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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1-23 22:28
[기타] 환단고기-학교서 배우지 않은 북부여 이야기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829  


북부여의 건국

대단군의 통치권이 약화되고 부단군과 지방 군장들의 목소리가 커지던 고조선 말기에 한민족의 새 역사를 개창한 분이 바로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이다. 해모수는 요하 상류에 위치한 고조선의 제후국인 고리국 출신으로 BCE 239년 웅심산(지금의 길림성 서란)에서 기두하였다. 그 후 백악산 아사달을 점거하고, 당시 고열가 단군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던 오가五加 부족장들의 공화정을 철폐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해모수를 단군으로 추대함으로써, 북부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BCE 232).



‘북부여’는‘ 북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이다. 고조선의 제3왕조 시대인 대부여의 북녘 땅을 중심으로 나라를 열었기 때문에,‘ 대’자를‘ 북’자로 바꾸어 북부여라 한 것이다. 그것은 망해 가던 대부여의 정통을 계승하겠다는 해모수단군의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렇게 북부여가 고조선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을 때, 고조선의 양팔인 번조선과 막조선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고조선 개국 이래로 서방 진출의 교두보이자 외부 침략으로부터 민족을 수호하는 방파제 구실을 하던 번조선 땅은 이 무렵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을 피해 넘어온 한족 난민으로 넘쳐났다. 그 난민 중에 한 고조 유방의 죽마고우이자 연나라 왕이었던 노관의 부하 위만이란 자가 있었다. 위만은 한 고조의 숙청을 피하여 조선인으로 변장한 뒤 부하 1천 명과 함께 번조선의 준왕에게 투항하였다(BCE 195). 준왕은 그를 받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서쪽 변방인 상하운장을 지키는 장수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위만은 그곳에서 몰래 세력을 길러 이듬해에 왕검성을 쳐서 한순간에 준왕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BCE 194).『 삼국유사』와 현 역사학계는 위만이번조선을 탈취하여 세운 정권을 위만조선이라 부른다.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또 다른 조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민족의 서쪽 영토 한 모퉁이를 잠깐 강탈하여 지배한‘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북쪽에 북부여가 열리기 전부터 이미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땅이던 막조선에도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요서지역(번조선)에 살던 대부호 최숭이 백성과 함께 진귀한 보물을 싣고 발해 바다를 건너 막조선으로 넘어왔다. 최숭은 오가의 부족장들에게 거금의 재물을 주고 왕검성(지금의 평양)을 넘겨받아 낙랑국을 세웠다(BCE 195). 강력한 한나라의 출현으로 요서지역에 위기감이 팽배한데다 위만을 비롯한 수많은 한족이 망명하여 오자, 어수선한 정국을 피해 최숭이 한반도 지역으로 와서 나라를 세운 것이다.



이처럼, 북부여가 세워진 후 만주의 진조선은 북부여에 흡수되고, 한반도의 막조선에는 낙랑국이 들어서고, 요서의 번조선은 위만이 차지함으로써 고조선의 역사는 완전히 문을 닫게 되었다.





북쪽에는 북부여, 남쪽에는 남삼한

준왕이 망하고 위만정권이 들어선 사건은 한민족에게 또 다른 역사 개척의 계기가 되었다. 번조선 땅이 위만에게 강탈당하자 상장군 탁卓이 사람들을 이끌고 한강 이남으로 이주하여 새로이‘ 마한’을 세웠다(BCE 194). 옛 진조선과 막조선의 일부 백성들도 한강 아래로 남하하여 각기‘ 진한’과‘ 변한’을 세웠다. 마한은 호남의 익산을, 진한은 경북 경주를, 변한은 경남 김해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비록 불의한 위만정권 때문에 남하한 것이지만, 한강 이남에서 새로운 삼한시대를 연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 전후삼한설前後三韓說’을 주창하여 한반도에 형성된 삼한을‘ 후삼한(남삼한)’이라 부르면서, 고조선 시대의‘ 전삼한(북삼한)’과 구별하였다. 이 남삼한이 바로 강단사학계가 말하는 삼한이다. 고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읽는 핵심 코드인 삼한관경제를 인정하지 않는 한, 어떻게 두 가지 삼한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만주대륙의 북삼한이 부정되고 한반도의 남삼한만 거론됨으로써 우리 역사는 소한사관에 찌들게 되었다. 작은 삼한의 시야로 역사를 보는 것을‘ 소한小韓사관’이라 한다. 하지만 한민족사는 대륙을 누비던 큰 삼한의 관점‘, 대한大韓사관’으로 보아야 그 본연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북부여의 구국 영웅, 고두막한

북부여는 4세 단군에 이르러 역사적인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BCE 109년, 한 무제가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이 다스리던 위만조선으로 쳐들어왔다. 한나라는 초기에 연신 패하였으나 이간책으로 위만정권 지도층을 분열시켜 결국 우거를 죽이고 왕검성을 점령하였다(BCE 108). 이때 한 무제는 새로운 점령지에‘ 한나라의 군현[漢四郡]’을 설치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우거 제거에 공을 세운 한민족의 강한 저항에 부딪쳐 고조선 유민들의 자치를 인정하는 데 그쳐야 했다.



위만정권을 무너뜨린 한 무제는 요동을 넘어 북부여까지 침공하였다. 그런데 당시 북부여의 4세 고우루단군은 워낙 심성이 유약하여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도중에 병사하고 말았다. 이때 이를 지켜보던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였다. 그러고는 졸본卒本에서 나라를 열어(BCE 108) 졸본부여라 하고, 스스로 동명왕東明王이라 칭하였다. 고조선을 계승한 북부여가 자칫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한민족 상고사 최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동명왕은 구국영웅으로 추앙받아 북부여의 5세 고두막 단군으로 즉위하였다(BCE 86).



원래 북부여의 4세 단군을 계승하여 잠시 보위에 있던 해부루는 동쪽의 차릉(가섭원)으로 이주하여 동부여를 세웠다. 이로써 부여는 동서로 나뉘게 되고 후기 북부여 시대가 시작되었다. 고두막한의 등장으로 전기 북부여 시대가 끝나고 새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북부여는 고두막 단군의 다음 대에 이르러 182년(BCE 239~BCE 58)의 짧은 역사를 끝내게 된다.



‘ 북부여가 고조선을 계승하였다’는 사실은 한민족 고대사의 국통 맥을 바로잡는 핵심 요체이다. 그런데 한국의 강단사학계는 위만정권을 고조선의 계승자로 앉혔을(BCE 194) 뿐 아니라,‘ 위만정권이 한나라에게 망한(BCE 108) 후 고조선이 있던 그 자리에 한나라가 네 개의 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라고 가르친다. 북부여는 온데간데없고, 중국의 식민지인 위만조선과 한사군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강단사학자들은 또한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근거로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를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아버지로 설정하였다.‘ 해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에 고주몽이 태어나 고구려를 열었다’라고 하여, 해모수와 주몽을 거의 동시대 인물로 만들었다. 180여 년에 걸친 북부여 6대 단군의 역사를 완전히 증발시켜 버린 것이다.



왜 북부여사는 이렇게 난도질되었는가? 그것은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한 무제가 동명왕 고두막한에게 대패한 치욕을 숨기고자 의도적으로 북부여사를 누락시킨 데서 비롯된다. 그 후 중국의 모든 사서에서 북부여 역사가 사라졌다. 고려와 조선의 사대주의 사서들이 이것을 그대로 모방하고, 일제 식민사학자와 국내 강단사학자들이 다시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였다.





서방으로 진출한 부여족

강단 사학계는 부여 역사를 외면하지만, 부여사는 단재 신채호가 한국 민족을 부여족이라고 부를 정도로 한민족사의 골간을 이룬다.



몇 안 되는 부여사 연구가 중에 신용하 교수는, 부여가 최소한 BCE 5세기부터 CE 5세기까지 약 천여 년 동안 만주 일대에 존재하였으며 CE 4세기 전반까지 동북아의 최선진국이었다고 말한다. CE 5세기라면『 환단고기』가 전하는, 북부여에서 분파된 마지막 부여인 연나부부여(서부여)가 멸망한 때(494)와 일치한다.



신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4세기 말경 부여족의 일파가 중앙아시아의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지방으로 이주하였고, 그 후 5∼7세기 초까지 돈강 유역과 북캅카스 지역으로 계속 이주하였다. 7세기의 서양사에서부터 불가Bulghar족의 역사가 나오는데, 이 불가족이 곧 부여족이다.‘ 불가’란‘ 부여(불)의 가加’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635년 불가족은 족장 쿠브라트Kubrat의 지도력 아래‘ 대大 불가리아(Magna Bulgaria)’를 건국하였다. 하지만 몇 년 후 그가 사망하였고(642), 그의 다섯 아들은 격심한 권력싸움으로 불가리아를 해체시켰다. 그 중 세 아들이 이끈 불가족은 결국 주변 민족에 복속되고 말았지만, 둘째와 셋째 아들은 독립국가를 세웠다.



둘째 아들 코트라그Kotrag가 세운 나라,‘ 고추불가Kotchou-Bulghar국’은 14세기까지 번성하였고, 현재는 타타르 자치공화국(1920년 소비에트연방의 자치 공화국으로 성립됨)으로 존재한다. 타타르인의 언어 구조는 한국어와 동일하고, 생김새도 동양인의 모습이다.



셋째 아들 아스파르흐Asparukh가 이끈 불가족은 오늘날의 발칸 반도로 남하하였다. 당시 비잔틴 제국의 로마군 장교의 기록에 의하면, 불가족은 로마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하늘을 향해 조상신 단군Tangun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이것은 환단 시대 이래로 동방 한민족이 일관되게 거행해 오던 천제 풍속을 서방으로 이주한 부여족도 그대로 따랐음을 보여준다.



이 불가족은 마침내 로마군을 물리치고 불가리아 제1제국(681∼1018)을 건국하였다. 불가족은 귀족 계층이 되어 보야Boyar(부여의 유사 발음인 부유의 모음조화에 따른 변음)라 불렸고 슬라브족을 농민으로 삼아 다스렸다. 황제 크룸Krum에 이르러 주변의 로마군을 대부분 추방하고 수도를 옮겨 소비(또는 사비, 지금의 소피아)라 불렀다. 황제는 소비의 산에 올라 단군에게 제사를 올리고, 그 산 이름을 발칸산으로 정하였다. 신 교수는‘ 발칸산’을‘ 밝안산’‘, 밝산’‘, 백산白山’등의 우리말 지명과 동일한 것으로 보며, 한민족은 고대로부터 백산(밝은 산)에 올라 제천 의식을 행하였다고 말한다. 지금도 크룸 황제의 제천 유적이 일부 남아 있다는 이 발칸산에서 발칸 반도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크룸 황제가 병사한(814) 후 불가리아는 국력이 점점 약화되었다. 12세기에 불가리아 제2제국(1186∼1330)을 세웠지만 그 지배층은 제1제국 때와는 많이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다. 소수 불가족과 다수 슬라브족 사이의 혼혈로 슬라브족의 생김새를 많이 띠게 되었다.



그렇지만 발칸 산, 발칸 반도, 소비 등의 지명 속에 부여의 자취가 남아 있고, 불가리아 말의 문법 구조와 풍습(정월 달집놀이, 굿거리 등)에서도 한민족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불가리아인은 백인 세계에서 유일하게 갓난아기의 엉덩이 반점, 일명 몽고반점이 나오는 민족이다. 이 모든 것은,‘ 불가리아는 동방에서 온 부여족이 세운 국가’라는 신 교수의 주장처럼, 불가리아의 원 조상이 바로 부여족이었음을 가리키고 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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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러브 18-01-23 22:38
   
단재 신채호 선생은 천부경이나 삼일신고 같은 대종교의 서적들을 위서라고 비판한 경력이 있는 인물이지요. ( 물론 후기에 아나키스트로 탈바꿈한 뒤에 ... )

환단고기도 아마 그 당시에 있었다면... 같이 비판 당했을 겁니다.
     
부르르르 18-01-24 01:54
   
그넘의 아나키스트.... ㅋㅋ
칼리S 18-01-23 23:14
   
드뎌 본색 나오네 ㅋㅋㅋ.
     
꼬마러브 18-01-23 23:19
   
식빠 = 환빠
     
위구르 18-01-30 16:52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큰형 18-01-23 23:27
   
환단고기가 참이고 거짓인가를 떠나 위서, 환빠 운운하며 무조건 배척 매도하면서도
거짓으로 왜곡된 중국의 25사는 왜 신주단지처럼 모시며 맹신하는지 역사학자들, 대학생들 도대체가 이해가 안감

현 중국공산당이 편찬하고 있는 청사
그게 바로 우리역사를 강탈해가는 동북공정인데
그 동북공정도 맹신할건가?
     
도배시러 18-01-23 23:58
   
중국 25사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사학자가 존재함 ? 거의 없는것으로 알고 있음...
     
큰형 18-01-24 00:06
   
역사 논쟁을 할때 어떤 근거를 댄다는것이 꼭 중국의 역사서를 인용
          
도배시러 18-01-24 00:09
   
유리한것만 인용하구요. 일제의 기존 통설에  불리한거는 인용 안함.
     
신수무량 18-01-24 09:59
   
또하나 있지요...쩍바리의 위서 일본서기도 잘 인용하지요...
비좀와라 18-01-23 23:45
   
몽골고원의 패자로 있던 선비족이 중원으로 남하 하면서 몽골고원의 패자가 없어지고 각자의 부족들이 쟁투를 벌입니다. 이 때 몽골고원에 있던 철륵이나 정령 같은 부족들이 선비족의 부용족으로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대장장이의 업을 가지고 살았고 이들이 나중에 투르크족이 되는 것이라 하죠.

몽골고원의 쟁패 끝에 유연(아바르)족이 주인이 되었고 이들은 투르크족을 핍박 하여서 투르크족은 본래의 자신들의 보호자 이면서 주인인 선비족에게 도움을 요청하나 선비족 역시 아바르의 압박을 받고 있던 상태라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이때의 이야기가 뮬란 이야기로 각색되어 나오는 것 이고요.

투르크 족이 성장하여 결국 아바르를 축출하고 몽골고원의 주인이 되고 아바르는 투르크의 압박을 피해서 서진하게 되는 것 입니다.

서진한 아바르가 대 불가리아 제국을 건설하나 투르크 제국에서 남부군 집단에게 아바르를 섬멸하지 전 까지 돌아오지 말라 명하고 남부군 집단은 아바르를 공격하게 되는 것 이고요. 이들이 추측하기로는 하자르족 즉 마자르족으로 헝가리 족이라 여겨지는 것 입니다.

마자르족의 공격과 내부 분열로 결국 대 불가리아 제국은 붕괴되고 몇 부루로 갈라지는데 그 중 일부가 지금의 발칸반도로 이동하게 되는 것 입니다. 본문에는 로마군 장교라 하였지만 실제로는 로마에서 보낸 인질로 당시 비잔틴 제국은 불가리아와 일정한 정도의 거리를 두면서 통제 할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불가리아족은 다수의 슬라브족과 연계하면서 독립과 더불어 발칸반도에 정착 할려고 하자 비잔틴 제국은 대규모의 토벌군을 보냈지만 아갈라 전투에서 대패 함으로써 불가리아족은 독립을 쟁취하면서 비잔틴 제국과 전쟁과 평화를 왔다 갔다 하죠.

크롬대제 당시가 제 1 불가리아 제국의 전성기 인데 크롬대제를 코난이라고 부릅니다. 영화상에서 나오는 코난은 크롬대제를 롤 모델로 만든 오락영화죠.

하여간 크롬대제 이후 불가리아 제국은 몰락하고 결국은 비잔틴 제국에 합병되는데 이 제국을 제 1 불가리아제국이라 하고 다시 독립을 하는 국가를 제 2 불가리아 제국이라 합니다. 이 둘의 구성원은 슬라브 혼혈이 많냐 적으냐의 차이죠.

정리하자면 투르크는 선비의 부용민족 이었고 선비는 고구려의 부용민족 이었습니다. 결국은 투르크나 선비 모두다 고구려의 부용민족으로 고구려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았다고 봐야 옳겠죠.

유연(아바르)는 투르크나 선비와는 다른 부여계통의 종족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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