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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가 경제중심지 강남을 잃고 겨우 버텨가는 가운데 우창(武昌)의 진우량과 쑤저우의 장사성에게 에워싸인 난징의 주원장은 불리한 처지에 놓였다.
다행히 쑤저우와 항저우를 점령한 장사성은 당초의 기개를 잃어버리고, 향락만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장사성은 정치를 동생 장사신에게 맡겼으며, 장사신마저 부하들에게 정치를 맡기고 향락을 추구했다.
장사성에 비해 진우량은 상관 예문준(倪文俊)과 서수휘를 차례로 살해하고 서파(西派) 홍건군을 손아귀에 넣을 만큼 과감하고 의욕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서수휘가 살해되자 부하 명옥진(明玉珍)은 쓰촨을 배경으로 독립해나갔다.
이 무렵 원나라의 명장 차칸테무르가 홍건군에 항복했다가 다시 원나라에 투항한 자들에게 속아 산둥 익도(益都)에서 암살됐다. 이로써 화북의 원나라 영토는 강남 지역과 마찬가지로 군웅할거 각축장으로 변했다. 강남·북 공히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동근상전(同根相煎) 상황이 된 것이다. 이제 주원장은 서쪽의 진우량과 동쪽의 장사성에게만 신경 쓰면 됐다. 주원장에게 거듭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주원장은 창장 중상류로 서진하고 진우량은 창장 중하류로 동진해 같은 홍건군 출신인 2개 세력권이 겹쳤다. 중원의 사슴(패권)을 목표로 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결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1363년 진우량은 동진해 주원장의 세력권이던 포양후(鄱陽湖) 남안(南岸)에 위치한 홍도(난창)를 포위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주문정과 등유 같은 주원장의 장군들이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주원장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홍도 구원에 나섰다. 주원장이 직접 나섰다는 소식을 접한 진우량은 60만 대군을 동원해 포양후 입구에 위치한 후커우(湖口)로 진격했다. 주원장의 20만 대군과 진우량의 60만 대군이 포양후에서 총 36일간에 걸친 수전(水戰)을 벌였다. 주원장과 진우량이 건곤일척의 대결전을 벌이고 있는데도 향락에 빠진 장사성은 움직일 줄 몰랐다. 주원장은 유기, 유통해 등 부하들의 활약과 화공 전술에 힘입어 장거리 원정으로 인해 보급 문제에 시달리던 진우량군을 대파했다. 전투 중 함선을 바꾸어 타던 진우량이 화살에 맞아 죽는 바람에 전투는 끝났다.
포양후 대전 후 주원장의 패권은 확고해졌다. 포양후 전투 2년 뒤인 1365년 주원장은 20만 대군을 동원해 창장 남북에 걸친 장사성의 영토를 빼앗아 나갔다. 주원장 군단은 항저우와 후저우(湖州), 우시(無錫)를 점령해 장사성의 도읍으로 동양의 베네치아로 불리는 물과 비단의 도시 쑤저우를 고립시켰다. 쑤저우를 포위한 1366년 12월 주원장은 부하 장수 요영충을 시켜 송나라 황제 한림아를 물에 빠뜨려 죽였다. 주원장의 앞길을 막는 방해물이 모두 치워졌다. 주원장은 1367년 쑤저우마저 점령하고 장사성을 포로로 잡았다. 쑤저우 함락 직후 일사천리로 서달과 상우춘이 지휘하는 25만 명의 명나라 대군이 원나라 수도 대도를 향해 진격했다.
주원장은 북벌군이 대도를 향해 진격하던 1368년 1월 황제에 즉위하고 나라 이름을 명(明)이라 했다. 이는 주원장 자신이 명교(마니교) 출신인데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라크 북서부에서 시작된 마니교(摩尼敎)는 조로아스터교(배화교)의 분파로 중국에서는 끽채사마(喫菜事魔)로 불리기도 했으며, ‘광명의 신’을 숭배한다는 점에서 이라크의 앗시리아인들이 믿는 예지디교와 유사한 점이 있다. 대한민국에도 마니교 전래의 흔적으로 보이는 강화도의 마니산(摩尼山)이 있다.
명나라군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원나라는 우유부단한 황제 토곤테무르(순제)와 그의 아들 아이유시라다라가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순제는 황자 시절 고려의 대청도에 유배된 적이 있으며, 고려 출신 기씨(奇氏)를 황후로 맞이하는 등 고려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원나라 조정은 몽골 지상주의자(국수파) 바얀과 한화파 톡토 간 대립에다가 황제파 볼로드테무르와 황태자파 코케테무르(차칸테무르의 아들) 간 대립도 격화돼 온갖 난맥상을 다 연출하고 있었다. 쿠빌라이 이래 일본, 베트남, 참파, 버마, 자바 등으로 해외 원정이 계속돼 국가재정도 붕괴된 지 오래였다. 강남으로부터 쌀과 소금이 오지 않을 경우 더 이상 나라를 지탱할 수 없는 상태였다. 서달과 상우춘이 지휘하는 25만 명나라 대군이 북진해 오는데도 군벌 간 대립이 계속됐다.
이제 명나라군을 막을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서달은 1368년 8월 대도를 점령했다. 일체의 저항 없이 대도성을 내준 순제 토곤테무르는 북쪽으로 도망하다가 내몽골에서 병사했으나, 기황후의 아들 아이유시라다라는 외몽골로 도피하는 데 성공해 원나라를 이어갔다. 원나라는 멸망한 것이 아니라 크게 팽창했다가 다시 수축된 것이다.
명나라 건국 후 고려 공민왕은 난징으로 축하 사신을 보내기는 했으되 중국 정세 변화를 날카롭게 관찰했다. 1370년 이성계와 이인임, 지용수 등이 1만5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북면(함경도 지역)에서 출발해 강계를 지나 압록강을 도하해 혼란에 처한 랴오둥에 진입했다. 고려군은 랴오둥의 중심도시 랴오양을 점령했으나 보급 문제로 인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의 선조들은 테무게 왕가 영역 내에서 실력을 길렀다. 원나라 시대 만주 일대를 지배한 테무게 왕가는 나얀 시기 원나라 대칸이 되기 위해 쿠데타를 감행했을 뿐만 아니라 쿠데타에 실패한 후에도 제후왕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을 만큼 실력과 권위를 갖고 있었다.
고려 ‘무신란’ 주역 중 하나인 이의방의 동생 이린의 손자인 이안사는 1255년 테무게 왕가로부터 천호장(千戶長) 겸 다루가치 직위를 하사받아 두만강 하류 일대를 지배했다. 이안사를 고조부로 하는 이성계 일가는 테무게 왕가의 가신(家臣)으로 천호장 겸 다루가치 지위를 세습해 함경도 일대의 고려인과 여진인을 지배했다. 따라서 1392년 조선 건국은 명나라와 만주의 몽골 세력 간 새로운 관계 정립의 한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원말(元末)-명초(明初) 만주의 몽골 세력을 대표하던 나하추(무칼리의 후손)는 1375년 랴오둥반도 남부 일대를 공격하다가 대패했다. 나하추는 1387년 풍승(馮勝)과 남옥(藍玉)이 이끄는 20만 명나라 대군이 다링허-랴오허 유역 근거지 금산(金山)을 압박하자 명나라에 항복했다. 나하추 일가는 명나라에 항복함으로써 명나라가 주도하는 질서하에서 제한된 권력이나마 유지할 수 있었다.
주원장은 1388년 3월 남옥에게 10만 대군을 줘 북원(北元) 세력을 공격하게 했다. 남옥은 만주라는 옆구리를 상실한 북원군을 내몽골 부이르호(捕魚兒海) 전투에서 대파하고, 북원을 외몽골로 축출했다. 이로써 북원(北元)과 고려 간 연계는 끊어졌으며 왕실을 포함한 고려 기득권 세력은 비빌 언덕을 잃어버렸다. 이에 앞선 3월 명나라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평안도 북부 지역을 할양해줄 것을 요구했다. 명나라의 영토 할양 요구에 대해 고려는 우왕(禑王)과 최영(崔瑩)으로 대표되는 대명(對明) 강경파와 이성계, 조민수, 정몽주 등으로 대표되는 온건파로 분열됐다. 이성계 일파는 그해 5월 우왕의 명에 따라 명나라를 치러 출격했다가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회군해 대명(對明) 강경파를 숙청하고, 조선 개국의 정치·경제적 기초를 구축했다.
천호장 겸 다루가치 울루스부카(이자춘)를 승계한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투를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터에서 보냈지만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명장이었다. 이성계는 빛나는 군사 실적을 기반으로 고려의 최고 실력자로 우뚝 섰다. 이성계는 몽골식 평지전과 산악전에 모두 능숙했는데, 이 때문에 이성계 군단은 다른 고려 군단에 비해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성계는 최영, 최무선 등과 함께 일본 가마쿠라 막부 말기 남·북조(南北朝) 내전에 패배한 규슈의 사무라이 위주로 구성된 왜구의 침략을 진포와 운봉(남원) 등지에서 격퇴하고, 신흥 사대부의 대표 격인 정도전과 조준, 남은 등의 지지를 받아 조선을 건국했다. 즉 조선은 원나라 지방군벌과 고려 성리학자의 합작품이었다. 이성계 일파의 승리와 조선 건국은 고려의 부패한 친원(親元) 기득권 세력을 밀어냈다는 의미와 함께 성리학이라는 한족 문명을 절대시하는 나약하고 폐쇄된 나라로 가는 출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