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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2-23 10:58
[한국사] 어느 고구려 무장의 일대기 - 고을덕 묘지(墓誌)를 통해 본 고구려 말기의 상황
 글쓴이 : 고이왕
조회 : 1,292  

https://www.nahf.or.kr/webzine/view.do?mode=list&catId=CWS922&scatId=&stype=&keyword=&page=7&cid=55827


고을덕은 618년에 태어나 82세의 나이로 사망한 고구려인이다. 그가 태어난 해에 수 양제가 피살되고 당이세워졌으며,고을덕 묘지 탁본 그의 죽음은 발해가 세워지고 몇 해 뒤의 일이었다. 그동안 고을덕의 조국은 나당연합군에 패망하고 말았다. 고을덕은 말 그대로 부침이 심했던 역사의 한복판에 살다간 이였다. 

 

고을덕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2015년 7월 말이었다. 중국의 한 학술지에 그의 묘지가 소개되었던 것이다. 묘지(墓誌)란 묘지명(墓誌銘)이라고도 하는데, 한 마디로 무덤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알리기 위한 목적에서 무덤 안에 넣은 기록물 이다. * 즉, 이 묘지를 통해 우리는 고을덕이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이며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묘지에 따르면 그의 무덤은 두릉(杜陵), 즉 전한(前漢) 선제(宣帝)의 능 북쪽(현재 중국 섬서성 서안시 동남)에 만들어졌다. 고을덕은 고구려 사람이면서도 당나라 도성 인근에 묻혔던 것이다. 

 

 

* 묘지란 무엇인가. 중국 후한(後漢)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당대(唐代)에 이르면 그 형태와 내용의 구성 요소가 정형화된다. 초기에는 죽은 이의 이름과 관직 정도만 써넣던 것에서 본인의 경력과 찬사의 문장, 여기에 선대에 대한 자세한 기재까지 들어가는 형태로 발전했다. 제재도 장방형으로 다듬은 석판에 면을 고르고 거기에 줄을 넣고 운문(雲紋)을 베푼 형태를 갖춘다. 묘지에는 죽은 이의 이름과 자와 같은 기본적 정보와 함께 그가 어디 출신인지를 적는다. 이 본적은 그의 선대가 누구인가를 밝힌 것과 함께 그가 어느 집안 사람인가를 알려주는 중요한 기재요소에 해당한다. 그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일을 했는가는 그 다음에 기술된다. 대개 관리 생활을 했기에 그가 올랐던 관직들을 적는 경우가 보통이며 여성의 경우 남편을 받들어 시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잘 키워냈다는 류의 기술이 보이곤 한다. 또한 죽은 날에 대해 반드시 적었다. 몇 살의 나이로 어디에서 어떤 이유로 죽었는지도 언급된다. 그 다음 언급되는 것이 장사지낸 날이 된다. 이는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무덤을 만들어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가묘를 만들어 임시로 모셔두고 무덤이 만들어진 뒤에 장사지냈던 장례방식에 따른 것이다. 묘지는 중국 고대의 상장제례에서 마련된 무덤 안의 기록물이었다. 고구려나 백제에서 이를 채용했다는 물증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묘지가 중국으로 건너간 유민들에 국한되어 나오고 있는 까닭이다.

** 여기에 소개한 내용과 번역문은 필자가 쓴 「어느 고구려 무장의 가계와 일대기-새로 발견된 <고을덕묘지(高乙德墓誌)>에 대한 역주(譯註)와 분석-」(《중국고중세사연구 (中國古中世史硏究)》 38, 2015)에 따른 것이다.

 

고구려 무장으로 당에 맞서 싸우다 포로로 끌려가다

이처럼 고구려나 백제인이면서 당에 들어가 생을 마감한 이들을 우리는 유민(遺民)이라 부르며, 이런 류의 인물로는 고구려를 멸망으로 몰아간 연남생(淵男生)을 비롯해 35명이 확 인된 바 있다. 고을덕 묘지의 발견으로 이제 유민 자료는 모두 36건이 되었지만, 이 묘지가 갖는 의미는 유민에 대한 또한 명의 사례를 확보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고국을 등 지고 자발적으로 당에 투항해갔던 다른 유민들과 달리, 고을덕은 고구려 무장으로 당군에 맞서 싸우다가 포로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공은 겨우 15세 나이에 벼슬길에 나아가 나라의 관직을 받았다. 중리소형(中裏小兄)의 관등을 받아 귀단성도사(貴端城道使)의 직을 맡았다. 대당(大唐)용삭(龍朔) 원년(661)에 이르러, 고종(高宗) 황제가 칙을 내려 의로운 군대를 발하여 요좌(遼左)의 죄를 문책하시니, 공은 군대를 이끌고 (황제의 군대에) 맞서 싸우다가 사로잡혔다. 황제는 저항한 허물을 묻지 않고 귀항(歸降)의 예를 허락하였다.”

 

위 내용은 묘지에 기재된 고을덕의 이력 부분이다. 15세의 나이에 등용된 고을덕은 그 뒤 언제인가 귀단성도사(貴端城道使)가 되었다. 귀단성이란 귀단수, 현재의 혼하(渾河)에서 이 름을 딴 성으로 무순시(撫順市)의 고이산성(高爾山城) 즉 신성(新城)일 가능성이 높다. 도사는 처려근지(處閭近支)로도 불렸는데, 지방의 성에 파견된 지방관으로 성주(城主)를 뜻한 다. 고을덕은 신성의 성주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661년에 벌어진 전투에서 고을덕은 당군에 포로가 되고 말았다. 요좌(遼左)의 죄를 문책한다는 것은 당이 고구려 공격에 나선 것을 뜻하는 이 시기 당측의 상투어인데, 바로 전 해에 백제를 무너뜨린 당은 여세를 몰아 661년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공격해 왔다. 그런 당군에 맞서 고을덕이 저항하다가 사로잡혔다는 것으로 보아, 신성도 이때의 전역에 관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투가 그의 임지인 신성에서 벌어졌거나 아니면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압록수 전투에 투입되었을 것인데, 일단 후자 의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용삭(龍朔) 2년(662)에 성은(聖恩)을 입어 우위(右衛)?남전부절충장상(藍田府折衝長上)에 제수되었다. 총장(總章) 원년(668)에 이르러 고구려에서 정사(政事)가 어지러워지니 동방의 땅이 (모두) 천명(天命)을 당나라에 되돌렸다. 황제가 칙을 내려 공이 나라에 충성을 다했다고 여겨, 검교본토동주장사(檢校本土東州長史)를 맡게 하였다. … ”

 

여러 차례의 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고구려인들이 당군에 포로가 되어 끌려갔지만,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특히 포로가 된 고구려 병사들이 당으로 들어가 어떻 게 되었을까 하는 점은 이 시기를 연구하는 이들이 궁금하게 여겨왔던 문제다. 이제 그 구체적인 실례를 고을덕에게서 보게 된다.

 

당의 말단 무관이 되어 고구려부흥군 진압에 나서다

우위?남전부절충장상은 고을덕이 당의 중앙군에 배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우위는 당의 16위(衛) 중 하나이며 남전부는 당이 전국에 설치했다는 590여 개 절충부의 하나로 현재의 섬서성(陝西省) 남전현에 위치하였다. 장상은 좌위 소속 종(從)9품하(品下)의 무관이었다. 당은 고을덕을 남전현의 호적에 새로 올리고, 좌위 소속의 부병(府兵)에 넣어 당의 말단 무 관으로 삼았던 것이다.

 

고을덕의 새로운 삶이 어떠했는지 잘 알 수는 없다. 691년에 이르면 정(正)3품상(品上)의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에 올랐다는 것으로 보아, 당에서 산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적지 않은 공적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하지만 묘지에는 그 구체적인 활약상을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 다만 역임했던 검교본토동주장사(檢校本土東州長史)에서 그의 역할과 그가 품었던 소회의 일단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검교란 임시로 해당 직무를 행사한다는 뜻으로 그 뒤에 붙은내용이 그가 맡았던 일을 보여준다. 본토는 고구려를 말하는 것인데, 동주는 당이 고구려 땅에 세운 도독부(都督府)나 주 (州)의 명칭에서 보이지 않는다. 『자치통감(資治通鑑)』 호삼성(胡三省) 주(註)의 설명에 따라 ‘고구려가 당의 동쪽에 있고 이미 (평정되어) 부주(府州)를 열지워 설치했기에 (그 토벌군을) 동주도(총관)라’ 보는 것이 온당하다. 즉 고구려 땅에서 부흥군이 일어나자 당은 고간(高侃)을 동주도행군총관으로 삼아 고구려부흥군을 상대케 하였다. 고을덕이 고간의 군대에장사로 종군했던 연유도 여기에 있었다. 어제까지 고구려 장수였던 그는 고간의 당군이 고구려부흥군을 상대하는데 여러 모로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패망한 나라를 되살리겠다고 일어선 고구려부흥군에 대해,고을덕은 이를 진압하려는 당군의 일원으로 전장에 나섰다. 그를 지켜보는 시선 속에 어쩔 수 없이 임무를 수행하지는 않 았을까. 적어도 그가 당 조정이 기대한 역할을 즐겨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당에서의 삶은 생애의 절반에 해당 하지만, 묘지에는 그 구체적 활약상에 대해 애써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그러하다.

 

고구려 귀족 출신의 장수가 겪은 부침

한편 묘지에는 무덤 주인공의 이력과 함께 그의 출자(出自)가 거의 예외없이 기재된다. 그가 어디 출신이며 어떤 가계에 속하는가 하는 내용인데, 그가 누구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고을덕의 묘지도 이 대목에 대해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공의) 휘(諱)는 덕으로 변국(卞國) 동부인(東部人)이다. 옛적 적제(赤帝)를 이어 왕자(王子)의 기운이 흥해 한(漢)을 건국하고, (동이) 오랑캐는 삼한(三韓)의 땅에 살면서 (서로) 패권을 차지하고자 다투었을 때, 사해(四海)가 파도를 일으키고 순백의 태양이 정기를 내려주니, 주몽(朱蒙)이 태어났다. 주몽은 연(燕) 땅을 크게 다스려 요양(遼陽)에 왕통(王統)을 세웠다. (주몽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천)명으로 인하여 성씨(姓氏)를 삼았으니, 공의 집안 씨족들은 (모두) 그 후예였도다.

 

(공의) 집안은 고관귀인을 계승하여 지난 세월 번영 을 이어왔고, 일족은 벼슬을 이어서 오늘에 이르기 까지 광채를 더해왔다. 조부 과(?)는 건무태왕(建武太王)에게서 중리소형의 관등을 받아 상사(?事)를 맡아 다스렸다. 그러다가 교(敎)에 의해 견책을 받아, 상사는 박탈되고 (관등이) 떨어져 외관(外官)으로 쫓겨났다. 직을 바꿔가며, 여러 직무를 거쳐 옮겨가 요부도독(遼府都督)의 직을 받았다. 곧바 로 교로써, 대로(對盧)의 관등을 추가로 받아, 전과 다름없이 상사를 맡았고 평대(評臺)의 직을 맡았다. 부친 부(孚)는 보장왕(寶藏王)에게서 중리소형의 관등을 받아 남소성도사(南蘇城道使)가 되었다.(관등이) 대형(大兄)으로 올라 해곡부도독(海谷府都督)이 되었다. 다시 태상(太相)의 관등을 받아 사부대부(司府大夫)의 직으로 상사를 맡아 다스리는 것을 이어받았다.”

 

변국(卞國)은 연남생이 변국공(卞國公)에 봉해졌던 예로 보아, 고구려를 달리 표현한 명칭이다. 동부인(東部人)이란 고을덕이 고구려 최고 귀족인 5부의 순노부(順奴部) 출신임을 알려준다. 고을덕의 집안이 왕가에 필적했던 귀종(貴宗)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주몽이 하늘에서 내려와 천명으로 성씨를 삼았다는 것은 고구려 건국신화의 일부를 표현한 것이며, 선대(先代)를 여기까지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고을덕의 가계가 유서 깊은 집안임 을 드러낸다.* 그런데 대대로 번영을 누려왔다고는 하지만, 이 집안의 정치 · 사회적 지위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궁금해진다. 이 대목에서 묘지는 고을덕의 조부와 부친을 등장시키고 있다.

 

 

연남생의 가족묘고구려에는 독특한 국정운영 방식으로 제5위 이상의 관등을 소지한 고관들이 국가기밀을 관장하고 정사(政事)를 논의하며 군사 징발과 관작 제수에 관여하였다. 고을덕의 조부와 부친 둘 다 제4위 이상의 관등(對盧, 大相)에 올랐다는 것으로 보아, 이 집안은 이 2대에 걸쳐 국가 중대사를 논의하는 회의체의 성원이었다. 또한 이 두 사람은 건무 태왕[建武太王, 영류왕(營留王)의 다른 이름]과 보장왕(寶藏王)의 두 왕과 각별한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국왕의 왕호(王號)를 특기하고 있다는 점과 ‘상사(?事)’의 관장이라는 국왕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부여된 임무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상사는 조부의 관력에서 세 차례 등장하고 아비에게선 한 차례 나오는데 그조차 승습에 따른 것이었다. 묘지는 상사를 관장했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언급하여, 이 일을 맡았었다는 것이 이 가계의 자랑거리였음을 보여준다. 상사란 국왕의 사적(私的) 경제기반으로써의 목마(牧馬)를 가리킨다. 국왕을 위해 이를 맡아 보았다는 특수한 관계를 배경으로 이 집안은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집안 배경에 의해 고을덕은 겨우 15세의 나이에 벼슬길에 나아갈 수있었다.

 

연개소문의 권력 독점으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고구려

그러던 이 일가의 정치적 지위는 고을덕에 이르러 변화가 감지된다. 그가 포로가 되었을 때 나이가 44세였지만, 선대가 ‘집상사’했던 것을 이어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관등도 중리 소형(제12위)에서 더 오르지 못한 채 귀단성 성주의 관직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선대의 관력과 비교해 볼 때, 고을덕은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정변을 일으켰던 것이다.

 

연개소문의 정변은 영류왕을 포함하여 대신 100여 명을 살해한 정치적 격변이었다. 더욱이 조부 고과는 영류왕의 측근이었다. 그럼에도 그 아들인 고부가 정치적 성장을 거듭하여 보장왕의 상사를 맡았고 대상에 올랐다는 것은 이 가계가 연개소문과 정치적 입장을 함께 했음을 알려준다. 그런만큼 장래가 보장되었을 고을덕이지만 끝내 중리소형에 머물고 말았다. 그 뒤의 정국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남생(淵男生)과 남산(男産)의 묘지는 연개소문이 두 아들을 고속 승진시키고 국정의 중책을 맡겨 나갔음을 전한다. 정 변 이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그는 사적(私的) 권력기반의 강화에 주력했던 것이다. 이러한 연씨 일가로의 권력 집중 현상은 정치적 입장을 같이했던 이들조차 권력에서 소외시 키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이제 고을덕이 그 구체적인 실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연개소문의 정변을 틈타 당 태종(唐 太宗)은 고구려를 일거에 무너뜨리려 했지만, 안시성(安市城)의 결사적인 항전 앞에 군대를 돌려야 했다. 그러나 승리의 그 순간부터 연개소문은 권력을 독점해나갔고, 고구려는 안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 이 부분의 서두는 “옛날 적제를 이어 왕자의 기운이 흥해 한을 건국하고”라고 시작하고 있다. 묘지를 처음 소개한 중국학자는 고을덕의 출자가 여기까지 연결되고 있다고 보았다. 가계의 시작을 중국의 전설상 인물로부터 구했다고 본것인데, 문장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이 부분은 바로 뒷 구절인 “(동이) 오랑캐는 삼한의 땅에 살면서 (서로) 패권을 차지하고자 다투었을 때”와 대구를 이루는 부분으로 시간대를 알려주는 도입부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자료의 이용에 앞서 판독과 해석에 유의해야 함을 보여주는 실례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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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내고환 18-03-07 19:29
   
자신의 나라 부흥군을 토벌하는 장수의 마음이 얼마나 비참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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