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한국에서 좌파건 우파건 가리지 않고 민족주의 까는게 유행이지만, 원래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쪽은 좌파였습니다. (반면 우파는 원래 민족주의를 긍정했습니다.)
그래서 소련 초기의 좌파 공산주의자들은 "머지않아 민족의 개념은 완전히 소멸되어 박물관에나 들어갈 것이다!"라고 자신있게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소멸되어 박물관에나 들어간 쪽은 민족이 아니라 소련 공산주의 정권이었습니다. 오히려 소련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진 이후, 소련 각지의 소수민족들이 민족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나라들을 14개나 세워서 민족이란 개념이 사라지기는커녕, 펄펄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만 증명했을 뿐입니다.
21세기인 지금에 와서도 스코틀랜드, 카탈루냐, 쿠르드, 로힝야족들이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분리독립을 추진한다는 사실은 민족의 개념이 결코 허구가 아니고 또 없애야할 사악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만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원래 민족주의 부정하는 좌파야 그렇다쳐도, 왜 한국에서 자칭 우파라 칭하는 뉴라이트들은 민족주의를 부정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뉴라이트는 사실 제대로 된 우파가 아닙니다. 그들은 본래 1980년대에 활동했던 좌파 운동권이었습니다. 한 예로 박근혜 정부 시절 근무했던 청와대 모 행정관은 원래 1980년대 시절에 "코카콜라는 미제국주의의 음료이니 안 마신다!"라고 말할 정도로 강성 좌파였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말에 들어서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과 1991년 좌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자, 그들은 충격을 받고 자신들이 적대했던 반대편 진영인 우파로 투항했습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도 원래의 좌파물이 완전히 빠지지 않고 남아서 저렇게 민족주의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숭상하는 한국 우파쪽으로 넘어갔으니 당연히 새로운 진영의 이념에 따라서 그런 독재자들을 찬양하고 있죠.
그러니까 뉴라이트는 좌파와 우파의 가장 안 좋은 점만 빌려와서 만들어진 어설픈 혼종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한국 인터넷상에서 민족주의를 부정하면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같은 독재자들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된 좌파도 우파도 아닌 그냥 어설픈 얼치기들에 불과합니다. 추측컨대 아마 그 사람들은 한국의 진보 좌파 언론들을 보다가 어설프게 주화입마가 들어 극우파 흉내를 내고 있는 것 뿐입니다. 사실은 진짜 극우파처럼 민족주의를 전혀 긍정하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정말 웃기는 일은 '민족주의를 부정하면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같은 독재자들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좌파라면 치를 떨고 증오하면서도, 막상 그 좌파들이 만든 탈민족주의 이론은 아주 신주단지처럼 모신다는 사실이죠.
추가: 그렇다면 좌파나 뉴라이트가 아닌 한국의 기존 보수 우파들은 왜 탈민족주의를 폭넓게 받아들였을까요? 이는 1997년 IMF 구제 금융 사태로 인한 한국 사회의 변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IMF 사태 이전까지 한국 사회는 종신고용이 보장받고 남존여비 문화와 민족주의 정서가 굉장히 강했는데, 지금의 일본과 매우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IMF 사태로 인해 한국 사회는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우선 400만 명이나 되는 대량 실직 사태로 인해 한국인들의 민족적 자존감이 크게 훼손되었고, 그로 인해 "민족주의는 약하고 나쁘다. 세계화가 좋다!"라는 반작용 정서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IMF 사태 직후, 한국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미국을 견학하고 와서 문화적 충격을 받고 "우리도 미국처럼 다민족, 다문화 사회가 되어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라는 착각에 빠져 본격적인 다민족, 다문화 같은 '미국화 정책'을 밀어붙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한 미국화 정책의 일환으로 한국 사회는 지금까지 굳게 믿어왔던 민족주의 담론을 버리고 반대로 탈민족주의 담론을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미국화 정책은 결국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선 한국은 미국처럼 신대륙에 이민으로 시작된 나라가 아니라, 최소한 2천년의 동일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민족 공동체에 기반을 둔 나라인데, 이런 나라가 갑자기 미국처럼 다민족 다문화 국가로 변신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정부와 언론도 이런 속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나름대로 교묘한 술책을 쓰기는 했습니다. 그것은 한국인들에게 외국인에 대한 죄책감을 심어주어 "너희가 민족주의 정서 때문에 외국인들한테 나쁜 짓을 저지르니까, 나쁜 놈이 되고 싶지 않으면 민족주의 버리고 외국인들한테 무조건 양보해라!"는 식으로 강요하는 언론 플레이를 대대적으로 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2000년대 초반 한국 사회에서 가장 유행했던 담론은 '민족주의와 한국인은 나빠'라는 내용이었고, 그런 내용을 담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언론 플레이가 얼마나 철저했고 지독했는지, 2018년이 된 지금에 와서도 다문화 정책에 대한 비판은 일어나도 탈민족주의 담론에 대한 비판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인 특유의 모범생, 착한 아이 컴플렉스를 교묘하게 이용한 여론 주도층의 공작이 잘 먹혀 든 셈이죠.
다만 1990년대에 절대적인 정의로 비추어졌던 페미니즘이 2018년 현재에 와서는 메갈과 워마드 같은 극단적 페미 조직들의 폭거와 만행으로 인한 큰 반발을 사서 주춤거리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앞으로 20~30년 후가 되면 탈민족주의 담론에 대한 본격적인 반발과 비판 여론도 일어날 거라고 여깁니다. 언제나 자정 작용은 있기 마련입니다. 단지 그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