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4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타이완과 요동반도를 차지하게 되자, 일본의 만주 진출에 반발한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을 부축여서, 일본에 대해 요동반도에 대한 중국반환을 요구하여 이를 관철시켰다(이른바 삼국간섭).
러시아의 위력에 굴복한 일본의 국제적 위신은 실추되었고, 일본 국내적 으로도 엄청난 좌절감과 반러시아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따라 조선은 러시아를 통한 일본견제를 시도하였고, 친러내각이 구성되었다.
2. 경과
1)1895년 5월부터 친일파가 잇따라 내각에서 쫓겨났다. 7월에는 궁중 호위를 위해 미국 장교의 지휘를 받는 시위대가 편성되고, 일본 장교가 지휘하던 훈련대는 해산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일본 정부는 조선 정부의 일련의 조치를 일본세력에 대한 공개적이고 전면적인 부정으로 받아들였다.
2)배후에 명성황후가 있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는, 대원군의 쿠데타를 기획하고, 경복궁을 점령한 후에, 대원군에 의한 명성황후 제거 시나리오를 작성 하였다.
3)조선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이 일을 추진할 적임자로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추천하였다.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이노우에의 제안을 받아들여 8월 17일 미우라를 조선공사로 임명하였다.
4)미우라는 초슈(長州, 현재 야마구치현) 출신으로 육군 중장으로 전역하였는데, 이노우에가 조선공사를 권유했을 때 외교를 전혀 모른다는 이유로 거절하였을 정도로 외교와는 인연이 없었던 인물이다.
당시 조선을 둘러싼 복잡한 외교를 외교문외한인 미우라에게 맡기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이토와 이노우에가 몰랐을 리 없다. 미우라는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내각을 수립하는 원포인트(one point) 임무를 맡고 서울에 부임한 것이다.
5)미우라는 9월 1일에 서울에 도착했고, 이노우에는 9월 17일에 서울을 떠났다. 두 사람은 서울에서 17일 동안 함께 있으면서 범행을 협의하였다.
그들은 이노우에를 따라 귀국하려는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를 간곡하게 만류하여 주저앉혔다.
오카모토는 육군포병 소령 출신으로 고향선배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의 소개로 조선국 군부 겸 궁내부 고문이 된 사람이었다. 그는 청일전쟁 당시,1894년 7월의 경복궁 점령사건에서도 대원군을 동원하는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다.
이번에도 오카모토에게 대원군을 거사에 동원하는 역할을 맡기기 위해 귀국을 만류한 것이다. 이노우에가 오카모토의 귀국을 만류한 사실은 그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깊이 관여하였음을 보여준다.
3. 시간대별 사건의 전개
1)일본공사관에서 참여한 인물은 a)공사 미우라를 비롯하여 b)일등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衫村濬), c)공사관 무관 겸 조선 군부 고문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幸彦), d)영사관보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 e)영사관 경부 오기와라 히데지로(荻原秀次郞)였다.
스기무라는 1894년 7월의 경복궁 점령사건 때도 대원군을 설득하는 데 일조한 인물이다.
구스노세는 육군포병 중령으로 당시 조선에 있는 일본군 가운데 최상급자였으며, 육군참모본부(전시에는 대본영으로 개편됨)의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가 가장 아끼는 부하였다. 구스노세를 1894년 11월에 서울로 보낸 것도 가와카미였다.
구스노세는 친일적인 조선 훈련대를 강화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는 말을 듣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배제되었다.
2)미우라는 훈련대가 해산될 것으로 예상되는 1895년 10월 10일을 거사일로 잡고 있었다. 그는 9월 19일 참모차장 가와카미에게 일본군 수비대에 대한 지휘권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당시 서울에는 후비(後備) 보병 제18대대(대대장 바야하라 쓰토모토) 600여명이 한성수비대(이하 ‘일본군 수비대’라고 한다)로 주둔하고 있었다.
3)미우라는 9월 28일 조선 주둔 일본군 책임자들과 작전을 협의하고, 10월 1일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 겐조(安達謙藏)에게 낭인(浪人)들을 동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성신문---> 한성신보가 맞음(제 오타임) 조선공사관과 일본 외무성의 비자금으로 운영되는 첩보기관이었다.
아다치는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에도 관여한 인물로서 후일에 체신대신, 내무대신을 역임하였다. 아다치는 한성신보사 주필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 편집장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 등 낭인 30여명을 동원하였다. 낭인이란 정치인이나 관료가 아닌 민간인으로서 정치적 활동을 하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한 낭인들 중에는 한성신보사 간부를 비롯하여 히라야마 가츠오 등 기자들, 그리고 후일 <근대조선사>를 서술한 기쿠치 겐조 등 지식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무뢰배 혹은 깡패가 아니었다.
4)10월 3일 일본공사관에서 최종 점검회의가 열려 작전의 대강(大綱)이 정해졌다.
대원군을 괴뢰 영수로 추대, 옹립해 입궐시킨 뒤 왕후를 시해하되, 행동부대의 표면에는 훈련대를 내세워 조선 병사들의 쿠데타처럼 가장하고, 행동의 전위대로는 낭인들을 앞세우되 그들을 위한 엄호 및 전투 주력으로 일본군 수비대를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친일훈련대는 해산되고, 친미시위대가 궁궐수비를 맡을 예정이었다. 5)10월 5일 미우라는 조선 주둔 일본군의 지휘권을 위임받았다. 이것은 내각과 군부가 미우라의 범행계획을 승인했음을 의미한다.
6)10월 6일 미우라는 일본군 수비대 대대장 바야하라를 불러 구체적인 작전지시를 내렸다
7)10월 7일 바야하라는 휘하 중대장들에게 이를 전달하였다. 제1중대는 대원군을 호위하고, 제2중대는 경복궁 배후의 궐문을 수비하며, 제3중대 일부는 공사를 호위하고 나머지 일부는 광화문 및 그 양 측문을 경비하는 역할분담이 이루어졌다.
8)그런데 훈련대의 해산이 7일 새벽에 전격적으로 단행되면서 거사일이 8일 새벽으로 앞당겨졌다. 훈련대의 해산을 계기로 왕후에게 적의를 품은 훈련대가 대원군을 옹립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왕후를 시해한 것으로 위장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10월 7일 긴급작전회의를 통해 각 행동책임자에게 다시 구체적인 행동지침이 시달되었다.
9)인천에서 대기하다가 급히 상경한 오카모토는 아다치가 인솔하는 낭인들, 오기와라가 인솔하는 일본 순사들(사복으로 위장), 그리고 호리구치, 이주회(李周會)와 함께 공덕리에 있는 대원군의 별장으로 갔다.
10)이주회는 군부협판(국방부차관)을 지낸 인물로 대원군의 사람이었다. 이들에게는 대원군을 옹위하고 경복궁으로 들어가는 임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새벽에 대원군의 별장에 도착한 이들은 저택을 지키고 있던 10여명의 순검들을 창고에 감금하고 그들의 옷을 빼앗아 일본 순사들에게 입혔다.
그리고 잠을 자던 대원군을 깨워 경복궁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으나 이들을 수상하게 여긴 대원군은 완강하게 저항하며 시간을 끌었다. 1894년 7월의 경복궁 점령사건에서도 일본인들에 이용당한 바 있는 대원군으로서는 일본인들을 신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청일전쟁' 중 발생한 제1차 경복궁 점령사건
11)버티던 대원군이 강제로 끌려간 것은 새벽 3시경이었다. 주한 영국영사 힐리어(W. C. Hillier)는 본국에 “대원군은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일본의 강압에 의해 경복궁으로 가게 되었다.”라고 보고하였다.12)대원군의 저항으로 인한 지연은, 일본의 작전에 커다란 차질을 가져오게 된다. 동이 트기 전에 사건을 마무리함으로써 일본의 관여사실을 은폐하려고 했던 기도가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작전이 순차적으로 지연되면서 날이 밝아 왔고, 당시 경복궁에 있던 시위대 교관인 미국인 다이(William McEntyre Dye)와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틴(Seredin Sabatin)이 일본 군인과 낭인들의 관여사실을 목격하면서 일본인들의 잔학한 범행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일본과 만행을 저지른 훈련대(당시 해산명령을 받음)13)오카모토 일행이 대원군을 끌고 남대문에 도착하였으나 만나기로 한 일본군 수비대 제1중대가 오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제1중대가 서대문에서 대기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쪽으로 가서 서대문 밖에 있는 한성부(漢城府) 청사에서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이 지휘하는 소수의 훈련대 병사들과 합류하여 기다렸다. 잠시 후 제1중대가 합류하자 이들은 광화문으로 진격했다. 대원군 주위를 낭인들이 둘러싸고 그 앞뒤에 조선 훈련대를 배치하였으며, 그 선두와 후미에 제1중대가 에워쌌다. 이것은 야간훈련이라고 속이고 데려온 조선 병사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14)이들이 광화문에 도착한 것은 5시 반경이었다. 이미 날이 밝아 목격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오기와라는 부하 순사들을 이끌고 미리 준비해 간 사다리를 돌담에 걸치고 궁 안으로 들어가 안에서 광화문을 열었다. 일본군 수비대 제1중대와 낭인들이 함성을 지르며 광화문으로 돌진하면서 광화문을 수비하던 조선 병사들과의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때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경복궁 밖에서 대기중이던 훈련대 1개 중대 병력을 설득하여 광화문으로 달려왔다. 일본군 수비대와 조선 병사들 간에 전투가 벌어졌으나 홍계훈이 전사하면서 조선 병사들은 퇴각하였다.
15)대원군 일행은 5시 50분경 광화문을 통과한 후 6시 10분경에 근정전 옆의 강령전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대원군을 내려놓은 후 아다치가 지휘하는 낭인들은 근정전 뒤 사잇길로 고종이 거처하는 건청궁으로 향했고, 일본군 수비대는 큰 길을 통해 건청궁으로 전진하였다. 다이가 지휘하던 시위대는 일본군 수비대와 마주치자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주하였다.
16)일본군 수비대 일부와 낭인들은 무방비 상태가 된 왕의 처소에 난입하여 왕과 왕세자를 인질로 잡고 왕후의 행방을 추궁하였다. 왕후를 지키려던 궁내부대신 이경직이 살해당하고 왕후 역시 이들의 칼에 수차례 찔려 시해당했다. 이들은 왕후의 신분을 확인한 후 시신을 소각하였다. 시신 소각은 오기와라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명성황후를 직접 시해한 자는 누구일까?
명성황후를 죽인 칼과 그 칼을 보유중 인 신사
17)명성황후 시해현장에는 일본군 수비대와 낭인들이 섞여 있어 혼잡하였다. 이들은 명성황후의 얼굴을 몰라 닥치는 대로 궁녀들을 살해하였다. 명성황후는 그 혼란의 와중에 시해되었기 때문에 누가 직접 시해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현재로서 가장 신빙성이 있는 자료는 사건 직후인 10월 8일 우치다가 외무차관 하라 다카시에게 보낸 사신(私信)이다. 이 편지에서 우치다는 “다행히 국왕과 왕세자 부부는 무사했지만 앞서 살해당한 부녀 중 한 명은 왕비라고 하는 바, 이를 살해한 자는 우리 수비대의 어느 육군 소위로서 그 사체는 오기와라가 한국인에게 명해 다른 곳으로 운반하여 즉시 불을 질러버리는 등 매우 난폭한 소행을 저질렀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이것은 사건 직후 우치다가 오기와라 등으로부터 직접 들은 것을 정리한 것으로서, 공문이 아닌 사신(私信)이어서 왜곡하거나 조작할 이유가 없었다는 점에서 신빙성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18)명성황후 시해현장에 있었던 일본군 수비대는 소위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와 특무조장(하사관) 마키 도라쿠마(牧虎熊) 2명이었다. 그렇다면 우치다가 말한 ‘우리 수비대의 어느 소위’는 미야모토밖에 없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낭인 히라야마 이와히코는 명성황후를 보호하려고 하던 궁내부대신 이경직에게 처음 총격을 가한 사람이 미야모토라고 증언하였다. 그렇다면 미야모토가 이경직에게 총격을 가한 후 그가 보호하려던 명성황후까지 시해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4.사건의 주동자 (메이지 일황과 이토 히로부미)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1894년 7월의 경복궁 점령사건의 재판(再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닮은 작전이었다. 1994년 3월 전 나라여자대학교 교수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가 후쿠시마 현립도서관에서 1894년 7월 경복궁 점령 당시 육군참모본부가 작성한 작전계획서를 발견하면서 경복궁 점령사건이 일본의 군사작전이었음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준비한 사람들은, 청일전쟁 때, 1894년 7월의 1차 경복궁 점령을 위한 작전계획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전자가 경복궁을 점령하여 고종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후자는 경복궁을 점령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두 사건을 주도한 일본 내각과 군부, 그리고 일본공사관의 인적 구성도 거의 동일하다.
a)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 b)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 c)육군대신 오오야마 이와오, d)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는 동일하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이노우에는 1894년 7월 당시에는 내무대신이었다. 스기무라와 오카모토는 두 사건에서 대원군을 동원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1894년 7월의 경복궁 점령사건과 그 목적만 달리했을 뿐 일본 내각과 군부가 거국적으로 참여한 군사작전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