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8-03-19 14:05
[한국사] 가탐도리기 登州海行入髙麗渤海道 연구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2,585  

1. 신당서(新唐書) 가탐 도리기(道理記) 연구

원문과 국역

唐置羈縻諸州,皆傍塞外,或寓名於夷落。而四夷之與中國通者甚眾,若將臣之所征討,敕使之所慰賜,宜有以記其所從出。天寶中,玄宗問諸蕃國遠近,鴻臚卿王忠嗣以《西域圖》對,才十數國。其後貞元宰相賈耽考方域道里之數最詳,從邊州入四夷,通譯於鴻臚者,莫不畢紀。其入四夷之路與關戍走集最要者七:一曰營州入安東道,二曰登州海行入高麗渤海道,三曰夏州塞外通大同雲中道,四曰中受降城入回鶻道,五曰安西入西域道,六曰安南通天竺道,七曰廣州通海夷道。其山川聚落,封略遠近,皆概舉其目。州縣有名而前所不錄者,或夷狄所自名云。

요약 : 재상 가탐이 방역도를 고찰했는데 그 자세함이 최상이다. 나라의 변방으로 들어오는 四夷에게서 홍려(관직명)의 통역을 거쳐 정보를 얻어 완성하였다. 四夷로 들어가는 길은 관문의 병영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총 7개이다. 첫번째는 영주에서 안동부로 가는 길, 두 번째는 등주에서 바닷길로 고구려/발해로 가는 길 (하략)

(營州入安東道)
營州西北百里曰松陘嶺,其西奚,其東契丹。距營州北四百里至湟水。營州東百八十里至燕郡城。又經汝羅守捉,渡遼水至安東都護府五百里。府,故漢襄平城也。東南至平壤城八百里;西南至都里海口六百里;西至建安城三百里,故中郭縣也;南至鴨淥江北泊汋城七百里,故安平縣也。自都護府東北經古蓋牟、新城,又經渤海長嶺府,千五百里至渤海王城,城臨忽汗海,其西南三十里有古肅慎城,其北經德理鎮,至南黑水靺鞨千里。


영주(營州) 서북쪽 100리는 송형령(松陘嶺)이라고 하고 그 서쪽은 해(奚)이며 그 동쪽은 거란(契丹)이 떨어져 있다. 영주(營州)에서 북쪽으로 400리를 가면 황수(湟水)에 이르고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180리를 가면 연군성(燕郡城)에 이른다. 다시 여라수착(汝羅守捉)을 지나서 요수(遼水)를 건너 옛 한(漢)의 양평성(襄平城)이었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에 이르기까지 500리이다. (안동도호부에서) 동남쪽으로 평양성(平壤城)까지 800리이고, (안동도호부에서) 서남쪽으로 도리해구(都里海口)까지 600리이며, (안동도호부에서) 서쪽으로 옛 중곽현(中郭縣)이었던 건안성(建安城)까지 300리이며, (안동도호부에서) 남쪽으로 압록강(鴨淥江) 북쪽에 있는 옛 안평현(安平縣)이었던 박작성(泊汋城)까지 700리이다. 안동도호부(都護府)로부터 동북쪽으로 옛 개모성(蓋牟城)과 신성(新城)을 지나 다시 발해(渤海)의 장령부(長嶺府)를 지나며 1500리(안동도호부에서 발해왕성까지)를 가면 발해의 왕성(王城)에 이르는데 발해의 왕성은 홀한해(忽汗海)를 내려다보고 있다. 발해왕성(其)의 서남쪽 30리는 옛 숙신성(肅慎城)이고 발해왕성(其)의 북쪽으로 덕리진(德理鎮)을 지나서 남흑수말갈(南黑水靺鞨)까지 1000리이다.

(登州海行入髙麗渤海道)
登州東北海行,過大謝島、龜歆島、末島、烏湖島三百里。北渡烏湖海,至馬石山東之都裏鎮二百里。東傍海壖,過青泥浦、桃花浦、杏花浦、石人汪、橐駝灣、烏骨江八百里。乃南傍海壖,過烏牧島、貝江口、椒島,得新羅西北之長口鎮。又過秦王石橋、麻田島、古寺島、得物島,千里至鴨淥江唐恩浦口。乃東南陸行,七百里至新羅王城。自鴨淥江口舟行百餘里,乃小舫溯流東北三十里至泊汋口,得渤海之境。又溯流五百里,至丸都縣城,故高麗王都。又東北溯流二百里,至神州。又陸行四百里,至顯州,天寶中王所都。又正北如東六百里,至渤海王城。

등주(登州)에서 동북쪽으로 바닷길로 (대사도(大謝島)와 구흠도(龜歆島)와 어도(淤島)와 오호도(烏湖島)를 거치는 300리를 바닷길를 가고, 북쪽으로 오호해(烏湖海)를 건너서 마석산(馬石山)의 동쪽에 있는 도리진(都里鎮)에 이르는데까지 200리이다. 동쪽 해연(海壖, 해변/해안)에 정박한다. 청니포(青泥浦)와 도화포(桃花浦)와 행화포(杏花浦)와 석인왕(石人汪)과 탁타만(橐駝灣), 오골강(烏骨江)을 지나는 800리의 바닷길을 가고 남쪽의 해연(海壖)에 정박한다. 오목도(烏牧島)와 패강구(貝江口)와 초도(椒島)를 지나면 신라(新羅)의 서북쪽에 있는 장구진(長口鎮)에 도달한다. 또한 진왕석교(秦王石橋)와 마전도(麻田島)와 고사도(古寺島)와 득물도(得物島)를 지나는 1000리를 항해하면 압록강(鴨淥江)의 당은포구(唐恩浦口)에 이른다. 이내 동남쪽으로 육로를 이용하여 700리를 가면 신라(新羅)의 왕성(王城)에 도달한다. 압록강(鴨渌江)의 어귀로부터 배를 타고 100여리를 가고, 이내 작은 배로 물길을 거슬러 동북쪽으로 30리를 가면 박작구(泊汋口)에 도달하는데 발해(渤海)의 경내이다. 또한 물길을 거슬러 500리를 가면 환도현(丸都縣)의 성(城)에 도달하는데 옛 고구려의 왕도(王都)이다. 또한 동북쪽으로 물길을 거슬러 200리를 가면 신주(神州)에 도달한다. 또한 육로를 이용하여 400리를 가면 현주(顯州)에 도달하는데 천보(天寳) 년간에 왕이 도읍한 곳이다. 또한 정북쪽에서 약간 동쪽으로 600리를 가면 발해(渤海)의 왕성(王城)에 도달한다.


1) 등주 ~ 오호도
ㅡ 총 3백 리
ㅡ 경유지 : 등주(봉래) - 대사도 - 구흠도 - 어도 - 오호도

2) 오호도 ~ (馬石山東之)도리진
ㅡ 총 2백 리
ㅡ 경유지 : 오호도 - 오호해 - 도리진

3) 도리진 ~ 오골강
ㅡ 총 8백 리
ㅡ 경유지 : 도리진 - 청니포 - 도화포 - 행화포 - 석인왕 - 탁타만 - 오골강

4) 오목도 ~ 신라 서북쪽 장구진
ㅡ 거리 : 정보 없음
ㅡ 경유지 : 오목도 - 패강구 - 초도 - 신라 서북쪽 장구진

5) 진왕석교 ~ 압록강 당은포구
ㅡ 총 1,000리
ㅡ 경유지 : 진왕석교 ~ 마전도 ~ 고사도 ~ 득물도 ~ 압록강 당은포구

6) 압록강 ~ 신라 왕성
ㅡ 총 700 리
ㅡ 특기 사항 : 육로, 동남쪽
ㅡ 경유지 : 정보 없음

7) 압록강 ~ 박작구
ㅡ 총 130 리
ㅡ 특기 사항 : 100 리 지점에서 작은 배로 갈아탐, 이 지점에서 이동 방향 동북쪽 제시
ㅡ 경유지 : 정보 없음

8) 박작구 ~ 고구려의 옛 왕성인 환도성
ㅡ 총 500 리
ㅡ 특기 사항 : 역시 물길을 거슬러 오른다 돼 있고 문맥 상 이동 방향 역시 동북쪽 추정
ㅡ 경유지 : 정보 없음

9) 환도성 ~ 신주(神州)
ㅡ 총 200 리
ㅡ 특기 사항 : 역시 물길을 거슬러 동북 방향 이동
ㅡ 경유지 : 정보 없음
 
10) 신주(神州) ~ 현주(顯州)
ㅡ 총 400 리
ㅡ 특기 사항 1 : 육로, 문맥 상 이동 방향 동북, 천보 년간에 왕(발해)이 도읍한 곳
ㅡ 특기 사항 2 : 천보 년간(天寶, 당 현종 후기, 742~756년), 안녹산(安綠山)의 난이 있던 시기
ㅡ 특기 사항 3 : 천보 년간의 발해 왕성은 발해 중경(747년 또는 751 년에 동모산에서 이곳으로 천도), 학계 통설에서 현 길림성(吉林省)화룡현(和龍縣) 북고성촌(北古城村) 남동쪽에 비정
ㅡ 특기 사항 4 : 안녹산의 난이 일어난 직후인 756년 초에 현주, 즉 중경에서 상경(上京, 학계 통설에서 현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에 비정)으로 천도
ㅡ (정보 출처 : 한민족문화대백과 ‘발해’)
ㅡ 경유지 : 정보 없음

11) 현주(顯州) ~ 발해 왕성(王城)
ㅡ 거리 : 총 600 리
ㅡ 특기사항 1 : 정북쪽에서 조금 동쪽으로 치우친 방향
ㅡ 특기 사항 2 : 발해는 총 네 번 천도했는데 각각의 천도 시기는 의견이 분분함. 가탐 도리기 상의 발해 왕성은 상경으로 추정됨.
ㅡ 특기 사항 3 : 발해는 780년대 후반 상경에서 동경(東京, 학계 통설에서 현 중국 지린성 琿春에 비정)으로 천도
ㅡ (정보 출처 : 한민족문화대백과 ‘발해’)
ㅡ 특기 사항 4 : 따라서 가탐 도리기 정보는 발해 수도가 상경이었던 780 년대, 혹은 그 이전의 정보로 추정됨
ㅡ 특기 사항 4 : 가탐은 730년 출생, 805년 사망, 751 년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며 관직에 진출.
ㅡ 경유지 : 정보 없음

가탐 도리기의 登州海行入髙麗渤海道는 출발지가 등주요 목적지가 고구려의 옛 땅이자 당시 발해 땅인 곳으로 최종 목적지는 당시 발해 왕성(상경으로 추정)

일도(一道)인 營州入安東道의 최종 목적지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요 최종 목적지인 안동도호부를 중심으로 주변 지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에서 보이듯 이도(二道)인 登州海行入髙麗渤海道는 목적지가 발해(와 고구려의 옛 땅)요 최종 목적지가 당시 발해 왕성이었던 만큼 신라 땅에 갈 일도 신라 땅을 설명할 일도 경유할 일도 없음

따라서 가탐 도리기 등주발해도에서도 발해 왕성으로 가는 입구인 압록강을 기준으로 신라 왕성까지 거리를 간략히 설명하고 있을 뿐으로 거리 700 리에 집착해서 이거 하나로 인해 그밖의 전체 내용을 틀어버리는 것은 말그대로 견강부회이다. 그런 식이면 가탐 당시에는 이미 안동도호부가 폐지된 때이고 가탐 도리기 상 안동도호부로 제시된 양평, 혹은 요동성은 안동도호부 연혁상 가장 짧게 도호부가 위치했던 곳이다

안동도호부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ㆍ總章元年(668 년) ㅡ 평양성(平壤城), 실제 설치하지 못 함
ㆍ上元三年(674 년) ㅡ 요동군의 옛 성(遼東郡故城)
ㆍ儀鳳二年(677 년) ㅡ 신성(新城)
ㆍ聖歴元年(698 년) ㅡ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로 개칭
ㆍ神龍元年(705 년) ㅡ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로 명칭 복원
ㆍ開元二年(714 년) ㅡ 평주(平州)
ㆍ天寳二年(743 년) ㅡ 요서의 옛 군성(遼西故郡城)
ㆍ至徳 (756 년 ~ 758 년) ㅡ 폐지
이후 ㅡ 발해가 차지함(尋為勃海大氏所據)
ㆍ발해 이후(907년 이후 오대십국 시대) ㅡ 거란이 차지하고 동평군을 세웠다가 남경으로 승격함(五代時地入契丹阿保機葺遼陽故城建東平郡尋升為南京)
(출처 : 본인의 글 ‘안동도호부의 연혁 및 설치 이후의 국제 정세’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61065&sca=&sfl=mb_id%2C1&stx=cellmate&page=10)

즉 압록강에서 육로로 신라왕성까지 700 리라 한 것은 登州海行入髙麗渤海道가 전하고자 하는 지리 경유 정보에서 논외인 것이다. 물론 왜 700 리라 했는지는 따로 연구 과제로 삼아 따져 볼 일이다.

가탐 도리기의 登州海行入髙麗渤海道에서 중각 기착지는 도리진 뿐만 아니라 오골강, 압록강을 포함해 세 곳으로 볼 수 있다

가탐 도리기 登州海行入髙麗渤海道의 항로는 동일 선상 선 위에서 쭉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문맥 상
1) 도리진의 동쪽에 정박(東傍海壖)
2) 오골강의 남쪽에 정박(乃南傍海壖)
3) 오목도에서 신라 서북쪽 장구진까지 경로
4) 진왕석교에서 압록강 당은포구까지 경로
5) 압록강 입구에서 발해 현주까지 가는 경로

이렇게 5 개로 이 5 개의 바닷길 경로는 다음과 같이 이어지거나 어긋난다

1) 등주 ~ 압록강 당은포구

등주(봉래) - 대사도 - 구흠도 - 어도 - 오호도 - 오호해 - 도리진 - 청니포 - 도화포 - 행화포 - 석인왕 - 탁타만 - 오골강 - 진왕석교 ~ 마전도 ~ 고사도 ~ 득물도 ~ 압록강 당은포구

2) 오목도 ~ 신라 서북쪽 장구진

오목도 - 패강구 - 초도 - 신라 서북쪽 장구진
(오목도의 이전 경유지는 오골강으로 볼 수도 있다)

로 서로 다른 방향의 2 개의 항로인 도리진~압록강과 오목도~장구진이 한 지점에서 만나는데 그곳은 요하만이다

이렇게 분석한 경위와 근거 설명은 뒤에서 차차 하겠다


2. 장황(章潢)의 도서편(圖書篇, 1577년) 연구


1) 원문 1
沙門島爲解宋寨界 單山爲黃縣界 桑島爲馬停寨界 龜島爲昌邑縣界 歆末島爲壽光界 都里鎭爲蒲臺界 靑島爲利津界 黃島爲賓州界 直沽口爲寶低縣界 塔山爲盧龍衛寨界 南半洋山爲昌黎縣界 計一千二百里, 抵遼東東北半. 洋山爲山海衛界 蔬萊島爲中前所界 牛車島爲中後所界 孤山爲中右所界 向陽島羅兒島爲金州衛界 石灘島爲左所界東雲島 黃駝島爲蓋州衛界 屛風山爲復州衛界 鳳凰山爲中左所界 女兒河爲中屯衛右屯衛界 遼河渡古寺島爲廣寧衛界 麻田島平島爲海州衛界 湯站堡爲鎭遼所界 臨江爲義州界計一千三百餘里爲鴨綠朝鮮界

2) 원문 2
沙門島為解宋寨界單山為黄縣界桑島為馬停寨界龜島為昌邑縣界歆未島為夀光界都里鎮為蒲臺界青島為利津界黄島為賔州界直沽口為寳坻縣界㙮山為盧龍衞界蔬萊島為中前所界牛車島為中後所界孤山為中右所界向陽島羅兒島為金州衛界石灘島為左所界東雲島黄駝島為蓋州衞界屏風山為復州衞界鳳凰山為中左所界女兒河為中屯衞右屯衞界遼河渡古寺島為廣寜衞界麻田島平島為海州衞界湯站堡為鎮遼所界臨江為義州界計一千三百餘里為鴨綠朝鮮界

장황의 도서편은 명나라 시기에 편찬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이 도서편에 수록된 중국 연안지역 섬의 정보와 그 순서는 등주에서 요동 지역에 이르는 정보가 8 세기 작성된 가탐 도리기의 登州海行入髙麗渤海道 정보와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원문 1과 원문 2의 내용은 차이가 있다
원문 1은 현재 국내 인터넷에서 통용되는 도서편 원문이고 원문 2는 중국사서DB에서 본인이 직접 취득한 도서편 원문이다

본인이 최초 가탐 도리기 登州海行入髙麗渤海道를 고찰할 당시에는 중국DB의 도서편에서 관련 정보를 발견하였고, 해당 내용의 정확한 해석(한자)을 위해 네이버에 원문 일부를 붙여넣기 하였는데 그 때에 몇몇의 블로그 등의 사이트가 뜨는 것을 발견하여 그 가운데에 어느 곳을 방문했으나 소위 대륙삼국설/대륙조선사 등의 분위기를 띠는 곳이라 글은 자세히 보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해당 원문만 복사하여 고찰에 이용했던 것이다 이 때만 해도 중국사서DB의 원문2와 본인이 사용한 원문1이 다를 것이라 생각치 못 했다

국내 인터넷 통용 원문1에 있는 “南半洋山爲昌黎縣界 計一千二百里, 抵遼東東北半. 洋山爲山海衛界”가 중국사서DB에는 없다. 이 지역에는 현 중국 천진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지역으로 문맥 상 원문 1의 “南半洋山爲昌黎縣界 計一千二百里, 抵遼東東北半. 洋山爲山海衛界”가 들어가 있는 게 옳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어느 것이 실제 사서에 적혀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으므로 고찰에는 최초 사용한 원문 1을 버리고 중국사서DB의 원문 2를 근거하기로 하였다.

다만 고찰 전에 있고 없고의 차이를 언급하자면
1) 있을 때에 창려계 뒤의 計一千二百里가 등주~창려의 거리로, 압록강 앞의 計一千三百餘里가 산해관에서 압록강까지의 거리로 해석할 수 있다
2) 또한 요동의 위치가 抵遼東東北半에 따라 산해관 근방으로 상정될 수 있다

그러나 원문 1의 진위를 가릴 수 없고, 이 고찰에서 근거로 삼는 원문 2에는 해당 내용이 없으며 마지막 문장인 計一千三百餘里為鴨綠朝鮮界를 놓고 봤을 때에 一千三百餘里와 為, 그리고 鴨綠朝鮮界가 분리가 되므로 一千三百餘里는 압록강의 길이를 나타냈다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미 16 세기 당시의 압록강은 현재의 압록강이다 그리고 또한 가탐 도리기의 登州海行入髙麗渤海道와 달리 도서편은 항로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중국 연안을 따라 각 행정구역의 바깥 경계를 이루는 섬의 정보를 기록한 것임을 염두할 필요가 있다

도서편의 정보는 가탐 도리기와 달리 경유지만 막연히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섬이 당시 실재한 각각의 행적구역 경계로 제시돼 있다는 것으로서 특출한 가치를 지닌다

즉 解宋寨, 黄縣, 馬停寨, 昌邑縣, 蒲臺 利津 등은 산동지역에 盧龍은 하북성에, 中前所, 中後所 등은 현 난하~대릉하 사이에 실재한 행정지역이다

가탐 도리기 항로와 마찬가지로 도서편의 해당 내용은 일방향의 일직선 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행정구역을 토대로 이 내용을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1) 沙門島為解宋寨界單山為黄縣界桑島為馬停寨界龜島為昌邑縣界歆未島為夀光界都里鎮為蒲臺界青島為利津界黄島為賔州界直沽口為寳坻縣界㙮山為盧龍衞界

ㅡ 현 산동 등주에서 하북 진황도시까지 연안을 따라 실재한 명나라 시기 행정지

2) 蔬萊島為中前所界牛車島為中後所界孤山為中右所界

ㅡ 현 요녕성 호로도시에 서에서 동으로 실재한 명나라 시기 행정지

3) 向陽島羅兒島為金州衛界石灘島為左所界

ㅡ 현 요동반도 끝의 좌우에 실재한 명나라 시기 행정지

4) 東雲島黄駝島為蓋州衞界屏風山為復州衞界鳳凰山為中左所界

ㅡ 현 요동 요하만 잉커우시에서 대련시 와방점 일대까지 실재한 명나라 시기 행정소

5) 女兒河為中屯衞右屯衞界遼河渡古寺島為廣寜衞界麻田島平島為海州衞界

ㅡ 현 요동 요하만 진저우시(錦州)에서 판진시 일대에 실재한 명나라 시기 행정소

6) 湯站堡為鎮遼所界臨江為義州界計一千三百餘里為鴨綠朝鮮界

ㅡ 현 요동반도 동안에서 현 압록강 북안까지 실재한 명나라 시기 행정소

즉 도서편 기록을 등주에서 요동까지 연안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배치하면 2 개의 경로가 나온다

첫째, 1) - 2) - 5) - 4)
둘째, 3) - 6)

이렇게 서로 다른 지점인 ‘등주~요서’와 ‘요동’을 교차하여 적은 것은 앞의 가탐 도리기와 동일한 태도이다

왜 이런 기술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는 따로 연구해 볼 일이다

사실 도서편의 각 행정지와 그 행정지의 (바다쪽) 경계를 이루는 각 섬의 위치는 따로 고찰할 필요도 없을 정도이다 또한 뒤에서 제시하겠지만 명나라 시대의 지도에서도 적확(的確)가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이러함에도 이해를, 납득을, 수긍을 못 하는 이들을 위해서 고찰을 이어가겠다


3. 도화포(桃花浦)의 위치

성경통지(盛京通志)

桃花島
新唐書地理志登州東北海行過大謝島龜歆島烏湖島三百里至都里鎮二百里東傍海壖過青泥浦桃花浦杏花浦
金史地理志興城縣有桃花島 按桃花島即桃花浦明初海運泊船于此今在寧逺州城南
ㅡ 신당서 가탐 도리기의 도화포는 도화도이다
ㅡ 금사 지리지에 흥성현에 도화도가 있다고 했다
ㅡ 명나라 초기에 이곳까지 배가 드나들었는데 지금 영원주 남쪽에 있다

금사(金史)

興城遼嚴州保肅軍縣故名,皇統三年廢州隸錦州。有桃花島。
ㅡ 흥성현에 도화도가 있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1461 년)

寜逺衞
在都司城西七百七十里本廣寜前屯中屯二衞地宣徳三年於此築城置衞又於城東五十里塔山别置中左千户所於城西四十里小沙河别置中右千户所屬焉
ㅡ 전둔, 중둔, 중좌소, 중우소 등

桃花島
在寜逺衞東一十五里濵海每嵗海舟漕運皆泊扵此
ㅡ 영원위 동쪽 15리 바닷가에 도화도가 있는데 배가 오고가며 정박한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북직 4)
河間府東至海豐縣三百里,南至山東德州二百五十里,西南至真定府冀州二百三十里,西至真定府定州二百有八里,西北至保定府安州百二十里。自府治至京師四百十里,至南京二千一百四十里。

靜海縣(河間)府東北百八十里。
海在縣東北百五十里,與山東、遼東接境。古名勃海。應劭曰:海之橫出者,曰勃。元行海運,以天津海道為咽喉要地。前朝亦嘗通運於此。嘉靖三十八年,遼撫侯汝翼,以遼東大饑,議移粟天津。其入遼之路,自海口發舟,至廣寧右屯河通堡,不及二百里,中間若曹泊店、月沱、桑沱、姜女墳、桃花島、咸可灣泊,各相去四五十里,無風濤、盜賊之虞。從之。尋復罷。《志》云:天津一隅,東南漕舶鱗集,其下去海不過百里,風帆馳驟,遠自閩浙,近自登、遼,皆旬日可達。控扼噤要,誠京師第一形勝處也。
ㅡ 하간부 정해현 동북 150리는 산동 및 요동과 접경이다(즉 오늘날 이 지역 동쪽부터 요동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음)
ㅡ 요동에 대기근이 들어서 나눠줄 곡식을 천진에서 운반할 일을 의논했다
ㅡ 천진은 요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길목이다)
ㅡ 천진에서 배를 타고 광녕위(현 진저우) 우둔하까지 200 리가 안 된다
ㅡ 천진과 광녕 우둔하 중간에 조박점, 월타, 상타, 강녀분, 도화도가 있는데 모두 정박할 수 있으며 각각 서로 간의 거리가 4~50 리 된다
ㅡ 명일통지에 따르면 천진은 한쪽 모퉁이에 있어서 동남쪽에 선박이 비늘처럼 밀집돼 있으며 그 아래 바다까지 불과 100리밖에 안 되고, 돛에 바람을 받아 빠르게 달리니 멀게는 민저(현 저장, 광둥 일대)로부터, 가깝게는 등주, 요동으로부터 모두 열흘이면 도달한다.

(산동 8)
寧遠衛司西七百七十里,西至廣寧前屯衛百三十里,東北至廣寧中屯衛百二十里,東北至廣寧衛三百里,西北至故大寧衛廢利州百五十里。

桃花島,在衛東十五里海濱,海舟往來,恆泊於此。又覺華島,在衛東南二十里,上有海雲、龍宮二寺。

ㅡ 도화도는 영원위 동쪽 15 리 지점 바닷가에 있다. 바닷배가 왕래하며 항상 이곳에 배를 댄다.

명사(明史)

嘉靖二年,遮洋總漂糧二萬石,溺死官軍五十餘人。五年停登州造船。二十年,總河王以旂以河道梗澀,言:「海運雖難行,然中間平度州東南有南北新河一道,元時建閘直達安東,南北悉由內洋而行,路捷無險,所當講求。」帝以海道迂遠,卻其議。三十八年,遼東巡撫侯汝諒言:「天津入遼之路,自海口至右屯河通堡不及二百里,其中曹泊店、月坨桑、姜女墳、桃花島皆可灣泊。」部覆行之。四十五年,順天巡撫耿隨朝勘海道,自永平西下海,百四十五里至紀各莊,又四百二十六里至天津,皆傍岸行舟。其間開洋百二十里,有建河、糧河、小沽、大沽河可避風。初允其議,尋以御史劉翾疏沮而罷。是年,從給事中胡應嘉言,革遮洋總。

寧遠衛宣德五年正月分廣寧前屯、中屯二衛地置,治湯池。西北有大團山。東北有長嶺山。南濱海。東有桃花島。東南有覺華島城。西有寧遠河,即女兒河也,又名三女河。又東有塔山,有中左千戶所,轄連山驛山至杏山驛,西有小沙河中右千戶所,轄東關驛至曹莊驛,俱宣德五年正月置。又南有鹽、鐵二場。東距都司七百七十里。
ㅡ 영원위에 도화도, 각화도, 여아하, 중좌소 등이 있음

天啟元年,沈陽破,應泰死,廷臣復思廷弼。給事中郭鞏力詆之,並及閣臣劉一燝。及遼陽破,河西軍民盡奔,自塔山至閭陽二百餘里,煙火斷絕,京師大震。
ㅡ 원숭환
ㅡ 심양이 무너짐
ㅡ 곧이어 요양이 무너지고 요하 서쪽의 군민이 도망쳤으며 탑산으로부터 여양 200여리가 연기와 불꽃으로 단절됐다

崇煥曰:「我寧前道也,官此當死此,我必不去。」第無以難,乃撤錦州、右屯、大、小凌河及松山、杏山、塔山守具,盡驅屯兵入關,委棄米粟十餘萬,而死亡載途,哭聲震野,民怨而軍益不振。
ㅡ 원숭환
ㅡ 금주, 우둔, 대릉하, 소릉하, 행산(본인은 이곳을 가탐 도리기의 행화포 관련지로 추정), 탑산(노룡위 탑산과 동명이처. 명나라 곳곳에 탑산이 산재) 등

廣寧中屯衛元錦州,屬大寧路。洪武初,州廢。二十四年九月置衛。東有木葉山。西有東、西紅螺山。西南有杏山。東南有乳峰山。又東有大凌河、小凌河。又西有女兒河,與小凌河合。又南有松山堡,在松山西,宣德五年正月置中左千戶所於此,轄杏山驛至小凌河驛。東有大凌河堡,洪武二十六年正月置廣寧右衛,二十八年四月廢。宣德五年正月置中右千戶所於此,轄凌河驛至十三山驛。又城南有鹽場二,鐵場一。又西有鐵場。東南距都司六百里。

금주부지(錦州府志)

桃花島 城南十五里海中明一統志云登萊海運泊船處按遼志為嚴州興城縣治


4. 조선시대 연행록으로 본 가탐 도리기 및 도서편의 각 섬의 위치(유득일의 일기에서는 기존에 우리가 알던 조선시대 주류설로서의 역사관의 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군요)

1) 강호보의 연행록(1690 년 ~ 1778 년) 중 1728년 3월 1일 ~ 3월 25일 경유지(북경에서 귀국하는 길로 크게는 서에서 동 방향이나 길은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꺾임)

深河堡→鳳凰店→大理營→山海關(산해관)→二里店→八里堡→王家庄→中前所(중전소)→前屯衛→兩水河→三臺子→東關驛→沙河所→寧遠衛(영원위 치소)→連山驛→塔山→高橋堡→宋山堡→小凌河→大凌河(대릉하)→十三山→閭陽驛→常興店→北鎭廟→一臺․二臺․三臺→北鎭廟→醫巫閭山→中安堡→小黑山→新店→二道井→白旗堡→蘆口河→大黃旗堡→周流河→邊城→混河(혼하)→白塔→沙河→十里堡→灤河堡→太子河(태자하)→冷井→狼子山→小石嶺→靑石嶺→甜水站→會寧嶺→連山關(연산관)→하략

2) 『판서공 조천일기(判書公 朝天日記)』의 연행경로(최기, 1607, 조선 선조 40 년)

의주(義州)→토성북원(土城北原)→개주(開州)→연산관(連山關)→요동(遼東)→해주성지(海州城池)→삼차하(三叉河)→사령(沙嶺)→고평(高平)→반산(盤山)→광령역(廣寧驛)→여양(閭陽)→십삼산(十三山)→능하(凌河)→조가장(曹家庄)→사하(沙河)→산해위(山海衛)→유관(楡關)→노봉역(蘆峰驛)→요하관(遼河關)→옥전현(玉田縣)→영제역(永濟驛)→양번역(陽樊驛)→어양(漁陽)→공락(公樂)→하주(夏州)→북경(北京)

3) 국역 연행일기초(유득일, 조선 숙종 시기)

9월 12일 정축(丁丑)일 맑음.
신광녕(新廣寧)에서 묵다. 새벽에 출발하여 양장하(羊腸河)를 건넜다.【당나라 소정방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흑산(黑山)과 양장하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모두 이곳 지역인 듯하다.】

중안보(中安堡) 북쪽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여기서부터 여양(閭陽)과의 경계이다. 저녁에 신광녕참(新廣寧站)에 도착하여 여염집에서 잤다. 이날은 80리를 갔다. 신참(新站) 북쪽과의 거리가 10리 정도 되는 곳에 광녕(廣寧)이 있다. 성 안에 있는 쌍백탑(雙白塔)이 우뚝하니 눈 안으로 들어왔다. 물으니 즉 마을에 있는 저자거리와 성첩 · 사찰이 번성하고 한참일 때는 구요동(舊遼東)과 우열을 다투었다고 하였다

광녕은 본래 『서경(書經) · 우공(禹貢)』에 의하면 기주(冀州) · 청주(靑州) 두 주의 영역이었다. 순임금이 기주 동북을 나누어 유주(幽州)로 만들었으니 곧 지금의 광녕이다. 서쪽 땅을 청주로, 동북을 영주(營州)로 만들었는데 즉 지금 광녕의 일부 지역이다. 주나라 때에는 조선과의 경계가 되었으며 진(秦)나라 때는 요서군(遼西郡)에 속했다. 한(漢)나라 때는 무려(無慮) · 망평(望平) 두 곳의 현을 두었고, 수(隋)나라 때는 고구려에 속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하고서 무려수위(巫閭守尉)를 두었으며 발해 때에는 현덕부(顯德府)가 되었다.


5. 명나라 주해도편(籌海圖編) 수록 중국 연안 상세 지도(중앙도서관 소장본 사본, 자료 출처 : 향고도님 블로그)

1) 등주에서 노룡ㆍ창려까지
http://blog.daum.net/_blog/photoImage.do?blogid=0BVH1&imgurl=http://cfile239.uf.daum.net/original/1534420E4A9F66C72D3074

산해관에서 압록강(명ㆍ청 시대 압록강은 현 압록강) 북쪽까지
http://blog.daum.net/_blog/photoImage.do?blogid=0BVH1&imgurl=http://cfile217.uf.daum.net/original/205EF80F4A9F6572384553


6. 결론

1)
가탐 도리기의 登州海行入髙麗渤海道는
등주 ~ 압록강 당은포구에 이르는 시계방향 연안항로(등주 - 대사도 - 구흠도 - 어도 - 오호도 - 오호해 - 도리진 - 청니포 - 도화포 - 행화포 - 석인왕 - 탁타만 - 오골강 - 진왕석교 ~ 마전도 ~ 고사도 ~ 득물도 ~ 압록강 당은포구)와 오목도 ~ 신라 서북쪽 장구진에 이르는 반시계 방향 경로(오목도 - 패강구 - 초도 - 신라 서북쪽 장구진)가 오골강을 기점으로 교차된 “연안항로”이다

2)
신라 서북쪽 장구진은 발해-당 전쟁에 참전하여 당으로부터 735 년에 공인 받은 패수이남 영토와 관련이 있다 추정된다. 이는 본인이 지난 고려 전기 서북계 고찰에서 암연현 문제를 다루며 제기한 바 있다(“암연현의 동계신라(東界新羅) 문제”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61551&sca=&sfl=mb_id%2C1&stx=cellmate&page=9)

3) 고구려의 수도로서의 평양은 요동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고 추정된다

4) 발해 서경압록부 신주(神州) 및 발해 5 경에 대한 재고찰이 요구되는 바이다

5) 즉 이상의 교차 분석으로 가탐 도리기에서 가리키는 압록강은 현 압록강이 아니라 요하, 또는 혼하이다

6) 오골강 ~ 압록강 거리는 200 리이다

※ 이상의 고찰은 본인이 100% 자력으로 연구하고 자력으로 쓴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history2 18-03-19 16:42
   
너무 고생하셨습니다.....이번 글은 정말 역작이시군요 ^^ 내용도 재미있고, 잘 읽었습니다.... 무단도용이 없었으면 합니다..친구님의 노력의 결실이니,,,저도 몇번 읽다보니 머리속에 남지만, 혹시라도 무심코 친구님 인용없이 사용하는 일은 절대로 없도록 하겠습니다. 홀한해는 싱카이호 겠지요?
이해한다 18-03-19 19:25
   
대가 없는 일은 없습니다. 고생한 만큼 대가가 찾아 올것이기에 감방친구님의 글을 게시하는 일에 일희일비 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모든 일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기에 다른 분들이 감방친구님의 글을 게시하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또한 탐문를 계속하시면 그 글의 출처는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작은 일은 큰 일을 위한 발판으로 삼아야지 작은 일에 집중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이해한다 18-03-19 19:27
   
오히려 저는 인용하는 것이 많다는 것 자체가 감방친구님의 탐문의 가치가 인정받고 있다는 징조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해한다 18-03-19 19:32
   
저는 그러므로 다른 분의 탐문업적일 언정 게시하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탐문자들은 특징은 근거를 바탕으로 주장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친구님은 근거가 되어 가는 과정으로 생각하심 좋을거 같습니다. 또한 고단한 생활을 함으로서 예민해진 정신 또한 이해합니다. 험난한 길을 개척하며 가고 있는 탐문을 응원하겠습니다.
     
감방친구 18-03-20 23:26
   
게시를 하되 출처를 밝히는 것이 기본이고 상식입니다
밝히지 않고 자기 연구인 것처럼 속이는 이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님이 글 한 편 쓰기 위해 100 시간 이상을 사용하신다면 이런 말을 이리 쉽게 하지 못 하실 겁니다
도배시러 18-03-19 21:02
   
정리 좋아요~
촐라롱콘 18-03-19 21:41
   
저 뿐만 아니라 아마도 많은 분들에게도 유익한 연구결과임에 틀림없습니다...!!!

비록 저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감방친구님이 게시한 글 가운데 몇몇 부분에서 님께 딴지를 건 경우도 있지만...

훨씬 많은 부분에서 감방친구님의 글과 연구를 통해 저 개인의 역사인식과 폭을 넓혀가는데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중단없는 노고 부탁드립니다...!!!
 
 
Total 19,96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5302
19969 [기타] 역사란...사관이란... (2) 윈도우폰 04-17 102
19968 [한국사] 역사학자의 위치비정 2 (4) 하이시윤 04-17 139
19967 [한국사] 역사학자의 위치비정 논문 일부 (5) 하이시윤 04-17 95
19966 [한국사] [역사지리 #4] Quiz의 답안 - 내가 생각하는 열국의 위… (12) 윈도우폰 04-08 380
19965 [한국사] [역사지리 #3] 부여의 위치 추정 (4) 윈도우폰 04-07 515
19964 [한국사] [역사지리 #2] 고조선 시대의 열국의 위치 추정 (2) 윈도우폰 04-07 330
19963 [한국사] [역사지리 #1] 한반도와 만주의 지형 (소국 들의 위치 … 윈도우폰 04-07 371
19962 [기타] 민족의 친연성에 대해 (1) 관심병자 04-07 236
19961 [한국사] 가설을 세우는데는 출처가 필요없죠 (16) 하이시윤 04-07 302
19960 [기타] 출처를 다는 건, 남녀노소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것입… (11) 아비바스 04-05 266
19959 [한국사] 소위 말하는 시민사학자들이 가생이 동아게에 계시… (7) 하이시윤 04-02 552
19958 [기타] 무식한 사람은 역사나 학문을 말하기 전에 기본을 갖… (2) 윈도우폰 04-02 284
19957 [한국사] 역사를 학문으로 받아드린다면 이렇게 해야 한다. (9) 아비바스 04-02 389
19956 [한국사] "정보" 를 다루는 사람들은 "출처" 를 달아야 맞습니… (11) 아비바스 04-01 351
19955 [한국사] 역사에 있어 사료나 증거라는게 그렇게 중요한가??? (3) 윈도우폰 04-01 387
19954 [한국사] 사이비 역사유튜버 거르는 꿀팁 (3) 아비바스 04-01 360
19953 [한국사] 요즘 역사 컨텐츠를 많이 보면서 깨닭는 것 ( 사이비 … (3) 아비바스 04-01 374
19952 [한국사] 동아게에서 역사글 관련 글 볼때마다 느낀 것 (5) 아비바스 04-01 290
19951 [한국사] 묘제로 본 고대 우리 민족과 이웃 민족 (5) 윈도우폰 03-31 515
19950 [한국사] 역사학자 돌려까기^^ 윈도우폰 03-30 342
19949 [한국사] 우리 고대사 #7 : 맥족의 이동 윈도우폰 03-22 583
19948 [한국사] 우리 고대사 #12 : 한민족과 재가승 윈도우폰 03-22 506
19947 [한국사] 우리 고대사 #11 : 한반도의 왜(倭) 윈도우폰 03-22 460
19946 [한국사] 우리 고대사 #10 : 진국의 한(韓)족 윈도우폰 03-22 509
19945 [한국사] 우리 고대사 #9 : 고조선 유민과 신라 윈도우폰 03-22 381
19944 [한국사] 우리 고대사 #8 : 고조선의 이동 윈도우폰 03-22 456
19943 [한국사] 우리 고대사 #6 : 예족의 이동 윈도우폰 03-22 362
 1  2  3  4  5  6  7  8  9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