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태극기, 팔괘의 창시자 태호복희(BCE3528 ~ BCE3413)씨 중국조상 만들기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서가 환단고기다.
태호복희의 성은 風이며, 고대 동이족이다. <'98년판 중국상해출판사, 역대제왕록>
태호복희왕은 진국의 출신이다.(帝出於震)” [『태평어람』*卷78 「제왕세기」태호복희씨조]
태호복희가 동이족이라는 것은 고대로부터 공인되어 온 일이다.”[『夷夏東西說』, 중국학자 부사년(傅斯年)]
중국에서 삼황오제로 받들어지고 있는 태호복희씨는 신시배달의 성웅중 한분이다. 태호 복희씨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사서는 환단고기이다.
인류문명의 아버지, 태호 복희(BCE3528 ~ BCE3413)
환단고기에 의하면 태호 복희씨는 5,700년 전, 배달국의 5대 환웅인 ‘태우의’ 환웅의 막내아들로서, 성은 풍씨(風氏)요 이름은 방아(方牙)이며, 호는 태호(太昊)로서 ‘크게 밝다’는 뜻이다. 어느 날 삼신(三神)이 강령하는 꿈을 꾸고 백두산에 가서 천제를 지내고 내려오다가, 천하(天河, 송화강)에서 나온 용마(龍馬)의 등에 나타난 상(象)을 보고 하도와 팔괘를 처음 그려 주역(周易)의 창시자가 되었다.
복희씨 때 상象과 수數로써 상징되는 하도(河圖)와 팔괘(八卦)가 만고불변의 진리로서 세상에 드러나자, 역학의 도맥은 문왕, 주공, 공자를 거쳐 이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손룡자, 추연 등을 거쳐서 음양오행의 변화원리로 체계화되고, 노자 열자 장자에 의해 논리를 넘어 우주 신비경의 궁극을 설명하는 우화형식으로 발전하였다. 이로써 역(易)은 동양사상의 최고봉이자 문화 전반에 걸쳐 적용되는 생활철학이 된 것이다.
복희씨께서 태어나신 곳은 어디인가 ?
『환단고기』에 의하면 태호 복희씨는 배달 신시에서 태어나 송화강에서 팔괘를 그으시고 산동성 어대현(현재 미산현)에 묻히셨다고 한다. 이를 볼 때, 복희씨의 이동경로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중국 동쪽 해안선을 타고 내려오게 된다. 그런데 중국학자들의 입장은 그와 반대로 중국대륙 서쪽 깊숙한 곳(현재 감숙성 천수시)에서 태어나 하남성 회양현에서 도읍을 정하고 그곳에서 돌아가셨다고 본다. 하남성 회양현에서 조금만 동쪽으로 가면 산동성 미산현이 있다.
즉 중국학자들이 말하는 복희씨의 이동경로는 먼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주해 왔는데, 산동성까지는 뻗어 나오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복희씨에 대한 문헌기록은「제왕세기」이다. 거기에 따르면, 복희씨는 ‘구이(九夷)에서 태어나 성기(成紀)에서 자라고 어대현에 묻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성기(成紀)라는 지명을 중국대륙 서쪽에서 찾다보니 현재 감숙성 천수시 주변의 ‘성기’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구이(九夷)에서 태어났다는 대목은 구이족(九夷族, 동이족의 다른 말)이 아닌 구지산(仇地山)에서 태어난 것으로 끼워 맞추었다. 이는 복희씨를 동방 동이족이 아닌 서방 중국인의 조상이며, 동방으로 문물을 전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다.
현지 답사 중 알게 된 것은 강택민 주석이 천수시에 ‘희황고리(羲皇故里)’라는 글을 써준 이후 천수시를 복희씨의 고향으로 정해 버렸던 것이다. 강택민 주석이 글을 쓴 그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묘와 사당이 새로이 복원, 보수되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환단고기는 배달시대 영웅 치우천황(BCE 2706)에 대한 기록이 있다.
배달국의 14대 치우 환웅천황
‘환국(환인) - 배달(환웅) - 고조선(단군)…’으로 내려오는 한민족사의 국통을 보면, 3301년간 일곱 분의 환인천제가 다스린 환국을 이어 배달 환웅천황이 배달국을 건국한다. 그 배달국 당시, 서기전 2706년에 즉위하여 배달국을 다스린 14대 자오지(慈烏支) 환웅천황이 곧 치우천황이다. 치우(蚩尤)란 세속의 말로 ‘우뢰와 비를 크게 지어 산천을 바꾼다’는 뜻이다,
당시 염제 신농씨 나라의 8대 마지막 임금인 유망이 쇠퇴의 길을 걷자 치우천황은 웅도(雄圖)의 대망을 품고 서방으로 출정하여 모든 제후들을 정벌하고 유망의 수도를 함락시킨다. 이 때 유망의 제후로 있던 헌원(황제헌원)이 치우천황의 입성소식을 듣고, 대신 천자(天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이에 대항해 온다. 그리하여 동방 고대사에서 저 유명한 탁록 대전투(동방 최초의 국제전쟁)가 벌어져, 10여 년 간 무려 73회의 치열한 공방전이 오고간다. 치우천황은 도술로 큰 안개를 지으며 최초로 제작한 금속병기를 동원하여 마침내 대승을 거두고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는다.)
중국인들이 동방 배달민족을 동이(東夷)라고 부른 것도 치우천황이 큰 활을 만들어 쓴 이 때부터이다. 이후 치우천황은 동방 무신(武神)의 시원이 되어 수천년 동안 동방의 조선족은 물론 한나라 진나라의 백성들에게까지 위력적인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 된다.
치우천왕에 대한 역사왜곡, 사마천의 『사기』
탁록의 대결전 중에 치우천황의 장수 치우비(蚩尤飛)가 헌원군에게 성급히 공격을 시도하다 몰살당한 사실이 있다. 이것을 두고 훗날 고조선과의 대전쟁에서 크게 패한 한무제와 그의 사관 사마천은 『사기』에서 “금살치우(擒殺蚩尤)”, 즉 ‘헌원이 치우천황을 사로잡아 살해했다’고 사실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 또 당시의 상황을 “치우작란”(蚩尤作亂), 즉 치우가 헌원에게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후의 위치에 있었던 헌원이 천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천자인 치우천황에게 도전해온 것이니, “황제작란”(黃帝作亂)이라 함이 역사의 진실인 것이다.
역사왜곡과 날조의 현장 : 탁록의 삼조당
중국은 기존의 황제 정통론에서 한걸음 나아가 염제와 황제의 자손이라는 의미에서 ‘염황지손’으로 역사를 고치더니 1995년 동방족의 조상인 치우천황까지 중국 역사와 문화의 시조로 날조하여 중화삼조로 만들고 그 성역화를 위해‘ 중화삼조당’을 세웠다.
뚝섬의 유래 : 치우천황에게 제를 지냈던 곳
서울시, 뚝섬에 ‘유래비’ 설치 서울시 한강사업본부는 시민들에게 뚝섬의 유래를 알려주기 위해 19일 뚝섬 한강공원에 뚝섬 유래비를 설치했다고 21일 밝혔다.
뚝섬은 한강과 중랑천으로 둘러싸인 살곶이벌(箭串坪) 일대로 무신(武神)을 상징하는 `치우천왕'의 모습을 본떠 큰 창에 소의 깃털을 꽂아 만든 깃발인 독 또는 둑(纛)과 관련된 지명이다. 뚝섬은 조선시대 국왕이 군대를 사열하거나 출병할 때 이곳에 둑기(纛旗)를 세우고 둑제(纛祭)를 지냈던 곳이라 뚝섬으로 불리게 됐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둑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기록돼 있다. 뚝섬 유래비는 지하철 7호선 뚝섬유원지역 2번 출구에서 내려 뚝섬 한강공원 광장으로 가면 바로 볼 수 있다.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중 3번 치우천황께 둑제를 올렸다. (난중일기)
① 癸巳(1593)年 2月 初4日 : 경칩날이라 둑제를 지냈다.
② 甲午(1594)年 9月 初8日 : 장흥부사로 獻官을 삼고, 홍양현감으로 典祀를 삼아 초아흐레 둑제를 지내기 위해 入齋시켰다.
③ 乙未(1595)年 9月 20日 : 새벽 2시에 둑제를 지냈다.
중국의 사학자 추군맹은 중국민족 곧 화하족은 이른 시대에 이미 東方의 蚩尤(치우)와 少昊(소호)가 지배하던 이인집단이 융합되었다고 역설하였다. 蚩尤에 대해서도 추씨(鄒氏)는 역대 학자들의 고증을 들어 구려(九黎)의 군장으로서 동이집단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蚩尤에 대하여 우리 나라 역사에서는 별로 연구된 바 없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으며, 少昊에 대해서도 中國의 五帝의 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반하여,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그 무덤까지 확인하고 분명히 東夷集團의 君長이었음을 역설하고 있음은 우리의 역사지식을 반성하게 한다.
묘족은 <머리채를 삼끈으로 묵은 상투쟁이로서 마치 싹이 돋은 듯하여 苗라 했다-회남자淮南子 권11 제속훈> 라는 구절과 <산해경> 권 17 대황북경에 <서북해 밖 흑수 북쪽에 날개달린 사람(鳥夷系)이 있으니 이름하여 苗民이다>란 기록에 비추면 이夷족이면서 머리에 상투를 튼 민족이다. 그리고 <삼묘족三苗族의 나라를 구려九黎라 하고 구려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왕동령王桐齡 중국민족사>라는 구절이 있다. 즉, 묘족은 우리와 공통의 조상을 가진 민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오히려 묘족이 있던 영역까지 배달국의 영역이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이러한 모든 추정들이 사실임이 밝혀진다.(이재석,『인류원한의 뿌리단주』,상생출판,2008)
환웅천황의 배달국 ’,‘신시’,‘청구’를 기록한 문헌들
<삼국유사>일연 1206~ 1289 <권1 기이1 고조선(왕검조선)>古記云 昔有桓國(謂帝釋也) 庶子桓雄 .....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표제음주동국사략標題音註東國史略> 유희령 1480~ 1552 <권1 전조선>檀君 姓桓氏 名 王儉 ..... 有神人桓因之子 桓雄 ..... 謂之神市 在世理化
<신증동국여지승람>이행 홍언필 1530 <권54 평안도4 영변대도호부 고적 태백산)太佰山(古記 昔有天神桓因 名庶子雄 ..... 謂之神市 主人間三百六十餘事)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권문해 1534~1591 <권9 상성 지 지 신시>昔有神人桓因 名世子桓雄 ..... 謂之神市將風伯雨師雲師 .....
<기언記言>허목 1595~1682 <권32 외편동사1 단군세가>上古九夷之初 有桓因氏 桓因生神市 始敎生民之治 民歸之神市 生檀君.....
<약천집藥泉集>남구만 1629~1711 <제29잡저 동사변증 단군>...云昔有桓國帝釋庶子桓雄 受天符印三箇 .....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해동이적>홍만종 1643~1725 <하(보)단군>... 有桓因釋庶者 名庶子桓雄 ..... 民歸如市 因號神市 將風伯雨師雲師
<규원사화>북애자 1675 <태시기>神市氏旣爲君長 以神說敎 ..... 神市氏
<수산집修山集>이종휘 1731~ 1797 <권12 동사 지 신사지>... 故桓雄爲神市天皇 而雄之子號檀君云 神市之世 以神說敎
<동사강목>안정복 1778 <부권상중괴설변증> 古記云 ..... 庶子桓雄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 .....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
<규원사화>북애자 1675 <태시기단군기>神市氏 寔爲東方人類之祖 ..... 盖檀君以前 首出之聖人也 ..... 曰靑丘國 宅樂浪忽'
고대 한국의 양잠기술을 확인시켜주는 환단고기
지금까지 고대 한국의 양잠기술은 서기 전 12세기 말경 箕子에 의해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이라는 견해가 정론처럼 통용되었다.
그 까닭은 문헌자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