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평양의 위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왜냐하면, 평양이 너무 많이 위치가 바뀌었고, 또 평양을 호칭하는 칭호도 상이한 경우가 있지만(장안성 등)지금 평안도의 현 평양을, 고구려의 평양으로 정의할 수 는 절대 없습니다.
역사를 온전히 바라 보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마음에서 글을 적습니다.
현 평양성이 고구려의 평양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삼국사기 그것도 신라조에 잠시 등장하며(김유신편) 그나마도 그것이, 전쟁 중 임시수도라는 점임과, 또안 수안에서의 거리를 뜻하기에,,,반드시 현 평양이 고구려의 평양이라고 지정된 다고 볼 수 는 없습니다.
그러나 요동의 평양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 말고도, 더 많은 문헌이 존재합니다.
*** 현재 평양이 고구려의 평양이 된 것은 조선왕조실록 세종편의 역할이 가장 지대하다.
그저 안학궁 같은 궁이 있을만하다 해서 그리 된 것 이다.
그렇기에 평양의 위치에 대해 훗날 실학자들도 많은 고민을 했다.
<세종실록>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조 묘를 각 나라의 도읍지에 설치하고자 하는데 고구려
만 평양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결국 고구려의 시조묘는 세종이 고구려땅에 설치하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북한 평양이 고구려 마지막 도읍지로 둔갑하게 되었다.
다음은 평양의 위치에 대한 고문서의 기록입니다(참조 하세요)
1.[삼국유사三國遺事]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구려가 도읍한 안시는 요수 북쪽이며, 다른말로 압록이라고도 불렀다.
麗時都 安市城 在 遼水之北 遼水一名 鴨淥
요나라 요수가 고구려 압록강이고 본래 구려하다....
고려승 일연이 고구려 압록강이 요나라 요하遼河라고 알고 있었는데 아마 김부식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부식이 고구려 발생지를 지금의 요하 서쪽 의무려산 부근이라 한 것이다.
2.[원사元史-지리지地理志] 동녕로東寧路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고구려 평양성이자, 장안성은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낙랑 땅이다. 장수왕이 처음으로 평양에 도읍하여 살았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쳐서 평양을 뽑아버리니 고구려가 동쪽으로 이주하여
압록수 동남 천여리로 옮겨가니, 대동강의 평양은 옛 평양이 아니다."
唐征高麗拔平壤 其國東徒 在鴨淥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
따라서 장수왕의 평양성과 압록강은 현재 대동강 평양의 서북 천리에 있다.
668년 고구려가 망하고, 700년에 당나라가 다시 보낸
고구려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가 후구려(소고구려)를 다시 세워서 동남쪽으로 옮겨가서 120년간 도읍한 곳이 지금 대동강 평양이다.
* 추가)《원사(元史)》 동녕로(東寧路)는 원래 고구려 평양성으로서, 고려의 왕건(王建)이 서경으로 삼았다. 원(元)의 지원(至元) 6년(1269)에 이연령(李延齡) 등이 부주(府州)·현진(縣鎭) 60성을 들어 내귀하였다. 8년(1271)에 서경을 고쳐 동녕로(東寧路) 하였고, 정주(靜州)·의주(義州)·인주(麟州)·위원진(威遠鎭)을 떼어내어 박색부(博索府)에 예속시켰다. <이에 따르면 고려의 평안도 의주는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있고 이곳은 평양으로부터 서북으로 420리 되는 지점이다.> "라고 하였다.
(구산 선생님 블로그 참조)
3.[전요지全遼志]에 따르면 요양시遼陽市 수산手山 남쪽 7리에 경관京觀(전승비)이 있었다.
[전요지]의 4권 고적편에 경관京觀에 대하여 진나라 황제인 사마의司馬懿가 만들고 당나라가 훼손했다고 적었다. 사마의가 도망치던, 공손연을 목 베고 나서 요동성 안에 들어가서 성민 7천명을 학살하고 만든 시체탑인 경관京觀을, 당나라 사람이 훼손할 이유가 없다.
또 사마의가 만든 그 시체탑을 당나라가 훼손했다는 기록도 없다.
대신, 수나라 내호아來護兒의 평양의 나곽羅廓 즉 외성外城 안까지 들어와, 약탈하다가 고구려 복병을 만나서 떼로 죽었다. 그들의 시체를 한데 모아, 고구려 전승비를 세웠던 것이 바로 요양시 수산首山의 경관京觀인 것이다.
당나라 초에 고구려와 서로 화해하면서, 당나라 사자 장손사長孫師가 평양에 들어와 직접 경관을 허물고 수나라 전사자들을 제사 지내주고 돌아갔다.
역사 기록에 238년 위나라 장수 사마의가 요동성에 경관을 세웠고, 612년 이후에 고구려가 평양성에 경관을 세웠고, 그리고 당나라 장손사가 경관을 허문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 요양시 수산 경관의 기록을 3세기 위나라 경관으로 보는 것은 절대로 틀린 것이고, 7세기 고구려가 수나라를 공격하고 만든 경관을 당나라가 훼손했음으로 보아야 옳다.
즉 고구려의 평양은 요동에 있었던 것이다.
4.[대원일통지大元一統志]에 의하면 요양시遼陽市 동쪽 30리에 명왕산明王山(동명왕릉이 있었기에)이 있고 거기에는 동명왕릉東明王陵이 있었다고 한다. 즉 30리 동쪽은 현재 기반산棋盤山(270m) 위치이다. 요양시 동쪽 30리에도 동명왕릉이 있었다. 거기 요양시가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이 있었던 것이다.
5.“평양성벽각서” 고구려 압록강이 요하였고, 고구려 평양성이 요양에 있었다면 대동강의 평양은 고구려 때 과연 무엇이었는가? 대동강 평양에서는 6세기경에 고구려인에 의해서 현재의 평양성이 세워질 당시에 만들어진 “평양성벽 각서刻書”가 발견되었는데, 그 성벽에 평양이라는 말은 전혀 없고 대신에 오로지 “한성漢城”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고구려가 당나라에 항복했던 대동강 평양성은 본래 고구려 한성漢城이었다.
“漢城下 後部小兄...”
6. “천남산 묘지”
천남산泉男産은 연개소문 차자로서, 형 천남생泉男生을 배반하여 대막리지가 되었다가 당나라에 항복했는데 낙양에서 발견된 “천남산 묘지문”에서는
"한성漢城을 지키지 못해 왕의 신물을 가지고 항복해 왔다." 라고 적었다.
漢城不守 貊弓入獻 楛矢來王
현 평양이 한성임을 밝히고 있는, 천남산 묘지석
7.“천남생 묘지泉男生墓誌”에서
천남생의 출생지를 요동군-평양성遼東郡平壤城이라 기록하였다.
이는 대동강에 위치한 한성(현 평양)이 임시수도가 되었다는 의미로, 원 요동에 위치한 평양과는 확실하게 구별한 것이다. 본래 하평양성下平壤(/廣開土王碑文)이라고도 부르던 고구려 한성漢城과 요동에 있던 평양성과 다른 것이다.
8.<요사> ‘지리지 동경도’ 조에는 분명히 평양성이 동경요양부로 나오는데 지금의 중국 요령성 요양이라는 것이다. 이곳이 당나라 고종이 침략한 고구려의 평양성이었다고 나온다. 고구려가 망할 당시의 평양이 이곳 요양이라는 얘기다.
9.조선, 성종 때에 최부가 제주도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명나라해안에 난파하여 명나라에서 돌아오면서 기록한 <표해록>에도 중국 요령성에 평양성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 다만 현 평양성을 평양이라고 생각할 만한 기록도 있기는 한다. 즉 [삼국사기-신라본기]에서 김유신金庾信은 황해도 수안을 거쳐 평양으로 공격해 가는데, 그 평양은 수안遂安으로부터 거리 36000보步라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평양은 지금의 대동강 평양이다.
그러나 그 평양성은 본래 고구려 한성이었고, 고-당 전쟁과정에서 임시수도로서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여전히 일반적인 고구려의 수도로서의 평양은 요동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만약에 한성이 평양의 임시수도 역할을 했다면, 당나라 태종의 645년 침입 이후, 소정방의 고구려 침략이 있던 660년 사이로 추정되지만, 굳이 방어하기 힘든 현 평양에 천도했다고 보기는 힘들 듯 하다(대동강으로 수군을 보내기가 쉽고, 신라로 부터 보급도 가능한)
고안승의 부흥운동이 현 평양(한성)에서 일어난것을 봐도 실재, 평양은 마지막까지 요동에 있었다고 보는게 맞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