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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2-17 15:22
[한국사] 고구려 안시성, 오골성, 신성, 남소성 등의 위치 고찰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3,708  

가. (독사방여기요)

首山司西南十五里。山連海州衛界,頂有平石,泉出其中,挹之不竭。曹魏景初二年,司馬懿伐公孫淵,潛濟遼水,進至首山,大破淵軍,遂圍襄平。是也。唐貞觀十八年,征高麗,車駕度遼水,軍於馬首山,即此山矣。或謂之駐蹕山。《唐史》:駐蹕山在安市城外。《志》云:首山一名手山,以山頂石上有文如指掌,故名。

1) 수산은 요양 서남쪽 15리
2) 수산은 마수산이다
3) 마수산 산자락이 해주위 경계에 닿았다
4) 해주위는 요양 서남쪽 120리
5) 조위 사마의가 238 년에 공손연을 정벌하고자 몰래 요수를 건너 마수산까지 나아가 공손연의 군대를 대파하고 양평을 포위했는데 그 마수산이 이 마수산이다
6)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며 요수를 건너 군대를 정열한 마수산이 이 산이다
7) 또는 주필산이라고 한다
8) 주필산은 안시성 바깥에 있다

海州衛司西南百二十里

9) 해주위는 요양 서남쪽 120리

沙卑城即(海州)衛城。亦曰卑沙城,高麗所築,疊石為城,幅員九里,或訛為卑奢城。自登、萊海道趣高麗之平壤,必先出此。

10) 사비성은 해주위 치소
11) 사비성은 고구려가 쌓은 석성이다
12) 등주ㆍ동래주로부터 고구려 평양으로 바닷길을 통하여 갈 때에 가장 먼저 나오는 곳(배로 평양으로 가고자 할 때에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고구려성이라는 뜻)이 이곳이다

49 遼河在(海州)衛西南五十五里。自遼陽界流入,又南注于海,謂之三岔河。當東西往來之沖,亦謂之遼澤,或謂之黃水。晉咸和八年,慕容仁舉兵平郭,襲慕容於棘城,至黃水,知事露乃還據平郭。胡氏曰:黃水在險瀆故縣界,蓋即遼瀆之異名。

13) 요하는 해주위 서남 50리
14) 요하는 동서로 왕래하는 요충지
15) 요하는 또한 요택이라고 하고 황수라고 한다
16) 모용인이 평곽(은 모용인의 근거지)에서 거병하여 극성에 있는 모용(전연 모용황)을 습격할 때(모용소와 모의해 모용수를 보냄)에 일이 잘못될 것을 알고 평곽으로 돌아갔다(정확한 해석이 필요)
17) 황수는 옛 험독현의 경계에 있는데 험독은 아마도 요택의 다른 이름으로 보인다

勃錯水在(海州)衛西北。唐貞觀十九年,親征高麗,攻安市城,不克,引還。至遼東,渡遼水,遼澤泥淖,車馬不通,命長孫無忌剪草填道。至蒲溝,駐馬督填道,諸軍渡勃錯水,暴風雪,士卒沾濕多死者。胡氏曰:蒲溝、勃錯水,皆在遼澤中也。

18) 발착수는 해주위 서북쪽에 있다
19) 당 태종이 안시성 공략에 실패하고 고구려를 떠날 때에 건넌 그 발착수로 요택에 있다

蓋州衛司西南二百四十里。南至復州衛百八十里,西北至廣寧衛三百六十里,東至鴨淥江五百五十里。

20) 개주위는 요양 남쪽 240리
21) 복주위는 개주위 남쪽 180리
22) 광녕위는 개주위 서북쪽 360리
23) 압록강(17세기 당시, 즉 현 압록강)은 개주위 동쪽 550리

蓋牟城即(蓋州)衛治。本漢平郭縣地,漢、晉以後屬於高麗。亦曰蓋葛牟城。唐貞觀十九年,伐高麗,取蓋牟城,因置蓋州。《遼志》云:州治建安縣,元省入州。明洪武五年,改築今城,周五里有奇。

24) 개모성은 개주위 치소
25) 개모성은 한 평곽현
26) 진(晉) 이후 고구려 소유
27) 당 태종이 취해서 개주로 삼음

平郭城在(蓋州)衛南。漢縣,屬遼東郡。後漢因之。曹丕封公孫恭為平郭侯,即此。晉省縣而城存。大興四年,慕容以其子翰鎮遼東,仁鎮平郭。咸和八年,仁據平郭以叛慕容。咸康二年,襲仁於平郭,自昌黎東踐冰而進,凡三百餘里。至歷林口,舍輜重,輕兵趨平郭,遂克之。歷林口蓋在衛西北,昔時濱海要口也。七年,又使其子恪鎮平郭城,後魏時廢。隋大業九年,復伐高麗,修遼東古城以儲軍糧,即平郭城矣。

28) 평곽성은 개주위 남쪽
29) 후한 이후 공손씨, 모용씨 차지
30) 모용외가 그 아들 모용한을 시켜 요동을 진압(공략)할 때에 모용인이 평곽에 진수됐고 모용인이 평곽을 근거지로 하여 모용황을 배반했다
31) 수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에 군량을 비축했다는 요동의 옛 성이 바로 평곽성이다

建安城,在衛東南,漢平郭縣地,高麗置建安城於此。唐貞觀十九年,伐高麗,張儉進度遼水,趨建安城。又李世言:建安在南,安市在北,安市先下,然後向建安。二城蓋相近也。儀鳳初,徙熊津都督府於建安故城,其百濟戶口先徙徐、兗等州者,皆置建安。《舊唐志》:自遼東城西南行三百里,至建安城,故平郭縣也。遼置建安縣,蓋循故名耳,非即舊城也。

32) 건안성은 개주위의 동남쪽에 있음
33) 건안성은 한 평곽현, 고구려 건안성
34) 요동성에서 서남쪽으로 건안성까지 300리(즉 건안성에서 북동쪽 300 리에 요동성)
35)요나라가 설치한 건안현은 옛 건안성이 아님

安市城(蓋州)衛東北七十里。漢安市縣,屬遼東郡。後漢及晉因之。高麗亦曰安市城。唐貞觀十九年,征高麗,攻安市城,不克,引還。咸亨三年,高麗餘眾復叛,遣將高侃擊之,敗之於安市城。後置安市州。渤海改置鐵州,領位城、河瑞、蒼山、龍珍四縣。遼仍為鐵州,亦曰建武軍,改置湯池縣。《志》曰:在東京西南百六十里。金州廢,以縣屬蓋州。元省。今為湯池寨堡。又後黃城在衛東,亦高麗所置。唐太宗攻安市,先拔其後黃、銀城二城。胡氏曰:高麗東境城也,與安市相近。時又拔其橫山、磨米、麥穀等數城。

36) 안시성은 개주위 동북쪽 70리(즉 요양 서남쪽 170여 리)
37) 요나라 철주 건무군
38) 지리지(어느 지리지인지 모르겠으나)에서는 요양 서남쪽 160리에 있다고 함(요사 지리지에서는 60리라 했으나 교차해 보니 160~170리가 맞음)


烏骨城,在安市東南,近大海。《唐史》:自登州東北海行,至烏湖島。又行五百里,東傍海需,有道至烏骨江。唐貞觀中,太宗圍白巖城,烏骨城遣兵為聲援。又太宗圍安市不下,群臣皆言宜釋安市,並力拔烏骨城,度鴨淥水,直取平壤。是也。

39) 오골성은 안시성 동남쪽에 있다
40) 오골성은 바다에 가깝다
41) 오골성은 압록수와 가깝고 압록수를 사이에 두고 평양(수ㆍ당 당시의 평양)으로 곧바로 가는 길목이다

駐蹕山在(蓋州)衛東。《唐史》:本名六山,在安市城外。貞觀十九年,征高麗,攻安市城,高麗將高延壽等來救。帝曰:彼若勒兵連安市而壁,據高山,取城中粟食之,縱靺鞨掠吾牛馬,攻之不可下,此上策也。及延壽至,距安市四十里而屯。帝曰:虜墮我策中矣。既延壽又進一舍,至城東南八里,依山為陣。上命李世將兵陳於西嶺,長孫無忌將奇兵自山北出狹谷,以沖其後,自將步騎挾鼓角,偃旗幟登北山。上命諸軍聞鼓角齊出奮擊。及戰,高麗兵敗,無忌斷其歸路,延壽乃降。因名其山曰駐蹕。或曰:衛東分水嶺諸山,即太宗駐蹕處也。又六山,今廣寧無閭山之別名。

42) 주필산은 개주위의 동쪽에 있다
43) 주필산은 안시성 바깥에 있다
44) 주필산은 본래 육산이다
45) 당 태종이 머물며 고연수 등을 패배케 한 곳이라 하여 駐蹕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46) 또는 위 동쪽(어느 시대 어느 위인지 모르겠다)/동쪽의 분수령이 되는/지키는 여러 산을 가리키는데 육산이라고도 하며 당 태종이 주필한 곳이자 의무려산의 별칭이다



나. (독사방여기요)

遼東舊都司城。東至鴨綠江五百六十里,南至旅順海口七百三十里,西至山海關一千一十五里,西北至大寧廢衛八百六十里,東北至故建州衛七百九十里。自都司至山東布政司二千三百三十里,至江南江寧府三千四百里,至京師一千七百里。

金州衛司南六百里。南至大海百二十里,西北至廣寧衛七百二十里。


1) 금주위 요양 남쪽 600리
2) 바다 금주위 남쪽 120리
3) 광녕위 금주위 서북쪽 720리

秦漢時遼東郡地。高麗為南蘇城。遼曰蘇州安復軍。金皇統三年廢。貞四年,改置金州。元廢。明洪武四年,置衛。今亦並入蓋平縣。

南蘇城即衛治。高麗所置。晉永和初,燕王遣慕容恪攻高句麗,拔南蘇。隆安二年,燕慕容盛以高句麗王安事燕禮慢,自將兵襲之,拔新城、南蘇二城,開境七百餘里。隋大業七年,伐高麗,分遣段文振出南蘇道。唐貞觀二十一年,李世伐高麗,渡遼水,歷南蘇等城,敗其兵而還。又乾封二年,薛仁貴破高麗兵,拔其南蘇等城。顯慶中,置南蘇州於此,尋沒於渤海。遼置蘇州,兼置來蘇縣為州治。一云晉時高句麗都丸都,去金州甚遠。

4) 남소성은 금주위 치소
5) 晉永和(동진 목제 사마담 345~356)初에 연 慕容恪(모용각, 전연의 마지막 왕, ~357)이 남소성을 공략하였다/빼앗았다
6) 隆安二年(동진 안제, 398)에 후연 慕容盛(모용성)이 고구려왕(광개토대왕)이 무례하다 하여 신성, 남소성을 쳐서 700여리를 빼앗았다

按:《漢志》高句麗縣有南蘇水,城當置於水側。今朝鮮咸鏡道有蘇州,即其地也。木底、新城,亦當在其處。宋建隆初,女真自其國之蘇州,泛海至登州賣馬,故道猶存。宣和初,復由此道遣馬政等通金,謀攻遼。金改置化成縣,尋為金州治。元州縣俱廢。明洪武四年,修築舊城,周四里有奇。

新城在衛西。胡氏曰:新城西南傍山東,北接南蘇、木底等城。晉咸康五年,慕容擊高句麗,兵及新城。高句麗乞盟,乃還。隋大業九年,復伐高麗,遣王仁恭出扶餘道。仁恭進至新城,攻之不拔。唐乾封二年,李世伐高麗,度遼,謂諸將曰:新城,高麗西邊要害,不先得之,餘城未易取也。遂壁西南山臨城,城下,進擊一十六城,皆拔之。此蓋高麗之新城也。

7) 신성은 금주위 서쪽에 있음
8) 북쪽으로 남소성, 목저성 등과 인접

木底城在衛東。胡氏曰:此高麗之南道也。晉咸康八年,慕容擊高句麗。高句麗有二道,其北道平闊,南道險狹。慕容翰曰:彼以常情料之,必謂大軍從北道,當重北而輕南。今以銳兵從南道擊之,出其不意,丸都不足取也。別遣偏師從北道,縱有蹉跌,其腹心已潰,四支無能為矣。從之。遂克高句麗。蓋從北豐而進者為北道,從南狹入木底城而進者,即南道也。義熙初,後燕慕容熙攻高麗木底城,不克。唐乾封二年,高麗襲新城,薛仁貴敗之,進擊高句麗兵於金山,遂拔其南蘇、木底、倉巖諸城。尋置木底州於此,後廢。倉巖本高麗二城名,唐置倉巖州,亦在衛境。

9) 목저성 금주위 동쪽에 있음
10) 모용씨가 말한 “북쪽 길은 평활, 남쪽 길은 좁고 험준”에서 이곳이 그 고구려의 남쪽 길

廣寧衛司西四百二十里。西至山海關五百八十里,西南至廣寧中屯衛百八十里,東南至海州衛二百四十里,南至海百三十里。

秦、漢遼東郡地。晉因之,後沒於高麗。唐復取其地,尋沒於勃海,為顯德府地。遼置顯州奉先軍。金改為廣寧府,亦曰鎮寧軍,初屬東京路,尋屬北京路。元亦曰廣寧府。至元十五年,改為廣寧路。明洪武二十三年,改置衛。今為廣寧縣,屬錦州府。

11) 광녕위 요양 서쪽 420리
12) 해주위(비사성) 광녕위 동남쪽 240리
13) 바다 광녕위 남쪽 130리
14) 광녕위는 진ㆍ한 때 요동군 땅
15) 진(晉)나라 때 지키기 어렵다가 고구려 땅이 됨
16) 당나라가 되찾았다가 다시 발해 땅(현덕부)이 됨
17) 요 현주 봉선군, 금 광녕부/진녕군, 원 광녕부/광녕로, 명 광녕위
18) 지금(명말청초) 광녕현으로 금주(錦州)에 속함

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1) 고국원왕 12년(서기 342)

十二年 春二月 修葺丸都城 又築國內城 秋八月 移居丸都城 冬十月 燕王皝遷都龍城 立威將軍翰請 先取高句麗 後滅宇文 然後中原可圖 高句麗有二道 其北道平闊 南道險狹 衆欲從北道 翰曰 虜以常情料之 必謂大軍從北道 當重北而輕南 王宜帥銳兵 從南道擊之 出其不意 丸都不足取也 別遣偏師 出北道 縱有蹉跌 其腹心已潰 四支無能爲也 皝從之

연나라 왕 모용황이 용성(龍城)으로 수도를 옮겼다. 입위장군(立威將軍) 모용한이 모용황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다.
“먼저 고구려를 빼앗은 후, 우문(宇文)씨를 멸망시킨 후에야 중원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에는 두 길이 있었다.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으며, 남쪽 길은 험하고 좁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항상 북쪽 길을 선택하였다. 모용한이 말했다.

“적국은 일반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우리 대군이 반드시 북쪽 길로 올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따라서 북쪽 길을 중요시하고 남쪽 길을 가벼이 여길 것입니다. 왕께서 마땅히 정예부대를 이끌고 남쪽 길을 택하여 기습 공격을 하면, 환도성은 공격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별도로 소부대를 북쪽 길로 보내면 다소 차질이 있더라도 그들의 심장부가 이미 무너졌으므로, 그들은 전의를 상실할 것입니다.”
모용황은 모용한의 말을 따랐다.

2) 고국원왕 15년(서기 345)

十五年 冬十月 燕王皝使慕容恪來攻 拔南蘇 置戍而還

연나라 왕 모용황이 모용각(慕容恪)에게 우리나라를 침공케 하여 남소(南蘇)를 무너뜨린 후 수비군을 남겨두고 돌아갔다.

3) 광개토대왕 9년(서기 400)

二月 燕王盛 以我王禮慢 自將兵三萬襲之 以驃騎大將軍慕容熙 爲前鋒 拔新城南蘇二城 拓地七百餘里 徙五千餘戶而還

2월, 연나라 왕 모용성(慕容盛)이 우리 임금의 예절이 오만하다는 이유로 직접 병사 3만을 거느리고 공격해왔다. 그들은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모용희(慕容熙)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新城)과 남소(南蘇)의 두 성을 빼앗고, 7백여 리의 땅을 점령하여 그들의 백성 5천여 호를 이주시켜 놓고 돌아갔다.


4) 보장왕 3년(서기 644년)

以刑部尙書張亮 爲平壤道行軍大摠管 帥江淮嶺硤兵四萬 長安洛陽募士三千 戰艦五百艘 自東萊州泛海 趣平壤

황제는 형부상서(刑部尙書)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강(江)ㆍ회(淮)ㆍ영(嶺)ㆍ협(硤)의 병사 4만 명과 장안과 낙양에서 모집한 군사 3천 명 및 전함 5백 척을 거느리고 동래주(東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진군하도록 계획하였다.

5) 보장왕 4년(서기 645년)

張亮帥舟師 自東萊度海 襲卑沙城 城四面懸絶 惟西門可上 程名振引兵夜至 副摠管王大度先登
五月 城陷 男女八千口沒焉

장량은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로부터 바다를 지나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하였다. 성은 사면이 절벽으로 되어 있는데, 오로지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 이때 정명진(程名振)이 병사를 이끌고 밤에 도착하였는데 부총관 왕대도(王大度)가 먼저 성에 올랐다. 5월, 성이 함락되어 8천 명의 남녀가 죽었다.

對曰 建安在南 安市在北 吾軍糧皆在遼東 今踰安市 而攻建安 若麗人斷吾糧道 將若之何 不如先攻安市 安市下 則鼓行而取建安耳

이세적이 대답하였다.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는데, 우리의 군량은 전부 요동에 있습니다. 이제 안시성을 지나서 건안성을 공격하다가 만약 고구려인들이 우리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면 어찌 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안시성만 함락되면 당당하게 북을 울리며 행군하여 건안성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高延壽高惠眞請於帝曰 奴旣委身大國 不敢不獻其誠 欲天子早成大功 奴得與妻子相見 安市人顧惜其家 人自爲戰 未易猝拔 今 奴以高句麗十餘萬衆 望旗沮潰 國人膽破 烏骨城耨薩老耄 不能堅守 移兵臨之 朝至夕克 其餘當道小城 必望風奔潰 然後收其資糧 鼓行而前 平壤必不守矣

고연수와 고혜진 등이 황제에게 말했다.
“저희들이 이미 대국에 몸을 맡겼으니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빨리 큰 공을 이루어 우리가 처자와 만나게 하여 주기를 원합니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의 가족들을 생각하여 자진하여 싸우고 있기 때문에 빨리 빼앗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고구려의 10만여 명의 병력을 가지고도 황제의 깃발을 보는 것만으로 사기가 꺾여 허물어졌으며, 백성들의 간담이 서늘하였습니다. 오골성(烏骨城)의 욕살은 늙어서 수비가 견고할 수 없을 것이니, 군사를 옮겨 그곳을 공격한다면 아침에 도착하면 저녁에는 승리할 것이요, 그밖의 길에서 맞닥뜨리게 될 작은 성들은 위풍만 보고도 반드시 허물어질 것입니다. 이후에 그곳의 자재와 군량을 거두어 북을 울리며 전진하면 그들은 틀림없이 평양을 지켜내지 못할 것입니다.”

群臣亦言 張亮兵在沙城 召之 信宿可至 乘高句麗忷懼 倂力拔烏骨城 度鴨淥水 直取平壤 在此擧矣

여러 신하들이 또 말하기를 “장량의 병사가 사성(沙城)에 있으니, 그를 부르면 이틀이면 올 수 있습니다. 고구려가 두려워하고 있는 틈을 타 힘을 합하여 오골성을 빼앗고, 압록강을 건너 곧바로 평양을 빼앗는 것이 이번 일에 달렸습니다.”라고 하였다.

帝將從之 獨長孫無忌以爲天子親征 異於諸將 不可乘危徼幸 今建安新城之虜衆 猶十萬 若向烏骨 皆躡吾後 不如先破安市 取建安 然後長驅而進 此萬全之策也 帝乃止

황제가 이 말을 따르려 하자 장손무기가 홀로 나서서 “천자의 원정은 보통 장수들의 정벌과는 다릅니다. 따라서 모험을 하면서 요행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의 무리가 아직도 10만이나 되는데, 우리가 만약 오골성으로 간다면 고구려가 반드시 우리의 뒤를 추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안시성을 점령하고 건안성을 취한 뒤에 군사를 먼 곳으로 진군시키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이 만전의 계책입니다.”라 하니, 황제는 곧 이전의 계획을 중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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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7-12-17 15:47
   
대릉하 동쪽은 5세기 이후(광개토대왕의 후연정벌 이후) 고구려 땅
따라서 수나라 유성이 현 조양일 수가 없음
현 조양이 연나라 화룡성일 수가 없음
대릉하 동쪽은 발해 땅이었음
감방친구 17-12-17 15:50
   
요동성ㅡ요양 북쪽 70~100 리
비사성ㅡ요양 서남쪽 120리
개모성ㅡ요양 서남쪽 240리
안시성은 개모성 동북쪽 70리, 요양 서남쪽 170여 리
오골성은 안시성 동남쪽, 바다와 가까움
오골성은 안시성에서 압록강과 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음
건안성ㅡ개모성 동남쪽, 요동성 서남쪽 300리, 가탐 안동도호부 서쪽 300 리
평곽성ㅡ개모성 남쪽

남소성은 요양 남쪽 600리, 바다 북쪽 120리
신성은 남소성 서쪽
목저성은 남소성 동쪽

요수ㅡ요양 서쪽 160리, 광녕위 동쪽 200리
요수는 현 요하

광녕위는 요양 서쪽 420리, 비사성 북서쪽 240리, 남소성 서북쪽 720리

광녕위는 현 금주(요하 서쪽, 조양 남쪽)시
남소성(금주)은 현 요동반도 진저우(金州)만
감방친구 17-12-17 15:52
   
     
감방친구 17-12-17 17:02
   
금주는 비단 금을 쓰는 금주와 쇠 금을 쓰는 금주가 있어서 둘 다 쭝궈 말로 진저우인데

비단 금 진저우는 지금의 대릉하 조양시 동남쪽의 금주시로 옛 광녕위(원ㆍ명 시대)이며

쇠 금 진저우는 현 요동남단의 진저우만으로 옛 금주위이면서 남소성, 목저성, 신성 등이 있던 곳으로 모용선비가 고국원왕 때 고구려를 침략한 남쪽 길이다
감방친구 17-12-17 16:41
   
가탐도리기

登州東北海行 過 大謝島 龜歆島 淤島 烏湖島 三百里, 北渡烏湖海 至馬石山東之都里鎮 二百里. 東傍海壖. 過 青泥浦 桃花浦 杏花浦 石人汪 橐駝灣 烏骨江 八百里, 乃南傍海壖. 過 烏牧島 貝江口 椒島 得 新羅西北之長口鎮. 又, 過 秦王石橋 麻田島 古寺島 得物島 千里 至 鴨淥江

이것은 두 가지 코스를 말하고 있다
일단 등주ㅡ도리진ㅡ오골강

오골강 남접해연한 자리에서
1) 신라새까지 가는 코스
烏牧島 貝江口 椒島 得 新羅西北之長口鎮

2) 압록강 당은포구까지 가는 코스
秦王石橋 麻田島 古寺島 得物島 千里 至 鴨淥江

그런데
 
秦王石橋라는 지명을 보자
진왕은 당 태종을 높여 이르는 별칭이다

위의 다ㅡ5)에서 고연수, 고혜진의 발언 내용에 그 사례가 잘 나와 있다

따라서 진왕석교는 당 태종과 관련이 있는 것이고 당 태종이 요택을 건널 때에 만든 다리의 유허를 이르는 명칭일 가능성이 높다

勃錯水在衛西北。唐貞觀十九年,親征高麗,攻安市城,不克,引還。至遼東,渡遼水,遼澤泥淖,車馬不通,命長孫無忌剪草填道。至蒲溝,駐馬督填道,諸軍渡勃錯水,暴風雪,士卒沾濕多死者。胡氏曰:蒲溝、勃錯水,皆在遼澤中也。

즉 발착수와 관계된 것으로 요하의 바다에 이르는 여러 물길 가운데에 한 곳에 있다고 보인다
Attender 17-12-17 16:42
   
안녕하세요 감방친구님?
저번에 숨겨진 상고사를 쓴 블로거를 소개시켜 드린 한 회원인데요,
제가 드린 자료는 많이 도움이....된 편인가요?

저는 숨겨진 상고사 블로거가 소개시켜준 고(구)려 서부 지도를 감방친구님의 설명에 맞춰 보았더니 더욱더 지도의 시각화가 용이하였습니다.
아랫 글에서 감방친구님 께서 말씀하셨듯이 요동성과 건안성에 대한 위치 비정도 숨겨진 상고사 블로거가 남긴 지도에 대입해 보니 거의 맞아떨어집니다(요동성의 서남쪽에 건안성이 있으며 반대로 뒤집어 생각해보면 건안성의 동북쪽에 요동성이 자리잡혀져 있다 + 신성의 동쪽에 남소성이 있다 = 남소성의 서쪽에 신성이 있다=허면,남소성은 오늘날의 대릉하=고대 비류수 의 동쪽 넘어서 있었던 것일까요? 숨겨진 상고사 블로거님의 지도에는 남소성과 오골성=봉황성=북평양성?의 위치는 찍혀있지 않아서;;;;;)

제가 자료 인용을 잘 하여 감방친구님의 연구강의 결과를 잘 이해하면서 따라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허허;;;;;
     
감방친구 17-12-17 16:52
   
그 분과 저는 견해가 달라요
저는 지금의 대릉하, 혹은 요하를 고수, 고당 때의 요하로 보고 있는데
그 분은 지금의 난하를 요하로 보고 있어요

그래서
건안성, 비사성 등 고구려 성의 위치 비정이 저와 다릅니다
저는 요하가 동진/북위 시절에는 지금의 대릉하, 요하가 됐다고 보고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조하, 영정하, 난하 등으로 점차 동쪽으로 이동했다고 보고요

http://m.photoviewer.naver.com/image?source=https%3A%2F%2Fmblogthumb-phinf.pstatic.net%2F20160620_87%2Fil472_1466410002345Tn9bA_JPEG%2F%25EC%259A%2594%25EC%2588%2598.jpg%3Ftype%3Dw800&nclicks=null#historyBack
          
Attender 17-12-17 16:55
   
그렇군요... 어쨋든 답변 덧글 감사합니다 ^^;;;;;;;;;;
               
감방친구 17-12-17 16:58
   
제가 상상하는 게 아니라
삼국사기, 신당서, 요사, 원사, 명사, 금사, 독서방여기요를 교차 분석해서 낸 결론입니다
                    
Attender 17-12-17 19:25
   
저어....감방친구님 머리나쁜 자칭 역사학도(?)가 더 질문하려 합니다 너무 나무라지 말아주세요 ;;;((
그럼 감방친구님께서 연구하셔서 얻은 결론으로는 수 당 시대의 고구려 서부전선 요하는 저번에도 언급하셨지만 대릉하일 확률이 가장 높다는게 감방친구님의 현재 결론이라는 것 이군요,

지금의 요하는 압록강, 혹은 안민강=중세고려, 푸를 녹 자와 맑을 록 자 두 강이있다고 어디 역사 기사를 읽은 바 있습니다, 이라고 하더라구요 이 역사서의 기사를 증거로 저도 교차검증을 충분히 하신 감방친구님 의 결론이 더 과학적이고 신뢰할 수 있다는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저....이정도면 저 감방친구님의 자료내용을 잘 이해한거 맞나요.......?

다만 바라는게 있다면 역사연구로 바쁘신것은 잘 알지만 가생이 동아게 에서 활동하시는 다른 회원님들이 잘 이해하기 편하게 지도에 성이나 그런것을 더 표시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보기에 감방친구님의 연구는 섬세하고 깊지만 문제는 타 회원분들은 잘 따라가기 어려워들 하시는것 같아서요......;;;;;;
     
감방친구 17-12-17 16:56
   
저는 비사성과 안시성을 지금의 잉커우, 즉 영구시 근방으로 보고 있고요

신성ㅡ남소ㅡ목저성을 지금의 진저우만(대련 여순 북서쪽의 만) 일대로 보고 있어요
감방친구 17-12-17 17:21
   
고수ㆍ고당 전쟁 당시의 평양의 위치는
비사성ㅡ안시성 라인1)을 동서로 긋고
요양에서 남소성이 있던 진저우만을 남북으로2) 그어 만나는 교차점에서 그 동남 방향일 것이라는 가정이 선다

또 환인ㅡ영구시ㅡ진저우만을 꼭지점으로 하는 거대 삼각형의 안쪽에서 찾아야 한다는 가정이 선다

이 거대 삼각형 안에 압록강과 평양이 다 들어있을 것이고 벗어난다 해도 100리 안쪽일 것이다
도배시러 18-04-13 04:16
   
당시 해주衛 와 개주衛 의 남쪽은 해수면 아래에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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