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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2-22 09:41
[한국사] 4) 환단고기에서 밝혀주는 역사
 글쓴이 : 스리랑
조회 : 1,261  





환단고기를 통해서만 밝혀지는 동명왕의 정체 : 동명은 주몽이 아니다.

 

동명신화는 최초의 기록인 <<논형>>(1세기)부터 6세기 문헌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아닌 부여의 건국신화로 구분하고 있는데 반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동명왕편> 등에서는 주몽의 건국신화로 되어있다. 따라서 동명이 어떻게 왜곡됐느냐 하는 실체가 오직 <<환단고기>><삼성기>에서만 밝혀지고 있다.

 

BCE108년 한나라 무제가 요하의 우거정권(우거는 번조선을 찬탈한 위만의 손자)을 멸한 뒤 군현을 설치하고자 대군을 동원하여 동방(당시 북부여)을 침략했다. 이 때 거국적으로 위병을 일으켜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한족 침략군을 막아낸 북부여의 구국영웅이 고두막한이다.


고조선 47세 고열가단군의 후손인 그는 거병에 앞서 졸본에서 동명왕으로 즉위하였고, 훗날 민심을 얻어 북부여 5대단군에 즉위하였다. 고두막학은 동명이라는 나라의 왕 (동명왕)으로 22년간 재위하였고 북부여 5세 단군(고두막 단군)으로 27년간 재위하였으나 합하여 49년간 왕과 단군으로서 나라를 다스렸다.

 

동명은 흔히 고구려를 개국한 주몽으로 알려져 있으나 연개소문의 아들인 연남산의 묘지명에

"옛날에 동명은 이군에 감응되어 표천을 건넜고, 주몽은 광명으로 잉태되어 패수에 임하여 도읍을 열었다(昔者 東明感氣 踰俵川而啓國 朱蒙孕日 臨浿水而開都) 라고 하여 동명과 주몽이 전혀 다른 인물로 기록되어있다.

 


천남산묘지명(泉男産墓誌銘).

제작년 : 702년(주(周) 측천무후(則天武后) 장안(長安) 2년). 출토 및 소장 : 1922년 낙양 출토, 북경대학교 원고고학실 소장.

크 기 : (誌) 가로 75cm, 세로 75cm (蓋) 가로 76cm, 세로 76cm. 형 태 : 정방형. 탁본 - http://goo.gl/CCq57

 

大周故金紫光祿大夫行營繕大匠上護軍遼陽郡開國公泉君墓誌銘幷序」

君諱男產遼東朝鮮人也昔者東明感氣踰㴲川而開國朱蒙孕日臨浿水」

而開都威漸扶索之津力制蟠桃之俗雖星辰海嶽莫繫於要荒而俎豆詩」

書有通於聲敎承家命氏君其後也乃高乃曾繼中裏之顯位惟祖惟禰傳


대주(大周)의 고(故)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행영선대장(行營繕大匠) 상호군(上護軍) 요양군개국공(遼陽郡開國公) 천군(泉君)의 묘지명(墓誌銘) 및 서(序) 군(君)의 휘(諱)는 남산(男産)이니 요동(遼東) 조선인이다.


옛날에 동명(東明)이 기(氣)를 느끼고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朱蒙)은 해를 품고 패수(浿水)에 임해 수도를 열어, 위엄이 해뜨는 곳[扶索]의 나루에 미치고 세력이 동쪽 지역[蟠桃]의 풍속을 제압하였으니 비록 성진(星辰)과 바다와 산악이 변방지역[要荒]에 걸려 있지 않았어도 예절[爼豆]과 시서(詩書)는 성교(聲敎)에 통하여, 가(家)를 잇고 씨(氏)를 받았으니 군(君)은 그 후예이다.


 

천(연)남산 묘 관련 자료 http://www.dragon5.com/news/news2005101802.htm

2010년 역사스페셜 동명루트를 찾아서 http://blog.daum.net/santaclausly/11793527

 



역사스페셜 동명루트를 찾아서 편에서는 동명을 이렇게 결론 내리고 있다.


“부여의 건국시조가 동명왕이다. 그동안 동명왕을 주몽으로 알고 있던 우리에게 조금 당혹스런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삼국사기나 동명왕편을 비롯한 여러 사서들에선 주몽을 동명왕으로 전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12세기 이후에 기록된 것들이다. 다만 그가 왜 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과 같은 이름을 같게 됐는지 또 건국신화 역시 비슷한 내용을 갖게 됐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 한 가지 있다.


‘朱蒙自北夫餘道難 至卒本夫餘’ 즉 주몽이 북부여에서 도망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는 삼국사기의 내용이다. 주몽이 다름 아닌 부여출신이란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는 강한 부여 계승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수서령(收書令) : 중국보다 앞선 역사를 드러내는 불온서적(?)을 모두 수거하라.

 

수서령(收書令). 수서령이란 조선시대 세조와 예종 · 성종 때 8도 관찰사에게 명령해서 예로부터 전해져온 희귀서적을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일이다. 지금 이 서적들은 전하지 않지만, 우리 역사의 자부심을 담고 있는 책들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러한 수서령이 내려진 책들 중에서 환단고기에 실려있는 책과 제목이 일치하는 것이 발견된다.


 

○ 8도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 비사 · 대변설 · 조대기 · 주남일사기 · 지공기· 표훈삼성밀기 · 안함노원동중 삼성기 1백여 권과 동천록 · 마슬록 · 통천록…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 세조 3년 5월 26일 (무자)

 


○ 세조 7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5월 26일(무자)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의 문서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다.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노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 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환단고기에 소개된 '행방불명된 사서 13종'이다.

1.대변경大辯經 2.표훈천사表訓天詞 3.삼성밀기三聖密記 4.고려팔관기高麗八觀記 5.배달유기倍達留記 6.삼한비기三韓秘記 7.신지비사神誌秘詞 8.오제설五帝說 9.유기留記 10.태백진훈太白眞訓 11.진역유기震域留記 12.진단구변도震檀九變圖 13.조대기朝代記

 

이것과 수거목록에 나온 사서들을 비교해보자.

'표훈삼성밀기', '대변경','조대기'는 세조 3년 수거목록에 그 이름이 확인되고, (환단고기에 실린 '삼성기'는 세조때 이미 나옴) '표훈천사', '삼성밀기'는 예종 1년 수거 사서목록에서 확인된다. 특이한 것은 세조때 '표훈삼성밀기'가 예종때와 환단고기에는 '표훈천사', '삼성밀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당시 이러한 책들은 왜 거두어들였을까?

 

'내가 괴산에 유배되었을 때 적소謫所에서 근신하고 있으니 너무 무료하여 집에 간직해 두었던 사전史典들과 노고들에게 들은 이야기, 그리고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16년 만인 경진년(중종 15년 1520)에 찬수관纂修官으로 있을 때 내각에 소장된 비밀스런 책들을 읽고 이들을 모두 합해서 책을 엮었는데 이름하여 「태백일사」라 한다.' (『태백일사』 발문跋文)



환단고기 중의 태백일사를 쓴 이맥의 발문이다. 이맥은 역시 환단고기에 실려있는 '단군세기'를 지은 고려시대 행촌 '이암'의 현손자이며, 또 환단고기를 감수한 구한말 해학 '이기' 선생이 그의 후손이다. 여기서 '태백일사'란 우리 동이족 역사라는 뜻이다. 실제로 태백일사에는 단군조선과 그 이전 환인의 환국, 환웅의 배달국 기록까지 전해진다.


이맥 선생이 내각의 '비장도서'들을 보며 자신이 몰랐던 우리상고사에 큰 충격을 받고 '태백일사'를 엮었음을 알수있고, '이들을 모두 합해서' 책을 냈다는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맥 선생이 태백일사를 엮을때가 그 후인 중종때이므로 예종때 목록에 있는 '표훈천사'와 '삼성밀기'등을 참고로 편찬한 것이다.

 


○ 예종 7권,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9월 18일(무술)

예조(禮曹)에 전교하기를,"[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이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文泰)·옥거인(玉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 및 모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道)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道)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상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綿布) 50필(匹)를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 하였다.




 

○ 성종 원년 12월 9일(무오)


여러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전일에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

《도증기(道證記)》《지리성모(智異聖母)》《하소량훈(河少良訓)》문태(文泰)·왕거인(王居仁)·설업(薛業) 삼인기(三人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 명경수(明鏡數)와 무릇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 등 여러 서책(書冊)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 보낼 일을 이미 하유(下諭)했으니..



 


단군조선의 비파형동검은 단군조선이 중국과 구별되는 선진 청동문화를 가진 정치세력 집단이었음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적, 유물이다. 이 정치집단의 분포도는 환단고기가 말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와 역사적 강역이 일치한다. 비파형동검의 분포는 만주, 한반도, 중국대륙의 동편으로 환단고기가 설명하고 있는 역사 강역과 완전히 일치하며 그 연대도 일치한다.


(cf. 한반도에서도 서기전 25세기로 올라가는 청동기 유적이 두 곳이나 발굴되었다. 전라남도 영암군 장천리 유적의 청동기시대의 집자리와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의 고인돌 무덤은 방사성탄소 측정에 의하여 서기전 250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이 같은 연구결과들을 종합해볼 때 단군조선의 건국연대가 고고학적 신뢰성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기전 2500년이라는 연대는 고조선의 건국연대인 서기전 2333년보다 170여 년 앞선 것으로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고조선의 건국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여 진다. )

 


고구려 유장 이정기가 중국 중동부 15개 주에 대제(大齊, 평로치청)라는 큰 나라를 세우고, 4대 58년간 다스린 기록이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처음 나오는데, 이것도 1997년 처음으로 발간된 책 <고구려를 위하여>(김병호, 하서출판), 그리고 KBS 역사스페셜 ‘중국 속에 또 다른 고구려가 있었다, 이정기 왕국(2001.5.16)’에서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


 





환단고기 속 역사기록을 천문과학으로 밝혀내다.


戊辰 五十年 五星聚婁


재위 50년 무진(BCE 1733)년에 오성五星이 누성婁星에 모이고 황학이 날아와 금원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재위 61년 기묘년(BCE 1722)년에 흘달 단군께서 붕어하시자 만백성이 음식을 끊었고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죄수와 포로를 석방하고 ,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였다. 해를 넘겨서 장례를 치렀다. 우가 출신 고불이 즉위하였다.



누성婁星 : 황도를 따라 천구를 28등분한 별자리를 이십팔수라 한다. 천상의 별자리를 동서남북 4궁으로 나누고 각 궁을 다시 7등분하여 도합 28구로 만들었다. 누성婁星은 서쪽 방위에 위치한 별이다.



단군조선시대, 13대 단군이신 흘달단군 때에

흘달단군 재위 오십년되던 무진년에 다섯 별이 28수의 하나인 루성婁星에서 결집하였다는 기록이다. 환단고기에 있는 이 내용을 천문자료로 과학적으로 풀어내다.


1993년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 기록의 과학적 검증

박창범 교수와 고 라대일 박사가 1993년 9월 韓國上古史學報 제14호에 발표한 논문을 간략히 정리한 초록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 기록의 과학적 검증 초록


단군조선 시대의 역사가 기록된 현존하는 대표적인 사서로는 발해시대 대야발 (大野勃)이 쓴 단기고사와 고려시대 이암(李癌)이 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 편이 있다. 이 책들에는 10회의 일식기록, 1회의 오행성(五行星) 결집과 강한 조수현상 등의 천문현상 기록들이 있었다. 또한 3회의 양일병출(兩日竝出, 두 해가 나란히 뜸) 기록, 1회의 백일관홍(白日貫虹, 흰 태양이 무지개를 뚫음) 기록, 4회의 지진기록 외에 홍수, 가뭄, 태풍 등 다수의 자연현상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자연현상이 실존하였음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사서들의 문헌학적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고, 따라서 단군조선의 역사적 실재성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오행성 결집현상을 통한 검증


BC1733년에 일어났다고 기록된 다섯 행성들의 결집 현상을 검증하기 위하여 BC2000년에서 BC1450년까지 550년간 오행성들의 위치를 계산하였다. 그 결과 이들이 하늘에서 가장 가까이 모인 때는 BC1953년 2월 25일이고, 두 번째로 가까이 모인 때는 BC1734년 7월 13일이었다. 따라서 단기고사와 환단고기에 나오는 오행성 결집기록은 BC1734년에 일어난 현상과 쉽게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두 사서가 현실과 무관하게 쓰인 위작이라면 자연현상 기록이 임의의 해에 등장할 것이고, 이 경우 기록이 실존했던 자연현상과 1년 차이로 우연히 들어맞을 확률은 얼마인가?



오행성 결집의 경우 550년간 2회의 강한 결집이 있었고, 그중 하나가 기록과 1년 차이로 있으므로 무작위 과정에 의해 이러한 정도의 일치를 보일 확률은 22/550 = 0.007이다. 따라서 이런 기록을 무작정 사서에 삽입해서는 이 정도의 일치를 보이기가 매우 힘들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현재는 일반 대중들이 별자리 관측 프로그램을 유료나 무료로 다운받아 사용할 수 있게 대중화되었다. 또다른 천문학 박사 박석재 위원도 한국 상고사에 대한 책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나오는 "무진 오십년 오성취루(戊辰 五十年 五星聚婁)"라는 기록에 주목했다.


이는 무진 50년(기원전 1733년) 다섯 행성이 루(婁)라는 별자리에 모였다는 기록이다. 그는 천문 소프트웨어 '별바라기'를 이용해 그해 7월 저녁 하늘에 화성, 수성, 토성, 목성, 금성이 나란히 늘어서는 우주쇼를 연출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환단고기의 기록이 천문학적으로 옳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몇백 년에 한 번씩 일어나는 이런 천문현상을 임의로 맞춘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불가능하다...(이하생략)





29세 단군 마휴 시절 조수 현상 검증 ,썰물 기록.


29세 단군 마휴(二十九世 檀君 摩休)의 재위기간은 34년이다(在位 三十四年).

병술 9년(丙戌 九年 BCE 935)에 남해조수(南海潮水)가 석자 후퇴했다. 신해 34년(辛亥 三十四年) 단제께서 붕어하시고(帝 崩) 태자 내휴가 즉위하였다(太子 奈休立).
 


29세 단군 마휴 단제의 기사를 보면 "마휴 9년(BCE 935년) 남해에 썰물이 세 척이 물러갔다" 이 썰물현상은 달이 불규칙한 궤도운동을 하며 조석력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 박창범 교수는 BCE 935년을 기준으로 전후한 200년간 해와 달의 위치를 계산하고 이들이 지구에 미친 조석력의 세기를 조사해 보았다. 그 결과 4년 후인 BCE 931년에 가장 강한 조석력이 발생했음을 발견했다. 이 썰물 기사가 사서에 임의로 삽입될 수 있는 확률은 0.004라고 한다. 옛 기록과 실제현상이 이 정도로 맞아떨어지기란 역시 어렵다는 것이다.


박창범 교수는 그의 저서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점들(오성취루,썰물현상 검증 등)로 미루어 볼때 학자들은 이 책들을 마냥 무시할 것이 아니라 옥석을 가리는 마음으로 책의 내용을 진지하게 재고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하였다.






중국사서 중의 하나인 신당서에는 당의 가언충이 고구려비기를 인용하여 ‘고구려는 900년을 넘지 못하고 80 먹은 당의 장수에게 망한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 그런데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당의 가언충이 고구려는 900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라고 지적했다. 즉, 고구려 900년 역사에 대해 김부식이 잘못 판단한 것이다. 환단고기에서는 당의 가언충이 올바르게 얘기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이 고주몽으로부터 13세손이라고 하였는데,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광개토대왕이 고주몽의 17세손이라 기록하였다. 그 비밀이 환단고기를 통해서 풀린다.


환단고기를 보면,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로부터 4세손이 고주몽이므로 따져보면 17세손이 된다. 이것을 통해 고구려 역사 900년 미스테리도 풀린다. BCE 232년에 해모수가 단군이 되고, 고구려가 AD 668년에 망했으므로 정확히 900년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당나라 고종과 가언충의 대화.

 

서기 668년에 당나라 고종의 신하인 가언충은 30년 가까이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지쳐 있는 자신의 주군을 격려하기 위한 내용이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 편에 나오는 말이다.


“고구려 ‘건국 900주년이 되는 해에 80대장에 의해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고구려 서적의 비기를 활용하여, 고구려 건국 900주년이 되는 금년에 80세 고령의 이적 장군을 파견해서 공격하면 올해는 꼭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실제로 그 해에 80세의 이적 장군이 평양성을 함락함에 따라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당나라가 서기 668년에 고구려에 대한 총공세를 강화한 것이나 평양성 함락의 영광을 일부러 80세 노장에게 맡긴 것은, 민간의 예언서를 활용하여 고구려 멸망이 마치 하늘의 조화에 의한 것처럼 비춰지도록 한 것이다.


당 고종과 가언충의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서기 668년의 당나라 사람들은 고구려가 900년 역사의 나라라고 인식했다는 점이다. 서기 668년으로부터 900년을 소급하면, BCE 233년이 된다. 그러므로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BCE 233년이 고구려의 건국연대인 것이다. 고구려는 신라는 물론이고 한나라(BCE 202년 건국)보다도 훨씬 더 먼저 건국되었던 것이다.

 

사료를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고조선 멸망 이전에 이미 고구려가 존재했다는 <한서> 의 기록, 광개토태왕이 주몽의 13세손이 아니라 17세손이라는 광개토태왕릉 비문의 기록, 멸망 당시의 고구려가 건국 900주년이 되었다는 가언충의 발언을 종합할 때, 우리는 BCE 37년에 고구려가 건국되었다는 김부식의 주장이 거짓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고구려는 BCE233년에 건국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서 고구려 역년이 900년이 되는 것인가 ? 고주몽이 해모수를 태조로 하여 제사를 모셨다는 환단고기 삼성기 상의 기록에 해답의 실마리가 있다.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운 때 BCE 239부터 계산하면 900년이 약간 넘는다. 고구려는 북부여의 연장선상에 있는 나라이므로 북부여가 원고구려라 할 수 있다. 고구려가 망하고 대중상이 세운 대진국(발해)도 처음에는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였다. 원고구려- 고구려 – 후고구려로 이어지는 역사는 우리 국통맥을 잇는 결정적 요소 중의 하나이다.










한자의 시조 창힐(倉頡)은 치우천황의 스승 자부선생의 제자다.


중국에는 창힐문자가 중국문자의 시초로 알려지고 있다. 역대 신선통감에는 창힐이 진창 사람으로 태호복희의 신하가 되어 거북 등과 새 발자국을 보고 여섯가지의 글짜체를 만든 인물로 나와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에서는 그보다 약 700년 후에 치우천황의 제후로서 배달국 신지문자를 중원에 전파시킨 인물이라 밝히고 있다.


당시 치우천황의 스승이 자부선생이었는데 황제헌원, 창힐, 대요가 모두 자부선생 밑에서 신교의 문화와 철학을 전수받았다. 황제헌원은 삼황내문경을 전수받았고 대요는 간지의 술법을 전수받았고 칭힐은 부도지문을 전수받았다. 그 후에 헌원은 탁록에서 군사를 일으켰다가 치우의 공격을 받고 대요와 창힐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대요와 창힐은 치우를 추종하였다.



대요와 창힐은 배달의 자부선생으로부터 문물을 전수받았기 때문에 스승의 나라를 배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10년간 73회의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황제헌원은 치우에게 사로잡히고 무릎을 꿇게 된다. 창힐의 고향인 섬서성 백수현에 있는 [창성조적서비創聖鳥跡書碑]에는 배달국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와 동일한 문자가 평안북도 용천군 신암리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에 새겨져 있음이 확인되었다. 현재 창힐의 무덤은 하남성 남락현에 보존되어있다.


『회남자(淮南子)』「본경훈(本經訓)」에는 이를 “창힐이 문자를 만들자 하늘이 곡식을 비처럼 뿌리고 귀신이 밤새도록 울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윷놀이는 치우천황 시절 자부선생이 환역(桓易)을 풀어 만든 것이다.  


공공 , 헌원,창힐,대요의 무리가 찾아와서 모두 자부 선생에게 배웠다. 그때 윷놀이를 만들어 [환역]을 연역하였으니 대체로 (초대 환웅때) 신지 현덕이 기록한 [천부경]이 전하는 정신을 구체적으로 풀어놓은 것이다 [삼한관경본기
 
 



1만년전 농경문화에 대한 의문 환단고기에서 찾을 수 있다.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고대의 볍씨 18개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의 토탄층 연대가 BCE 12670~BCE 10550년으로 측정되었다. 같은 토탄층의 아래층에서는 고대 단립벼가 나왔는데 이 토탄층의 연대도 비슷한 시기인 BCE 11970년이었다. 그리고 가장 늦은 시기의 토탄층에서는 장립벼가 나왔는데 이 토탄층의 연대는 BCE 10550년이었다. 신석기 초기에 재배되던 세 종류의 벼가 한반도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 연구결과는 한동안 볍씨 자체의 연대를 측정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미국 아리조나 대학교에서 토탄과 볍씨를 분리 측정하여 볍씨의 연대를 BCE10550년경으로 밝힌 이후 이 자료는 1만년 전 벼농사의 명확한 자료로서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아직까지 만주와 요동 등에서 이와 유사한 발굴사례가 없지만 한반도의 1만년 전 볍시는 당시 동북아 전역에 벼농사가 행해졌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그동안 국제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아왔던 중국 후난(湖南)성 출토 볍씨보다도 약 3000년이나 더 오래된 세계 최고(最古)의 볍씨가 한국에서 발견되었다. 흔히 농경문화는 BCE 7000년경 서남아시아의 오리엔트 지역 즉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맨 먼저 발생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2004년 청원군 볍씨에 대한 연구 결과가 발표된 이후 신석기 시대를 연 농경문화의 발원지로 동북아시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1만년전 농경문화를 가장 먼저 일군 동북아시아인은 과연 누구인가 그 해답을 환단고기에서 찾을 수 있다.



환국의 실존을 기록한 문헌들

<삼국유사三國遺事>, <약천집藥泉集>,  <풍암집화楓巖輯話>, <수산집修山集>, <해동악부海東樂府>


환국의 열두나라 이름은 여러 문헌상에 나타난다.

중국 문헌에서도 12환국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진서 사이전을 보면 비리국,양운국,구막한군,일군국이 있었는데 이들은 2만~ 5만호 정도를 가진 소국으로 시베리아 등지에 있었다 한다. 당서 북적전에는 우루국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삼국사기]에는 구다천국과 매구여국이 구다국과 매구곡이란 명칭으로 남아있다. 이처럼 아홉 개 나라의 이름이 후세의 사서에 나타난다.


진서(晉書) 사이전(四夷傳) 에서 전한다.
裨離國在肅愼西北  馬行可二百日  領戶二萬  養雲國去裨離馬行又五十日  領戶二萬
비리국재숙신서북  마행가이백일  령호이만  양운국거비리마행우오십일  령호이만
寇莫汗國去養雲國又百日行  領戶五萬餘  一群國去莫汗又百五十日  計去肅愼五萬餘裡
구막한국거양운국우백일행  령호오만여  일군국거막한우백오십일  계거숙신오만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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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2 18-02-22 17:35
   
이문영씨가 이 주제로 조목조목 반대를 했습니다...저도 이문영씨의 주장에 100% 동조하지는 않구요....그분의 생각의 오류도 많이 발견했는데, 님은 전반적으로 이문영씨의 생각에 대해 어떻게 여기시는지요?  저는 그저 총괄적으로 묻는 질문입니다.....
     
스리랑 18-02-22 20:35
   
몇 년 전, 초록불의 글과 초록불의 글에 대한 반박글을 올렸던 대수맥이라는 분의 글들을 읽어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의 5,6년 가까이 초록불의 사이트를 찾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고요. 내가 그때 생각했던 것은 초록불 이사람은 혹~~  종자가 일본인이 아닐까라는 착각을 일으켰던 적까지  있었습니다..
6시내고환 18-03-07 20:17
   
수서령(收書令) = 조선 최고의 뻘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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