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그리고 도渡 에서 엄호广 자 부분이 살짝 달라 보입니다. 다른 것들은 윗부분이 네모반듯하게 있지만, 도해파의 도渡는 윗부분이 조금 올라가 있군요. 파破의 돌석石 자도 다른 것과 비교하면 삐뚤어 보입니다. 특히 돌석石의 두번째 획에 곡선 끼가 있네요. 다른 건 직선에 가까운데...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 상고사'에서 6편 3장 '광대토태왕의 북진정책과 선비 정복' 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문은 당 태종이 직접 쓴 [진서(晉書)]와는 달리, 곧 태왕의 후손 제왕이 설립한 것인데, 그 중에 선비 정벌에 대한 문구(文句)가 기재되지 않았음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일찍이 호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에 이르러 여관에서 영자평(英子平)이라는 만주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필담으로 한 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비가 오랫동안 풀 더미 속에 묻혔 있다가 최근에 영희(榮禧: 이 또한 만주인이다)가 이를 발견했는데 그 비문 중에 고구려가 토지를 쳐서 빼앗은 사실을 기록한 자구(子句)는 모두 칼이나 도끼로 쪼아내어 인식할만한 자구가 없어진 것이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탁본해서 팔았는데, 흔히 자구가 깎여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서 도리어 인식할 수 없는 자구가 생겨나서, 진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한 사실이 덧붙여진 듯한 감(감) 느낌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현재 이 비문에 정작 태왕의 선비 정복의 대 전공(戰功)이 없는 것은 그것이 삭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삭제되고 위조된 글자들이 발제글을 포함하여 (중요한 단어지만) 몇 단어 뿐일까 생각합니다.
또한 당시 호태왕비가 풀 숲에 묻혀 있었다고 했고, 비석의 받침대도 없이 비석만 묻혀 있었다고 했는데 과연 그 비석이 원래 그 자리에 있었을까도 의심할 만합니다.
우리의 땅도 잃어버리니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기가 참 요원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