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올라가서 주와 은과의 싸움으로 돌아가면... 은은 당시 최강대국으로 군사대국의 형태를 띤 군국주의 국가로 주변의 나라나 종족들을 굉장히 괴롭히던 국가 였습니다.
아즈텍이나 스파르타와 같이 형태를 보인국가로 군인들이 일반 사람들을 군사훈련이라는 이유로 그냥 죽일 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을 잡아와 제물로 바친 신성국가체제의 국가 였습니다.
이런 행동에 지친 주변국들이 주나라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은을 무너트리는 것 입니다.
이런 은나라를 우리의 조상이라고 한다면 너무 슬픈 일이죠.
근세조선 시기의 유학자들이 오랑캐라고 이夷라 불러 사대주의자들이라 비난 하는데 그럼 불교도들은 이족을 자신들의 조상이라 여겼냐는 것이죠.
유명사찰에 가면 사천왕문이라는 것이 있는데 사천왕은 주나라를 도와 은나라와 싸운 왕들 입니다. 이들 사천왕이 밟고 있는 아귀 형상은 은나라 군대를 의미 하는 것 입니다.
만일 불교도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은나라 동이족이라고 한다면 저런 동상을 세울일이 없죠. 한국인들은 유교도나 불교도 모두다 자신들을 주나라 내지는 주나라의 협력국인 사천왕의 후손으로 생각했지 은나라 사람의 후손이라고 생각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설화에 일본 여신이 일본으로 오기전 고려땅을 밟고 오는 대목과 일본신사 정문에 고마견을 세워는 것 등은 사천왕문과 같은 의미로 일본의 지배층은 주나라 계열이지 은나라 동이족이 아니란 말이죠. 이것이 메이지 유신 후에 은나라 동이 계열이 정권을 잡은 후에 고마견을 없애고 신화도 조작하는 것이죠.
한국도 역시 마찮가지로 동이계의 패악질로 한국의 역사도 엉클어 지는 것 입니다.
당시 중국이란 개념은 지금과 같은 개념이 아니라 북중국을 일컫는 말로 한국의 조상역시 그 부류에 속합니다.
진시황이 전국 칠웅을 없애고 북쪽의 흉노와 대결해야 하는데 진나라는 그런 여력이 없었기에 만리장성을 쌓는 것 이고요. 만리장성을 쌓은 후로 원래는 같은 부류 였는데 분리 되는 것 입니다. 성을 쌓은 후에 서로 간의 교통이 단절 되었기 때문입니다.
위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서력기원 전후였으며, 처음 전해진 불교는 인도 불교가 아닌 서역 불교였다.[1] 후한(後漢: 25~220) 말인 2세기 후반에는 서역과 인도에서 온 역경승들에 의해 불경이 한역되기 시작하면서 불교는 중국에서 확실한 기초를 형성하게 되었다.
사천왕을 주나라를 도와 은니라와 싸운 무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근거가 있는건지요? 처음 들어보는 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