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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30 20:23
[한국사] 외국인이 한국군의 장교까지 된 사례들
 글쓴이 : history2
조회 :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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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순룡 사당



1) 장순룡: 충렬왕 왕비로 원나라 출신인 제국공주를 수행해 1274년 고려 땅

을 밟은 이방인, 중국 서북부 위구르 이슬람교도인 장순룡은 고려 귀화 후 낭장

에 임명된 뒤 첨의참리(2), 문하찬성사(2)까지 승승장구한다.

낭장은 부하 200명을 거느린 중앙군 정6품 무관으로 오늘날 육군 중대장급 지

휘관이다외국인이 육군 대위로 특채돼 참모총장까지 고속진급한 셈이다.

장순룡은 나중에 덕수 현(개성시 개풍군)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덕수 장씨 시조

가 된다.

 

이지란.jpg
                                            이지란

2) 이지란: 이성계를 최측근에서 호위하며 조선 개국 1등 공신에 오른 이지란

도 여진족 출신 이방인이다. "쿠룬투란 티무르"가 본명인 이지란은 원나라에

서 벼슬을 하다가 부하를 이끌고 고려에 투항해 이성계 휘하로 들어간다.

전선을 누비며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이지란은 경상도 절도사, 동북면 안무사,

찬성 등 고위직을 두루 역임한다. 이지란이 지휘한 부대는 여진족과 몽골족 등 

이민족이 뒤섞인 일종의 다국적군이었다고 한다.



3) 동청례: 조선 시대에는 외국인이 왕실 경호 책임자가 되기도 했다. 조선에 귀

화하여 무과에 급제한 여진족 출신 동청례는 연산군(1476~1506)의 위장으

로 발탁된다위장은 궁궐 수비와 임금 근접경호를 담당하는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 등을 총괄 지휘하는 2품 무관직으로, 요즘 대통령 경호 실장과 비슷

한 자리다.

왕이 주관하는 국가 중요 행사나 궁궐 밖 출입 때 내금위가 최측근 경호를 맡고 

좌측과 우측에는 각각 우림위와 겸사복이 배치됐다.

동청례는 경호 대상인 연산군을 배신하고서 중종반정 세력에 가담해 정권 교체

를 거들었지만 처참한 대가를 치른다.

논공행상에서 서운한 대접을 받은 데 불만을 품고 왕을 비난했다가 역모죄에 걸

려 능지처참형을 당한다. 부인과 자식은 노비로 전락한다.



김충선.jpg
                                                         김충선(사야가) 
 

 

4) 사야가: 임진왜란 당시에는 사야가라는 왜장이 조선에 귀화해 눈부신 전공

을 세워 고속 출세한다. 왜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휘하에서 3천여 

명을 거느린 사야가는부산 상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군에 투항한다.이후 

조선군 조총부대 창설을 주도하고 왜군과 70여 차례 전투를 벌였으며 병자호

란 때 는 청나라 군대와 싸워 용맹을 떨친다.

선조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아 가선대부라는 종2품 벼슬과 함께 김 씨 성을 하사

받은 사야가는 김충선으로 개명한다

조선 여인과 결혼한 김충선은 공직생활을 마치고 대구로 내려가 일가를 이뤘으

, 후손이 지금까지 7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유럽계 흑인도 조선군 장교로 임관할 기회가 있었으나 무산됐다.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인 1598년 선조는 명나라 장수로부터 흑인 병사 4

을 소개받는다.

선조는 파랑국(포르투갈) 출신인 이들이 조총을 잘 쏘고 다양한 무예에 능하다

는 말을 듣고 "왜적을 섬멸하는 것은 시간문제다"라며 기뻐한다.

노란 눈동자에 온몸이 검고 곱슬머리인 용모 때문에 해귀(바다 귀신)로 불린 이

들은 바다 잠수로 적선을 침몰시키는 능력도 있었다고 했다.

해귀 출현 소식에 왜군은 바짝 긴장했으나 막상 이들이 적선을 부쉈다는 기록

은 없다흑인 군인들이 무력시위만 했을 뿐 실전 성과를 거두지 못한 탓에 장

교 임용 기회는 자연스레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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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테브레(박연)



5) 박연: 1627년 경주 인근 해역에서 양식과 식수를 구하려고 상륙했다가 붙잡

힌 네덜란드인 박연(본명 얀 얀스 벨테브레이)도 동인도회사 소속이었다.

박연은 동료 2명과 함께 체포돼 경주 관아로 압송된다.

이들이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장면을 목격한 주민들은 비명을 질렀고, 성문

을 지키던 군인조차 눈이 휘둥그레졌다고 한다.

붉고 노란 머리카락에 우뚝 솟은 코, 푸른 눈, 희멀건 피부, 우람한 체구에 놀랐

기 때문이. 박연 일행 또한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조선을 식인의 나라로 생각한 이들은 해 질 무렵 군인들이 횃불을 높이 들자 자

신들을 구워먹기 위해 불을 지핀 것으로 알고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박연 일행은 조선 훈련도감에 편입돼 대포와 조총 제작·사용법을 가르친다.

훈련도감은 한양 방위를 담당한 정예 부대로 포수(총포), 살수(창검), 사수()

3개 병과에 특화한 군인들로 편성됐다.


박연 일행은 당시 성능이 가장 우수한 무기인 홍이포(네덜란드포)도 제작했다.

기존 화포보다 사거리가 길고 파괴력이 뛰어난 신무기다.

병자호란 때는 전쟁터로 나가 박연만 살아남고 동료 2명은 전사한다.

훈련도감에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항왜)과 중국인 군인들도 많

았는데 박연이 이들을 지휘했다. 외인 부대장 노릇을 한 셈이다.

1648년 무과에 장원급제한 박연은 조선 여자와 결혼해 자식을 낳고 단란한 가

정을 꾸려 조선인으로 동화하는 듯했으나 어느 순간 향수병에 걸리게 된다.

1653년 제주도 인근 해역에서 조난한 외국인 통역을 도와준 게 잊혀가던 고향

을 떠올린 계기다.해상 난민들은 하멜표류기에 등장하는 네덜란드 출신 하멜 일

행이었다.박연은 이들과 몇 마디 주고받다가 갑자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엉

엉 울어 소매가 흥건하게 젖었다고 한다.


조선에 체류한 지 27년 만에 고향 사람을 만난 기쁨과 고국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교차해 눈물이 펑펑 쏟아진 것이다.

하멜 일행도 훈련도감 외인부대에 배속됐다가 1664년 조선을 탈출해 일본을 거

쳐 귀국한. 하멜표류기는 조선에 14년간 억류된 탓에 챙기지 못한 급여를 동

인도회사에서 받아내려고 작성한 행적 보고서로 조선을 유럽에 최초로 소개한 

문헌이다.

박연의 아들도 훈련도감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후손 흔적은 확인되

지 않고 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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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2 18-03-30 20:45
   
***고구려의 강이식 장군도 진주강씨의 족보에 의하면, 수나라의 원수였는데 고구려로 귀화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또 야사에는 원래 고구려인이 였다는 상반된 기록이 있습니다.
촐라롱콘 18-03-30 22:16
   
[[4) 사야가: 임진왜란 당시에는 사야가라는 왜장이 조선에 귀화해 눈부신 전공을 세워 고속 출세한다.
왜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휘하에서 3천여 명을 거느린 사야가는부산 상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군에 투항한다.이후 조선군 조총부대 창설을 주도하고 왜군과 70여 차례 전투를 벌였으며 병자호란때는
청나라 군대와 싸워 용맹을 떨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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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가 김충선이 투항하기 이전 가토 키요마사 휘하에서 3천여 명을 거느렸다는 기록은
신빙성이 상당히 떨어져 보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가토 키요마사와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이끄는 일본군 제2군은 총 2만2천여 명
그중 가토 키요마사 휘하 병력은 1만여명 규모였습니다.

만약 1만여명 가운데 무려 3천명의 병력이 개전 초반에 증발해 버렸다면....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코니시의 제1군보다 5일 늦은 4월 18일 부산에 상륙해서 동래-언양-경주-영천-군위-조령-충주-죽산-용인을
거쳐 코니시의 제1군과 같은 날짜인 5월 3일 한양에 입성.... 결론적으로 부산상륙 기준으로 만 15일만에
한양에 입성했을 정도로 거칠 것 없는 파죽지세의 진격은 도저히 불가능한 노릇입니다.
더구나 가토군의 진격노선은 제1군 코니시군보다 상당히 에둘러 가는 코스였습니다.

더구나 당시 일본군 장수들 가운데 병사 3천명을 거느릴 수 있는 위치는 다이묘급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일반적으로 1만석 규모의 다이묘에게 내려진 병력할당량이 대략 300명 규모인데, 3천명의 병력이란...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10만석 규모의 중급 다이묘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규모입니다.

또한 가토 키요마사 휘하의 확인되는 가신 숫자들만 하더라도 24명 규모인데
이를 평균적으로 나눈다 하더라도 가신 1인이 지휘할 수 있는 병력규모는 평균 400명 규모입니다.

따라서 사야가 김충선이 가토 키요마사의 가신의 위치라 하더라도 그가 거느리고 투항할 수 있는
병력규모는 기껏해야 대략 300명 규모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야가 김충선이 병자호란에서 청나라군대와 싸워 공을 세웠다는 주장 또한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당시 김충선은 경상도 대구-달성 지역이 근거지였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경상도 속오군을 주축으로 한 병력이 청나라군과 싸웠던 전투는 경기도 광주의 쌍령전투입니다.
그런데 이 쌍령전투는 최소3만~최대4만에 달하는 경상도군이 고작 300명 규모의 청군 기병에게 대오를
돌파당하고 전열이 무너져... 이후부터는 그냥 청군에 의한 일방적인 학살만이 존재했던 치욕스런 전투였습니다.

(다만 쌍령전투에서의 청군 지휘관이 청태종의 조카이자 패륵인 요토이기 때문에 쌍령전투에서의 청나라군
전체 병력규모도 3천~6천명 규모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로 알고 있습니다.)

쌍령전투에서 경상도군은 적게 잡아도 2만명 가량이 전사(사실상 전사보다는 청군에 의한 일방적인 학살과
도주하다 아군들끼리 밟혀죽거나 깔려죽은 압사의 경우가 대부분이지만..)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쌍령전투 후 청나라군이 상당수 경상도군 시신들을 불태웠고... 그후 경상도 지역의 여러 문중에서
사람을 보내 자기 집안출신의 상당수 시신들을 수습하고 난 이후에도.... 전란 이후에 쌍령지역에서 수습된
시신이 8천여 구에 달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쌍령전투에서의 청나라군 피해는 전사자 기준으로 불과 수 십명 규모로 추정되기 때문에....
설령 김충선이 쌍령전투에 참가하여 무사히 목숨을 건졌다 하더라도 공을 세울 기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김충선이 쌍령전투에 참가했다 하더라도... 직접 전투에 참여한 경상좌-우병사 휘하가 아닌
다소 후방에 위치해서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경상감사 휘하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쌍령전투에 직접 참여했다면 당시만 하더라도 김충선의 나이가 60~70세에 달하는 노구인지라
당시 전열이 무너져 지리멸렬해서 무질서하게 도주하는 경상도군들 틈에서 압사당하거나
또는 청군에게 학살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지극히 어려울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history2 18-03-30 22:41
   
자세한 댓글 진심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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