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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4-08 10:05
[한국사]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글쓴이 : 스리랑
조회 : 1,945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2-대무신왕


-후한 광무제가 다시 낙랑을 빼앗아 한군현으로 삼다 ( 44년 09월(음) )-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 取其地爲郡·縣, 薩水已南屬漢.

"한 광무제가 낙랑을  빼앗어 군현을 설치했다. 살수 이남의 땅은 한에 속하게 되었다."


살수가 한반도에 있다면 한반도 남쪽에 한나라가 있었다는  웃기는 얘기가 됩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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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8-04-08 10:19
   
스리랑님도 저와 같은 착각을 하고 계신 듯 합니다
원문에는 '다시'라는 부사어가 없습니다

저도 몇 년 동안 다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
분명 잘못된 어떤 국역의 영향인 듯 하나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네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7년(서기 44)
27년(서기 44)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병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서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 爲郡縣 薩水已南屬漢
감방친구 18-04-08 10:24
   
낙랑국과 낙랑군, 그리고 44 년 조의 이해

1. 낙랑국 세력이 고구려로부터 독립하고자 자청하여 한나라에 귀속을 하였고

2. 비록 낙랑국의 선택이 자립자존을 위한 방편적 선택이었다 할지라도 고구려 본기에 '살수 이남이 한나라 차지가 되었다'라고 돼 있는 것에 보듯이 고구려는 그곳을 한나라 땅이 됐다고 인식을 하고 있고

3. 그러나 대무신왕 정벌 이후 낙랑유민이 신라로 망명했다1)는 것과 맥국2)이 등장하는 것, 화려ㆍ불내3)가 등장하는 것, 신라를 괴롭히는 존재가 낙랑ㆍ말갈에서 백제ㆍ말갈로 교체된 것4), 그리고 그밖에는 이후로 낙랑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 것

4. 그리고 백제사에서는 이보다 36년 일찍 낙랑이 사라지고1) 245년 후에 낙랑군과 대방국 (군국)이 등장하는 건2) 에서 관찰되는 바

5. 기존의 낙랑국이 고구려 정벌을 전후하여 그 위세가 급격히 약화되었다는 것을 추측케 한다

6. 이후의 한나라 속방으로서의 낙랑국은 한나라와 한반도 국가 및 제 집단을 이어주는 경제ㆍ문화의 중개자 역할을 하였다 보여진다

7. 요동의 우리 조상들은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하여 이미현도군을 한 요동군 지역으로 몰아붙여 기존의 현도군 지역을 차지 했으며 요심의 동남, 동, 동북 지역을 회복하여 이러한 태세에서 고구려가 건국되었고 또 백제가 뒤를 이어 요동반도 태자하 이남에 자리를 잡았으며

8. 고구려는 서기 1세기부터 지금의 요하 동서의 땅을 두고 한나라, 공손씨, 위, 모용선비 등과 경쟁하였으며

9. 태조대왕의 요서 10성에서 보이듯 빼앗고 뺏기는 생동활활한 각축이 벌어졌으며

10. 후한서, 위서, 태강, 진서 지리지에서 나타나 듯이 중국계 왕조의 현 요서, 요동지역의 군현은 위축, 교치되어 3세기 중후반에 이르면 만리장성 안팎으로 물러간다

11. 246 년 고이왕 대에 245년의 침묵을 깨고 백제의 동쪽에 등장하는 위ㆍ진의 호동이교위 소속의 반독립 세력인 군국으로서의 낙랑, 대방 등은 고구려가 양평일대를 제외한 요동의 대부분을 차지한 상황에서 기존의 위치가 아니라 요서지역으로 교치, 축소된 것으로서의 낙랑, 대방이며 요서의 주인이 공손씨, 위, 진, 모용씨 등으로 엎치락뒤치락 하는 근 100 년 사이 어느 시간의 지점에 힘의 대립이 현 요하에 집중된 상황에서 백제가 현 난하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에 거점을 마련했다 추정이 가능하나

12. 어떤 숨은그림으로 백제가 3세기 요서의 판도에 끼어있는지 찾아야 할 것이다

13. 또 1세기~3세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현서북한 지역의 낙랑국은 중국계 정권에의 예속력을 상실하고 문화ㆍ경제의 터미널 역할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고구려에 동화되었다 판단된다

14. 또 요서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족계 이주자들을 다수 받아들였으리라 추정 가능하다

15. 3세기 관구검의 침입은 고구려가 서안평을 공격하여 야기된 것인데 서안평은 현 요하 동안에 있다가 서안으로 교치되었다

16. 백제와 고구려의 군사적 충돌의 그 처음은 4세기이다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63937&sca=&sfl=mb_id%2C1&stx=cellmate&page=6
감방친구 18-04-08 11:15
   
그리고
다른 시차의 개입을 고려해야 합니다

즉 44 년 기사는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 등의 기사를 근거로 삽입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습니다
     
스리랑 18-04-08 12:17
   
네, 말씀 감사합니다.

한사군의 명칭은 사마천의 『사기』본문에는 없고 약 2백여 년 후에 편찬된『 한서漢書「』무제본기武帝本紀」에 비로소 나옵니다.

조선에서 우거왕右渠王의 목을 베고 항복하니 그 땅을 낙랑·임둔·현도·진번군으로 삼았다[朝鮮, 斬其王右渠降. 以其地爲樂浪·臨屯·玄?·眞番郡].

그러면서도『 한서「』오행지五行志」에는 ‘원봉元封 6년(BCE 105)조’에 “이전에 두 장군이 조선을 정벌하고 삼군三郡을 열었다[先是, 兩將軍征朝鮮, 開三郡].”라고 하여 3군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기』와『 한서』의 기록이 2군郡과 3군郡, 4군郡 사이를 오가는 것입니다. 한사군에 대해 두 사서가 내용이 다릅니다.





우거를 멸한 후 북부여를 침공한(BCE 107년) 한나라의 군대를 물리친 조선족 항쟁과정은 『북부여기』에서 잘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때 구국의 영웅으로 등장한 인물이 47세 고열가단군의 후손으로 고리국?離國 출신 의병장인 고두막한高豆莫汗이었습니다.


재위 13년 계유(BCE 108)년에 한漢나라 유철劉徹(무제)이 평나平那를 침범하여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4군四郡을 설치하려고 군대를 크게 일으켜 사방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고두막한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이르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을 격파하였다.

이때 유민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전쟁을 지원하니 군세를 크게 떨쳤다[癸酉十三年, 漢劉徹寇平那滅右渠. 仍欲易置四郡, 盛以兵四侵. 於是高豆莫汗倡義起兵, 所至連破漢寇. 遺民四應以助戰 軍報大振.] 「( 북부여기」) .




한나라 침략군을 물리친 고두막한은 민심을 얻어 큰 세력을 얻게 되었다. 이에 종래의 북부여 황실을 압박하여 가섭원 땅으로 밀어내고 스스로 북부여의 단군 제위에 올라 동명제東明帝라고 하였다. 이것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동부여의 개국비화입니다.



중국 사서에서는 북부여와의 전쟁과정은 하나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북부여와의 전쟁 사실을 의도적으로 말살하여 기록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위만정권을 멸한 한나라가 마치 고조선 전체를 정복한 것처럼 꾸미고 뒤이어 북부여에게 패한 것을 숨기고자 하는 역사 왜곡 음모입니다.
          
스리랑 18-04-08 12:18
   
한사군 문제의 초점은 한사군의 위치 문제입니다. 이를 규명하는 열쇠는 한漢 군현郡縣 설치의 출발점이자 위만정권의 도읍지 왕험성이 있었다는 낙랑의 위치를 찾는 데 있습니다.

현재 주류학계의 정설로 간주되어온 낙랑군 대동강설(재평양설在平壤說)은 이에 반론을 제기해온 여러 학자들의 문헌고찰을 통해 많은 모순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낙랑과 평양의 위치를 먼저『 후한서』「 동이열전」을 보면 111년에 부여가 낙랑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안제安帝 영초永初 5년(111)에 부여왕이 처음으로 보병과 기병 7~8천 명을 이끌고 낙랑을 쳐서 관리와 백성들을 살상하였다[帝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樂浪, 殺傷吏民『](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조).



기존의 주장대로 한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이라고 가정한다면 만주 송화강 유역에 위치한 부여(동부여)가 남쪽으로 진격하여 고구려의 수천 리 영토를 아무 제지도 안 받고 그대로 통과했다는 말이 되며, 개선할 때도 역시 무사통과했다는 말인데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 11세 태왕인 동천열제東天烈帝(227~248)는 246년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입으로 도읍이 폐허가 되자 이듬해 환도성에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합니다(247).


봄 2월에 왕은 환도성이 난을 겪어 다시 도읍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고구려는 장수왕 때 지금의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는데 이 기록은 고대의 평양이 여러 곳에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주류사학계의 주장처럼 이때의 평양이 지금의 평양(평양=낙랑군)이라면 고구려가 수도를 적국의 땅인 낙랑군으로 옮겼다는 말이 되므로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류사학계에서는 여전히 지금의 평양이 한사군 낙랑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스리랑 18-04-08 12:20
   
대동강 부근의 낙랑국이 고구려에게 복속된 것은 CE 37년이었습니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왕망王莽의 신新나라가 멸망하고 한 고조 유방의 후손인 유수劉秀(광무제光武帝, 재위 25∼57)가 후한後漢을 건국했는데, CE 44년 광무제는 바다를 건너 낙랑 지역을 공격하게 됩니다.



고구려 대무신왕 27년(44) 가을 9월에 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땅을 군·현으로 만들었으므로 살수 이남은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二十七年秋九月 漢光武帝, 遣兵渡海伐樂浪, 取其之爲郡縣, 薩水已南屬漢]『(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



이것을 기존 학계에서는 고구려가 빼앗은 낙랑군을 광무제가 다시 빼앗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광무제 때 지금의 난하 유역에는 이미 낙랑군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것은 고구려에 멸망한 낙랑국의 잔여 지역을 점령한 것입니다. 다음의 『태백일사』 기록에서처럼 낙랑국 유민들은 고구려에 계속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대무신열제 20년(37) 열제께서 낙랑국을 기습하여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동압록(압록강) 이남이 우리에게 속하였으나, 다만 해성 이남의 바다 가까이 있는 여러 성은 아직 항복시키지 못했다[大武神列帝二十年, 帝襲樂浪國, 滅之. 東鴨綠以南, 屬我, 獨海城以南近海諸城, 未下『](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해성은 지금의 요동반도 북부에 있습니다. 당시 해성이남인 요동반도까지도 최씨낙랑국의 기본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태백일사의 내용을 종합하면 광무제가 공격한 낙랑은 해성 이남 지역입니다.‘
                    
스리랑 18-04-08 12:22
   
살수2) 이남’의 기록에서 살수는 요동의 주남하를 말합니다.

후한 광무제가 대동강 주변에 군현을 설치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범위와 기간은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삼국사기에서 당시 신라가 한반도 북부의 낙랑을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이라 일관되게 지칭한 사실과, 낙랑 멸망 후 그 유민이 중국이 아니라 신라에 귀부한 사실만 봐도 넉넉히 입증됩니다.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일제는 우리 고대사를 말살하여 역사무대를 한반도로 규정하고 우리 역사의 시작이 고조선을 침탈한 위만정권부터라고 하였습니다. 또 위만정권이 한 무제에 의해 멸망당하고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이 들어서면서 중국의 식민통치와 문화의 영향을 받아 우리 고대사가 시작된 것으로 조작하였습니다.





광복 후에도 조선사편수회에서 부일했던 이병도와 그 후학들은 지금도 일제 식민사학이 만들어 놓은 잘못된 한국사 틀을 정설로 고수하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또한 위만정권과 한사군으로 인해 우리 문화가 발전했다고 주장합니다.



한국사는 반도의 태반을 한족漢族에게 빼앗김으로써 상고上古에 있어서 외래족에게 굴복하는 선례를 남겼다.(이병도, 『한국사대관』)



한국사는 아시아 대륙의 한 끝에 붙어있는 조그만 한반도의 역사다.( 이기백, 『한국사신론』)


대동강변에 설치된 한사군은 원시적 국가형태로 볼 것이나 한韓민족은 한漢나라의 식민지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는 변칙적인 과정을 밟았다.(김철준·한우근, 『한국사개론』)
                         
스리랑 18-04-08 12:22
   
근래에 와서 고조선의 위치가 처음에 요동에 있다가 한반도로 이동했다는 설을 내놓기는 했으나 핵심은 바뀐 게 없습니다. 한사군은 여전히 대동강 유역에서 수백 년간 존재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한사군은 사마천이 생존해 있을 당시에 모두 설치된 것이 아니라 일부가 후대가 설치된 것이라 봐야 합니다. 설사 당시에 설치되었다 하더라도 그 위치는 한반도 북부가 아닌 지금의 하북성과 요서 지역이었습니다.



문헌 연구만 제대로 해도 한사군이란 것이 한반도 내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국내 주류사학계는 일제 식민사학을 그대로 추종하여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에 다 갖다놔 버렸습니다. 신채호 선생 말대로‘ 귀신도 하지 못하는 땅 떠서 옮기는 재주’를 부린 것입니다.




최리의 낙랑국『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에서,
여름 4월에 왕자 호동好童은 옥저지방을 유람하고 있었는데, 낙랑왕 최리崔理가 그 곳에 출행하여 그를 보고 묻기를,‘ 그대의 안색을 보니 보통사람은 아닌 듯한데 혹시 북쪽의 나라 신왕神王(대무신열제)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는


드디어 그를 데리고 돌아와 딸로써 그의 처를 삼도록 하였다.(『삼국사기』라고 한 기록에서 군郡을 다스리는‘ 낙랑태수樂浪太守’라는 한나라 지방 관리의 호칭이 아니라 국國을 다스리는 ‘낙랑왕樂浪王’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만약 이때의 낙랑이 낙랑군이라면 ‘태수太守’라는 호칭을 써야합니다. 이것은 대동강 유역이 한漢나라 군현인 낙랑군 지역이 아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삼국사기』에는 신라 남해 차차웅 원년(CE 3)에 낙랑의 군사가 신라 도성인 금성金城을 포위했는데, 여기서 낙랑을 일컬어 낙랑군이라 하지 않고‘ 이웃나라(隣國)’라 부르고 있습니다.



백제 책계왕조에는 대방의 통치자를‘ 대방의 왕[帶方王]’이라고 한 기록이 보이며, 또 신라 기림이사금 3년에 낙랑과 대방 양국兩國이 귀복했다고 했는데 여기서도 낙랑과 대방을 국가로 보고 있습니다. 만일 이들이 중국 세력이었다면 중국으로 돌아가야지 신라에 귀복했을리 만무한 것입니다.



난하에서 건너온 최숭 대동강 부근에 있었던 낙랑국은『 북부여기』에 따르면 BCE 195년에 낙랑왕 최숭이 난하 유역에서 현재의 대동강으로 이주했다고 했는데 바로 이기록에 주목해야 합니다.
스리랑 18-04-08 12:29
   
임신 원년(BCE 169) 정월 낙랑왕 최숭崔崇이 해성에서 곡식 300석을 바쳤다. 이보다 먼저 최숭은 낙랑산에서 진귀한 보물을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에 이르러 왕검성에 도읍하였다.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BCE 195)년 겨울이었다.(북부여기)



즉『 삼국사기』에 기록된 낙랑왕 최리는 최숭의 후손이었던 것입니다. 최숭이 마한 왕검성(지금의 평양)으로 오기 전 난하 유역에 원래 낙랑이 있었습니다. 최숭이 대동강 부근에 와서 자신의 고향 이름을 따서 나라이름을 낙랑국으로 삼았습니다. 난하?河지역에는 낙랑이라는 지명이 그대로 남은 것입니다.


그 당대의 기록인『 회남자淮南子』의 주석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 곳에 조선·낙랑현이 있다고 하였는데 갈석산은 현재도 하북성 창려현에 그대로 있습니다. 갈석산은 연나라 장성의 동쪽 끝인 양평 부근이요,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의 끝이다. 따라서 한무제가 설치했다는 낙랑군은 대동강이 아니라 난하 하류의 갈석산 부근이었습니다.
     
스리랑 18-04-08 12:31
   
한국 주류사학계에서 대동강 일대를 낙랑군으로 보는 유력한 근거는 평양지역에서 출토된 유적과 유물입니다. 이 지역 무덤들은 나무곽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 세 가지로 다른 지역 무덤과 형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 학자들에 의하면 광복 이후 평양 일대의 무덤 3,000여기를 발굴 조사한 결과 나무곽무덤은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한漢나라가 출현하기 훨씬 전인 BCE 3세기 이전에 지배적인 무덤형태였으며, 귀틀무덤을 거쳐 벽돌무덤으로 발전하고 3세기 중엽부터 고구려 무덤형식인 돌칸흙무덤으로 전환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출토된 유물은 한나라 것과 다른 고조선의 대표적인 무기인 좁은 놋단검(세형동검)을 비롯해 조립식 쇠단검, 조립식 쇠장검, 질그릇과 마구 등입니다. 그렇다면 대동강 유역에서 발굴되는 중국계 유물들을 잘 살펴보면 전한시대의 유물은 보이지 않고 약 2백년 뒤의 후한시대 또는 그 이후의 유물들만이 출토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스리랑 18-04-08 12:34
   
후한 시대의 유물들 대동강 유역에서는〈 점제평산군신사비○蟬平山郡神祠碑〉가 발굴되었는데“ ○和二年四月戊午, ?蟬長勃興”으로 시작됩니다. 첫 자는 읽을 수가 없으나 두 번째 和자가 들어간 중국 연호 가운데 가장 빠른 것은 후한後漢 장제章帝시대로서 CE 85년입니다.


문제는 낙랑군의 속현 가운데 하나인 점제?蟬현이 있는데 이 비석이 발굴된 지역은 낙랑군 점제현이 틀림없다고 발굴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출토 유물 가운데 연대가 확인되는 것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192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발굴한 대동강 유역의 제1호 고분에서 출토된 화천貨泉인데, 화천은 왕망王莽 때 주조된 청동제 화폐입니다.



왕망은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황후皇后 일족이었다가 황위를 빼앗아 신新을 건국(CE 8)하였지만, 불과 15년 만(CE 23)에 망했습니다. 그런데 이 화폐가 한반도에 유입되어 통용되다가 무덤에 들어가기까지의 시간을 고려하면,


전한의 무제가 우거정권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BCE 108년 무렵의 유물이 아니라 왕망의 신新나라를 무너뜨리고 후한後漢을 세운(CE 25) 광무제 이후 유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리랑 18-04-08 12:37
   
위조된 봉니 출토되어 보고된 유물 가운데에는 위조품도 있었습니다. 낙랑유물이라고 주장하는 것 중에서 봉니封泥는 일제가 위조한 대표적 유물로 봅니다.



봉니는 문서를 운송하는 도중에 남이 보거나 위조하지 못하도록 죽간竹簡을 묶은 노끈 매듭에 진흙을 발라 도장을 찍은 것으로 그 서체나 모양도 다양합니다. 그리고 봉니는 보내는 곳이 아닌 받는 곳인 낙랑군 지역 외에서 발견돼야하며, 문서를 보려면 봉니를 깨트려야 내용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것은 드문니다.



그런데 낙랑 봉니라는 것들은 대부분 형체도 온전하고 서체나 형태도 거의 흡사합니다.

더구나 낙랑군 치소였다는 토성 터에서 받는 곳인 관할 현에 있어야 할 봉니가 200여 개나 무더기로 발견되었는데 한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수가 발견된 예는 없습니다. 그러한 봉니가 광복 후 북한이 발굴하는 과정에서는 하나도 나오지 않아 일제의 봉니 위조설은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다른 군으로부터 받은 봉니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죽하면 한 일본인 역사학자는 위조한‘ 봉니封泥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으로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부터 거액을 보상금으로 받았는데, 조선사 왜곡에 앞장섰던 이마니시 류今西龍마저 그것은 위조라고 반발할 정도였습니다.
영종햇살 18-04-08 13:22
   
본문의 내용은 살수 이남의 땅이 한나라 땅이되었다는 기록이고,
그래서 살수는 한반도에 있는 강이 아니라는 사실과
고구려의 남쪽이 한나라와 경계였다는 사실입니다.
낙랑군이던 낙랑국이던 그건 별개의 문제고 살수는 한반도에 없었다는
기록입니다.
도배시러 18-04-08 14:10
   
거듭 지적하지만
44년 삼국사기의 기록과 후한서의 기록은 전혀 다릅니다.
후한서는 그해 가을 낙랑군의 행정업무가 정상운영되었다고 기록합니다.
[광무제가 낙랑을 정벌할 이유는 없던 상황입니다. 낙랑군의 운영이 파행이라면 정벌해야죠 ? ]

여기서 낙랑군외에 낙랑국國의 추정이 나올수있는 부분입니다.
도배시러 18-04-08 14:22
   
三國志 卷11 魏書11 袁張涼國田王邴管傳 第十一 원장량국전왕병관전, 전주(田疇)편
과거 북평군의 치소가 평강(平岡)에 있었는데 길이 노룡(盧龍 고죽, 비여)을 지나 요서군의 유성(柳城)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광무제의 건무(建武 A.D 25~56) 연간 이래 도로가 파괴되어 통행이 끊긴 지
이미 200년 가까이 되어 오직 작은 길로 통행이 가능할 뿐입니다.
적들은 지금 우리 대군이 응당 무종현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결국 전진할 길이 없어 철군할 것으로 알고
별다른 방비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은밀히 노룡의 입구에서 백단(白檀)의 험한 길을 따라가면
적들이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은 지역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길이 오히려 가깝기도 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하여 기습공격을 가하면
답돈(오환족의 선우)은 가히 싸우지 않고도 생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종햇살 18-04-08 15:05
   
後漢書 서기 44년 기록
卷一下‧光武帝紀第一下
二十年 秋,東夷韓國人率衆詣樂浪內附。동이한국인 솔중 예낙랑 내부.
동이 한국인이 무리를 이끌고 낙랑에 도착하여 내부하였다.
(내부하다~적 또는 외부와 남몰래 통하다. 한나라가 다른 나라 안으로 들어가 붙음)
지수신 18-04-10 02:33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였다고 했지
살수 이남이 모두 한나라라고 하지도 않았고
살수 이남에 한나라의 중심지가 있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시'가 아니라는것도 매우 중요한데
감방친구 님께서 자세히 설명하셨으므로 생략합니다.

역사 기록을 대충, 그것도 자기 멋대로 비틀어 읽으면 안 됩니다.
그러잖아도 왜곡된 기록입니다.
왜곡 이전의 진상을 찾으려는 자는 역사가이고
왜곡 위에 왜곡을 덧붙이는 자는 선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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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5 [한국사] 한국,일본은 전혀다른 유전자 금성신라 09-18 1540
19764 [한국사] 제3차 여몽동맹(한몽동맹) 진행중 ㄷㄷㄷ 금성신라 09-18 1166
19763 [한국사] 마광팔, 디씨로 돌아왔네요 (2) doprsr 09-15 992
19762 [한국사] 대고조선제국(大古朝鮮濟國) 다큐 아비바스 09-05 1312
19761 [한국사] 기황후, 천추태후 이런 사극들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 천의무봉 09-03 1240
19760 [한국사] 대고구려제국(大高句麗帝國) 다큐 아비바스 09-03 1182
19759 [한국사] 고대 한국인, 예맥제국(濊貊帝國) (1) 아비바스 09-02 1303
19758 [한국사] 알려지지 않은 고조선(古朝鮮) 설들 아비바스 09-02 961
19757 [한국사] 역사 매국부역에 지분 태우지 말라 (1) 금성신라 08-23 1377
19756 [한국사] 태극기 민족 티벳 (충격) (6) 금성신라 08-23 2534
19755 [한국사] 400년전 보도검열 실태 ㄷㄷ (1) 금성신라 08-22 1406
19754 [한국사] 공험진을 반박할수없게되자 학계에서 뿌리는 요상… (4) 금성신라 08-22 1335
19753 [한국사] 고려의 국경 동계는 잠수함 감시용 해안초소인가? (3) 금성신라 08-22 1143
19752 [한국사] 강화도에 10만 인구가 38년간 거주한 흔적이 있능가? (4) 금성신라 08-21 1306
19751 [한국사] 노걸대 실로 놀라운 발음기록 ㄷㄷ (1) 금성신라 08-21 1053
19750 [한국사] 붓다 사카무니의 씨족명, 국명 금성신라 08-21 945
19749 [한국사] 금나라는 신라다 (2) 금성신라 08-21 1266
19748 [기타]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증조부의 비석을 파헤친 후손 관심병자 08-18 971
19747 [기타] 북한군이 촬영한 한국전쟁 관심병자 08-17 1456
19746 [기타]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의 삶 관심병자 08-16 1125
19745 [기타] 세금 1억 들어간 춘향이 그림..여러분의 의견은 (4) 관심병자 08-03 2694
19744 [한국사] 미국 옥션에 나온 신라금관 Korisent 07-30 3429
19743 [기타] 무능했던 제국 그리고 시작된 관동군의 폭주(황고둔… (1) 관심병자 07-27 1644
19742 [기타] 칭기즈칸의 마음을 홀랑 빼앗은 고려 여인은 누구일… (7) 관심병자 07-27 2281
19741 [기타] 옛날 사람들도 봉급을 받았을까? 관심병자 07-24 1199
19740 [한국사] 동아게가 주의하고 싸워야할 점 (3) 하이시윤 07-18 1204
19739 [한국사] 서악 華山 이동과 馬邑山 즉 평양성 (2) 구르뫼 07-18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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