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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1-11 18:05
[기타] 조선과 명ㆍ후금(後金)과의 관계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810  

https://blog.naver.com/liangfl1028/220498526537

명이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요동의 서부에는 명의 요동도사가 설치되어 있었고,
요동의 동부에는 여진 제부(諸部)가 분포되어 있었다.
이 시기의 여진은 흔히 그 거주 지역에 따라 건주(建州), 해서(海西), 야인(野人-東海) 등 3부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중 경제력이 가장 뛰어난 것은 건주여진이었다.

명은 먼저 영락(永樂) 원년(1403년)에 건주위군민지휘사사(建州衛軍民指揮使司)를 창설하고 화아아부(火兒阿部)의 수령인 아합출(阿哈出)을 지휘사로 책봉하고 그 부하들에게도 천호(千戶), 만호(萬戶) 등의 관직을 주었다.

이에 반해 오도리부(吾都里部-斡朶里部) 추장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는 무리를 이끌고 혼춘(琿春) 방면에서 오음회(吾音會-지금의 會寧) 지방으로 이주하여 조선에 복속, 태종(太宗) 4년(1404년)에 입조하여 상호군(上護軍)에 책봉되었다.

조선과 더불어 요동을 다투던 명은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가 조선의 번호(藩胡)로 존재하는 것을 방치할 수 없어 그를 세 차례나 초유(超諭)하여 마침내 영락 4년(1406년)에 건주좌위(建州左衛)를 설치하고 맹가첩목아를 그 도지휘사로 임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처럼 조명 양국의 경쟁대상이 된 건주여진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요동 각지를 전전하였다. 이후 건주좌위도독(建州左衛都督) 동산(董山)은 건주위도독(建州衛都督) 이만주(李滿住)의 아들 고납합(古納哈)과 함께 세조(世祖) 4년(1458년)에 조선에 입조하여 정헌대부중추원사(正憲大夫中樞院事)란 관직을 받음으로써 명 측에 큰 충격을 주었다.

조선과 여진의 ‘잠통(潛通)’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명조는 성화(成化) 3년(1467년)에 건주좌위를 공벌(攻伐)하여 동산을 처형하고, 조선의 원군과 함께 건주위도 공격하여 이만주 부자를 참살하였다.

이리하여 건주여진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쇠퇴의 길을 밟으면서 요동의 한 귀퉁이에서 잔명(殘命)을 겨우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만력연간(萬曆年間-1573~1619)에 건주좌위에서 누르하치(奴爾哈赤)이라는 영웅이 나와 요동을 석권하게 되었다.

통일된 여진국가의 출현은 누르하치가 1583년에 명으로부터 건주위지휘사로 책봉 받고 1591년에는 도독(都督)으로 승급됨과 동시에 용호장군(龍虎將軍)으로 책봉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의 후손임을 자처한 누르하치는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하여 건주좌위를 다시 일으켜 건주제위(建州諸衛)를 제어하면서 통혼정책(通婚政策)과 무력토벌로써 요동의 여진 제부를 통일하였다.

누르하치에 의해 통합된 건주여진은 이미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조선에 대규모 구원병을 파견하겠다고 자청할 정도로 강성해졌다.

누르하치가 이처럼 신속하게 요동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천부적인 정치적 역량뿐만 아니라 명과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주변을 돌볼 틈이 없었던 국제적 환경도 크게 작용하였다.


조선은 누르하치의 파병에 대해 국운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후환을 두려워하여 제의를 거부하였다.

명의 직첩(職牒)을 받은 누르하치는 조선에 대해서도 상경 수직(受職)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은 이를 거절하였다.

또 누르하치의 ‘문서상통(文書相通)’의 요청도 명조의 간섭을 불러온다고 하여 역시 거부하였다.

누르하치는 조선의 울타리 노릇을 하던 여진 번호와 향화여진(向化女眞)까지 자기 휘하에 집거(集居)하고 조선 등지에서 납치해 온 장인(匠人)들을 이용하여 금은철광과 제철사업을 추진하여 강력한 경제적 기반을 갖추었다.

이에 반해 번호와 향화여진을 상실한 조선은 6진체제(六鎭體制)의 와해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누르하치는 1616년(萬曆 44년)에 마침내 금국(金國)을 세우고 혁도아랍(赫圖阿拉)을 수도로 정하고 흥경(興京)이라 불렀다.

역사에서 후금(後金)이라 부르는 이 새로운 여진국가는 1618년에 7대한(七大恨)을 고함으로써 명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여 명과의 전통적 책봉조공관계를 청산하고 명의 요동도사를 공격하였다.

이에 명은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고 대규모 군대를 요동으로 이동시켰다.

당시 조선국왕 광해군(光海君)은 이미 임진왜란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또다시 국가를 국제적 전란에 빠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 매우 현실적인 외교정책을 선택하였다.

그는 명의 원병 요청에 응하여 1만여 군대를 파견하면서 그 사령관 강홍립(姜弘立)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도록 비밀리에 지시하였다.

이에 강홍립은 명군이 불리하게 되자 후금에 항복하여 조선에 대한 후금의 보복을 막을 수 있었다.

결국 조명 연합군은 살이호전투(薩爾滸戰鬪)에서 여진군에 대패하여 요동 전체가 여진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를 계기로 급속히 국력이 약화된 명은 의종(毅宗) 숭정(崇禎) 17년(1644년)에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농민군에 패배하여 멸망당하였다.

이어 여진은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중국으로 진입하여 힘의 공백 상태에 놓인 중국을 점유하였다.


이처럼 조명시대의 말기에 조명 양국은 일본과 여진으로부터 각각 군사적 위협을 받았으며 조명 양국은 서로 원군을 보내어 상대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명이 조선을 도울 때는 일본군이 궁극적으로 중국을 목표로 조선침공을 하였기 때문에 명의 원병은 보다 적극적이었지만 조선은 여진이 조선을 침략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어서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다.

결국 한중관계의 실질적 내용은 다른 국제관계와 마찬가지로 자국의 이익에 따라 결정되었다.



https://blog.naver.com/liangfl1028/220498526537




투화여진인(投 化 女 眞 人)

 

    고려에 귀화(歸化)한 여진인을 투화인 (投化人 : 投 化 女 眞 人)이라고 한다.

 

   고려 태조는 초기부터 개척에 힘을 기울여 여진과의 충돌이 잦았으며 따라서 여진인의 귀화가 일찍

 

   부터 나타나게 되었다.

 

   태조의  즉위와 더불어  윤선(尹瑄)이 무리를 이끌고   골암성 으로써  내부한   이후 빈번한  충돌과

 

   교섭으로 여진인의 귀화 내부의 수가 상당히 늘었으며 , 이들중에는 조공까지 바친일도 있었다.

 

   고려에서는 이와같은 여진인에게 시종 , 은위병용(恩 委 幷 用)의 정책을 취하여 ,향(向)하는자에게

 

    는 회유책(懷 委 策)으로써 어루만지고 반(叛)하는 자는 무력으로써 응징하였다.

 

    이것은 여진인에 대한 고려의 전통적인 정책으로써,   당시에 있어서  투화인과  향화인의  동데와

 

    그들에 대한 고려의 시책은 아래와 같다.

 

    [투화인]  투화인을 고려에서는 내지(內地)에  분산적으로  주거(住居)케  하고 민호(民戶)에 편입

 

    시키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변방의  빈터를 주어 그곳에 살게 하기도 하고 , 그들의  원에  의하여

 

    변방의 방위군(防 衛 軍)에 편입시키기도 하였으며 , 또  특수한  기술자는 민호에 편입시켜  공인

 

    (工 人)으로 부리기도 하였다.

 

    이런한 귀화인 중에는 군공(軍功)을 세워 명장(名將)으로서 이름을 날려 수사공상서우복야(守司

 

    公尙書右僕야)의 관직까지 올랐던 고열(高烈)이란 자(者)도 있었다.

 

    [향화인] 향화인은 주로 부족의 추장 , 부락의 두목들로서 이들은 초기부터 서로 뒤를 이어 자주

 

    고려에 입공(入貢)하여왔다.

 

     이런한 여진의 향화추장에 대하여는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회화장군.귀덕대장군(歸德大將軍)

 

     귀덕장군 . 봉국대장군(奉國大將軍). 봉국장군 . 영새대장군(寧塞大將軍) . 영새장군 .  수원장군

 

     (綏遠將軍). 회원장군(懷遠將軍) .대장군 .장군 .대상(大相). 대광(大匡) .원보(元甫) .정보(正甫)

 

     대승(大丞) .정조(正朝). 원윤(元尹).중윤(中尹). 좌윤(左尹). 보윤(甫尹).대상(大常) .지인(持印)

 

     등의 관작을 그들의 지위와 세력을 고려하여 신분에 알맞도록 수여 하였다.

 

     또한 충실히 봉사하는 자에게는 관작의 급위를 올려주기도 하고 ,추상과 두목에게는 향직(鄕職)

 

     으로서 도령(都領)과 같은 칭호를 수여도 하고 이름도 고려식으로 고쳐주기도 하였다.

 

     이는 고려의 선진 문물을 얻어 가려는 물적요구(物的要求)와 정치적인 세력의 배경을 얻으려는

 

     데에 있었던 것 같다.

[출처] 투화여진인|작성자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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