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과 신덕왕후
신덕왕후 강씨와 이방원의 악연은 세상이 잘 아는 이야기이다.
사실, 왕자의 난 이전에 신덕왕후 강씨는 죽었으니, 이방원과 자신의 악연을 뼈 속 깊이 깨닫고 죽지는 못했다. 그리고 간과해서는 안될것이 사실 왕자의 난으로, 죽은이는 이방석과 이방번이었지만, 사실상 죽은이 곧 실권을 잃은이는 이성계였다.
그러면 왜 이성계는 이방석을 왕위에 올리려 했을까? 단지 알려진대로 신덕왕후 강씨가 사랑스러워서... 그랬다고 보기엔 사실 이성계는 한 왕조를 개창한 큰 사람이었다.
신덕왕후 강씨
사실, 고려를 무너뜨릴 때 필요했던 것은, 개인의 역량 뿐 아니라 하나의 세력이 필요한 것이었다. 즉 그 세력은 결국 혼사라는 장벽으로 이어질 때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갖게 되는데 이 부분에서 신덕왕후 강씨가 이성계의 자녀와 중앙귀족과의 결혼을 주선하면서 이성계의 세력을 바닥부터 닥아 놓았다고 생각을 해야 옳은 판단이라 생각이 든다.
즉, 태조 이성계의 건국도 기존 기득권층이 분열이 되면서(친원 권문세가), 분열된 일부 기득권과 신진세력 즉 사대부와 무장세력인 이성계의 만남으로 이루어 지는데, 사대부와 이성계의 다리를 정도전이 만들어 쌓고, 정몽주가 다져 주었다면, 기존의 기득권 즉, 권문세가들에서 분리된 일부 기득권 세력을 이성계와 이어준 것은, 신덕왕후 강씨의 결혼주선이 그 매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같은 이유로 신덕왕후는 자신이 건국에 일정부분 지분이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고, 이성계도 이를 인정해 주었기에 방석의 세자책봉 및 이성계파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고 판단이 된다.
신덕왕후의 정릉에 있던 조형물
그러면 신덕왕후와 신의왕후의 자녀들간 에는 사이는 원래 어떠했는가? 사실 중앙의 귀족과 결혼을 주선 해 주고, 중앙의 관례, 정치 등을 수업시킨 신덕왕후가 신의왕후 자녀와 사이가 나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특히 이방원과 신의왕후는 특히 더 각별했다
정몽주의 척살사건에서 보듯, 이지란, 이화 같은 사람도 이성계가 두려워 정몽주의 척살을 주저했을 때도, 이를 강행한 이방원은 심한 이성계의 질책을 받았으나, 당시 강씨의 도움으로 이성계의 질책을 벗어날 수 있었고, 11살 나이 차이가 나는 이방원과 신덕왕후는 사료의 기록에 보면 ‘같은 세대’라는 의식으로 상당히 말도 잘 통했고,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했을 때에는, 신덕왕후와 신덕왕후의 소생동생들을 이방원이 피난시켜 준 일도 있었다 (민가에서 밥을 얻어 동생들을 먹이기 까지 함)
또한 이방원이 17세에 과거에 합격하는데, 신덕왕후의 뒷바라지가 상당했다는 기록마저 있다 (강씨가 성실히 공부하는 방원을 보며, 방원이가 어찌하여 내 아들이 아니란 말인가! 하며 탄식을 했다는 기록이 있음)
이성계 또한 이방원의 급제에 눈물을 쏟았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과거 합격에 강씨의 역할이 있었기에, 이성계 역시 강씨에게 감사하면서 자신의 출신인 동북면에 대한 콤플렉스를 이기려 한 듯 보인다.
즉, 신덕왕후 강씨는 동북면 출신인 신의왕후 한씨가 못해줄 수 밖에 없던, 이성계 자녀들의 개경에서의 삶에 서포터가 되어 주었으며, 원래부터 사이가 나빴던 적이 없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였다.
신덕왕후 강씨가 신의왕후의 소생과 관계가 좋았고, 또한 중앙의 귀족 모두와도 관계가 원만했던 것은 그녀의 집안 내력과도 상당한 관련이 있다.
그녀의 집안은 한때, 고려의 핵심인 황해도 패서출신 이었지만, 고려전기에 잠시 외척이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강씨의 작은아버지인 강윤충은 천한노비 출신이었다는 점을 보아 집안이 몰락 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덕왕후의 숙부인, 이 강윤충이 충숙왕 때, 발탁되어 출세를 하게 되고, 충혜왕 때에 더욱 신분이 상승하게 됨과 동시에 그 아들 충목왕 때는 찬성사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덕녕공주와 불륜의 관계까지 나아가다 공민왕 때, 권력을 잃고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한 입지전 적인 인물이었다.
강윤충은 명문집안의 출신과 달리 왕이 바뀔 때 마다 처세를 능수능란하게 하였는데, 즉 밑바닥 출신의 전형적인 처세를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노비부터 시작하여 왕의 마음과 몽골공주의 마음을 얻기까지 강윤충의 처세는 대단한 것이었다.
나중에 이성계의 경처가 되는 신덕왕후의 처세도, 이런 집안의 내력과 무관하지 않아보인다. 강윤충이 노비가문을 세도가의 반열에 올렸던 가문의 기억은, 신덕왕후에게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강한 권력의 집착을 낳았을 것이고, 결국 자신의 아들 곧 이방번, 방석 형제들을 죽음으로 내 몰게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을 한다.
태종 이방원의 헌릉
즉, 강씨는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일정부분 지분이 있다고 본인 스스로 생각을 하였고 (정도전 등 그 일파 역시 그것을 인정함), 또한 이성계 또한 그러한 그녀의 주장을 인정하였던 것 같다. 그녀는 이성계를 중앙귀족과 연결을 시켜주었고, 중앙의 인맥을 만들어 주었으며, 이러한 인맥과 혼맥이 ‘이방원의 정몽주 척살’ 보다 강력한 조선 건국의 씨앗이라 생각한 듯 하다.
또한 이성계 가문은, 선대에 이미 두 번째 부인 소생에게로, 권력이 이어진 선례도 있었기에(할아버지인 도조 이춘의 경우) 신덕왕후는 자신의 소생인 방석을 왕위에 올릴 수 있다고 생각을 한 듯 하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은 그녀의 모든 처세술과 정치적 계산을 사장시키고, 그녀의 아들들 모두 죽음으로 몰게 되는 상황에 이른다. 사실 정몽주의 척살과 이성계의 인맥 어느것이 조선의 건국에 공이 되었는지는 후대 판단하는 자들의 몫이지만, 그녀의 처세술이 없었다면 조선의 건국은 힘들었을 것이고, 그랬기에 정도전 등 의 세력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