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고사 내용을 발췌하였습니다.
왜 ( 倭 ) 는 일본의 본 이름이니, 지금 일본이 왜와 일본을 구분하여 왜는 북해도 ( 北海道 ) 의 아이누 족이요, 일본은 대화족 ( 大和族 ) 이라 한다. 그러나 일본 음에 화 ( 和 ) · 왜 ( 慶 ) 가 같으니 일본이 곧 왜임이 분명한데 저들이 근세에 와서 조선사나 지나사에 쓰인 '왜'가 너무 문화 없는 흉포한 야만족임을 부끄럽게 여겨 드디어 화(和)란 명사를 지어냈다.
백제 건국 이후까지도 왜가 어리석고 무지하여, 일본삼도 ( 日本三島 : 일본의 국토를 이룬 세 섬, 곧 本州 · 四國·九州 ) 에서 고기잡고 사냥으로 생활을 할 뿐 아무런 문화가 없었는데, 백제의 고이왕 ( 古 爾王 ) 이 그들을 가르쳐 인도해서 봉직 ( 縫織 ) 과 농작 ( 農作 ) 과 그 밖의 백공 ( 百工 ) 의 기예를 가르치고 박사 왕인 ( 王仁 ) 을 보내 논어 ( 論語 ) 와 천자문 ( 千字文 ) 을 가르쳐주고 백제의 가명 ( 假名 ) 곧 백제의 이두자 ( 吏讀字 ) 에 의하여 일본의 가나 ( 假名 ) 란 것을 지어주었으니 이것이 소위 일본 자라는 것이다. 왜가 이와 같이 백제의 교화를 받아 백제의 속국이 되었으나 천성이 침략하기를 좋아해서 도리어 백제를 침범하여 진사왕 말년에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백제가 고구려에게 석현 ( 石峴 ) 등 10 여 성을 빼앗낌을 통분히 여겨 기원후 391 년 ( 광개토왕 원년 ) 에 왕이 진무 ( 眞武 ) 로 하여금 고구려가 새로 점령한 땅을 공격하고, 한편으로 왜와 친교하여 함께 고구려에 대한 동맹을 맺었다. 5 년 ( 기원후 395 년 ) 에 광개토왕이 와려 원정에서 회군하여 수군으로 백제의 연해 ( 沿海 ) 와 연강 ( 沿江 ) 의 일팔성 ( 壹八城 ) · 구모로성 ( 臼模盧城 ) · 고모야라성 ( 古模耶羅城 ) · 관미성 ( 關彌城 ) 등을 함락시키고, 육군으로 미추성 ( 彌鄒城 ) · 야리성 ( 也利城 ) · 소가성 ( 掃加城 ) · 대산한성 ( 大山韓城 ) 등을 함락시키고 왕이 몸소 갑옷 투구를 두르고 아리수 ( 阿利水 ) --- 지금의 월당강 ( 月唐江 ) 을 건너 백제 군사 8 천여 명을 죽이니, 백제의 아신왕 ( 阿莘王 ) 이 다급하여 왕제 한사람과 대신 10 사람을 볼모로 올리고 남녀 1 천 명, 세포 ( 細布 ) 1 천 필을 바치고 '노객 ( 如客 ) '의 맹서 ( 盟書 ) 를 쓰고 고구려를 피해 사산 ( 사山 ) ---지금의 직산 ( 稷山 ) 으로 천도하여 '신위례성 ( 新慰禮城 ) '이라 일컬었다 .
그 뒤 고구려가 북쪽 선비와의 싸움이 있을 적마다 백제는 그 맹약을 어기고 왜병 ( 倭兵 ) 을 불러 고구려가 새로 점령한 땅을 침노하고 또 신라가 고구려와 한편 됨을 미워하여 왜병으로 신라를 침노하였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용병이 신과 같이 신속하여 북으로 선비를 치는 틈에 매양 백제의 기선 ( 機先 ) 을 제어하여 왜를 격파해서 신라를 구원하였다.
임나가라 ( 任那加羅 ) ---지금의 고령 ( 高靈 ) 에서 왜병을 대파하여 선라의 내물왕 ( 奈勿王 ) 이 몸소 광개토왕을 찾아보고 사례함에 이르렀으며, 기원후 407 년 지금의 대동강 수전 ( 水戰 ) 에서 가장 기묘한 공을 세워 왜병 수만 명을 전멸시키고 갑옷 투구 1 만여 벌과 수없이 많은 무기와 물자를 얻으니 왜가 이를 두려워하여 다시는 바다를 건너오지 못하여 남쪽이 오랫동안 평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