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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2-20 19:17
[한국사] 고구려의 중국계 영토 공략사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1,429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 발췌
(광개토태왕 일부 기록은 광개토태왕비문에서 발췌)

서기 1세기 유리왕부터 서기 5세기 장수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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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리왕

31년(서기 12)
한나라의 왕망(王莽)이 우리 병사를 징발하여 흉노를 치게 하였다. 우리 병사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왕망이 강제로 보내니, 모두 변방으로 도망쳐 법을 어기고 재물을 약탈하는 도적이 되었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머리를 베어서 서울로 보냈다. 왕망이 기뻐하며 우리 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고 고쳐 부르고, 이를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한나라 변경 지방을 침범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33년(서기 14)
봄 정월, 왕자 무휼을 태자로 삼아 군사와 국정의 일을 맡겼다.
가을 8월, 임금은 오이(鳥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계속 진군하여 한나라의 고구려현[현은 현도군(玄菟郡)에 속한다.]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2) 대무신왕

11년(서기 28)
가을 7월, 한의 요동(遼東) 태수(太守)가 병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20년(서기 37)
임금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27년(서기 44)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병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서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3) 모본왕

2년(서기 49)
봄, 장수를 보내 한(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요동 태수 채동(蔡彤)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접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4) 태조대왕

3년(서기 55)
봄 2월, 요서에 열 개의 성을 쌓아 한나라 병사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4년(서기 56)
가을 7월,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국경을 개척하여 동으로는 창해(滄海), 남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렀다.

53년(서기 105)
봄 정월, 부여 사신이 와서 호랑이를 바쳤는데, 길이가 1장 2척이며, 털 색깔이 매우 밝고 꼬리가 없었다.
임금이 한나라 요동에 장수를 보내 여섯 개 현을 약탈하게 하였다. 요동 태수 경기(耿夔)가 군사를 출동시켜 대항하여 막으니 임금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가을 9월, 경기가 맥인(貊人)을 격파하였다.

59년(서기 111)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현도(玄菟)에 속하기를 요구하였다.[『통감(通鑑)』에는 “이 해 3월, 고구려왕 궁(宮)이 예맥(穢貊)과 함께 현도를 쳤다.”고 하였는데, 혹 속하기를 원했는지 또는 침범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느 하나는 잘못 기록된 듯하다.]

66년(서기 118)
봄 2월, 지진이 났다.
여름 6월, 임금은 예맥과 함께 한나라 현도를 습격하여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69년(서기 121)
봄, 한나라 유주(幽州) 자사 풍환(馮煥), 현도 태수 요광(姚光), 요동 태수 채풍(蔡風)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침략해서 예맥의 우두머리를 쳐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았다. 임금이 아우 수성(遂成)을 보내 병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풍환, 요광 등을 역습하게 했다. 수성이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겠다고 말했는데 풍환 등은 이 말을 믿었다. 마침내 수성이 험한 곳에 의지하여 대군을 막으면서 몰래 군사 3천 명을 보내 현도, 요동의 두 군을 공격하여 그 성곽을 불사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여름 4월, 임금은 선비(鮮卑) 8천 명과 함께 요대현(遼隧縣)을 공격하였다. 요동 태수 채풍이 병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에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공조연(功曹掾) 용단(龍端)과 병마연(兵馬掾) 공손포(公孫酺)는 스스로의 몸으로 채풍을 호위하여 막았으나 채풍과 함께 진영에서 죽었다. 이때 사망자가 백여 명이었다.

12월, 임금이 마한(馬韓)과 예맥의 1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병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한나라 병사와 힘을 합쳐 막고 싸우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70년(서기 122)
임금이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입하였다. 부여왕이 병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격파하였다.[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한 것은 아마도 멸망한 후 다시 일어난 것인가?]

94년(서기 146)
가을 8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질하였다.

5)신대왕

4년(서기 168)
한나라 현도군 태수 경림(耿臨)이 침입해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였다. 임금이 스스로 항복하고 현도에 속하기를 빌었다.

5년(서기 169)
임금이 대가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현도 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서 부산(富山)의 적도들을 토벌하였다.

8년(서기 172)
겨울 11월, 한나라에서 많은 병사를 이끌고 우리나라로 쳐들어왔다. 명림답부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쫓아가서 좌원(坐原)에서 싸우니 한나라 군사들은 크게 패하여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6) 고국천왕

6년(서기 184)
한나라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쳤다. 임금이 왕자 계수(罽須)를 보내어 한나라를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임금이 직접 날쌔고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한나라 군사와 좌원(坐原)에서 싸워 물리쳤다. 베어진 적의 머리가 산처럼 쌓였다.

19년(서기 197)
중국에 큰 난리가 일어나 한나라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항복하여 오는 자가 대단히 많았다. 이때가 한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2년이었다.

7) 산상왕

21년(서기 217)
가을 8월, 한나라 평주(平州) 사람 하요(夏瑤)가 백성 1천여 가(家)를 이끌고 항복해 왔다. 임금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책성(柵城)에 배치하였다.

8) 동천왕

16년(서기 242)
임금이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깨뜨렸다.

20년(서기 246)
가을 8월, 위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에서 나와 침입하였다.

21년(서기 247)
봄 2월, 임금은 환도성이 병란을 겪어서 다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9) 중천왕

12년(서기 259)
위나라 장수 위지해(尉遲楷)[이름(楷)이 장릉(長陵, 고려 인종)의 이름에 저촉된다.]가 병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임금이 정예 기병 5천 명을 선발하여 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 싸워 이기고, 8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10) 서천왕

11년(서기 280)
양맥(서)과 숙신(동북)의 난 평정과 복속

11) 봉상왕

2년(서기 293)
가을 8월, 모용외(慕容廆)가 침입하였다. 신성 태수인 북부(北部) 소형(小兄) 고노자(高奴子)가 기병 5백을 거느리고 임금을 맞이하고, 적군과 만나 분발해 그들을 공격하니, 모용외의 군사가 패하여 물러났다.

5년(서기 296)
가을 8월, 모용외가 침입하여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렀다. 임금은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았다. 고노자가 선정을 베풀어 권력과 명성이 높아지니, 모용외는 다시 쳐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12) 미천왕

3년(서기 302)
가을 9월, 임금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공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12년(서기 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14년(서기 313)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15년(서기 314)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帶方郡)을 침공하였다.
16년(서기 315)
봄 2월, 현도성을 침공하여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20년(서기 319)
겨울 12월, 진(晉)나라 평주자사(平州刺使) 최비(崔毖)가 도망쳐왔다. (그후 최비가 단씨, 우문씨, 고구려와 함께 연의 극성을 공격하려다 실패) 우리나라 장수 여노(如孥)가 하성(河城)을 막아 지키고 있었는데, 모용외가 장군 장통(張統)을 보내 공격하여 그를 사로잡고, 그 무리 천여 가(家)를 포로로 잡아 극성으로 돌아갔다. 임금은 자주 병사를 보내 요동을 침공하였다. 모용외는 모용한(慕容翰)과 모용인(慕容仁)을 보내 우리를 치게 하였는데, 임금이 동맹을 구하자 모용한과 모용인이 곧 돌아갔다.

21년(서기 320)
겨울 12월, 병사를 보내 요동을 침공하였는데, 모용인이 막아 싸워 우리가 패하였다.

13) 고국원왕

5년(서기 335)
봄 정월, 북쪽에 신성(新城)을 쌓았다.

9년(서기 339)
연(燕)나라의 왕 모용황(慕容皝)이 침입하여 그의 병사가 신성에 이르렀다. 임금이 동맹을 요청하자 그들이 곧 돌아갔다.

12년(서기 342)
봄 2월,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았다.
가을 8월, 임금이 환도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겨울 10월, 연나라 왕 모용황이 용성(龍城)으로 수도를 옮겼다. 11 월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입해)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싣고, 궁궐 창고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보물을 훔쳤으며,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운 뒤에 환도성을 무너뜨리고 돌아갔다.

15년(서기 345)
겨울 10월, 연나라 왕 모용황이 모용각(慕容恪)에게 우리나라를 침공케 하여 남소(南蘇)를 무너뜨린 후 수비군을 남겨두고 돌아갔다.

25년(서기 355)
봄 정월, 임금이 왕자 구부(丘夫)를 왕태자로 삼았다.
겨울 12월, 임금이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볼모와 공물을 바치면서 그 어머니를 돌려보내 주도록 요청하였다. 연나라 왕 모용준이 이를 허락하고, 전중장군(殿中將軍) 조감(刁龕)에게 왕의 어머니 주씨를 호송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임금에게 이전과 동일하게 정동대장군영주자사(征東大將軍營州刺史)의 작호를 주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하였다.

40년(서기 370)
진(秦)나라의 왕맹(王猛)이 연나라를 격파하였다. 이에 연나라의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우리나라로 쫓겨 왔다. 임금이 그를 붙잡아 진나라로 보냈다.

14) 고국양왕

2년(서기 385)
여름 6월, 임금이 병사 4만을 출동시켜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연나라 왕 모용수(慕容垂)가 대방의 왕 모용좌(慕容佐)에게 용성(龍城)을 수비하게 하였다. 모용좌는 우리 병사가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사마(司馬) 학경(郝景)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돕도록 하였다. 그러나 우리 병사가 이들을 격파하였다.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키고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겨울 11월, 연나라의 모용농(慕容農)이 병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요동과 현도 두 군을 회복하였다. 예전에 유주(幽州), 기주(冀州) 등지에서 다수의 유랑민이 우리에게 투항했었는데, 모용농이 범양(范陽)의 방연(龐淵)을 요동의 태수로 삼아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15) 광개토태왕

391 년 9월, 임금이 병사를 보내 북쪽으로 거란을 공격하여 남녀 5백 명을 사로잡고, 또한 본국에서 거란으로 도망갔던 백성 1만 명을 달래어 데리고 돌아왔다.

패려(稗麗)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이 그치지 않으므로), 영락(永樂) 5년(395) 을미(乙未)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部落) 600∼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五備□)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9년(서기 400)
봄 정월, 임금이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 연나라 왕 모용성(慕容盛)이 우리 임금의 예절이 오만하다는 이유로 직접 병사 3만을 거느리고 공격해왔다. 그들은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모용희(慕容熙)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新城)과 남소(南蘇)의 두 성을 빼앗고, 7백여 리의 땅을 점령하여 그들의 백성 5천여 호를 이주시켜 놓고 돌아갔다.

11년(서기 402)
임금이 병사를 보내 연나라의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였다. 연나라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13년(서기 404)
겨울 11월, 군사를 출동시켜 연나라를 공격하였다.
14년(서기 405)
봄 정월, 연나라 왕 모용희가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성이 함락될 즈음에 모용희가 장병들에게 명령하였다.
“성에 먼저 오르지 말라. 성이 평정되면 내가 황후와 함께 가마를 타고 들어가리라.”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성 안에서는 삼엄한 대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끝내 성을 빼앗지 못하고 물러갔다.

15년(서기 406)
겨울 12월, 연나라의 왕 모용희가 거란을 공격하기 위하여 형북(陘北)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거란의 병사가 많은 것을 겁내어 돌아가려 하다가, 수레의 무거운 군수품을 버리고 가벼운 몸차림을 한 병사들을 데리고 우리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연나라는 3천여 리를 행군하여 왔기 때문에 병사와 말이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는 병사들이 길에 줄을 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17년(서기 408)
봄 3월, 북연(北燕)에 사신을 보내 같은 종족으로서의 예를 베풀었다. 북연의 왕 모용운(慕容雲)이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어 답례하였다. 모용운의 조부 고화(高和)는 고구려의 방계 혈족인데, 자칭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이라 하여, ‘고’를 성씨로 삼았다. 예전에 모용보(慕容寶)가 태자가 되었을 때 모용운이 무예가 뛰어나서 태자를 모시도록 하였는데, 모용보가 모용운을 아들로 삼아 모용씨라는 성을 주었다.

16) 장수왕

15년(서기 427)
평양(平壤)으로 수도를 옮겼다.

23년(서기 435)
여름 6월, 임금이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역대 황제의 이름을 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위나라의 세조(世祖)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서 황제들의 계보와 이름을 기록하여 보내게 하였으며,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보내 임금을 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영호동이중랑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임금이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였다. 위나라의 사람들이 연나라를 자주 공격하였기 때문에 연나라의 형세가 나날이 위급해졌다. 연나라 왕 풍홍(馮弘)이 말하였다.
“만일 사태가 위급하면 동쪽에 위치한 고구려에 잠시 의존하며, 미래를 위한 대책과 방법을 세우겠다.”
비밀리에 상서(尙書) 양이(陽伊)를 우리나라에 보내 받아주기를 요청하였다.

24년(서기 436)
연나라왕이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자제를 인질로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위나라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병사를 동원하여 연나라를 침입하기 직전에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려 주었다.

여름 4월, 위나라가 연나라의 백낭성(白狼城)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임금은 장수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에게 병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연나라 사신 양이를 따라 화룡(和龍)에 가서 연나라왕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갈로와 맹광이 연나라의 성에 들어가, 병사들에게 헌 옷을 벗게 하고, 연나라의 무기고에 있는 정교한 의장을 내주어 입게 하였다. 그들은 대규모로 성을 약탈하였다.

5월, 연나라왕이 용성(龍城)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동쪽 고구려로 이주하도록 하고, 궁전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열흘 동안 꺼지지 않았다. 이동하는 부녀자들에게는 갑옷을 입혀 행렬의 안쪽에 서게 하고, 양이 등은 병사를 거느리고 행렬의 바깥 쪽에 서게 하였으며, 갈로와 맹광은 기병을 거느리고 행렬의 끝에 서서 수레를 나란히 몰아 진군하였다. 행렬의 길이가 80여 리에 이어졌다. 위나라왕이 이 소문을 듣고, 산기상시(散騎常侍) 봉발(封撥)을 고구려에 보내 연나라왕을 위나라로 보내달라고 하였다. 임금이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왕에게 편지를 바치면서, 연나라왕 풍홍과 함께 위나라왕의 교화를 받들겠다고 하였다. 위나라왕은 임금이 자신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논의하였다. 그는 농우(隴右) 지방의 기병을 출동시키려 하였으나, 유혈(劉絜)ㆍ 낙평왕((樂平王) 비(丕) 등이 반대하자 이를 중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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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시러 18-02-20 19:20
   
12월, 임금이 마한(馬韓)과 예맥의 1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병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한나라 병사와 힘을 합쳐 막고 싸우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70년(서기 122)
임금이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입하였다. 부여왕이 병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격파하였다.[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한 것은 아마도 멸망한 후 다시 일어난 것인가?]
=====> 여기에 나오는 마한은 위지동이전의 삼한강역 4천리를 보강해주는 문헌이죠.
꼬마러브 18-02-20 19:23
   
대무신왕 20년(서기 37)
임금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 여기의 낙랑을 낙랑군으로 볼 수 있을까요? 중국 사서에는 서기 37년에 고구려가 낙랑군을 공격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애초에 낙랑군은 대무신왕 이후에도 존속하고요...

아마 여기에 나오는 낙랑은, 낙랑국의 부흥세력? 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중국계 영토 공략사"에는 포함되지 않는 기록입니다.
     
감방친구 18-02-20 19:34
   
저는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37, 44 기사 낙랑은 낙랑국으로 봅니다
     
감방친구 18-02-20 19:36
   
저거는 같이 놓고 보려고 일부러 포함시킨 겁니다

고구려의 활발한 공략사로 비추어 서북한은 중국계 영토라는
게 성립될 수 없는 것이죠
남북통일 18-02-20 19:25
   
其地,東至新羅,西渡遼水二千里,南接百濟,北鄰靺鞨千餘裏。治平壤城。其城,東西六裏,南臨浿水
-북주서
고구려땅은 동으로 신라에 닿고 서쪽으로 요수를 건너 2천리이고 남으로 백제에 접하고 북으로 말갈과 천여리 거리이다.  왕은 평양성에 있는데 동서 6리이고 남쪽으로 패수에 접해있다.
永樂五年,歲在乙未,王以碑麗不息,□人躬率往討。過富山負山至鹽水,上破其丘部洛六七百當,牛馬群羊不可稱數。-광개토대왕릉비
영락5년은 을미년이다. 왕이 비려(碑麗)가 고구려인을 돌려주지 않기 때문에 몸소 토벌에 나섰다. 부산(富山)을 넘어 산을 등에 지고 염수(鹽水)에 이르러 비려의 3부락 6∼7백 령(營)을 파하고 소, 말, 양떼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 두 자료만 해도 고구려의 거대함을 증명하죠.
     
도배시러 18-02-20 19:28
   
문헌기록에 마한이 더 거대한 연맹체였습니다.
삼한의 종주가 마한이고, 마한 강역이 방4천리일대, 고구려, 부여는 방2천리 국가
          
남북통일 18-02-20 19:30
   
고구려가 동서 6000리라는 기록도 있는데요.
하다못해 그 기록도 고구려 최전성기 시절이 아닌 수당때입니다.
제가 제시한 광개토대왕릉비 기록도 고구려가 내몽고, 동몽고 지역까지
진출했다는 일종의 증거입니다.
               
도배시러 18-02-20 19:32
   
그 기간은 길지 않습니다.
통전에 동서 6천리 까지는 좋은데... 고구려 남북의 강역이 2천리를 넘어간 기록은 없습니다.

즉, 고구려는 동서가 길고 남북이 좁은 국가입니다.
                    
남북통일 18-02-20 19:36
   
과거 영토 개념은 모호하기 때문에, 세력권으로 표기하자면
실위, 두막루, 지두우, 말갈애들 모두 엄연히 고구려땅입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남북 4000리는 나오고요.
그리고 고구려 전성시대는 광개토태왕~문자명왕 사이이기 때문에
동서 6000리도 최솟값으로 봐여합니다.
                         
도배시러 18-02-20 19:38
   
북주서에서 西渡遼水二千里  해당하는 강역을 가진 고구려왕은 평원왕입니다.
북위의 분열기이죠.
감방친구 18-02-20 19:52
   
이거를 그냥 보면 안 되고
한ㅡ신ㅡ후한ㅡ위ㅡ진ㅡ북위의
영토 축소 및 교치상과 같이 놓고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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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3851
19895 [한국사] 만주 동북평원(요하평원,송눈평원,삼강평원) (2) 하이시윤 02-25 603
19894 [한국사] 만주 3대평원ㅡ송눈평원 (4) 하이시윤 02-25 527
19893 [한국사] 글림킴이 올린 고구려 지도 재조명 되고 있다? 요즘 … (5) 아비바스 02-24 595
19892 [한국사] 조선 초기 북방 영토 분석: 신호수 지역 보리스진 02-15 1180
19891 [중국] 지나족 족보 세탁 - 지나 한족의 시작은 1930년 중화민… Korisent 02-09 1411
19890 [한국사] [ KBS ] 고려거란전쟁 양규장군 전쟁씬 모음 아비바스 02-09 882
19889 [기타] [K-문화] 세계인들을 열광시킨 케이팝 GODS 아비바스 02-09 749
19888 [한국사] 고려의 영토 분석: 개주, 선성을 중심으로 (지도 첨부 보리스진 02-06 987
19887 [기타] 동아시아 19세기 복장 Korisent 02-04 1384
19886 [한국사] 고려말의 파사부 행정구역 분석 보리스진 02-02 925
19885 [한국사] 과거를 용서하되 잊지는 맙시다.. (4) dtan 01-30 1051
19884 [한국사] 한국사의 대상범위 하이시윤 01-28 998
19883 [한국사] 압록강과 태자하의 어원 비교 분석 (2) 보리스진 12-22 1942
19882 [기타] [K-문화] 세계인들이 한국 게이머 만나면 치를 떠는 … 아비바스 12-18 2449
19881 [기타] [K-문화] 글로벌 게임회사들, K-문화에 젖어들다. ( 한… 아비바스 12-16 1578
19880 [기타] [K-문화] 유튜브를 장악한 글로벌 K-pop 모음 아비바스 12-16 1984
19879 [한국사] 국제정치학과 유튜버 - "국뽕" (1) 아비바스 12-15 1400
19878 [세계사] 캘리포니아 석사 썬킴, 정형돈 - 대환장 지식파티 (1) 아비바스 12-15 974
19877 [한국사] 역사학자 임용한, 정형돈 - 전쟁사의 모든 것 아비바스 12-15 1061
19876 [한국사] 역사학자 임용한, 정형돈 꿀잼 전쟁 이야기 아비바스 12-15 811
19875 [한국사] 서울의 봄 실존인물 + 실제 역사 파스크란 12-14 1231
19874 [한국사] 고려의 대륙 동부 영토 - 화북, 산동,강소 (23) 파스크란 12-13 1626
19873 [기타] 왜의 실제 위치, 왜 어디에 있었나 (6) 관심병자 12-10 1840
19872 [한국사] [FACT] 황현필 - 드라마에서 다루지 않은 거란의 1차 … 아비바스 12-02 1453
19871 [한국사] [FACT] KBS 호평일색 "고려거란전쟁" ‘역사고증에 첨단… 아비바스 12-01 1651
19870 [한국사] [FACT] 역사유튜버 글림킴, 규원사화 원문 번역문 아비바스 11-29 1334
19869 [한국사] 고려영토 논란 종결. 지도, 고려사<고려거란전쟁?>… (9) 하늘하늘섬 11-27 2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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