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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4-02 16:34
[일본] 731부대의 진실(2)
 글쓴이 : history2
조회 : 1,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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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루타의 등장: 베이윈허에서 죄수들이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외부공격으로 보이는 폭발사건까지 발생하자 베이윈허 비밀실험시설을 하얼빈 남동쪽 17킬로미터 떨어진 핑팡(平房)으로 이전하였다. 베이윈허 시설은 1937년에 폐쇄되었고, 핑팡의 비밀실험시설은 1939년에 완공되었다. 이시이 부대는 지역 주민들을 속이기 위해 핑팡에 짓고 있는 시설을 제재소라고 선전하였다. 이 때문에 실험대상이 되는 인간을 통나무라는 뜻을 가진 마루타(丸太)라고 불렀다. 핑팡에 거주한 731부대원은 처음에 300여 명 정도였으나, 가장 많았던 1942년에는 3,000여 명에 이르렀다.

 

실험대상이 된 희생자들은 하얼빈 헌병대에서 특별이송되어 왔다. 특별이송이란 관동군의 헌병대에서 체포한 항일운동가 등을 재판을 거치지 않고 731부대에 이송하여 생체실험을 진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각지 헌병대에서 하얼빈 헌병대로 보내진 후 731부대로 이송되었다. 적어도 3,000명 이상이 이송되어 실험대상이 된 후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별이송의 대상자들은 주로 중국인이었지만, 항일운동을 하다 체포된 한국인, 전쟁포로로 잡힌 러시아인, 그리고 영국, 네덜란드, 호주, 뉴질랜드, 미국과 같은 연합국의 군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731부대 세균제조부장을 지낸 가와시마 기요시(川島淸)는 소련의 하바로프스크 재판에서 여성과 어린이도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남아있는 자료 가운데서 한국인 이기수, 고창율, 김성서, 한성진 등의 이름이 보인다. 이기수는 함경남도 출신으로 중국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에 소속되어 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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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부대에서 연구하던 병원균은 페스트, 콜레라, 티푸스, 파라티푸스, 탄저열, 파상풍, 여과성 바이러스 등이었다. 인간생체실험은 세 가지 방면으로 자행되었다. 첫 번째는 핑팡과 같은 시설 내에서 이루어지는 실험이다. 두 번째는 세균폭탄의 성능을 알아보기 위해 안다(安達)와 같은 야외실험장에서 인간마루타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실험이다. 세 번째는 적군과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실전에서 테스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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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5월과 6월에 핑팡 비밀실험실에서 콜레라실험이 이루어졌다. 20명의 실험대상 가운데 8명은 초음파장비로 만든 콜레라백신을 접종하였고, 8명은 재래식 방식으로 제조한 콜레라백신을 접종하였으며, 나머지 4명은 백신을 접종하지 않았다. 20일이 지난 후 콜레라균에 감염된 우유를 강제로 마시게 한 결과, 백신을 접종받지 못한 4명은 전원 사망하였고, 재래식 방식으로 제조한 백신을 접종받은 사람은 일부가 병에 걸리거나 사망하였으며, 초음파장비로 제조한 백신을 접종받은 사람은 한사람도 콜레라증세를 보이지 않았다. 이후 이시이는 초음파장비로만 백신을 만들라고 지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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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생화학 무기의 개발: 416월 초에 안다 야외실험장에서는 인간에게 페스트에 감염된 벼룩이 들어 있는 폭탄을 투하하는 실험을 하였다. 10명 내지 15명 정도 되는 인간마루타들을 땅에 박아놓은 말뚝에 단단히 묶은 뒤 그곳으로 폭탄을 10개 이상 투하하였다. 다음 해 여름에도 15명을 말뚝에 묶어놓고 비행기로 20개 정도 되는 벼룩폭탄을 투하하였다. 100미터 상공에서 폭탄이 터지고 벼룩이 사방으로 흩어지면 죄수들이 감염될 수 있도록 충분히 방치한 다음 결과를 관찰하였다.

 

731부대가 처음으로 실전에서 생물학무기를 테스트한 것은 1939년 소련군과 싸운 노몬한전투에서였다. 그해 5월 전투가 발발하고 6월 들어 전황이 일본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관동군 사령관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는 이시이에게 생물학무기를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612일 이시이는 2개 자폭분대를 할하강의 소련 쪽 제방으로 급파하였다. 이들은 고무보트에 22.5킬로그램의 살모렐라균과 티푸스균을 싣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 뒤 세균을 담은 깡통을 강물에 투하했다. 이때부터 1942년까지 적군과 민간인을 상대로 수많은 실전테스트가 자행되었다.

 

19406월에는 국민당 총통 장제스(蔣介石)의 고향인 닝보(寧波)에 대한 세균공격이 있었다. 731부대는 저수조나 샘은 물론 일반가정에 있는 우물에도 세균을 쏟아부었다. 10월 말에는 이시이가 직접 닝보로 와서 주변지역에 오염된 밀과 목화를 뿌리는 일을 감독했다. 이로 인해 닝보 주변지역에 콜레라와 티푸스, 페스트가 창궐하여 적어도 1,000여 명이 감염되었으며 그중 절반 이상이 사망하였다.

 

일본군의 세균 살포에 의한 피해는 일본 시민단체와 중국 각지에서 조직된 세균전피해조사위원회에 의해 일부 밝혀졌다. 2002년 도쿄지방재판소에 의해 인정된 사망자는 닝보 등 8개 지역에서 10,694명이다. 731부대 의학자였던 가네코 준이치(金子順一)1948년 도쿄대학에 제출한 논문에 따르면 1940-1942년 사이에 중국에서 실시한 6개 작전에서 사용한 벼룩으로 인한 감염자수가 25,964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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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942년 8월 이시이는 육군 제1의무부대 총책임자가 되어 난징(南京)으로 옮기게 된다. 이시이의 후임으로 731부대장이 된 사람은 키타노 마사지(北野政次)였다. 그는 이시이가 개발한 공중분사방식을 좀 더 발전시켜 1944년 상하이 근교에서 대규모 페스트실험을 성공리에 수행하였다. 이 테스트는 필름에 담아져서 관동군 최고사령부에서 열람되었다. 19453월에는 다시 이시이가 731부대장으로 복귀하여 패전할 때까지 근무하였다.

 

이시이의 실험결과는 관동군 사령관에게 보고되었다. 관동군 사령관을 지낸 우에다 겐키치(1935-1939년 재임)1939년 노몬한전투에서 이시이에게 생물학무기를 사용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郞, 1939-19447월 재임)와 그 후임자인 야마다 오토조(山田乙三)도 알고 있었다. 야마다는 19447월 사령관에 부임한 직후 731부대와 100부대가 세균무기 개발 및 대량생산방법을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진술하였다.

 

관동군 재무부서 총책임자를 지낸 다케다노미야 쓰네요시(竹田宮恒德)도 이시이의 실험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는 생물학무기 연구를 위한 자금을 조달하는 책임자인 동시에, 731부대와 100부대의 활동을 관리하기 위해 구성된 특별위원회의 구성원이었다. 그는 미야타 스네요치라는 가명으로 핑팡 비밀시설을 자주 찾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어머니는 천황 히로히토의 여동생이므로 히로히토는 그의 외삼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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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천황 히로히토의 인지: 1941년부터 총리대신을 지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1935년부터 1938년까지 만주에서 관동군 헌병대 사령관과 참모장을 역임하였다. 도조의 한 측근은 도조가 인간생체실험을 다룬 이시이의 영화를 보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고 증언하였다. 도조는 육군 수뇌부와 육군대신을 거쳐 총리대신까지 역임하였다. 따라서 당시 육군과 정부의 수뇌부들은 대부분 이시이의 실험내용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천황 히로히토가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는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천황은 전쟁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는 일본 정부의 선전과는 달리 히로히토는 전쟁 개시부터 종전에 이르기까지 최고통수권자로서 전쟁에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특히 독가스의 사용에 대해서는 히로히토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관련자료에 의하면 독가스는 천황의 재가가 내려진 다음 참모총장의 지시가 발령되고, 이것이 대본영을 통해 현지군에 내려갔다. 그러나 생물학무기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자료가 없다. 항복을 전후해서 조직적으로 생물학무기에 대한 자료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소각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생물학무기는 독가스보다 위중한 것이므로 독가스에 준해서 그 사용이 천황의 통제하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히로히토는 과학자로서 이시이의 실험결과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이시이가 개발한 수질여과장치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에 참석한 적도 있었다. 히로히토의 생질인 다케다노미야 쓰네요시가 이시이의 실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히로히토가 알고 있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히로히토는 군부에 심어놓은 황족들과 각계각층의 정보원을 통해 많은 정보를 취득하고 있었다. 중요한 생물학무기에 대한 정보가 여러 루트를 통해 히로히토에게 전달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인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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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내고환 18-04-05 20:39
   
전세계가 그들의 자료를 필요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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