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순룡 사당
1) 장순룡: 충렬왕 왕비로 원나라 출신인 제국공주를 수행해 1274년 고려 땅
을 밟은 이방인, 중국 서북부 위구르 이슬람교도인 장순룡은 고려 귀화 후 낭장
에 임명된 뒤 첨의참리(정2품), 문하찬성사(정2품)까지 승승장구한다.
낭장은 부하 200명을 거느린 중앙군 정6품 무관으로 오늘날 육군 중대장급 지
휘관이다. 외국인이 육군 대위로 특채돼 참모총장까지 고속진급한 셈이다.
장순룡은 나중에 덕수 현(개성시 개풍군)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덕수 장씨 시조
가 된다.
이지란
2) 이지란: 이성계를 최측근에서 호위하며 조선 개국 1등 공신에 오른 이지란
도 여진족 출신 이방인이다. "쿠룬투란 티무르"가 본명인 이지란은 원나라에
서 벼슬을 하다가 부하를 이끌고 고려에 투항해 이성계 휘하로 들어간다.
전선을 누비며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이지란은 경상도 절도사, 동북면 안무사, 좌
찬성 등 고위직을 두루 역임한다. 이지란이 지휘한 부대는 여진족과 몽골족 등
이민족이 뒤섞인 일종의 다국적군이었다고 한다.
3) 동청례: 조선 시대에는 외국인이 왕실 경호 책임자가 되기도 했다. 조선에 귀
화하여 무과에 급제한 여진족 출신 동청례는 연산군(1476~1506년)의 위장으
로 발탁된다. 위장은 궁궐 수비와 임금 근접경호를 담당하는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 등을 총괄 지휘하는 종2품 무관직으로, 요즘 대통령 경호 실장과 비슷
한 자리다.
왕이 주관하는 국가 중요 행사나 궁궐 밖 출입 때 내금위가 최측근 경호를 맡고
좌측과 우측에는 각각 우림위와 겸사복이 배치됐다.
동청례는 경호 대상인 연산군을 배신하고서 중종반정 세력에 가담해 정권 교체
를 거들었지만 처참한 대가를 치른다.
논공행상에서 서운한 대접을 받은 데 불만을 품고 왕을 비난했다가 역모죄에 걸
려 능지처참형을 당한다. 부인과 자식은 노비로 전락한다.
김충선(사야가)
4) 사야가: 임진왜란 당시에는 사야가라는 왜장이 조선에 귀화해 눈부신 전공
을 세워 고속 출세한다. 왜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휘하에서 3천여
명을 거느린 사야가는부산 상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군에 투항한다.이후
조선군 조총부대 창설을 주도하고 왜군과 70여 차례 전투를 벌였으며 병자호
란 때 는 청나라 군대와 싸워 용맹을 떨친다.
선조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아 가선대부라는 종2품 벼슬과 함께 김 씨 성을 하사
받은 사야가는 김충선으로 개명한다.
조선 여인과 결혼한 김충선은 공직생활을 마치고 대구로 내려가 일가를 이뤘으
며, 후손이 지금까지 7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 유럽계 흑인도 조선군 장교로 임관할 기회가 있었으나 무산됐다.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인 1598년 선조는 명나라 장수로부터 흑인 병사 4명
을 소개받는다.
선조는 파랑국(포르투갈) 출신인 이들이 조총을 잘 쏘고 다양한 무예에 능하다
는 말을 듣고 "왜적을 섬멸하는 것은 시간문제다"라며 기뻐한다.
노란 눈동자에 온몸이 검고 곱슬머리인 용모 때문에 해귀(바다 귀신)로 불린 이
들은 바다 잠수로 적선을 침몰시키는 능력도 있었다고 했다.
해귀 출현 소식에 왜군은 바짝 긴장했으나 막상 이들이 적선을 부쉈다는 기록
은 없다. 흑인 군인들이 무력시위만 했을 뿐 실전 성과를 거두지 못한 탓에 장
교 임용 기회는 자연스레 사라진다.
벨테브레(박연)
5) 박연: 1627년 경주 인근 해역에서 양식과 식수를 구하려고 상륙했다가 붙잡
힌 네덜란드인 박연(본명 얀 얀스 벨테브레이)도 동인도회사 소속이었다.
박연은 동료 2명과 함께 체포돼 경주 관아로 압송된다.
이들이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장면을 목격한 주민들은 비명을 질렀고, 성문
을 지키던 군인조차 눈이 휘둥그레졌다고 한다.
붉고 노란 머리카락에 우뚝 솟은 코, 푸른 눈, 희멀건 피부, 우람한 체구에 놀랐
기 때문이다. 박연 일행 또한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조선을 식인의 나라로 생각한 이들은 해 질 무렵 군인들이 횃불을 높이 들자 자
신들을 구워먹기 위해 불을 지핀 것으로 알고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박연 일행은 조선 훈련도감에 편입돼 대포와 조총 제작·사용법을 가르친다.
훈련도감은 한양 방위를 담당한 정예 부대로 포수(총포), 살수(창검), 사수(활)
등 3개 병과에 특화한 군인들로 편성됐다.
박연 일행은 당시 성능이 가장 우수한 무기인 홍이포(네덜란드포)도 제작했다.
기존 화포보다 사거리가 길고 파괴력이 뛰어난 신무기다.
병자호란 때는 전쟁터로 나가 박연만 살아남고 동료 2명은 전사한다.
훈련도감에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항왜)과 중국인 군인들도 많
았는데 박연이 이들을 지휘했다. 외인 부대장 노릇을 한 셈이다.
1648년 무과에 장원급제한 박연은 조선 여자와 결혼해 자식을 낳고 단란한 가
정을 꾸려 조선인으로 동화하는 듯했으나 어느 순간 향수병에 걸리게 된다.
1653년 제주도 인근 해역에서 조난한 외국인 통역을 도와준 게 잊혀가던 고향
을 떠올린 계기다.해상 난민들은 하멜표류기에 등장하는 네덜란드 출신 하멜 일
행이었다.박연은 이들과 몇 마디 주고받다가 갑자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엉
엉 울어 소매가 흥건하게 젖었다고 한다.
조선에 체류한 지 27년 만에 고향 사람을 만난 기쁨과 고국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교차해 눈물이 펑펑 쏟아진 것이다.
하멜 일행도 훈련도감 외인부대에 배속됐다가 1664년 조선을 탈출해 일본을 거
쳐 귀국한다. 하멜표류기는 조선에 14년간 억류된 탓에 챙기지 못한 급여를 동
인도회사에서 받아내려고 작성한 행적 보고서로 조선을 유럽에 최초로 소개한
문헌이다.
박연의 아들도 훈련도감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후손 흔적은 확인되
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