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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25 15:03
[세계사] 흉노와 유목민족에 대한 재 인식
 글쓴이 : history2
조회 : 2,075  

다뉴브강에서 몽골리아를 거쳐 중국 동북부지역까지 수평으로 뻗어 있는 띠모양의 광대한 중앙유라시아 초원지대에는 서기전 3000년대부터 목축생활이 전개되었다. 
(즉, 스키타이, 흉노, 훈 돌궐은 사실상 하나의 문화권이라 보아도 무방하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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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지역은 고도가 높은편이고, 바다로부터 격리되어 있어서, 여름의 더위가, 그리고 겨울에는 살을 에는 추위를 보이는 극단적인 대륙성기후를 갖고 있다. 

흉노 유목경제와 생활

1) 목축을 주로 하지만 수렵도 하였으며, 오아시스에서는 농업과 교역이 이루어졌다. 
2)유목민의 군사력과 오아시스의 농업 경제력은, 상호보완적인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3)동서남북으로 탁 트인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초원길은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동아시아를 연결하면서 교역의 연결선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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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란계 스키타이 
                       
1. 유목민족의 기술적 진보성

1)기원 전 1000년경 a)청동제 고삐와 재갈, 그리고 b)등자가 발명되면서 사나운 말을 길들이고 안전하게 승마할 수 있게 되었다. 
2)기동력이 높은 말과 승마기구 발명으로 인해 유목과 약탈, 그리고 전쟁을 함께 수행할 수 있는 '유목기마민족'이 탄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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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들은 또한 뛰어난 궁술(활)을 겸비한 강력한 기병대를 구축하고 부족한 자원의 보충을 위해 주변을 약탈하였다. 목축과 수렵, 농업, 교역, 약탈은 초원의 생존방식이었다. 
4) 상업과 때때로 자행 된 약탈은 이 지역의 번영의 요소(상업이 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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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목문화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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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노문화의 전파(동복) 

2.흉노 유목민족의 탄생과 진화

1)중앙유라시아 초원의 서부에는 스키타이라고 불리는 유목 부족연합체가 일찍이 존재했다. 스키타이는 서기전 8-7세기에 흑해 북쪽의 초원지대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이란계 유목민 스키타이가 중앙유라시아 초원의 서부를 지배할 때, 초원의 동부는 투르크-몽골계 유목민이 지배 하였다. 

2)당시 초원 동부지역은 강력한 세력이 없이 여러 집단들이 혼재해 있었다. 동쪽의 흥안령산맥 부근에는 동호(東胡)가 있었고, 서쪽의 기련산 부근에서 타림분지에 걸쳐서는 월지(月氏)가 있었으며, 북쪽의 바이칼호 부근에는 정령(丁零), 격곤 등이 있었다. 

3)흉노의 최초 출현지는 황하 대만곡 부근의 오르도스지역이다. a)흉노는 몽골계가 아니라 투르크계이다(출토된 흉노인상은 투르크인의 특징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흉노의 b)언어는 알타이어계 투르크어족에 속한다. 유목국가의 경우 흔히 그렇듯이 처음에는 작은 종족의 이름이었다가 후에 국가의 이름이 되었을 것이다.

4)흉노사회는 전형적인 목축사회로서 같은 언어와 영역을 공유하는 혈연집단으로 나누어진다. 사회 구성원들의 혈연 및 지연 의식은 강했다. 잉여생산물이 많지 않아 직접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귀족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생산기반이 취약한 사회에서는 기후, 질병, 전쟁 등으로 위기가 발생하기 쉬웠다. 유목사회는 항상 불안정성을 안고 있었다. 일정한 권역을 확보하지 못하였으므로 통일적이고 집중적인 국가권력이나 사회조직을 갖추기가 어려웠으며, 통일국가를 건설하더라도 오래 유지되지 못하였다. 또한 이동이 잦아 기록이나 유적이 보존되기 어려웠다.

3. 흉노에 대한 정주민의 편견

1)부족 내지는 씨족 사회였던 흉노가 국가를 형성하게 된 경위에 대해 종전에는 유목사회가 정주(定住)지역에 대한 약탈경제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요사히 학설은 정주지역민들의 편견이었다 는 것이다

2)유목사회는 생산물이 부족하여 자급자족이 어려우므로 주변 농경사회를 약탈할 수밖에 없었는데, 정주지역에 통일왕조가 들어서자 약탈을 위해서는 더 강력한 유목세력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초부족적 유목조직은 강력한 정주국가가 출현하면서 거기에 대응하기 위해 출현한 것이 된다. 

3)중국의 사가(史家)들은 이들을 농경지역 주변에 아무런 예고 없이 나타나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고 반격을 받기 전에 전리품을 가지고 퇴각해버리는 상습적인 약탈자로 묘사하고 있다. 이 견해는 중국측에서 바라본 흉노사회에 대한 편견이 게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4. 흉노는 상습적인 약탈자가 아니다

최근 들어 흉노는 약탈자라는 견해에 대해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탈리아 역사학자 니콜라 디 코스모(Nicola De Cosmo)는 유목사회에 대국가 성립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고 있다.  

1)기후의 이상변동이나 외부세력의 침입 등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하였다.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통해 유목사회도 내부에 농업공동체를 포함하고 있었음이 입증되었다. 오아시스와 강변에 농지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즉, 중국이 곡물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출처가 아니었다. 

2)서역, 시베리아 남부 등 중국 이외의 지역과의 교역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는 사실도 확인되고 있다. 

3)또한 중국측 자료에 의하면 유목민들이 농업생산품이 아니라 가축과 사람을 약탈해 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유목사회 내부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4)이러한 사실들은 유목민들의 생산품이 자급자족에 미치지 못해 중국을 침략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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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정 농업생산력 을 갖춘 초원의 지역 

5)이 견해는 서기전 215년 진제국의 장군 몽념(蒙恬)이 오르도스지역을 정복한 직후에 흉노제국이 부상한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한다.

5. 흉노제국의 조직

1)흉노제국의 정치 및 사회조직은 좌우·동서·흑백으로 나뉘어 상호견제하도록 이원화되었다. 군사조직은 십·백·천·만이라는 십진법체계의 피라미드구조다. 최대집단인 만을 이끄는 지도자인 만기는 모두 24명이었다. 

2)24개의 만인대는 좌(동쪽), 중앙, 우(서쪽)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좌현왕이 지휘하는 동방부분은 상곡군(上谷郡, 지금의 북경 서북쪽 일대) 부근에서 동쪽으로 만주와 한반도에 있었던 고조선과 접해 있었다. 좌현왕 아래에 좌녹려왕, 좌대장, 좌대도위, 좌대당호, 좌골도후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3)우현왕이 지휘하는 서방부분은 상군(上郡, 지금의 서안 북쪽 일대) 부근에서 서쪽으로 월지 등과 접해 있었다. 오르도스지방, 기련산 부근, 타림분지 등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우현왕 아래에도 우녹려왕, 우대장, 우대도위, 우대당호, 우골도후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선우의 중앙왕정은 대군(代郡)·운중군(雲中郡) 일대, 즉 지금의 대동시(大同市) 일대와 마주보고 있는 몽골고원의 대부분을 직할하고 있었다. 

3)흉노제국은 24명의 만기들에 의한 연합권력체제였으며, 여기에는 여러 인종과 종족의 부족집단이 참여하였다. 흉노제국은 단일 종족이나 민족의 국가가 아니라 여러 종족이 섞인 다원화된 국가였던 것이다. 국가라고는 하지만 연합체의 성격이 강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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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노제국의 확장은,  정주제국의 확장과도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 


6. 중국과 흉노의 갈등과 역사 

1)기원전 221년 진(秦)제국(서기전 221-206년)이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하고, 곧이어 한(漢)제국(서기전 202-서기후 220년)으로 교체되면서 중국은 통일왕조시대를 열었다. 

2)기원전 215년 진제국은 몽념을 보내 황하 남쪽 오르도스지역(황하의 대만곡 부분의 안쪽)을 정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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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진제국은 유목 거주민들을 몰아낸 후 요새를 만들고 장성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죄수들을 이곳으로 옮겨 지키게 하였다. 이러한 진제국의 영토확장은 유목지역에 대한 최초의 심각한 대규모 침입이었으며, 이는 유목민족의 강력한 대응을 유발하였다.

4)서기전 209년경 묵특(冒頓)은 아버지 두만(頭曼)선우를 죽이고 선우가 되었다. 묵특이 어릴 때 월지(月氏)에 인질로 갔던 것으로 보아 당시 흉노는 월지나 동호(東胡)에 예속될 정도로 세력이 미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묵특선우는 군사적으로 팽창정책을 추진하였다. 먼저 동쪽으로 동호(東胡)를 격파하여 몽골고원 및 만주지역 일부를 손에 넣었다. 
서쪽으로는 감숙(甘肅) 및 천산 지역의 월지를 공격하여 서쪽으로 이주하게 하였다. 

5)남쪽으로는 누번(樓煩)과 백양(白羊) 두 부족국을 병합함으로써 진제국에 빼앗겼던 오르도스지역을 되찾고 황하 이남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북쪽으로는 북몽골과 서시베리아에 거주하고 있던 정령(丁零), 격곤 등을 복속시켰다. 이로써 중국 북부지역과 동북부지역을 아우르는 강력한 흉노제국이 성립되었다.

6)서기전 200년 묵특선우는 대군을 이끌고 태원군을 공격하고 진양성에 이르렀다. 한제국의 고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갔다가 흉노의 유인계에 걸려들어 백등산(白登山)에서 포위되었다. 한고조는 묵특선우의 처에게 뇌물을 바치고 포위된 지 7일 만에 철수할 수 있었다. 

7)서기전 198년 흉노의 기세에 압도당한 고조는 무력대결을 포기하고 흉노제국과 굴욕적인 형제조약을 체결하였다. 선우는 형이고 황제는 동생으로 칭하면서, 한제국은 흉노제국에 매년 값비싼 선물을 보내고, 황제의 딸을 인질로 선우에게 시집보내야 했다. 한제국이 흉노제국의 실질적인 조공국이 된 것이다. 

8)백등산전투는 유목국가와 농경국가간의 첫 격돌이었으며, 이는 유목국가의 전면적인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백등산전투는 중앙유라시아 동부에서 유목민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일대사건이었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 史記>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중국의 역사서를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다.

9)흉노의 정복사업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서기전 176년 묵특선우는 한제국의 문제(文帝)에게 보낸 서한에서 월지를 격파하고 누란, 호손, 호게와 인근 26개국을 완전히 평정하였다고 선언하였다. 

10)당시 흉노제국은 그 영토가 동쪽으로 만주 북쪽지역, 서쪽으로 아랄해, 남쪽으로 중국 위수(渭水)와 티벳고원, 북쪽으로 바이칼호와 이르티쉬강 유역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팽창하였다. 

11)양국의 화친조약에도 불구하고 흉노의 침입은 계속되었다. 서기전 166년 겨울 묵특선우의 뒤를 이은 노상(老上)선우는 14만 기병을 끌고 한제국을 공격했다. 흉노군은 북지(北地)의 도위 손앙을 죽이고 수많은 백성과 가축을 약탈해갔다. 팽양(彭陽)에서는 회중궁(回中宮)을 불태웠는데, 회중궁은 별궁인 이궁(離宮)이다.

12)서기전 140년 무제(武帝, 서기전 140-87년 재위)가 즉위하면서 양국간의 화친관계는 파국을 향해 치달았다. 한제국의 경제는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면서 충분히 회복되었다. 무력에서 열세에 놓였던 한제국은 효과적인 기병대를 창설하고 무기의 효능을 개선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13)서기전 133년 무제는 변경인 마읍(馬邑)에 30만 병력을 매복시켜 놓고 흉노제국의 선우를 유인하였다. 거짓으로 내부에서 호응하겠다는 사람을 보내 선우를 속여 끌어들인 후 기습하여 일망타진하겠다는 계략이었는데, 도중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제국과 흉노제국은 기나긴 전쟁에 들어간다.

14)서기전 129년 흉노가 상곡(上谷)을 공격하자, 무제는 위청(衛靑), 공손하(公孫賀), 공손오(公孫敖), 이광(李廣)으로 하여금 각각 1만기의 병력을 이끌고 네 방면에서 흉노제국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공손오는 참패하였고, 이광은 참패한 후 포로가 되었다가 겨우 도망쳐 돌아왔으며, 공손하는 흉노와 만나지 못해 전투가 없었다. 위청만이 상곡에서 출격하여 흉노가 하늘에 제사하는 용성(龍城)까지 공격해 들어가 700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한제국 군대가 장성을 넘어 흉노의 심장부까지 공격해 들어간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15)서기전 127년 위청은 운중(雲中)에서 북쪽으로 나가 오르도스지역을 회복했다. 그리고 감숙의 농서에서 나가 흉노의 백양왕(白羊王), 누번왕(樓煩王)을 패주시켰다. 한제국은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 지역에 삭방군(朔方郡)을 설치하였다. 

16)서기전 121년 곽거병(霍去病)이 1만 기병을 이끌고 농서를 출발, 1천 리 이상을 행군하여 언지산(焉支山) 너머 흉노제국을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흉노의 절란왕(折蘭王)과 노후왕(盧侯王)을 죽였다. 그해 여름 곽거병은 거연(居延)을 지나 기련산(祁連山)에서 흉노제국 병사 3만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17)흉노의 우현왕(右賢王)과 휴도왕(休屠王)은 서쪽으로 쫓겨났다. 가을에는 혼야왕(渾邪王)의 항복을 받았다. 기련산 북쪽은 가장 뛰어난 초원이며 교통의 중심지로서 군사적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흉노는 이 요충지를 빼앗김으로써 각종 물자의 공급원을 잃게 되면서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한제국은 이 지역을 지키기 위해 무위(武威), 장액(張掖), 주천(酒泉), 돈황(敦煌)을 차례로 설치하였는데, 이를 하서4군(河西四郡)이라고 한다. 

18)기원전 119년 곽거병은 외몽골에 있는 흉노의 본거지를 공격하여 1만 9000 명 정도를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 전투로 북방변경은 안정되었고, 흉노는 멀리 북쪽으로 밀려났다.

19)서기전 108년 무제는 만주 서부(지금의 요동지역)에 있던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반도 아님)하였다. 흉노가 위만조선과 손을 잡고 한제국에 대항하는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20)한사군의 설치는 하서4군의 설치와 함께 흉노의 세력을 고립시키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21)서기전 54년 흉노제국에 내분이 일어나 동흉노와 서흉노로 분열되었다. 서기전 52년 동흉노의 선우 호한야는 한제국과 손을 잡았다. 서기전 44년 좌현왕 질지는 호한야에게 쫒겨 키르키스지역으로 이동하였다(서흉노). 

22)서기전 36년 서흉노는 한제국의 힘을 빌린 호한야에 의해 멸망했다.

23)서기후 48년 흉노의 서역왕 일축왕비(日逐王比)가 고비사막 남쪽의 8개 부족을 이끌고 한제국에 투항하였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는 이들을 내몽골 즉 고비사막의 남쪽 만리장성 북쪽지역에 살게 하였다(남흉노). 

24)남흉노는 한제국의 속국이 되어 경제원조를 받는 대가로 변경의 방위를 맡았다. 오환, 선비, 정령 등은 북흉노에서 이탈해 남흉노와 함께 북흉노를 공격하였다. 흉노의 내분은 흉노의 세력을 현저하게 약화시켰다.

25)남흉노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북흉노는 한제국과 계속해서 대립하였다. 
북흉노는 시베리아 남부와 내륙아시아 및 서아시아 교역로상의 도시국가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서기후 91년 한제국의 대장군 두헌(竇憲)에게 패한 북흉노는 알타이산맥을 넘어 일리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26)기원 후 2세기경 선비족(鮮卑族)의 단석괴(檀石槐)가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흉노의 존재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의미다. 

27)서기후 4세기경 유라시아에서 발생한 민족 대이동의 단초를 제공한 훈족이 흉노라는 주장이 유력한 가설로 제기되고 있다.

7. 결론. 재인식 되어야 할 유목민족(특히 흉노족)의 정체성

1)흉노제국은 아시아 북방계의 주도로 세운 사상 최초의 유목국가였다. 이 제국은 강력한 정치권력에 의한 통일국가로서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북부 일원에서 400여 년간 존재하였다. 흉노제국은 남방계의 주도로 세운 진, 한제국과 함께 역사에 등장했다가 진, 한제국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다. 이 과정에서 a)진, 한제국의 농경문화를 수용하기도 하고, b)자신의 유목문화를 진, 한제국에 파급시키기도 하였다. 북방계와 남방계의 상호의존적인 관계는 향후 아시아역사의 한 패턴으로 정착하게 된다. 

a)역사학자 오웬 라티모어(Owen Latimore)는 “북아시아사와 중국사가 맞물려서 주기를 가지고 나선형적으로 역사가 발전하였다.”고 지적하였다. 
b)또다른 역사학자 토마스 바필드(Thomas Barfield)는 이러한 현상을 ‘거울의 상(mirror image)'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유목사회의 융성과 중국의 번영이 거울의 상이 짝을 이루듯이 맞물려 있었다는 의미다.

2)유목민들은 일반적으로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자기들의 역사가 없다. 이 때문에 유목민에 대한 시각과 그들의 역사는 대부분 그들과 인접한 문자를 가진 정주사회가 남긴 기록을 통해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주민들이 남긴 기록에는 유목민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담겨 있다. 그들은 유목사회를 문명 밖의 미개와 야만으로, 그리고 중심문화에서 떨어져 있는 주변문화로 홀대하였다. 흉노사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대부분 이러한 편견과 오해로 점철된 중국 역사가들의 기록에 의해 형성되었던 것이다.

3)최근 들어 유목사회를 재 해석한 된 서적과 출토자료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들 역시 정주사회처럼 a)자연환경에 적응하고 생존을 위해 사회구조와 사고(思考)를 변화시켜 왔음이 밝혀지고 있다. b)유목사회는 독자적인 정치체제와 경제구조, 그리고 사회조직과 문화패턴을 가지고 다른 문명과는 구별되는 문명을 창조하였던 것이다. 

유목사회의 내부에는 a)농업과 교역을 주로 하는 오아시스가 있었고, 주변국가들과의 교역이 활발하였으므로 자급자족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b)내부에는 목제와 철을 이용한 수공업이 발달하였고 금세공과 도기(陶器)제조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c)숙련된 궁수들로 구성된 기마부대는 주변국가들에 대한 힘의 우위를 가져다주었지만, 실제로 유목사회의 주변에 대한 침략이 정주사회 보다 더 심했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흉노제국은 동서 문화교류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a)스키타이 청동기문화를 도입하여 동북아시아 청동기문화의 출현에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이는 멀리 한반도와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b)흉노사회가 진, 한제국의 농경문화를 도입하여 새로이 창출한 호한(胡漢)문화는 흉노의 서천(西遷)으로 자연스럽게 서아시아와 유럽으로 전해졌다. c)중앙유라시아의 유목사회는 작은 틀에서 보면 중국이라는 지역의 변방에 지나지 않겠지만, 큰 틀에서 보면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동아시아, 시베리아를 연결하는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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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제국은 강력한 유목국가의 효시로서 향후 2,000년간 계속되는 유목국가의 전형적인 패턴을 창출하였다고 할 수 있다.

*흉노제국을 간단요약 

a) 진, 한 같은 강력한 정주제국의 성립은 역시, 강력한 유목세력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b)흉노유목제국이 강탈한 자원은, 인력과 가축이지, 농업생산물 즉, "밀이나 쌀" 이 아닌것으로 보아, 유목제국도 스스로 농업을 통한 경제를 소유했다
(유목공동체에도 농민이 존재함) 

c)흉노의 성장은 진 몽염의 오르도스 공격이 오히려,큰 자극제가 되었다. 

d) 도기, 금세공, 철기 등 기술수준이 정주국의 기술 수준 이상이었다(기술 전문가 집단이 존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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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갱 18-03-25 15:32
   
재밌네요.
Attender 18-03-25 16:34
   
저도 “단군의 나라 카즈흐스탄” 을 읽어보았지만, 흉노-스키타이-우리 민족 에 대한 연관성이 너무나도 궁금합니다.......

로열 스키타이(왕족 스키타이) 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말을 듣기도 해 보았구요..... 스키타이 민족이 다인종 국가라는 말을 들어보기도 하였습니다

흉노-스키타이-우리나라 의 연관성과 관계나 너무나도 궁금합니다........
     
비좀와라 18-03-26 02:39
   
"로열 스키타이(왕족 스키타이) 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말을 듣기도 해 보았구요"

스키타이는 5 가지 의상의 색깔로 신분을 구분 했는데 이게 환단고기의 황부인 적부인 등등의 내용과 같습니다.

환단고기의 내용은 스키타이의 내용과 거의 같아요. 그래서 환단고기를 주장하는 분들이 환단고기의 중심지를 한반도나 만주로 설정하는 것은 틀리단 말이죠.

전에도 썼지만 민족이나 종족의 구분을 피부 색갈로 구분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피부색갈로 구분하는 것은 인종의 구별이란 말이에요.

민족이나 종족의 구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패션으로 구분 합니다. 스키타이는 옷 색갈로 구분했는데 이는 오방색으로 구분 했단 말이죠.

이 오방색이 당시에는 무지개 색갈이고 한국인은 무지개 종족으로 스키타이가 바로 한국인 입니다.

몽골은 홍쿤이라 해서 적부인에 속하는데 이는 무사계급을 말하며 황색은 농민계급이고 백색은 신관계급이면서 로열 스키타이에 속합니다. 한국인은 백의민족으로 무지개 종족이면서 신관계급이고 로열 스키타이에 속하는 것이죠. 청색은 목동계급 등등으로 구분하거든요.

이성계는 평생 청색옷을 입었죠. 궁복역시 청색옷을 입었던 반면에 태조 이방원 부터 홍색옷을 입었죠. 이성계는 목부계급에 속하는 사람이었기에 청색옷을 입었던 것이고 이방원은 무사계급에 속한다고 생각 했기에 붉은 옷을 그리고 그 후에 임금들은 흰색옷을 입기도 하였기에 신관계급에 속하기도 하는 것 이죠.

반면에 중국의 황제들은 황색옷을 입었는데 황색은 농민계급을 의미하는데 스키타이의 계급에서 농민은 최 하층 계급입니다. 황색옷이 결코 좋은 의미의 색갈이 아니란 말이에요.

가장 좋은 것은 백색이고 그 다음 홍색 - 흑색 - 청색 - 황색의 순으로 계급을 매긴단 말이죠.
     
6시내고환 18-03-26 20:08
   
로열 스키타이는 이란계 유목민입니다..그들이 후에 페르시아의 일부가 되었고 지금의 이란이 생긴거구요...
history2 18-03-25 19:51
   
제 글에서, 흉노를 투르크 언어를 사용하는 계통이라 적었지만, 사실 스키타이 부터, 흉노, 선비, 훈, 돌궐에게 인종과 부족은 큰 의미가 없었다고 생각을 합니다...다만, 정주 대제국이 생기면, 항상 유목 대제국이 생긴다는 흉노 전문가의 말은 참 의미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청동기 부터, 동해안 루트가 초원길과 연결이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그 길을 통해, 스키타이 부터,,,,흉노와 선비의 문화가 신라까지 전해져서, 신라에 로만 글라스 까지 발견이 되는 것이겠지요....
Korisent 18-03-26 06:47
   
선비족은 한민족과 한피줄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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