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때는 몽골군이 포로로 잡은 고려 여인과 결혼하는 것은 다반사.
사진을 물론 다루가치, 둔전병에 이르기까지 고려 여인을 아내로 삼으려는 풍조가 크게 유행.
<연하곡서 輦下曲序>에서는 “보초 서는 병사들은 고려 말을 배우네. 어깨동무하며 나지막이 노래 부르니 우물가에 배가 익어가네.”라고 노래하고 있다.
당시 원나라의 벼슬아치는 고려 여인과 결혼하고 거실에는 고려 청자, 나전칠기를 장식.
고려의 먹과 종이를 사용하여 고려에서 만든 화문석을 깔고 사는 것이 유행.
고려 인삼을 진시황이 찾는 불사약이라고 생각.
원나라 궁정의 비사를 담은 장욱의 <원궁사>는 “가장 유행하는 옷은 고려 여인이 황제 앞에서 입는 고려 옷이라네. 궁중 여인들도 서로 다투어 고려 여인의 옷을 구경하러 가네.”하고 앴고
<경신외사>에서도 “(원나라) 대신들과 귀인들은 고려 여인을 얻은 후에라야 명가라고 불렸다... 고려 여인은 상냥하고 애교가 넘치며 남편을 잠 섬겼다... 곳곳의 의복과 신발, 모자 및 기물이 모두 거려의 모습을 따랐다.”
그로 인해 당시의 사정을 “지금 고려의 부녀가 후비의 반열에 있는 이도 있고 왕후의 귀인이 된 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경대신 중 고려의 외손자 출신이 많습니다. 이들은 본국의 왕족과 문벌, 부호의 집안에서 특별히 조지를 받들고 온 여인, 혹은 자원한 여인, 또는 중매를 통해온 여인들입니다”라고 설명.
북원의 제1대 황제 소종의 황후인 권황후도 고려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