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8-02-20 17:56
[한국사] 지금의 평양에 있던 '낙랑'에 대한 고견을 여쭙고자 합니다.
 글쓴이 : 지수신
조회 : 688  

안녕하세요.

뜬금없다 여기시겠습니다만

저도 최근 '낙랑'과 '평양'에 대해 새삼스레 관심이 생겨 검색을 좀 하다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이래저래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나라이지만 아직도 재야의 고수 분들이 계시네요.

역시 세상은 생각보다 넓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특히 '감방친구'님의 놀라운 고찰들을 보고 정말 많이 배워갑니다.

이어지는 저의 질문에 고견 주신다면 영광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소위 한사군과 낙랑 문제와  관련하여

정말 기초적인 자료임에도 턱없이 간과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 기록입니다.

출처는 국편위.

十五年...... 夏四月, 王子好童遊於沃沮, 樂浪王崔理出行, 因見之問曰, “觀君顔色, 非常人. 豈非北國神王之子乎.” 遂同歸, 以女妻之. 後好童還國, 潛遣人, 告崔氏女曰, “若能入而國武庫, 割破鼓角, 則我以禮迎, 不然則否.” 先是, 樂浪有鼓角, 若有敵兵則自鳴. 故令破之. 於是, 崔女將利刀, 潛入庫中, 割鼓面·角口, 以報好童. 好童勸王襲樂浪. 崔理以鼓角不鳴不備. 我兵掩至城下, 然後知鼓角皆破. 遂殺女子, 出降

二十年, 王襲樂浪滅之...

二十七年, 秋九月, 光武遣兵渡海伐樂浪, 取其地爲郡·縣, 薩水已南屬


유명한 호동왕자 설화에 이어

'북국신왕'이 '낙랑'을 멸했는데

7년 후 후한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 군대를 파견해 '낙랑'을 공격하고 그 땅을 취해 군현을 삼습니다.

이로 인해 '살수 이남'이 한에 속했다고 했습니다.

'다시'가 아닙니다. 어디에도 '다시'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기록에 의한다면 고구려 남쪽에 위치한 '낙랑'은,

후한 광무제 대에 처음으로 한나라 영역이 된 겁니다.


대무신왕에게 멸망당한 최리의 낙랑과 광무제가 군현을 삼은 낙랑을

굳이 별개로 봐야만 하겠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맥락상 동일한 존재로 봐야 자연스럽지 않나 싶습니다.

본래 고구려 남쪽에 위치한, '최리'라는 인물이 다스리던 낙랑왕국이 있었고

고구려의 침략으로 멸망당했는데

7년 후 한나라가 '바다를 건너와' 그 땅을 점령하고 군현으로 삼음으로 인해

'살수 이남'의 땅이 한나라에 속했다는 겁니다.

선입관 없이 읽는다면 그렇게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한편 후한서의 동일 연도(ad 44) 기사에는

秋東夷韓國人率衆詣樂浪來附

라고 했다는데, 삼국사기 대무신왕 27년조 기사와 맥이 닿는 내용이 아닌가 합니다.

바다를 건널 정도의 대대적 군사행동이 정작 중국측 기록엔 왜 생략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낙랑'을 습취해 군현을 삼은 직후에 벌어진 일을 기록한 것으로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후한서에 생략된, '東夷韓國人'이 뜬금없이 '낙랑'에 '내부'해야 할 이유가

바로 삼국사기에 설명되어 있는 것이죠.


'살수'가 어느 강이냐 하는 지리고증 문제가 남습니다만

만약 강단 주류의 통설대로 지금의 청천강으로 본다면 아주 간단하게 아귀가 맞아들어갑니다.

고고학적으로 평양일대에 있었다는 '낙랑군'은

전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설치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 대무신왕이 멸망시킨 낙랑왕국의 땅을 후한 광무제가 탈취하여 설치한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평양 일대에 있던 낙랑군은,

위만조선이나 그 이전의 고조선 중심지와는 하등의 연관 관계가 없게 됩니다.

한무제가 설치했다는 '4군'중 하나인 낙랑군과는 아예 별개가 되는 것이죠.

'살수'가 청천강이 아닌 다른 강이라고 해도,

더 남쪽의 강이 아닌 다음에야, 더 북쪽의 강이라면 맥락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 듯 합니다.


이렇게 보면

지금의 평양 일대에서 나오는 '낙랑'유물들의 정체와

문헌상 위만조선의 중심지 및 강역과 고고학적 '평양 낙랑군'의 불일치 문제가 간단하게 설명됩니다.

애초에, 지금의 평양에 있었던 고고학적 '평양 낙랑군'은

위만조선 강역에 설치된 '4군'중 하나인 '낙랑군'과 상관없는 별개의 존재였던 겁니다.

소위 한사군 위치 논란은

단지 '낙랑'이란 명칭 때문에 오랜 세월 이어진 혼동의 아사리판에 불과했던 셈입니다.

또한 이후 시대의 문제들,

'평양'이나 '漢城'등의 위치 및 정체 문제

백제의 기원과 중심지, 백제왕의 작위명(낙랑태수) 문제 등과 관련해서도

하나의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여기선 다 쓸 수 없지만 정말 많은 것들이 설명될 것 같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듭니다.


'세기의 논쟁'에 대한 답이 거의 허무개그 수준이라

짧은 지식과 허접한 이해력으로 헛짚은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한 켠에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렇게 볼 경우 제가 생각하지 못한 어떤 문제나 모순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여러분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남북통일 18-02-20 18:04
   
평양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을 북한학계에서는 낙랑국으로 보고 있죠.
꼬마러브 18-02-20 18:07
   
     
지수신 18-02-21 19:08
   
윤내현 교수가 '최씨낙랑국'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음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윤내현 교수는 광무제 이후에도 한이 직접 지배하지 않았다는 견해 같군요.
감방친구 18-02-20 18:09
   
이 문제(대무신왕조 37, 44)는 저보다는 꼬마러브님의 견해가 명쾌합니다
저 역시 꼬마러브님의 견해를 따르고 있습니다
     
감방친구 18-02-20 18:13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47869&sca=&sfl=&stx=&sst=&sod=&spt=0&page=3


꼬마러브 17-06-09 12:45 답변
이에 대해서는 후한서와 책부원구의 기록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책부원구> 한국(韓國)의 염사 사람인 소마시 등이 낙랑으로 와서 공물을 바치니 황제께서 소마시를 염사읍의 군사로 삼아 낙랑군에 속하게 하였고 계절마다 조알하게 하였다.

 <후한서> 건무(建武) 20년(서기 44년), 한국의 염사 사람인 소마시 등이 낙랑군에 배알하고 조공을 바쳤다. 광무제는 한염사읍군에 봉하고, 낙랑군에 복속시켜 사철마다 입조시켰다.

- 이 기록에 나오는 한국이 낙랑국일 확률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낙랑국이 위치했던 평양지역이 원래 마한의 영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 기록에 따르면 낙랑국(한국)은 낙랑군에 속하기를 바랬으며, 서기 44년(건무20년)에 한사군의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어서, 삼국사기를 보면 의문점을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삼국사기> 대무신왕 27년(서기 44년)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므로,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 광무제가 살수 이남의 낙랑을 군현으로 삼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서기 44년입니다. 위의 <후한서>의 기록 역시 서기44년이고요. 다시 말해, 교차 검증이 된다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평양의 중국계 유물들이 후한시대의 것이 집중되서 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본다면 딱딱 들어맞죠.

낙랑국은 고구려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중국에 도움을 요청한 겁니다. 삼국시대 후기의 신라처럼 말입니다.

 꼬마러브 17-06-09 12:51 답변
다만, 실제로 당시 한나라가 한반도의 낙랑국을 군현으로 다스렸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낙랑군이 두 곳에 있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나라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쟁취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한나라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던 것이고.
앞서 말했듯 평양 지역의 중국계 유물도 이런 식으로 설명이 되는 겁니다.
          
지수신 18-02-21 19:06
   
감사합니다!
도배시러 18-02-20 18:13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 取其地爲郡·縣, 薩水已南屬漢 대무신왕
秋(7~9)東夷韓國人率衆詣樂浪來附 광무제 본기
가을 추秋는 7~9월을 의미합니다.  9월 광무제가 정벌하기전에 7~8월중에 동이의 한국인이 낙랑을 예방한거죠.
낙랑군이 멀쩡하게 작동하고 있었다는것이기에 군대를 보내서 정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광무제~낙랑 간에 정보교류가 정상적으로 이루졌다는 증거이고,
동이방문에 따른 황제의 의중을 알려는 시간이 소모된 과정이라 달을 특정하지 않고 추秋라 하는것입니다.

즉, 대무신왕편에 기록된 광무제의 정벌 기사와 광무제 본기에 기록된 동이의 방문기사...
둘중에 하나는 누군가가 조작한 것이죠.
     
도배시러 18-02-20 18:16
   
직전에 a.d 26 낙랑군 토호 왕조의 반란이 있었는데... 광무제가 즉시 진압합니다.
이때는 인과관계가 명확하죠. 반란 발생 => 토벌

대무신왕편은 인과관계가 맞지 않습니다. 낙랑군에 동이 방문 => 잘돌아가네 ? => 낙랑토벌, why ?
     
꼬마러브 18-02-20 18:16
   
이유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라고 하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도배시러 18-02-20 18:22
   
명분이 없죠.
직전에 신나라의 왕망이 고구려를 하구려라고 비하하는 교서를 내려서 관계가 악화되었죠.
이후 후한의 광무제가 이 문제를 해결하고 외교적으로 고구려를 복권시켜줍니다.
建武八年 32,高句驪遣使朝貢 光武復其王號 복권
建武九年 33 十二月,高句麗王遣使奉貢。

고구려와 관계개선이 착실히 진행되고 있는데, 왜 정벌을 ?
               
꼬마러브 18-02-20 18:32
   
광무제가 낙랑을 정벌하고 5년 후에 (49년)

고구려가 북평 어양 상곡 등을 습격합니다.

당시 고구려와 한나라는 서로 공격하다 화친하다를 반복했어요.
                    
도배시러 18-02-20 18:36
   
저런... 그건 고구려가 낙랑 행정업무믈 마비시켰을때 가능한거죠.
고구려가 방해해서 동이 한국인이 방문하려다가 포기 했습니다...
이럴때 정벌을 하는거죠.

게다가 광무제는 정복군주가 아닙니다.
먼곳에 있는 행정구역을 포기하고, 관료의 수를 줄이는데 집중한 군주이죠.

요서 유성군으로 가는 군사도로가 막히니 그냥 방치하는 군주입니다.

그리고 49년 사건은 대무신왕이 아닌 민중왕의 치적입니다.
대무신왕의 아들이 아닌 아우 민중왕이죠.
형제의 외교적 관점이 달랐다고해도 됩니다.
     
감방친구 18-02-20 18:21
   
사실 삼국사기조차도 중국사서를 교차 분석해 말그대로 편찬한 것이라서

삼국사기 사서 편찬자의 견해 가입이 어디까지인가 구별해내는 것도 예민한 문제라 봅니다
          
도배시러 18-02-20 19:25
   
민중왕의 중국 본토 공략은 교차검증이 되고요.
광무제의 낙랑정벌은 교차검증이 되지 않습니다.
     
지수신 18-02-21 19:16
   
제가 쓴 글 내용의 인과를 바꿔서
7~8월에 '동이한국인'의 내부, 즉 한나라에의 투항과 청병이 있었고
이에 광무제가 호응해 즉발적으로 군대를 파견해서 9월에 낙랑을 점령했다
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동이한국인'이 내부한 낙랑은 한반도 서북부의 멸망한 낙랑국이 아닌, 구 위만조선 영역의 낙랑군으로 보는게 맞겠죠.
어느 쪽이든 어색할 건 없어 보입니다만?

왕망의 하구려 드립 사건에서 보듯
어차피 고구려는 한나라에겐 이전부터 골치거리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고구려가 관련된 사건이 터졌다면 언제 출병해도 이상할 게 없죠.
고구려에 원한을 가진 낙랑국 유민들이 스스로 와서 청병했다면,
이건 한나라에겐 그야말로 기회는 찬스다 개꿀ㅋ! 인 상황입니다.
감방친구 18-02-20 18:32
   
살수이남의 그 살수는
그 기사의 사실비판 여부를 떠나서 청천강으로 봄이 타당하다 생각합니

그러나 강감찬의 귀주대첩의 살수는 요사에는 다하ㆍ타하 지간으로 돼 있는데 이 지역은 청천강을 비롯한 평북이 아니라 요사 지리지에 나오는대로 요양부에 타하가 있고 사산이 있는 만큼 혼하 상류ㅡ범하 일대에서 찾아야 옳다고 봅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 살수대첩의 살수는 평양을 결코 현 북한 평양이 아닌 재요동으로 봐야 함으로 역시 요동에서 그 위치를 찾아야 합니다

패수와 마찬가지로, 또 평양과 마찬가지로 살수 역시 한 곳이 아니었다 봐야 합니다

패수만 해도 위만이 서에서 동으로 건넌 패수1) 요사 지리지의 요동의 패수2)가 있고, 역시 요동에 있었을 고구려 평양의 패수3)가 있습니다

니하만 해도 요동의 패수의 별칭으로서 니하1), 강원도, 또는 함경도의 니하2)가 있습니다
     
지수신 18-02-21 19:30
   
살수.
그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걸 청천강으로 보게 되면, 훗날 살수대첩의 살수도 청천강이라면 장안성은 통설대로 지금의 평양에 있었던 것이고, 그렇다면 또 모순이 발생해버리죠. 평양은 선인 왕검 어쩌고 운운하는 내용들이 있으니...
감방친구 18-02-20 18:37
   
낙랑군은 요서에 있었고
낙랑국은 위만조선 교체기와 멸망기에 이 지역에서 현 서북한  지역으로 이주한 자들이 세운, 그러니까 서로 별개였다고 봄이 타당하다 보입니다

이에 이견의 근거가 될 사료 기록이 있으면 누군가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이왕 대에 등장하는 낙랑, 대방 등은 백제의 요서 거점과 관련된 것들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도배시러 18-02-20 18:44
   
초기 백제의 북쪽에 말갈, 동쪽에 낙랑군
이 문제가 요서백제로 해결이 될까요 ?
          
감방친구 18-02-20 19:42
   
거듭 말씀드리지만
백제 최초기는 요동 남부에서 패수를 경계로 고구려와 있었고

그 동쪽, 그러니까 서북한에 낙랑은 낙랑국으로 보는 것이죠

그리고

백제사에서 서기 1년 이후 245 년 동안 낙랑이 사라지는데
이는
1) 고구려로 인한 낙랑국 세력의 위축
2) 백제가 본거점을 요동에서 한반도로 이동

이렇게 상정하는 것이죠

그리고 246 고이왕 이후의 낙랑ㆍ대방은 요서 지역에 백제가 거점을 마련했다 보는 것이고요
신수무량 18-02-21 17:48
   
삼국사기는 김부식과 그 당시 저자들이 대륙 사서들과 우리의 사서들을 참조하여 기록한 기록들이 많습니다.
대륙사서들을 그대로 기록한 내용들도 많다고 하는데...
대부분의 대륙 사서들 그 늠의 춘추필법에 의한 기록들이 많은데 그걸 그대로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 생각합니다.

낙랑에 대한 참고해 볼만 한 단재 신채호의 견해:
조선상고사 3편  4장 4.3절 낙랑(樂浪) 25개국과 남삼한(南三韓) 70여국
낙랑의 여러 나라로 역사에 보인 것이 25이니, 조선(朝鮮), 감한(邯邯), 패수(浿水), 함자(含資:貪資라고도 ), 점선(黏蟬), 수성(遂城), 증지(增地), 대방(帶方), 사망(駟望), 해명(海冥), 열구(列口), 장잠(長岑), 둔유(屯有), 소명(昭明), 누방(鏤方), 제해(提奚), 혼미(渾彌), 탄렬(呑列), 동이(東 이), 불이(不而:不耐라고도함), 잠대(蠶臺), 화려(華麗), 두미(邪頭味), 전막(前莫), 부조(夫租):沃沮의 잘못인 듯) 등이니, 위의 25 국은 한서지리지에 한(漢) 낙랑군(樂浪郡)의 25 현(縣)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한서의 본문이 아니라,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려고 할 때에 그 신하와 백성 들의 적개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조선이 거의 다 지나의 옛 땅임을 위증 ( 僞證 ) 하고자 전대 지나의 역사책 중에서 조선에 관계되는 것틀을 죄다 가져다가 많이 고칠 때, 조선 고대의 낙랑 25 국을 낙랑군 25 현으로 고쳐 한서지리지에 넣은 것이니, 이는 제 4 편에서 다시 자세히 논술 하기로 한다

한서지리지 낙랑군(樂浪郡)은 위작이다.
http://history-backup.tistory.com/entry/%ED%95%9C%EC%84%9C%EC%A7%80%EB%A6%AC%EC%A7%80-%EB%82%99%EB%9E%91%EA%B5%B0%EF%A4%94%E6%B5%AA%E9%83%A1%EC%9D%80-%EC%9C%84%EC%9E%91%EC%9D%B4%EB%8B%A4

- 개인적인 생각은, 고대의 전쟁은 단순화시키면 땅따먹기다. (모든 전쟁이 그 나름의 명분이 있겠지만//징기스칸의 몽골제국이나, 서양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나, 로마제국 등도 그 범주안에 있다.)
이런 관점으로 봤을 때, 철천지 원수도 아니고 그럴만한 명분도 없는데 과연 한나라가 바다건너 지키지도 못할 지역, 낙랑, 지금의 평양지역을  뺏기 위해 군대를 보냈을까? 생각해보면 설득력이 부족하지요.
이렇게 봤을 때, 단재 신채호의 견해는 매우 공감이 가고, 더 연구해 볼(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Total 19,94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3762
19949 [한국사] 우리 고대사 #7 : 맥족의 이동 윈도우폰 03-22 233
19948 [한국사] 우리 고대사 #12 : 한민족과 재가승 윈도우폰 03-22 269
19947 [한국사] 우리 고대사 #11 : 한반도의 왜(倭) 윈도우폰 03-22 162
19946 [한국사] 우리 고대사 #10 : 진국의 한(韓)족 윈도우폰 03-22 280
19945 [한국사] 우리 고대사 #9 : 고조선 유민과 신라 윈도우폰 03-22 104
19944 [한국사] 우리 고대사 #8 : 고조선의 이동 윈도우폰 03-22 236
19943 [한국사] 우리 고대사 #6 : 예족의 이동 윈도우폰 03-22 87
19942 [한국사] 우리 고대사 #5 : 맥족과 예족 윈도우폰 03-22 245
19941 [한국사] 우리 고대사 #4 : 단군조선과 토템 윈도우폰 03-22 97
19940 [한국사] 우리 고대사 #3 : 홍산문화와 적봉지역 주민 윈도우폰 03-22 257
19939 [한국사] 우리 고대사 #2 : 하화족과 동이족 윈도우폰 03-22 108
19938 [한국사] 우리 고대사 #1 : 우리 민족의 조상 윈도우폰 03-22 283
19937 [한국사] 《인류와 한국조선의 변천사 - 한경대전》 (1) 에피소드 03-21 153
19936 [한국사] 아래 지도에 대한 내 관점... 고조선 중심의 열국시대… (4) 윈도우폰 03-21 375
19935 [한국사] 위만조선 시기 판도 (2) 위구르 03-20 260
19934 [한국사] 우리는 동이가 아니다. (2) 윈도우폰 03-19 561
19933 [한국사] 2022년 고고학계의 경주 월성 발굴조사 보고서 (6) 홈사피엔스 03-19 262
19932 [한국사] 삼국사기 이해 (1)신라사 (7) 홈사피엔스 03-16 572
19931 [한국사] 《(고)조선의 "가르침"과 직접민주주의 "국민의원"》 에피소드 03-14 330
19930 [한국사] 《고구려 최초의 이름은 '홀본(일본)' 이다》 에피소드 03-14 535
19929 [중국] 대륙계보? 아랫글 관련... (6) 윈도우폰 03-11 601
19928 [한국사] 《안문관,연운16주,송나라.. 화하족 관점 대륙계보》 에피소드 03-09 683
19927 [한국사] [한겨례] 2024/3/8 [단독] 고대 일본 권력층 무덤 장식품… (2) 외계인7 03-09 492
19926 [기타]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감미로운 모지혜(다니엘) - 인… 아비바스 03-08 657
19925 [한국사] 《고려 조상님들이 건축한, 서경(북경성)의 모습》 (7) 에피소드 03-08 639
19924 [기타] 동아시아에서의 국가의 형태라면? 그냥 잡설 (3) 윈도우폰 03-06 751
19923 [한국사] 발해 멸망 이유 - 야율아보기의 쿠데타 (4) 하늘하늘섬 03-05 1740
 1  2  3  4  5  6  7  8  9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