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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4-07 02:36
[한국사] 이정기의 치청왕국은 한국사의 범위에 들어올 수 있는가?
 글쓴이 : history2
조회 : 1,979  

치청제국.jpg

제 1 대. 이정기(765~781)
제 2 대. 이납(781~792) 이정기의 아들
제 3 대. 이사고(792~806) 이납의 아들
제 4 대. 이사도(806~819) 이사고의 이복동생


* 이정기에 대해서는 이제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정도 그 실체를 알고있는 당나라 절도사이자, 치청왕국의 창립자이며, 고구려의 유민이다. 

그러면 이 이 정기의 제나라가 과연 한국사의 영역에 편입이 가능한 것 인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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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정기의 정체성: 이정기가 고구려의 유민임은 기록되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명시적으로 고구려의 복원을 또한 요구한 일 이 없다. 그는 황제가 되기를 바랬고 그래서 낙양방화와 대운하를 점령하는 등 반당 활동을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고구려의 부흥을 위한 것은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야망이었다. 

2.이정기라는 이름: 그의 원래 이름은 이회옥이었다. 정기라는 이름은 당에서 준 이름이다, 그는 당에서 받은 그 이름을 자랑스러워 한 듯 보인다. 

3.이정기의 아들 이납이 제나라를 세운이유: 이납이 제나라를 세운 이유는 단순히 이납에게 부친의 직위에 대한, 계승을 당이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주변의 여타 번진 또한 독립을 시도했기에 집단적으로 행동한 결과일 뿐 이다.

4.그의 주변 인물: 그의 주변인물  중 사촌이며, 절도사로 그가 추대한 후희일을 제외하고는 고구려 유민이 명시적을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산동이 고구려 유민이 상대적으로 많은 지역이기는 하지만, 그의 동료집단에서 고구려인의 정체성을 찾기가 쉽지않다. 발해와의 친선도 발해의 말을 구하고, 발해의 반당정서와 맞았기 때문이지, 고구려라는 의식으로 친선이 이루어 졌다는 기록은 없다. 

특히 이정기의 성씨인 이씨가 고구려의 고유 성씨 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도 이정기의 고구려 유민으로서의 정체성이 그리 강하지 않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하게한다. 더군다나 이정기 집안은 발해의 건국에 전혀 관여하지 않은 체, 그냥 조양에 머문 고구려유민의 후손이기도 하다.    

그런 이정기의 치청왕국을 한국사의 범위에 넣은다는 것 그리고 이정기를 한국인이라고 라 수 있는지에 대해 솔직히 의문이 든다. 

평생을 당을 위해 싸우다 모함으로 죽은 고선지 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지만, 이정기의 치청왕국이 a)고구려의 부흥과 연결된 고리도 없고, b)발해와 연합을 하여, 한민족의 국가를 세우고자 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c)신라가 당의 요구로 3만의 대군을 보내 치청왕국을 정벌하려 했으니, 신라와도 적대적일 수 밖에 없었다. 즉, 한국사의 어느부분에서 연결점을 찾아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구당서 발췌>

李正己, 高麗人也. 本名懷玉, 生於平盧. 乾元元年, 平盧節度使王玄志卒, 會有敕遣使來存問, 懷玉恐玄志子爲節度, 遂殺之, 與軍人共推立侯希逸爲軍帥. 希逸母卽懷玉姑也. 이정기(李正己)는 고구려(高麗) 사람이다. 본명은 회옥(懷玉)으로 평로(平盧 지금의 요령성)에서 태어났다. 自正己至師道, 竊有鄆·曹等十二州, 六十年矣. 懼衆不附己, 皆用嚴法制之. 大將持兵鎭于外者, 皆質其妻子, 或謀歸款於朝, 事洩, 其家無少長皆殺之. 以故能劫其衆, 父子兄弟相傳焉. 五年七月, 檢校尙書右僕射. 

이정기로부터 사도에 이르기까지 운주, 조주 등 12주를 멋대로 차지하고 60년 간 자신에게 붙지 않으면 모두 엄한 법으로 다스렸다. 대장으로 군사를 이끌고 외방에 나가는 자는 모두 처자식을 인질로 남겨두니 조정으로 돌아가려고 모의하다 일이 발각되면 가족을 노소의 구별없이 모두 죽였다. 5년 7월 (이사도가) 검교상서 우복야가 되었다.

師古雖外奉朝命, 而嘗畜侵軼之謀, 招集亡命, 必厚養之, 其得罪於朝而逃詣師古者, 因卽用之. 其有任使于外者,皆留其妻子, 或謀歸款於朝, 事洩, 族其家, 衆畏死而不敢異圖. 

이사고가 비록 겉으로는 조정을 명을 따랐지만 일찍부터 침략할 마음을 갖고 망명자들을 불러들여 후하게 대접하였다. 조정에 죄를 짓고 사고에게 달아나는 자는 받아들여 썼다.

東軍諸道行營節度擒逆賊將夏侯澄等共四十七人, 詔曰: 「附麗兇黨, 拒抗王師, 처음에 동군제도행영절도(東軍諸道行營節度)가 역적의 장수 하후징 등 47인을 사로잡았는데,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고려의 흉악한 무리에 붙어 왕사(王師)에 맞섰으니


다음은 그의 삶에 대한 대략적인 개관을, 인용하여 적어본다.  

1.고구려의 유민 이회옥 

영주에 남은 유민들의 후손 가운데 이회옥()이 있었다. 그는 732년에 태어나 당나라의 군인으로 성장했다. 당나라는 여러 종족()들을 끌어들여 군인으로 복무하게 했다. 이들 가운데 안녹산과 같이 군인으로 출세해 절도사(使)가 된 이들도 있었다. 고구려 유민들이 당나라에서 출세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은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2.이회옥의 등장

755년 당나라를 뒤흔든 안녹산 반란사건이 일어나자, 반란군 토벌군이 구성되었다. 이회옥도 영주를 근거지로 한 평로군()의 비장()으로 고모의 아들인 후희일()과 함께 토벌군으로 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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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외종사촌인 후희일을 절도사로 추대

758년 평로군 절도사 왕현지가 병으로 죽자, 당나라 정부에서는 그의 아들에게 절도사 직위를 세습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이회옥은 왕현지의 아들을 죽이고 후희일을 평로군사()로 추대했다. 후희일이 이끈 평로군은 순탄하지 않았다. 안녹산의 군대와, 북방 해족()의 침공을 받고 있었고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지원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평로군에는 다수의 고구려 유민 출신이 있었는데, 이들이 그의 힘의 바탕이 되었다. 761년 후희일과 함께 2만 명을 지휘하여 발해만을 건너 산동반도 등주()로 상륙했다. 당 조정은 후희일에게 치주(), 청주() 등 6개주를 관장하게 하고, 평로치청절도사의 관직을 주었다. 그는 후희일을 돕는 부장()이었다.

그는 안녹산의 잔당인 사조의() 군대를 토벌하기 위해 여러 차례 전투를 했다. 이때 당나라 토벌군과 함께 작전도 하게 되는데, 이때 가장 뛰어난 군대가 위구르 출신 군대였다. 위구르 출신 장군 하나가 자신의 전공과 힘을 앞세워 포악하게 날뛰어 다른 절도사들까지도 제어를 못하는 일이 생겼다. 이를 보다 못한 이회옥은 그를 격투 끝에 제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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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 장수는 오줌을 질질 싸고 말았다. 이로 인해 병사들의 웃음꺼리가 되자 다시는 난폭한 행동을 못했다. 이 사건으로 토벌군의 병사들은 이회옥을 추종하게 되었다. 건강한 신체와 담대한 용기와 힘은 그가 군대에서 출세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4.부하들의 추천에 의한 이희옥의 절도사 추대 

그런데 후희일이 차츰 정치에 태만하고, 불사 건축 등에 힘써 치청 일대의 경제가 흔들리게 되었다. 이 무렵 평로치청군 내부에서 이회옥의 인기가 계속 올라갔다. 후희일은 이를 시기하여 그를 부장() 직위에서 해임한다. 하지만 군사들은 이 조치에 불만을 품고 후희일을 쫓아내고 765년 그를 절도사로 추대했다. 안녹산과 사조의 반란 이후 당나라는 각 지역의 절도사를 통제할 힘을 크게 잃고 있었다. 이회옥은 당의 임명이 아니라, 부하들의 추대로 절도사가 되었다. 

5.당나라의가 '정기'라는 이름을 하사함

그러자 당나라는 그에게 평로치청절도관찰사,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使), 검교공부상서 겸 어사대부, 청주자사로 임명하고, 정기()라는 이름을 주었다. 이때부터 그는 이정기라고 불렸다. 당나라는 이정기가 절도사가 된 것을 승인하면서, 이와 같은 사후 조치를 취한 것이다.

당나라가 그에게 준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는 바다를 통해 이루어지는 발해와 신라의 외교 및 교역 업무를 당담하는 직책이다. 그가 차지한 산동반도 일대는 발해, 신라가 당나라와 교역하는 최단거리에 위치해있어, 발해와 신라로부터 오는 물자가 모이는 요충지다. 이정기는 발해와 신라와의 교역을 토대로 크게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정기는 차츰 산동일대를 복속시켜 치(), 청(), 제(), 해(), 등(), 래(), 기(), 밀(), 덕(), 체() 10주를 확보했다. 775년에는 이웃한 이영요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 참여하여, 당나라 최대 요충지인 서주()를 비롯한 조(), 박(), 예(), 운() 5주를 더 얻어 15개주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절도사들이 7~9주 땅과 , 5만~9만 군사를 거느린 것에 비해 그는 10만이 넘는 군사력, 한반도에 버금가는 면적, 인구 540만(84만 호)을 달하는 사실상 독립된 왕국의 임금이었다. 큰 영토를 가진 당나라 최대의 강력한 번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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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진은 당나라 시대에 절도사를 최고권력자로 한 지방지배체제다. 절도사는 특정 지역에 치소를 두고, 그 관할 하에 지역의 군사, 재정, 행정, 사법 등의 모든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번진의 절도사들은 차츰 자립의 움직임을 보였고,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를 위협하기도 했다. 번진의 절도사들은 차츰 절도사 지위를 세습하면서, 번진 영내에서 거둔 세금을 당나라에 바치는 상공()을 하지 않으면서 자립하고자 했다. 이정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정기의 힘은 단순히 영토와 군사력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가 다스린 산동지역은 당나라 전체 소금 생산량의 절반에 차지하는 거대한 염전이 조성되어 있었다. 또 당나라 곡물 생산량의 10%를 차지할 만큼 비옥한 농토가 있었다. 또한 발해 및 신라와의 무역의 이익도 누리고 있었다. 이정기는 법을 엄정하게 하고, 백성들의 세금을 균등하고 가볍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지지도 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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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정기와 당과의 대립(낙양공격과 대운하 장악)

강력한 경제력과 함께 강한 군사력을 가진 이정기의 치청 번진을 당나라도 차츰 두려워하여 번진 억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정기도 당나라에 대항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구당서 ‘이보신’ 열전에는 절도사 이보신과 이정기를 두 황제로 일컫는 기록이 보인다. 이정기가 대륙을 통치하는 천자()의 야심이 있거나, 황제의 위상을 가질 만큼 권력이 강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79년 이정기는 치청의 수도를 청주에서 당나라 수도 장안과 가까운 운주로 옮겼다. 운주로 수도를 옮긴 것은 당나라 수도 장안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당과 치청은 781년 전쟁을 하게 된다. 전쟁은 781년 성덕절도사 이보신이 죽자, 당나라 덕종()이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의 절도사 세습을 인정하지 않은 사건에서 비롯했다. 이보신은 이정기의 아들 이납의 장인이었다. 이정기는 이보신 등 절도사와 동맹관계에 맺고 있었다. 따라서 이정기는 당나라가 성덕 번진을 제압할 경우 치청 역시 무사할 수 없기 때문에, 이유악의 절도사 세습을 인정하라고 당나라에 압박을 가한 것이다. 이정기는 자신의 지위를 이납에게 물려주려고 계획했다. 따라서 당나라의 번진 억압책에는 당연히 반대해야 했다. 반면 당나라는 황제의 인사권에 대해 절도사가 반기를 든 것이므로, 이를 반란으로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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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기는 10만 대군으로 당나라와 전투를 벌여 강회()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용교(), 와구() 등 대운하가 지나는 길목마저 점령했다. 당시 당나라는 양자강 유역에서 거둔 세금을 대운하를 통해 황하 유역에 위치한 장안으로 옮겼다. 따라서 대운하가 막히면, 당나라 중앙정부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정기는 당나라의 목덜미를 쥔 셈이 되었다. 대운하를 손에 쥔 이정기는 당나라 수도 장안을 향한 공격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해 여름, 이정기가 악성종양으로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리 길지 않은 49년간의 생애였지만, 그는 독립된 왕국을 만들어냈고, 그가 만든 왕국은 더욱 번영했다.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이납이 지위를 계승했다. 

7.이정기 사후, 아들 이납의 제나라 건국

당나라가 이납의 지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자, 이납은 당나라를 향한 공격을 계속하게 되었다. 782년 11월 이납은 국호를 제()라 칭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문무백관을 임명, 온전한 국가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이때 다른 번진들 가운데 기왕(), 위왕(), 조왕()을 칭하는 자들이 등장했다. 여러 번진이 당나라에 대항하자, 당나라 덕종은 이들이 당에 반기를 한 것을 사면해주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당나라로부터 번진의 독립성을 인정받자, 이납 등은 왕호를 철회하고 당나라와 전쟁을 일단 끝냈다.

8.치청왕국의 발전과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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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를 철회한 것은, 당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기 위함이다. 당나라로부터 독립된 정권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당나라를 멸망시킬 욕심이 없는 한 굳이 전쟁을 할 필요성도 줄어든 것이다. 이정기에서 이납으로 권력이 계승되고, 이납이 792년에 죽자 그의 아들 이사고()가 뒤를 이었다. 806년 이사고가 죽자, 이복동생 이사도()가 계승했다. 819년 이사도가 피살되어 제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765년부터 4대 55년간 이정기의 자손들은 권력을 세습하는 독립된 국가를 이룩했던 것이다. 이정기는 당나라가 시행한 절도사에 의한 지방통치 제도의 가장 큰 수혜자였다. 그는 번진의 힘을 키워 당나라로부터 독립된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당나라의 절도사였다. 하지만 그가 다스린 지역은 그가 전쟁을 통해 확보한 것이며, 당나라로부터 위임받아 다스린 땅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당나라의 통치를 거부했다. 당나라가 그의 왕국을 위협할 때, 이정기와 그의 자손들은 전쟁도 마다하지 않고 맞섰다. 대운하의 통행을 막거나, 당나라 창고를 불사르거나, 번진의 억압 정책을 펼친 자들을 암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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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기와 그의 자손들은 그들의 왕국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당나라와의 관계를 조율했다. 이정기 왕국이 존속하던 시기 발해는 54회에 걸쳐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고 이들은 대부분 이정기의 평로 번진을 경유했다. 반면 779년 이정기가 당나라에 맞서기 시작한 이후부터 814년까지 신라는 겨우 7회 당나라와 사신왕래를 한다. 819년 당나라가 이사도를 공격할 때에 신라가 3만 명이 원군을 보낸 것은 이정기 왕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탓도 이유가 될 것이다. 이것은 이정기가 고구려 유민출신인 탓도 없지는 않겠지만, 발해로부터 많은 말을 구입해야 했던 이정기 왕국의 현실적 욕구 탓도 있다. 이정기 왕국은 당나라와 전쟁에 대비해 매년 발해의 명마를 거래했다. 발해와는 활발한 무역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정기 왕국은 발해와 연합하거나, 또는 당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부흥시키려는 의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이지는 못했다. 그의 왕국 구성원에서 차지하는 고구려 유민의 숫자가 많지 않았고, 현실적으로 치청 외 다른 번진들의 존재 탓에 이정기 왕국의 행동에는 제한이 많았던 탓이라고 하겠다.

그는 고선지와 더불어 고구려 유민들 가운데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고선지가 당나라의 충실한 장군으로 생애를 마친 것에 비해, 그는 당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난 독립된 나라를 건설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될 수 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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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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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2 18-04-07 02:57
   
775년 이보신과 함께 위박절도사 전승사의 군대를 물리치고 덕주를 손에 넣은 뒤, 이듬해에는 전승사를 사로잡으면서 2개 주를 다시 손에 넣었다. 전승사를 사로잡은 공으로 이정기는 검교상서우복야를 거쳐 요양군왕(堯陽郡王)에 봉해진 뒤, 다시 검교사공과 동중서문하평장사에 올랐다.

이것은 아마도 하남이나 다른 지역이 소요에 빠졌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번진은 당시 여러 번진 중에서 최대로 강성했으며, 중앙정부에 대해서는 거의 독립적인 태도를 취했다.

781년 이보신이 숨을 거둔 뒤에는 덕종이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에게 절도사 자시를 세습하지 않자, 이유악 · 양숭의 · 전열 등과 함께 산둥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정기는 자신이 관할하던 15개 주에서 얻은 막대한 부와 1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바탕으로 당군과 맞서, 강회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같은 해 숨을 거두는 바람에 낙양을 함락시키지는 못하였다.
도배시러 18-04-07 04:06
   
自安、史以後,迄至於貞元,朝廷多務優容,每聞擅襲,因而授之,以故六十余年,兩河號為反側之俗。구당서 李正己
反側之俗 풍속이 다르다
history2 18-04-07 09:33
   
너무 죄송해요...전문을 다 보았는데 풍속이 다르다는 기사는 어디에 있고 의미가 무슨 뜻 일까요? 이정기 개인의 풍속에 관한 건지 치청청국에 관한 건지 궁금합니다.
지수신 18-04-10 04:10
   
한국사에는 포함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민족사에는 포함될 수 있습니다.
6시내고환 18-04-12 23:53
   
고선지는 위인전도 있던대 차라리 이정기의 위인전이 있는게 맞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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