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낙랑의 유물은 모두 가짜인가?
낙랑의 정체성을 무엇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a.강단이 말하는 한나라 군현이다 b.낙랑군과는 별도인 낙랑국이다 c.낙랑과 특히 많이 교역하던 한반도 토착민의 무역항이다 d.낙랑이 한반도와 중계무역 하기 위해 설치한 무역거점이다 등)
<진품 낙랑의 유물들>
이 낙랑의 이름을 단, 유물 중 진품도 무척 많은 것은 사실이다
(유적관련 상에만 가도 낙랑제품 구하기 쉬움) 그렇기에 가품도 당연히 많다
-> 일제시대 낙랑 붐이 불어 그만큼 가품제작도 일본인의 손에 의해 조작이라는 측면이 아닌, 돈을 위해 중국인, 조선인에 의해 만들어진 정교한 가품도 너무나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소장한 한나라식 낙랑유물(위조품으로 생각됨)
2...유적관련
한사군(漢四郡) 가운데 낙랑군(樂浪郡)의 위치는 고조선의 위치와 직결되는 문제다. 주류 역사학자들은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이 지역에서 낙랑군의 유적과 유물이 대거 발견되었다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 유적으로는 토성과 고분, 점제현비가 있고, 유물로는 봉니(封泥), 목간(木簡), 기와 등이있다.
1)낙랑토성: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낙랑군 시대의 유적>에서는 '대동강면 토성'을 낙랑군의 토성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한나라 군사를 상대로 1년 동안 항쟁하기에는 너무나 취약한 토성이다. 사기는 우거왕이 군사를 내어 험준한 곳에서 저항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대동강 유역에는 그만큼 험준한 곳이 없다.
조선총독부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다소 고려가 되는 것은 토성이 협소한 구릉에 얕게 쌓여져 있다는 점이다. 사면이 트여 있어 천험(天險)이 없으므로 하루아침에 적의 공격을 받게 되면 방어가 지극히 곤란한 상태에 놓인다는 점이다.”(낙랑치소에서 발견된 한나라 기와 양각양식이고 사실 무제이전 것이고....)
낙랑치소에서 발견된 기와는 한무제 이전에 쓰이던 양식이다. 또한 왕검성이 있었다고 볼 만한 어떠한
궁궐, 성곽등의 유적이 평양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같은시기 한이 설치한 베트남 군현에서는 발견됨)
2)낙랑고분군: 강단은 대동강 유역 고분 100여 기를 모두 낙랑군의 고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대동강 유역 고분 2600여 기를 발굴하여 연구한 결과 낙랑군과 대방군의 고분으로 알려진 것들이 대부분 낙랑군이 설치되기 전에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북한의 리순진은 정백동 2호와 37호 무덤의 상한은 서기전 7세기까지 올라가고 하한은서기전 1세기로 보았다. 고분은 낙랑군과 관계없이 축조된 것들이며 낙랑군의 설치 이후에는 더 이상 축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한은 일제시대에 발굴한 100여 기의 고분보다 26배나 많은 2600여 기에 달하는 고분을 발굴하여 그 결과를 보고한 것이므로 보다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고분도 위조도 마다하지 않는 일본인들(고구려식 고분을 한나라 고분으로 위조)3)점제현 신사비: 1913년 평안남도 온천군에서 일제의 역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점제현신사비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점제현은 <한서 漢書> (지리지)에 수록된 낙랑군 25개현 가운데 하나이다. 이로써 온천군이 점제현이 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김교정과 정강철이 신사비의 화강석 성분을 분석한 결과 부근의 화강석과는 크게 다르고, 요하지방의 화강석과 비슷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발굴 과정에서 신사비의 기초에 시멘트를 쓴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전 연세대학교 교수 손보기는 신사비가 있는 곳은 2천 년 전에는 물이 들어왔던 곳이므로 비를 세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모두 이 신사비가 일제에 의해 조작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4)봉니: 유물 가운데 봉니는 가장 논란이 많은 것이다. 봉니란 문서가 수신자에게 안전하게 전해질 수 있도록 봉함하는 진흙이다. 죽간이나 나무에 글을 쓰고 상자에 넣어 묶은 다음 끈을 진흙으로 봉하고 도장을 찍은 것이다. 1918년부터 1937년 사이에 대동강 유역에서 봉니 200여 개가 발견되었다. 모두 일제시대에 발견된 것들이다. 그러나 그 이전이나 이후에 발견된 것은 한 개도 없다. 북한에서 1969년에 봉니가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하는 곳을 300여 평방미터나 발굴하였으나 단 한 개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진품봉니도상당수 발견 됨 )
a.역사학자 정인보 (鄭寅普, 1893년 출생 1950년 납북)는 봉니의 보존상태가 너무 좋고 서체가 비슷하며 발견사례가 너무 많다는 점 등을 들어 조직적인 조작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재야사학자 이덕일은 일제시대에 발견된 봉니가 모두 한나라것이라는 점을 들어 의문을 표한다. 낙랑군은 전한, 신, 후한, 삼국시대, 진, 오호 16국 시대에 걸쳐 존재하였는데 오로지 한나라것만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봉니의 위조는 일반인이 돈을 목적으로 위조봉니를 만들다보니, 이런일이 생긴게 아닌가 싶다, 상당수는 진품도 많다)
b.북한의 박진욱은 관직명이 당시 관직제도와 맞지 않고 크기가 제각각이라는 점 등을 들어 봉니가 위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봉니의 위조는 일반인이 돈을 목적으로 위조봉니를 만들다보니, 이런일이 생긴게 아닌가 싶다, 상당수는 진품도 많다)
5) 목간: 대동강 유역의 한 무덤에서 낙랑군의 호구와 인구수를 적은 목간이 발간되었다. 소위 주류 역사학자들은 이를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물은 어디나 갈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정창원에 신라장적이 있다고 해서 그곳에 신라가 있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강 하구, 평야 지역이, 강 상류 즉 산악 보다 인구가 적은 어처구니 없는 결과가 적혀있어서, 목간에 적힌 지역의 재 조사가 정밀히 필요하다)
9) 단국대학교 교수 윤내현은 대동강 유역에서 발굴된 중국계 유물이 낙랑군이 설치된 전한(前漢) 때의 것은 거의 없고 대부분 후한(後漢) 때의 것이라는 점을 들어 낙랑군의 유물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제작연대가 표시된 기와나 벽돌 중에는 낙랑군이 고구려의 공격으로 멸망한 이후인 서기후 353년과 405년에 제작된 것도 있다.(서기 후 300년 이후는 이미, 강단에서도 낙랑군이 요동으로 교치된 상황을 인정하고 있으니, 평양에서 낙랑관련 유물이 나오면 안된다)
반론) 중요한 것은 평양 말고 낙랑군 유물이 발견된 곳이 있냐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요동이나 요서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하는데 요동이나 요서에서 낙랑군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된 적이 없다. 역사학에서는 기록보다도 유물⋅유적을 더 중요시한다. 마치 삼국사기에는 마한이 서기 9년에 멸망했다고 나오지만 마한 관련 유물⋅유적 때문에 마한이 5세기까지도 존재했다는 게 인정 받는 것처럼 말이다.
즉, 요서나 요동에서 낙랑군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 한 그 지역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인정될리가 없다. 이에 대해 낙랑 요서설을 주장하는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들 중에선 평양을 방문하여 낙랑군 조사를 한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한국 역사학계를 평가절하 하는데, 물론 평양이 북한의 수도가 되어버린 지금 방문 조사 및 현지 발굴이라는 귀중한 기회를 얻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전하는 문헌 자료 및 발굴 자료 만으로도 사료적 적합성을 확인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