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명도전에 대한 정의는 “명도전은 고조선이 아닌 연나라 화폐”라는 것이다. 명도전은 중국 전국시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넓은 범위에 걸쳐 유통된 화폐라는 점에서 당시의 동북아 국가간의 교류 양상을 엿 볼 수 있는 중요 유물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국내외 학계에서는 명도전을 주목하고 그 의미를 규명하고자 하였으며, 명도전의 명칭, 기원, 유통시기, 사용자 등과 관련하여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a)명도전이 전국시대 중기 이후에 주조되었고, b)주로 중국의 북경, 하북성, 산서성, 내몽고자치구 동남부, 요령성, 길림성 서남부, 한반도 서북부 일대에 유통되었음이 밝혀졌다.
사실, 고조선의 팔조법의 내용이나, 한치윤의 “해동역사” 를 보면 수유국 흥평왕 원년인 기원전 957년 자모전(子母錢)이라는 주조 화폐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튼 이러한 기록은 고조선에서 화폐를 사용했다는 것을 뜻한다.
(고조선의 팔조법 중 “도둑질한 자는 노예로 삼는데 재물을 바치고 죄를 면하고자 하는 자는 50만전을 내야 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조선이 화폐를 사용하였음 알 수 있다)
1)화폐는 인류가 경제 활동에 적응한 일종의 산물이기 때문에, 유통지역의 정치, 경제, 지리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화폐가 특정한 형태의 생활필수품에서 유래하였음은 이를 보여주는 것 이다. 즉, 농경구 모양의 포전은 농경이 발달한 황하 중류 유역에서 사용되었고, 손칼 모양의 도폐는 주로 북방 목축경제가 발달한 지역에서 유통되었다. 이들 화폐는 춘추시대까지만 해도 포전과 도폐의 사용 권역이 구분되어 있었고 분포 범위도 요하를 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이르면 한 국가에서 여러 종류의 화폐를 혼용해서 사용함에 따라 유통권도 더욱 확장되었다. 같은 형태의 화폐가 당시 동북아시아 전체에서 유통되었을 것임은 명확하며 명도전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2) 명도전은 1920년대 일본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요령성 부근에서 발굴되어 시대적 상황과 그들의 사관에 의해 요령성 일부 및 한반도 서북부까지 세력을 뻗친 국가, 즉 연나라의 화폐로 지금까지 인지되어 왔다.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한 시기를 거쳐 고조선의 강역이 지금 하북성 및 요령성 그리고 동북삼성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이르렀었다는 이론의 발전이 있는 지금에도 우리는 명도전이 춘추전국시대의 고조선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연나라와 제나라의 화폐였다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고조선 지역에서 출토된 명도전은 고조선에서 통용된 연나라 화폐로 볼 수 있는가 이다.
3) 여기서 명도전이 연나라 화폐가 아닌 고조선의 화폐라는 이유를 밝힐 수 있다면, 고조선의 실제적인 세력범위를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럼 명도전이 고조선의 화폐일 수 있다는 가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고조선의 강역 범위 내에 명도전이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연나라 지역에는 일부 출토는 되지만 고조선 지역에 비하면 아주 경미한 수준이다. 더군다나 황하 이남에는 전혀 출토되지 않고 있다.
2) 경제의 법칙은 고대나 지금이나 규모와 방식만 달라졌을 뿐, 물건을 사고파는 데 대체수단으로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임에는 변함이 없다.
만약 고조선에서 연나라의 화폐인 명도전이 사용되었다면 고조선의 경제는 연나라의 경제에 예속되었어야 하고, 연나라는 명도전을 찍어내는 일만으로도 고조선의 경제를 장악하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고조선이 적국인 연나라의 화폐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3) 고조선의 청동 주조 기술이 주변국에 비하여 뒤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조선의 대표적인 청동기 유물인 비파형 동검이나 세형동검 같은 동검을 보더라도 중국의 동검과는 다른 특징을 갖고 있었고, 특히 다뉴세문경(잔줄무늬 청동거울)을 보면 불과 지름 21㎝ 정도 되는 크기 안에 0.3㎜ 간격으로 무려 가는 선 약 1만 3000개를 새겨 넣었다. 이렇듯 정밀한 청동 주조 기술을 가진 고조선 사회가 명도전이라는 화폐를 만들지 않았을 리 없었다는 것이다.
4) 명도전의 출토 수량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다. 연나라는 기원전 323년부터 기원전 220년이라는 약 100년의 짧은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 연의 존속 기간 동안에 통용되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명도전이 요서 및 요동, 만주 전역에서 가마니로 발굴되어 굴러다닌다. 2,000여 년 전 화폐가 기념품 가게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한화로 1000원 정도에 팔렸다(그러니 위조 명도전이 나오기가 어렵다)
* 명도전이 고조선의 화폐라는 주장은 의외로 중국인 학자로부터 나왔다.
중국 고고학자인 중국사회과학원 장보취안(張博泉) 교수가 2004년 후반 『북방문물』 이라는 학술지에서 그의 논문「 명도폐연구속설(明刀幣硏究續說)」에서 원절식 명도전은 고조선의 화폐라고 발표하였던 것이다. 결론은 명도전은 고조선에서 고조선 경제를 위해 만들어 사용한 고조선 화폐라는 것이다. 장교수의 논문 내용 중 일부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무렵까지 만주 지역에는 3종의 화폐가 있었다. 즉 a)첨수도, b)원절식 도폐, c)방절식 도폐가 그것이다. 첨수도는 끝이 뾰족한 것이고 원절식은 몸체가 둥근 형태이고, 방절식은 몸체가 각진 형태로 된 것을 말한다. 이들 화폐 가운데는 첨수도는 고죽 또는 기자관련 족이고 원절식은 (고)조선의 화폐이며 방절식은 연나라 화폐이다."
첨수도 1)
첨수도 2)
4) 방절식
결국 중국 고고학자인 장교수가 진정으로 주장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원절식 명도전은 기자조선의 화폐임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기자조선이 요서에서 요동으로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요동에서도 원절식 명도전이 출토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도전이 고조선의 화폐가 아니라는, 반론도 제시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청동기 유물의 경우 거푸집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 유물은 지역을 대표하기가 어렵다.
즉, 1)명도전을 제조하였던 거푸집(금형)이나 공방과 장소들이 대부분 중국의 북경 근처와 하북성 북부 및 중부 그리고 요령성 서쪽이기 때문이다.
* 명도전의 거푸집
사실 고조선의 영토를 아무리 넓게봐도 난하를 넘기기는 어렵다. 특히 화폐는 국가의 중심부에서 제조됨이 맞다고 볼 때, 명도전의 거푸집이 한반도 북부나 요동지방에서 출토되지 않는다면, 사실 명도전을 고조선의 화폐로 인정하기는 쉽지않다.
또한 2) 명도전의 원류는 형태상, 고조선이나 홍산 쪽의 북으로부터 시작했다기 보다는, 서쪽인 조나라 지역에서 그 원류가 나타나며, 여러형태가 존재하지만 이를 통칭해서 도전(刀錢)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앞서 거론했 듯 손칼모양이 북방계통이고, 포전의 형태가 남방계통이라고 하기는 했지만, 형태적인 발달로는 여전히 도전은 조나라 지역이 원류이고, 그것이 퍼져나가면서,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 명도전(첨수도)에 적힌 상형문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