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8-03-14 13:47
[한국사] 태종 이방원과 신덕왕후, 누가 조선건국의 공이 많은가?
 글쓴이 : history2
조회 : 697  

태종 이방원과 신덕왕후

이방원44.jpg


신덕왕후 강씨와 이방원의 악연은 세상이 잘 아는 이야기이다.

사실, 왕자의 난 이전에 신덕왕후 강씨는 죽었으니, 이방원과 자신의 악연을 뼈 속 깊이 깨닫고 죽지는 못했다. 그리고 간과해서는 안될것이 사실 왕자의 난으로, 죽은이는 이방석과 이방번이었지만, 사실상 죽은이 곧 실권을 잃은이는 이성계였다.

 

그러면 왜 이성계는 이방석을 왕위에 올리려 했을까? 단지 알려진대로 신덕왕후 강씨가 사랑스러워서... 그랬다고 보기엔 사실 이성계는 한 왕조를 개창한 큰 사람이었다.


신덕왕후.jpg
                                                                   신덕왕후 강씨

 

사실, 고려를 무너뜨릴 때 필요했던 것은, 개인의 역량 뿐 아니라 하나의 세력이 필요한 것이었다. 즉 그 세력은 결국 혼사라는 장벽으로 이어질 때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갖게 되는데 이 부분에서 신덕왕후 강씨가 이성계의 자녀와 중앙귀족과의 결혼을 주선하면서 이성계의 세력을 바닥부터 닥아 놓았다고 생각을 해야 옳은 판단이라 생각이 든다.

 

, 태조 이성계의 건국도 기존 기득권층이 분열이 되면서(친원 권문세가), 분열된 일부 기득권과 신진세력 즉 사대부와 무장세력인 이성계의 만남으로 이루어 지는데, 사대부와 이성계의 다리를 정도전이 만들어 쌓고, 정몽주가 다져 주었다면, 기존의 기득권 즉, 권문세가들에서 분리된 일부 기득권 세력을 이성계와 이어준 것은, 신덕왕후 강씨의 결혼주선이 그 매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같은 이유로 신덕왕후는 자신이 건국에 일정부분 지분이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고, 이성계도 이를 인정해 주었기에 방석의 세자책봉 및 이성계파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고 판단이 된다.


청계천 광통교.jpg
                                                       신덕왕후의 정릉에 있던 조형물 
 

 

그러면 신덕왕후와 신의왕후의 자녀들간 에는 사이는 원래 어떠했는가? 사실 중앙의 귀족과 결혼을 주선 해 주고, 중앙의 관례, 정치 등을 수업시킨 신덕왕후가 신의왕후 자녀와 사이가 나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특히 이방원과 신의왕후는 특히 더 각별했다

 

정몽주의 척살사건에서 보듯, 이지란, 이화 같은 사람도 이성계가 두려워 정몽주의 척살을 주저했을 때도, 이를 강행한 이방원은 심한 이성계의 질책을 받았으나, 당시 강씨의 도움으로 이성계의 질책을 벗어날 수 있었고, 11살 나이 차이가 나는 이방원과 신덕왕후는 사료의 기록에 보면 같은 세대라는 의식으로 상당히 말도 잘 통했고,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했을 때에는, 신덕왕후와 신덕왕후의 소생동생들을 이방원이 피난시켜 준 일도 있었다 (민가에서 밥을 얻어 동생들을 먹이기 까지 함)

또한 이방원이 17세에 과거에 합격하는데, 신덕왕후의 뒷바라지가 상당했다는 기록마저 있다 (강씨가 성실히 공부하는 방원을 보며, 방원이가 어찌하여 내 아들이 아니란 말인가! 하며 탄식을 했다는 기록이 있음)

 

이성계 또한 이방원의 급제에 눈물을 쏟았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과거 합격에 강씨의 역할이 있었기에, 이성계 역시 강씨에게 감사하면서 자신의 출신인 동북면에 대한 콤플렉스를 이기려 한 듯 보인다.

 

, 신덕왕후 강씨는 동북면 출신인 신의왕후 한씨가 못해줄 수 밖에 없던, 이성계 자녀들의 개경에서의 삶에 서포터가 되어 주었으며, 원래부터 사이가 나빴던 적이 없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였다.

 

신덕왕후 강씨가 신의왕후의 소생과 관계가 좋았고, 또한 중앙의 귀족 모두와도 관계가 원만했던 것은 그녀의 집안 내력과도 상당한 관련이 있다.

그녀의 집안은 한때, 고려의 핵심인 황해도 패서출신 이었지만, 고려전기에 잠시 외척이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강씨의 작은아버지인 강윤충은 천한노비 출신이었다는 점을 보아 집안이 몰락 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덕왕후의 숙부인, 이 강윤충이 충숙왕 때, 발탁되어 출세를 하게 되고, 충혜왕 때에 더욱 신분이 상승하게 됨과 동시에 그 아들 충목왕 때는 찬성사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덕녕공주와 불륜의 관계까지 나아가다 공민왕 때, 권력을 잃고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한 입지전 적인 인물이었다.

 

강윤충은 명문집안의 출신과 달리 왕이 바뀔 때 마다 처세를 능수능란하게 하였는데, 즉 밑바닥 출신의 전형적인 처세를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노비부터 시작하여 왕의 마음과 몽골공주의 마음을 얻기까지 강윤충의 처세는 대단한 것이었다.

 

나중에 이성계의 경처가 되는 신덕왕후의 처세도, 이런 집안의 내력과 무관하지 않아보인다. 강윤충이 노비가문을 세도가의 반열에 올렸던 가문의 기억은, 신덕왕후에게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강한 권력의 집착을 낳았을 것이고, 결국 자신의 아들 곧 이방번, 방석 형제들을 죽음으로 내 몰게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을 한다.

 

e31aaf04002e4892a37bb11e32d969f0142554.jpg
                                                                       태종 이방원의 헌릉 

, 강씨는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일정부분 지분이 있다고 본인 스스로 생각을 하였고 (정도전 등 그 일파 역시 그것을 인정함), 또한 이성계 또한 그러한 그녀의 주장을 인정하였던 것 같다. 그녀는 이성계를 중앙귀족과 연결을 시켜주었고, 중앙의 인맥을 만들어 주었으며, 이러한 인맥과 혼맥이 이방원의 정몽주 척살보다 강력한 조선 건국의 씨앗이라 생각한 듯 하다.

또한 이성계 가문은, 선대에 이미 두 번째 부인 소생에게로, 권력이 이어진 선례도 있었기에(할아버지인 도조 이춘의 경우) 신덕왕후는 자신의 소생인 방석을 왕위에 올릴 수 있다고 생각을 한 듯 하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은 그녀의 모든 처세술과 정치적 계산을 사장시키고, 그녀의 아들들 모두 죽음으로 몰게 되는 상황에 이른다. 사실 정몽주의 척살과 이성계의 인맥 어느것이 조선의 건국에 공이 되었는지는 후대 판단하는 자들의 몫이지만, 그녀의 처세술이 없었다면 조선의 건국은 힘들었을 것이고, 그랬기에 정도전 등 의 세력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mymiky 18-03-15 03:43
 
신덕왕후 강씨의 숙부 강윤충은 서숙(庶叔)입니다.
할아버지가 집안의 여종과 관계해서 낳은 서자, 더 정확히 말하면 얼자죠.
강윤충 신분이 미천한건 맞는데, 그렇다고 강씨 집안 자체가 미천한 것은 아닙니다.

이성계가 뭐하려고, 몰락한 집안의 여식과 정략혼을 합니까?-.-
정략혼 자체가, 집안과 집안의 이득을 보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것인데..

어차피, 천한 노비 집안이면 정실이 아니라,
그냥 편하게 첩실로 맞으면 될 것을;;

그리고, 이성계랑 결혼하기 이전에, 이미 강씨 집안과 통혼이 있습니다.
이성계 형인가? 하고 강씨 집안과 혼맥이 있어요.

즉, 본문 내용과 달리, 강씨 집안이 천하거나 몰락한 집안이 아니라는 것임.
이들의 결혼도 친척들의 중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history2 18-03-15 08:04
 
그렇군요.... 서숙이지는 몰랐습니다... 저는 강윤충이란 인물이 너무 흥미 진진해서요..몽골 공주랑 불륜을 맺고,,암튼 강씨 집안의 정치적인 DNA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이성계가 아무튼 정치적인든 사랑디든, 경처로서 강씨는 훌륭한 선택이네요
history2 18-03-15 08:11
 
강윤충(康允忠)은 천예(賤隸) 출신으로 애초 충숙왕을 섬겨 호군(護軍)으로 임명되었다. 낭장(郞將) 백유(白儒)의 처를 범하자 감찰사(監察司)에서 심문해 자백을 받은 후 처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왕은 윤허하지 않았다. 감찰사와 첨의부(僉議府)·전법사(典法司)가 번갈아 상소해 극론했으나 보류해둔 채 하교를 내리지 않았다. 감찰사가 여러 날 업무를 거부하자 결국 곤장을 쳐서 바닷섬으로 유배보냈다.

조적(曹頔)의 난 때 충혜왕을 시종한 노고를 기려 일등공신으로 삼고 밀직부사(密直副使) 벼슬을 내려주었다. 당시 왕이 사건노비(四件奴婢) 를 매우 급하게 구하면서 강윤충과 민환(閔渙)에게 이 일을 맡겼다.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승진한 후 양광도(楊廣道)·전라도(全羅道)·경상도(慶尙道) 세 도의 문민질고사(問民疾苦使)로 나갔는데, 민환이 악소배(惡少輩)를 여러 도에 나누어보내 가렴주구를 그치지 않자 강윤충이 그 자들을 체포해 순군(巡軍)에 가두었다.

충목왕 때 찬성사(贊成事)로 임명되었다. 애초 조득구(趙得球)가 왕후(王煦)를 따라 원나라로 갔는데, 왕후가 그에게 정치의 개혁 방안을 묻자 조득구는,

“강윤충이 어린 임금의 곁에 있으면서 임금을 나쁜 길로 몰아가고 있으니 정말로 정치를 개혁하려는 마음이 있거든 그를 먼저 제거해야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강윤충이 그 소문을 듣고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 후 왕후와 김영돈(金永旽)이 기삼만(奇三萬)의 옥사에 얽혀드는 바람에 정치도감의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원나라로 가서 황제에게 사정을 보고하려 했다. 강윤충은 조득구가 자기에게 해를 끼칠까 우려한 나머지 왕을 꾀어 그를 탐라(耽羅 : 지금의 제주도)로 유배보냈다.

당시 한창나이였던 덕녕공주(德寧公主)가 대궐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강윤충과 배전(裵佺)이 그 거처에 드나들며 총애를 받아 정권을 잡고 세력을 부렸다. 어떤 사람이 감행령(監行領)8)에 다음과 같은 익명의 방(榜)을 붙였다.

“찬성사(贊成事) 강윤충은 내시와 시녀 각 한 명을 통해 임금의 모친과 만나 음란한 짓을 자행하고 그 총애를 받고 있다. 하유원(河有源)과 함께 정치도감(整治都監)의 일을 방해하고 있으니, 이 두 사람만 처형시키면 나라에 근심이 없을 것이다.”

밀직사(密直使) 인당(印璫)과 찬성사(贊成事) 권겸(權謙)·이수산(李壽山)이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에게,

“강윤충이 임금의 모후와 간통하는 큰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지금 강윤충이 원사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자 왕에게, ‘고용보의 모함으로 선왕(先王 : 충혜왕)께서 악양(岳陽 : 지금의 중국 후난성[湖南省] 위에양시[岳陽市])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죄를 짓고 귀국한 터에 전하께서 무엇하러 정중한 예의로 대우합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라고 일러바쳤다. 고용보가 그 말을 듣고 그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가 강윤충에게,

“그대는 내신(內臣)으로 무례한 짓을 자행하니 어찌된 일인가? 이제부터 내전에 가까이 오지 말라!”
고 꾸짖자 겁이 난 강윤충이 병을 핑계하고 며칠간 출근하지 않다가 고용보의 모친에게 뇌물을 주고 선처를 부탁했다. 고용보가 강윤충을 불러놓고 인당 등에게,

“이제 찬성사 강윤충에 관계된 사안을 분명하게 밝히고자 하니 공들은 앞서 한 말을 다시 해보라.”
고 다그치자 인당 등이 서로 바라만 보고 입을 닫았다. 고용보가 이들을 꾸짖는 척하면서 강윤충을 돌아보고, “그대는 다시 일을 보아야 할 것이오.”라고 말했다. 마침 왕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원나라 황제의 조서를 영접했는데, 강윤충도 호종하였다.

김륜(金倫)·이제현(李齊賢)·박충좌(朴忠佐) 등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12)

“맹자(孟子)는, ‘어질지 못한 자와 어찌 더불어 대화할 수 있겠는가? 위태로운 것을 보고도 편안하다 하고 남의 재앙을 틈타 자기 이익을 챙기면서, 그 통에 망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자는 어질지 못하니, 이런 자들과 더불어 대화해도 괜찮다면 어찌 나라와 집안을 망치는 일이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임금을 속이고 백성을 기만하면서 천하의 공론을 꺼리지 않고 천하의 근본이 되는 법(法)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크게 어질지 못한 자입니다. 그런 자와 더불어 대화하는 것도 옳지 않은데, 하물며 어찌 그를 믿고 일을 맡기겠습니까? 저희들이 보건대, 강윤충은 천예(賤隸)의 신분에서 벼슬해 선왕(先王)의 총애를 받게 되자, 간사하게 아첨하고 황음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이미 벌로 곤장까지 맞았으니 법을 두려워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해야 마땅한데, 오히려 허물을 숨긴 채 다시 영화를 탐내 망령되이 승진을 청탁하는 등 온갖 방법으로 욕심을 채우고 있으니 당대의 간흉입니다. 선왕께서 원나라 황제로부터 벌을 받아 악양(岳陽)까지 갔다가 그 곳에서 돌아가셔서 그 시신을 본국으로 모셔와 장사지내게 된 것은 바로 으뜸가는 역적 강윤충 때문이며, 민환(閔渙) 등 아홉 명은 종범에 지나지 않습니다. 쌓인 허물을 모조리 임금께로만 돌린 후 교활한 꾀로 자신은 살아남았으니 이것이 바로 온 나라가 가슴 아프게 여기며 분개하는 바입니다.

신(臣) 김륜 등은 모두 충성의 뜻을 품고 분개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그의 죄를 조목별로 써서 아룁니다. 강윤충이라는 자는 김남보(金南寶)의 처를 범하고 또 백유(白儒)의 처와 간통한 일로 여러 차례 장형을 당했으므로 몸에 흉터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외람되게 정동원외랑(征東員外郞)으로 임명된 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겸직하면서 권세를 마구 휘둘러 불법을 자행했습니다. 현재 처첩을 셋이나 두었는데도 또 죽은 밀직사(密直使) 조석견(趙石堅)14)의 처가 남편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장가들어 그 집 재산을 차지하였습니다.

또 지정(至正) 6년(충목왕 2, 1346), 천자께서 왕토군[王脫歡]15)과 김노카이[金那海]16)에게 명해 우리나라의 폐정을 바로잡게[整治] 했을 때 왕토군이, ‘전대의 일은 강윤충이 기실 재앙의 근원이니, 먼저 그를 퇴출시켜야만 폐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공언했습니다. 겁을 낸 강윤충이 음흉한 꾀를 몰래 꾸민 후, 김노카이를 속여 왕토군을 견제하게 함으로써 폐정 개혁을 망쳐버렸습니다. 또 지정 7년(1347), 천자께서 왕토군 등에게 다시 명해 폐정 개혁을 지시하자, 전하께서는 왕토군 등 재신(宰臣)과 국가의 원로들을 불러 그 뜻에 따라 시행할 일을 의논했습니다.

국가의 원로들은, ‘전민(田民)의 송사를 듣고 판결하는 것은 단지 폐정 개혁 중 한 가지 일일 뿐입니다. 먼저 관리를 임용하는 법을 반드시 바로잡아 적합한 인재를 내외 관직에 임명한 후 비위가 있을 경우 감찰(監察)을 시켜 탄핵하게 한다면 황제의 뜻에 부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건의했습니다. 강윤충은 당시 정방제조(政房提調)17)로 있으면서 자신의 이권을 잃을까 겁이 난데다 또 왕토군이 했던 말에 불만을 품은 나머지 낯빛이 변하며 소매를 떨쳐 일어나버리고 여론을 전하께 보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얼마 후 자기와 친밀한 안자유(安子由)18) 등 대민업무에 어두운 자들을 정치도감관(整治都監官)으로 임명했으며, 왕토군을 영도첨의(領都僉議)로 승진시킨 것도 사실은 그의 실권을 빼앗은 것이니, 그가 어찌 폐정 개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왕토군이 일을 하나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은 기실 강윤충의 훼방 때문입니다.

종묘(宗廟)에 제사 올리는 일은 나라의 대사입니다. 그런데 안자유가 태묘(太廟)를 임시로 맡으면서 희생(犧牲)으로 사용할 소를 원당(願堂)의 승려에게 함부로 주는 바람에 희생을 올리는 의식에 허물이 있게 하였습니다. 감찰(監察)이 그의 죄를 탄핵하자, 그의 사위 이읍(李浥)이 강윤충의 문객(門客)이므로 강윤충이 온갖 꾀로 구제한 후 도리어 안자유를 승진시켜 찬성사(贊成事)가 되게 했습니다. 간관(諫官) 송천봉(宋天鳳)·이방실(李芳實)·안원룡(安元龍)이 안자유의 사첩(謝牒)에 서명하지 않자 강윤충은 왕의 명령이라 사칭하고 이방실 등을 불러 억지로 휴가를 요청하게 한 후 곧이어 그들의 관직을 빼앗았습니다.

또 강윤충은 감전(監傳)의 노비였으니 어찌 유품(流品)의 청렴하고 부패함을 알겠습니까? 그가 정방제조(政房提調)가 되자 인사권[銓選]을 휘두르면서 관직의 임면을 제멋대로 행하니 뇌물이 공공연히 오가 그 집의 문전이 시장바닥 같았습니다. 나라에서는 권세를 독점해 백성에게 해독을 끼쳤고, 심지어 선왕(先王)으로 하여금 살아 계실 때에는 황제의 견책을 받게 하고 돌아가셔서는 시호(諡號)도 제 때에 받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만약 이 반역의 죄를 추궁해 바로잡지 않는다면, 선왕의 원나라에 대한 충정을 밝히지 못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이 글을 원나라로 보내어 전대의 일은 선왕의 허물이 아니라 모두 강윤충의 소행임을 밝히소서. 이 반역자를 궁궐의 문 앞에서 목을 베어 죽임으로써[兩觀之誅] 선왕이 받으신 만세(萬世)의 수치를 씻게 하소서.”

왕과 대비(大妃)가 느낀 바 있어 이 글을 원나라로 보내었다. 공민왕 3년(1354), 다시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가 곧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5년(1356), 호군(護軍) 임중보(林仲甫)가 충혜왕의 서자인 석기(釋器)를 받들어 몰래 반역을 도모했다가 순군(巡軍)에 체포 구금되어 문초를 받았는데 그 공술(供述)에 강윤충의 이름이 나왔으므로 좌천시켜 동래현령(東萊縣令)으로 삼았다가 8년(1359)에 그를 죽였다.
 
 
Total 16,45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16459 [한국사] 백성이 굶어 죽어도 신경도 안 쓰던 조선 클라스.jpg (6) 로마법 04:14 450
16458 [한국사] 조선은 정말 가난한 나라였나요? (10) 유란 01:06 650
16457 [한국사] 천진시 정해현과 고대의 '요동' (22) 감방친구 09-23 464
16456 [기타] 흥수아이·소로리 볍씨 논쟁 (8) 뉴딩턴 09-20 1727
16455 [세계사] 폴리네시아인이 정말 미스테리네요. (5) 아스카라스 09-19 2396
16454 [기타] 벙거지가아니고 정식명칭은 (3) 사르트카 09-19 729
16453 [한국사] 중국천하대동란때에 고구려가 삼국통일을하면.... (5) 사르트카 09-19 1388
16452 [한국사] 북방 중국어 입성(ㄱ,ㄷ,ㅂ 받침)사라진 역사적 이유 (11) 열공화이팅 09-19 1223
16451 [한국사] 백제의두글자 성씨 (4) 사르트카 09-18 1295
16450 [세계사] 아골타 정확한 여진어와 만주어 발음과여진족과만주… (2) 사르트카 09-18 1027
16449 [기타] 신라 가야 백제 고구려 민족정체성 대해서 궁금합니… (1) 뉴딩턴 09-18 696
16448 [한국사] 고조선 천부인 天符印 발견 소식 (12) 도배시러 09-18 1600
16447 [한국사] 옛날kbs광개토대왕조연출이썼던사극갑옷글에대한 반… (2) 사르트카 09-18 745
16446 [기타] 회고 (1) 위구르 09-17 250
16445 [세계사] 명말청초 중원 한족 인구의 삭감 추정 (5) 위구르 09-17 716
16444 [중국] 뜬금 생각난 한족관련 사실 (10) 위구르 09-17 773
16443 [한국사] 하남 감일동 굴식 돌방무덤 52기 출토품·석실 얼개 … (2) 뉴딩턴 09-17 521
16442 [기타] 新중국(?)국가 2편 (4) 위구르 09-17 694
16441 [기타] 손흥민의 손씨가 중국성 인가요? 일본 연관성 ? (5) 조지아나 09-17 1460
16440 [한국사] 고려시대 가장 쇼킹한 입신을 한 유청신... (26) 슈프림 09-17 1130
16439 [한국사] 고수님들 삼국사기 기록 증명하는듯이 신라 초기 사… (1) 뉴딩턴 09-16 526
16438 [한국사] 논란의 ㅐ발음 최종 정리 해봤습니다 (4) 징기슼 09-16 564
16437 [한국사] 외래 유입론들은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상한이 올라… 뉴딩턴 09-16 552
16436 [한국사] 낙랑군 패수의 위치와 사서조작 도배시러 09-16 364
16435 [한국사] 단모음화된 애와 에를 발음하던 사람들이 사회 전면… (9) 열공화이팅 09-14 815
16434 [한국사] 백제의 군 호칭 키미, 키시 (5) 호랭이해 09-14 1560
16433 [일본] 백제와 일본의 관계는 (4) 아스카라스 09-14 993
 1  2  3  4  5  6  7  8  9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