는 일본어나 영어와도 확연히 다른 한국어의 특징이 없었다. /ㅈ/ 소리도 있었는지 없었는지 불분명하긴 하나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된소리에 대해서는 모든 학자의 의견이 일치한다. 된소리는 조선시대에 들어 발달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전후로 추정한다. 그 근거는 한자음이다. 한자음에 된소리가 전혀 없었다. '끽(喫), 쌍(雙), 씨(氏)'도 조선시대에 된소리화한 것이다.
유기음의 존재에 대해서 그 구체적 발생 시기는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부분 삼국시대 후기까지도 유기음은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다고 본다. 삼국시대 말 유기음의 존재를 주장하는 이기문 교수 등의 글도 그저 있었다는 정도지 활발하게 쓰였다고는 하지 않는다. 고구려, 백제어를 되짜다 보면 결국 유기음이 전혀 없음을 알게 된다.
유기음 가운데서도 가장 늦게 발달한 /ㅋ/소리는 현재도 어두에 극히 적은 숫자만이 존재한다. 어말에 ㅎ소리가 있던 ‘고ㅎ’ 같은 말이 ‘코’로 변하기 전에는 거의 없었다.
'주몽(朱蒙)'과 '추모(鄒牟)', '중상(仲常)'과 '충상(忠常)', '상질현(尙質縣)'과 '상칠현(上漆縣)' 등의 기록은 적어도 삼국시대 초기에는 유기음이 없었음을 입증한다.
파찰음 /ㅈ/도 그 존재를 의심하게 된다. '비자화(比自火)'와 '비사벌(比斯伐)', '구사군(仇史郡)'과 '굴자군(屈自郡)', '성충(成忠)'과 '정충(淨忠)' 등의 기록을 보면 /ㅈ/소리가 있었다고 믿기 어렵다.
고주몽의 이름이 <삼국사기>에 추모(鄒牟)·중모(中牟)·중해(衆解)·상해(象解)·도모(都牟)·도모(都慕) 등으로 나온다. 성은 解씨였으나 高씨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것은 고대에 유기음은 물론 파찰음 /ㅈ/도 없었다는 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김종훈, 박영섭, 박동규, 김태곤, 김종학 공저,『한국어의 역사』를 위주로 정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