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시대의 전쟁을 단 하나의 표현하자면, 잔인했다. 전투의 ‘룰’, 즉 규칙 같은 것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원시시대의 전투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의식(儀式)’이다. 일종의 공식적인 이벤트로서 전투에 참가한 전사들이 지켜야한다는 규칙이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로 한 줄로 선 다음 일제히 창을 던지고, 부상자가 나타나면 전투를 중지한다던가, 아니면 적을 전투에서 꺾더라도 여자와 아이들은 죽이지 않는다는 것 등이다. 개개 전사들이 적들 앞에 나아가 개인의 무용을 과시하고, 대규모 전투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때문의 서구의 많은 역사학자들도 고대의 전쟁은 올림픽 같은 집단 게임이라고 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원시시대의 전쟁이 현대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진행되었을 것이라는 편견 때문이다. 원시시대사람들은 싸우려는 상대에게 당당하게 선전포고를 하거나 하지 않았다. 진을 짜고 대오를 맞추지 않았다. 영화에서 흔히 오지(奧地)의 부족들이 화려한 의상을 입고 나와 시끌벅적하게 소리치는 것은 모두 가짜 전투이다. 진짜 전투는 대부분의 경우 밤중에, 몰래, 소리 소문없이 이루어졌다.
선사시대에는 대개 채집이나 사냥을 할 수 있는 땅을 두고 싸웠기 때문에 싸움에 진다는 것은 곧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다는 말이었고, 이는 곧 죽음을 뜻했다. 적을 어설프게 건드렸다가는 반격을 받아 마을이 위태로울 가능성이 높았다. 이렇기 때문에 원시시대의 전사들은 기습에 성공하면 마을 사람 전부를 몰살시켰다. 남자건 여자건, 아이건 노인이건 상관없었다. 반격의 가능성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1325년, 현재 미국 사우스․다코다州의 Crow Creek에서 벌어진 인디언 부족의 학살은 원시시대의 전쟁이 어땠는지 잘 보여준다. 마을의 방어를 위한 목책이 무너져 다시 짓고 있던 중, 적의 기습을 당했다. 마을에 있는 집의 수로 보아 약 800명이 살고 있었다. 단 한번의 기습에 500명이 죽었다. 피해자들의 뼈에 짐승들의 이빨자국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아 제대로 묻히지도 못하였다. 집들이 다시 지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생존자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한번의 기습에 마을 하나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런 일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시시대 전쟁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12세기말 미국 콜로라도州 남서부에 있는 Sand Creek Pueblo에서는 많은 수의 해골이 무너진 집의 잔해속에서 발견되었다. 생존자도 없이 몰살당한 것이다. 4000년전 프랑스 로와지방의 어떤 마을에서는 먼 거리에서 화살을 날리는 침략자들의 습격을 받아 100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최근까지도 뉴기니의 마링 부족은 밤에 몰래 적들의 집을 포위한 후 불을 지르고 불을 피해 뛰쳐나오는 모든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즐겨썼다.
여기에서 얼굴을 찌푸리는 독자는 아직도 원시시대의 전쟁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현대에서 정규군끼리 ‘정당한’ 방법으로 싸우는 것이 ‘진짜’ 전쟁이란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다. 원시시대의 전쟁에서 항복이나 자비란 개념은 없었다. 전투는 누가 살아남고 누가 죽느냐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비는 사치였다. 아울러 원시시대의 전사들은 포로를 잡는 일도 드물었다. 포로를 잡아보았자 먹을 입만 늘릴 뿐, 쓸모가 없었다. 노동력을 위하여 포로와 노예를 잡는 일은 사람들이 농사를 짓게 된 먼 훗날의 일이다.
18세기의 계몽주의 사상가인 루소는 ‘사유재산’이란 것이 생겨나기 이전, 인간은 가지기 보다는 나누고, 본능적으로 자비심과 이해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른바 ‘고귀한 야만인’이다. 16세기의 사상가인 홉스는 공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원시시대는 인간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경쟁상태, 즉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하였다. 이른바 Warre이다.
많은 고고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이 원시시대에 관하여 논쟁을 벌였고, 결국 현대 고고학은 홉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원시시대에는 살아남는 것만이 최고의 가치였다. 인간은 서로를 돕지 않았다. 오히려 죽이려 들었다. 루소의 ‘고귀한 야만인’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출처 http://egloos.zum.com/damulism/v/2234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