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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2-18 20:14
[기타] 몽골-고려 관계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090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8292

<전략>
1162년에 태어난 위대한 칸 ‘진국왕(震國王)’ 칭기즈칸은 <몽골비사>에 따르면 재위 22년인 1227년 8월 하늘로 돌아갔다. 이 해는 개봉(開封)을 중심으로 중원의 절반을 통치하던 금나라 애종 4년인 때다. 또 금나라 왕가의 고향이던 고려에서는 고종 재위 14년이 되던 해였다.

그로부터 12년 전 칭기즈칸과 그의 선조의 고향 고려는 처음으로 외교 관계를 맺었다.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다른 나라와 많이 달랐다. 고려와 몽골은 칭기즈칸의 ‘세계 정복전의 길’ 위에서 형제국이 된 유일한 두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 계기는 몽골과 고려 사이에 자리 잡은, 거란 왕조의 남은 씨앗 금산(金山) 태자 일당의 도발이었다. 만주에 대요수국(大遼收國)의 왕(王)이라 칭한 그들은 1215년 몽골에 쫓겨 고려의 강동성(평안남도)으로 쳐들어왔다. 거란 잔당은 이내 충북 제천까지 쳐들어와 고려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그들을 추격하던 몽골은 고려에 지원병을 요청했다. 안마당에 불이 붙은 고려는 당연히 협조했다. 그 결과 <고려사>에서 보듯이 양국 군대는 금산태자 일당 수십만 명을 격퇴시켰다. 몽골 원수 합진(哈眞)과 고려 장군 김취려를 비롯해 양국은 ‘골세(만년)에 이르는 영원한 형제국’이 되기로 맹세한다. 칭기즈칸의 역사상 ‘형제국’을 논의한 경우는 이것이 유일한 예다.

형제국이 된 지 8년 후 몽골 사신 착고여(着古歟)가 살해됐다. 우리 국사책에서는 몽골이 이 사건을 단순히 고려 침략의 명분으로 활용했다고 기술한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명초 송렴의 <원사(元史)> ‘외이열전(外夷列傳)’과 조선시대 한치윤이 엮은 <해동역사(海東繹史)> ‘제14권’에 따르면 고려는 형제국이 되자고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몽골 장군 ‘찰라’를 살해했다. 이어 몇 년 뒤에는 착고여를 압록강에서 암살했다.

그 후 고려는 이런 행위를 책망하러 온 몽골 칙사에게 활을 겨눠 쫓아내는 등 다섯 차례 도발 행위를 했다. 그 결과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유럽의 상당 부분을 정복한 세계 최강국 몽골은 고려 정벌에 나선다.

어찌된 일일까? 칭기즈칸은 자신의 증조부들을 죽인 금나라에 대해서는 1206년 칸이 되자마자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그런데 칭기즈칸은 고려를 치라고 하지는 않았다. 1227년 하늘로 돌아간 칸의 뒤를 이은 셋째 아들 어거데이칸 재위 3년인 1231년에 이르기까지 몽골은 고려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사죄만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고려가 누차 말을 듣지 않자 어거데이칸은 그해 군사를 보내 고려 정벌을 시작했다. 몽골 측이 먼저 고려에 대해 적대 행위를 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몽골 입장에서 고려 침략은 징벌이 아닌 응징일 뿐이다.

몽골과 고려는 결국 전쟁에 휘말렸다. 이 전쟁은 양국 모두 고구려-발해를 계승한 나라란 점에서 ‘고려 반도의 본토고려와 세계 정복자 몽골 고려 형제간의 다툼’이라고 표현해도 큰 무리가 아니다. 비록 전쟁의 원인은 다르지만, 지난 세기 남북한 간 일어난 싸움에 비유할 수 있다.

1231년 12월 몽골군이 고려로 쳐들어와 수도 개성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고려의 제23대 왕 고종(1192~1259, 재위 1213~1259년)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고, 이후 공식적으로 29년 동안 항쟁한다. 그 기간 두 나라는 지루한 전쟁과 짧기만 한 강화(講和)를 되풀이했다.

전쟁 도중 두 나라의 관계는 특이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약소국의 설움이라며 개탄하는 ‘고려공녀’도 사실은 몽골 황가(皇家)가 먼저 내준 ‘몽골공녀’가 근간이다.

전쟁 발발 10년째인 1241년 4월, 고종은 강화를 위해 왕의 조카인 영녕공 왕준을 왕자라고 속여 몽골로 보냈다. 이때 칭기즈칸의 손자이자, 그 막내아들 툴루이의 맏아들인 몽케칸(재위 1251~1259년)이 몽골제국의 제4대 칸으로 재위하고 있었다. 칸은 왕준에게 처음으로 몽골 황족 여인을 아내로 내려주고, 왕준으로 하여금 몽골에 눌러앉아 살게 한다. <고려사>의 ‘권130-열전43-반역4’ 기록에는 왕준의 아내가 “나는 황족이다. 황제는 공(公)이 고려 왕족이므로 이 첩을 시집 보냈다”고 했다.

몽골은 1231·1232·1254년 세 차례 침입했고, 제4차 침공 후인 1270년 고려는 몽골에 항복했다. 왕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나와 몽골 사신을 맞았다. 이에 앞서 영녕공 왕준은 두 나라의 화해를 위해 중재를 시작했다. 몽골 측이 먼저 두 나라 군주 가문 사이에 혼인을 제안하고 실행해 양국은 전쟁 중에 사돈 국가가 된 것이다.

그 후 원종의 아들 왕심이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칸(세조) 때인 1271년 강화를 위해 원나라로 갔다. 그는 후일의 고려 제25대 국왕 충렬왕(재위 1274~1298년, 복위 1299~1308년)이다. 그가 강화를 위해 갔을 때 쿠빌라이칸의 부마가 된다.

<익제난고(益齋亂稿)> ‘권제9상세가(卷第九上世家)’에는 “세조 쿠빌라이가 놀라고 기뻐서 말하기를 ‘고려는 만 리나 떨어진 나라다. 당 태종이 몸소 쳤지만 따르게 할 수가 없었다. 이제 세자가 스스로 와서 내게 귀부(歸附)했다. 이는 하늘의 뜻이다. 크게 상을 내려라”라고 기록돼 있다. 그 후 쿠빌라이칸은 왕심이 요구한 대로 자신의 딸 후투룩겔마스(忽都魯揭里迷失)를 그에게 시집 보낸다. 쿠빌라이칸은 그녀에게서 난 외손자 왕장, 곧 충선왕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이후 원제국의 황실과 통혼해 훈신(勳臣)·세족(世族) 등 군주로 대우받은 고려 왕실의 인물들로는 심왕 왕고 등 모두 6명이다. 그들과 혼인한 몽골 여인은 기록상 최소 황녀 1명, 공주(왕의 딸, 곧 황제의 손녀) 7명, 평민 1명을 포함해 모두 9명이다.

쿠빌라이칸은 1287년에야 비로소 고려 여인을 후궁으로 받기 위해 처음으로 공녀제도를 만든다. 이를 통해 고려와 몽골은 겹사돈 국가가 된다. 그렇다면 몽골공녀가 고려공녀보다 먼저 고려 왕족에게 주어진 셈이다.

어떤 학자에 따르면 고려 여인은 44회에 걸쳐 총 170명이 원나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학자는 고려 공녀들을 ‘양공주’인 양 묘사한다. 그러나 이는 고려공녀의 역할이나 성격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 오류다. 그녀들은 사실은 원나라 황제의 후궁들이었고, 그들 중 황후가 된 여인도 4명이나 된다. 우리가 잘 아는 원 말의 기황후(奇皇后) 하나만이 아니다. 기황후보다 훨씬 먼저 고려 왕족 출신인 왕황후(王皇后)를 비롯해 다르마시리 김씨(金氏) 황후 등 2명이 원나라 황후가 됐고, 곽비(郭妃)도 사실상 황후급이었다. 그 외 다른 후비를 포함해 북원(北元) 시대의 후비까지 치면 10여 명에 이른다.

원말 도종의가 ‘몽고 78종’이라고 기록했듯이 당시 몽골씨족은 많았다. 그러나 이들 중 오직 콩그라트 씨와 예키라스씨 두 씨족만이 황제의 후궁과 황후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나머지 76종의 몽골씨족을 제치고 고려 여인만이 두 씨족과 같은 반열에 들어섰다.

그렇다면 고려 여인들만이 여타의 몽골씨족 여인들과는 다른 특별대우를 받았다는 이야기다. 고려 공녀는 달리 말하자면 황제의 자손을 잇기 위해 고려에서 뽑혀온 고관대작의 딸들이었다.
1247년에는 국왕의 아우가, 1254년에는 몸소 몽골까지 온 적 있는 아르메니아의 왕 헤툼 1세 이래 헤툼 2세가 공주를 몽골 황실과 혼인했다. 이 일을 포함해 원래 고구려계 인물로 카자흐스탄 킵차크 지방에서 왕가를 이었던 바야우드씨 등 정통 몽골이 아닌 여인이 몽골 왕족과 혼인한 예가 있다.

그러나 몽골과의 혼인 관계는 고려를 제외하면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일부 사학자는 이런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몽골의 ‘황후종족제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몽골 황가가 고려에 먼저 황녀·왕녀를 시집 보낸 사실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지 힘이 약한 고려 측에서 여인을 보냈다는 한 가지 측면밖에 몰랐기 때문에 잘못된 평가가 나온 것이다. 만일 고려 여인들이 고려공녀라면 몽골 황실이 고종의 조카 왕준과 원종의 왕자 충렬왕 등 고려 왕족에게 시집 보낸 황녀·왕녀들은 몽골공녀란 말이 아닌가?

고려 원종의 왕자가 원 세조 쿠빌라이칸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양국은 사돈의 나라가 됐다. 두 나라는 각각 중원과 고려의 다른 황제국과 왕국에서 공동 통치자가 됐다. 두 나라 간에 이처럼 특별한 관계가 생긴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쿠빌라이칸의 말처럼 고려의 국력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원나라는 공식적으로는 29년간, 비공식적으로는 39년간 고려와 싸웠지만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이나 중원의 금나라·서하·송나라처럼 쉽게 정복할 수 없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다시 생각해봐야 할 중요한 역사·정치적 교훈이다.

둘째로는 고려 여인들의 덕성이다. <경신외사(庚申外史)> ‘권상(卷上) 1’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기황후는 고려 미인을 많이 데리고 있어서 대신에게는 그 여인들을 보냈다. (…) 고려 여인들은 아름답고 교태가 있고 사람을 잘 섬기므로 결국은 총애를 얻었다.”

셋째, 고려 여인들의 뛰어난 외모의 아름다움이다. 원대가 지나 명초부터 명말 만력(萬歷) 때까지의 사실을 적은 심덕부(沈德符, 1578~1642) <만력야획편(萬歷野)>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문황제(文皇帝, 영락황제)는 고려가 바친 여인 몇 명을 받아들였는데 그중 하나가 현비 권씨다. 북으로 정벌을 가는데도 데려갔고, (…) 그 아비는 고려에서 여전히 살았다. 이때는 여전히 원나라 때의 풍속을 숭상했기 때문인데 (…) 나중 정덕[正德, 명 11대 황제 무종(武宗)의 연호] 연간에 회회인(回回人) 우영이 황제에게 말씀을 올려 말했다. ‘고려 여인들은 그 살결이 희고 부드러우며(白) 아름다워(美) 중국(中國) 여인들보다 크게 낫습니다(大勝)’.”

<경신외사>는 또 “고려 여인들의 뛰어난 덕성과 외모 때문에 경사(京師, 서울)의 높은 관리와 귀족들은 반드시 고려 여인을 얻은 후에야 명가(名家)가 될 수 있었다”고 적었다.

고려 여인들은 문화 면에서 몽골 귀족 사이에서 고려양(高麗樣)을 크게 전파했다. <경신외사>는 “이 때문에 원 순제의 지정(至正) 연간 이래 황궁 안의 급사·사령 등 여관(女官)은 대부분이 고려인이었고 사방의 옷·신·모자·기물 모두 고려 것의 모양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원나라 황가와 귀족들은 고려의 상추쌈과 불고기 등을 먹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여인·의복·신발·모자·음식 등 일종의 원대 궁정 속에 퍼진 ‘고려류(高麗流)’다. 곧 오늘날의 ‘한류(Korean waves)’다.

이처럼 두 나라의 왕실이 하나의 혈통으로 묶인 또 다른 이유는 원나라의 몽골 귀족들이 자신들의 지위 유지를 위해 고려인과의 결혼동맹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고려도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원나라와 혼인동맹이 필요하긴 했지만 몽골 여인을 선호하지는 않았다.

예컨대 북원 때를 보자. 북원의 오왕·회왕·쌍합달 왕이 모두 사신을 보내 답례하고 말을 바쳤다. 이때 오왕 등이 고려에 먼저 예물을 가지고 왔는데 고려에서 사신으로 우제를 보내 답례했다. 오왕은 고려 사람과 혼인하기를 간청하고, 회왕은 우제를 매우 후히 대접했으며 그 딸을 고려에 시집 보내고자 했다. 이에 우제가 사양하며 아뢰기를 “신은 명을 받아 교빙(交聘)할 뿐이오니 청혼하는 일은 신이 알 바가 아닙니다”고 했다. 이로 보아 원나라의 귀족층은 자기들이 먼저 고려 귀족과 혼인 관계 맺기를 원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몽골제국이 건재한 동안 한족(漢族) 여인은 물론 한인과 남인(南人)들도 몽골인과 고려인들의 공동 통치하에서 스스로 정부나 나라 없는 속민의 삶을 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신외사> ‘권상’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원 순제 자신도 이 사실을 인정해 ‘사람들은 국가가 한인을 가벼이 여긴다고들 한다. 이와 같으니 과연 한인을 가벼이 여기는 도다’고 한 바 있다.”
<후략>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8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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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auder 18-02-18 22:42
   
그의 선조의 고향 - 이건 무슨말이죠. 몽골이건 칭키즈칸이건 선조의 고향이 왜 고려인지...
     
감방친구 18-02-18 22:47
   
전원철 박사의 견해입니다
찾아서 읽어 보면 알게 되시겠지만 매우 흥미롭습니다
history2 18-02-19 06:47
   
1)저도 사실, 너무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가 이상한 점이 많아서, 실위(몽골부족)와 두막루(부여후손)와의 관계까지 검토하고 있던 중 이었습니다.... 몽골의 고려사랑과, 북원의 고려에 대한 애증은 참 대단했지요!
(북원: 고려마저 배신하다니....!!!)

2)하지만, 명나라 역시 만력제가 '조선황제'라는 별칭으로  불릴만큼, 조선의 기근때 자신들의 쌀을 보내주는 등(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기근도 힘든데,조선을 돕는 황제가 미웠겠지요), 애정을 보인 황제들이 많았지요....역시 조선처자들에 대한  애정과 공녀요구도 컸었고(헤비 최씨)ㅡ 순장된 조선여인들도 많았고요! (여비 한씨 등)

3)그럼에도, 원나라의 고려사랑은, 몽골의 이전의 행태에 비하면,  별나 보이기는 합니다.... a)만주의 동방3왕가 웃치킨에 대한 견제라지만, 심양왕제도를 만들어 고려인을 남만주의 왕으로 만들지 않나! b)고려를 유사시 몽골황제의 후방기지 or 몽진처 로 생각하지를 않나! 하는 등의 모습은 다소 몽골답지 않게, 퉁구스 계통 중에서는 좀 고려를 많이 신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4)사실 몽골은 투르크계 색목인 외에는 신뢰를 준 적이 없는데, 이는 실무적이 영역이고 고려인은 다른 방식(?)의사랑을 받은 것 같습니다. a)충렬왕이 쿠빌라이가 황위계승 전쟁 중 어려울 때, 뜬금없이 쿠빌라이쪽에 항복을 해서 이러한 사랑(?)을 받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b)충선왕이 원나라 조정에서 줄을 잘 탄 이유도 있지만,  c)겹사돈 관계라는 것과 고려왕이 쿠빌라이 순위 6위라는 점도 있었겠지만

5)당시 유리한 상황을 잘 이용하지 못하고, 요동을 결국은 고려국 영토화 하지 못한것은 정말 아쉽습니다.
사실, 기회는 정말 많았는데요(굳이 군사력이 아니라도, 나하추만 잘 설득했어도 ,,,,,등등 너무 아쉽습니다)
     
Marauder 18-02-19 09:03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역사적 사례가 얼마나 있었나 확인해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나 사람들보면 별거아닌것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던데 과연 몽골이 점령한 타국가중에서도 그러한 사례가있는지, 둘째로는 전체 유목민사에서 고려와 같은 대접을 받은 국가가 있는지 마지막으로는 전체 국가에서 그러한 사례가 있는지 정도 생각해봐야겠죠.
          
감방친구 18-02-19 09:46
   
언제까지 그렇게 확인해 봐야 한다고 하고 계실 건가요?
10 년 후에도요?
시로코 18-02-19 10:47
   
나도 이와 비슷한 대목을 책에서 읽었습니다. 그때 왜 몽골이 고려와의 관계와  왜?고려여인과 혼인을 할려고 했는지 궁금했었습니다. 왜 교려를  부마국으로 둘려고했는지? 이제는 좀알겠네요..
일부 사람들은 이런말도 하던데~~  참어의가 없는 말입니다 만
한국사람이 몽골사람과 닮은것은  몽고칩입시  고려여인들이 몽골군에  당해서 몽골의 피를 받아서
몽골인가 비슷하다고~~  그때 참 어의가 없었습니다~~~

몽골이 큰제국을 만들었지만  고려를 그리 무시하지 못했던것같고~ 옛부터 내려오는  타민족과 다른 동질감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제개인적인 생각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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