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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4-08 16:36
[한국사] 한일 함선비교 및 명량해전
 글쓴이 : history2
조회 : 3,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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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916일 전남 진도와 해남군 화원반도 사이에 있는 명량해협에서 13척의 조선 수군과 300여 척의 일본 수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일본 수군은 31척의 손실을 보고 물러났고 조선 수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명량해전은 절대적 열세에 놓여 있던 조선 수군이 10배나 되는 일본 수군을 격퇴한 전투였다.

15924월 조선을 침략한 일본은 20여 일 만인 53일에 한양에 입성하고, 6월 중순에는 평양까지 함락시켰다. 조선 육군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 육군의 전략전술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전쟁에 대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에 조선 수군은 고려 말 왜구와의 전투 이후 꾸준히 전력을 강화시켜 왔다. 강력한 화포를 개발하고 대형함선(艦船)인 판옥선(板屋船)을 건조하였다. 대형화포를 장착한 판옥선은 일본의 주력 전함인 세키부네(關船)에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판옥선은 1555년부터 건조되었는데, 함선 자체가 클뿐만 아니라 갑판을 2층 구조로 만들고 전투원을 2층에 배치함으로써 높은 위치에서 적을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공격할 수 있었다. 판옥선보다 훨씬 작은 세키부네에 타고 있던 일본 수군은 성벽과 같은 판옥선을 기어 올라와서 공격해야 했기 때문에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 수군의 주된 공격전술인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이 판옥선에는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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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벌어지기 12개월 전인 15912월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다. 이순신은 마치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상한 것처럼 전쟁에 대비하며 전력을 보강하고 훈련에 열중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옥포해전에서의 승리를 시작으로 적진포,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한산도, 안골포, 부산포 등지에서 연승하면서 해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지켰다. 조선 수군의 활약은 일본 육군의 활동도 크게 제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 수군이 남해안과 서해안으로 진출하여 육군과의 합동작전을 펼친다는 전략은 수군의 패배로 실행되지 못했다. 이로써 곡창인 전라도가 일본군의 침탈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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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택선은 속도가 빠르나, 연안에서 회전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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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옥선은 바닥이 평평해서, 연안의 암초가 많은지역에서 유리하다

 

일본 수군은 전력의 열세를 절감하면서 조선 수군과의 전투를 피하기 시작했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발견하는 즉시 도망치기에 바빴다. 한편으로 일본은 수군의 열세를 보완하기 위해 점령지역인 경상도 해안지역에 육군을 배치하였다. 일본 육군은 해안지역에 성을 쌓고 주둔하면서 지나가는 조선 수군의 배에 조총을 쏘는 등 위협을 가하고 육지에 정박하는 조선 수군을 공격하였다. 당시에는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아 연안을 따라 항해할 수밖에 없었고, 조선기술이 정교하지 않아 배가 표류하는 경우가 잦았으며, 물이나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배가 수시로 육지에 정박하여야 했기 때문에, 일본 육군이 주둔하고 있는 해안지역을 항해하는 것은 커다란 위험을 수반하였다. 15936월 이후 이순신은 한산도에 주둔하면서 일본 수군의 전라도 남해안 및 서해안 진출을 차단하는 방어전략에 주력하게 된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무리한 전투를 벌이는 것은 이순신의 전략전술에는 없었다. 이순신은 손자병법에서 이르는 바와 같이 승리를 확신한 후 전쟁에 돌입하였고 전쟁은 승리를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이순신의 전투에 대한 소극성으로 오해되어 파직되는 하나의 요인이 된다.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불신과 일본측의 간계로 이순신은 159721일 삼도수군통제사(15938월에 임명되었음)에서 파직되고 원균이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현장의 사정에 어두운 조정의 어리석은 판단이 조선 수군, 조선 전체를 위기에 빠뜨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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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택선과 세키부네 전단

 


수군 전력의 열세를 실감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159210월 대형전함인 아다케(安宅船)를 많이 건조하라고 명령하였다. 판옥선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것이었다. 새롭게 보강된 일본 수군은 1597716일에 벌어진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을 대파하였다. 이순신의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이다. 당시 조선 수군은 180여 척의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칠천량해전에서의 패배로 이를 대부분 잃고 말았다. 이제 조선 수군에는 배설(裵楔)이 이끌고 도망간 12척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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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부네: 속도가 빠르고, 대양항해에 유리하나, 암초가 많은 연안항해에는 불리하다

 

159783일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된 이순신은 배설이 지휘하던 12척의 배를 수습하였다. 조선 수군을 대파하고 남해안을 장악한 일본 수군은 서해로 진출하려고 하였다. 일본 수군이 서해를 통해 한강이나 임진강으로 진출하게 되면 일본 육군과의 합동작전이 가능해지고 병력 및 군수품 보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이는 곧 전황이 완전히 일본군 주도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조선의 사활이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미약한 수군을 해체하고 육군에 통합하여 함께 싸우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대해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이제 만약 수군을 모두 없애신다면 이는 도적들이 다행이라고 여기는 바이며, 이로 말미암아 호남의 바닷길을 따라 한강에 도달할 것이니 이것이 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라고 반대의견을 피력하여 관철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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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일본 수군의 동태를 파악하는 한편 회령포, 이진, 어란포, 장도, 진도의 벽파진, 전라우수영 등지로 진지를 옮기면서 전투에 유리한 지역을 탐색하였다. 일본 수군 역시 이순신의 동향을 파악하면서 서해안으로 진출하기 위해 서서히 접근해오고 있었다. 이순신은 마침내 명량해협의 좁은 물목을 이용하여 전투를 벌이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1597915일 일본 수군 55척이 명량해협에서 가까운 어란포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전라우수영(현재 해남군 문내면 소재)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당시 이순신은 13(후에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가져온 1척 추가)의 함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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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택선과 세키부네의 크기 비교

 

명량해협의 울돌목은 수로폭이 매우 좁다. 현재 기준으로 볼 때 썰물 때 180미터 정도, 밀물 때 320미터 정도로서 평균 250미터 정도 된다. 길이는 2킬로미터 정도 되고 최저수심은 1.9미터이다. 조류의 속도는 최대 11.5노트로 매우 빨라서 20리 밖에서도 물흐르는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울돌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게다가 수로 양쪽 해안에 암초가 많아 통과할 수 있는 배의 크기나 일시에 통과할 수 있는 배의 수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해협을 통과한 후에도 해역이 그다지 넓지 않아 많은 수의 배가 한꺼번에 움직이기 어려웠다. 수적으로 열세인 조선 수군에게는 최적의 장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57916일 오전 7시가 지나면서 일본 수군은 유리한 조류를 타고 명량해협을 통과하기 시작하였다. 예상대로 300여 척 가운데 세키부네를 주축으로 한 130여 척만이 해협을 통과하였다. 30 1의 전투가 이제 10 1의 전투로 유리하게 바뀌었다.

조선 수군은 해협 안쪽에서 일렬로 늘어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은 해협을 막 벗어난 지역이라 그다지 넓은 곳이 아니었다. 따라서 130여 척이 해협을 통과하였지만 막상 조선 수군과 직접 전투를 벌일 수 있는 것은 30여 척에 불과했다. 다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10 1의 전투를 3 1의 전투로 바꾼 것이다. 판옥선 1척이면 세키부네 3척 정도는 당해낼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의 전투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일렬종대로 늘어서서 선두의 몇 척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전술을 구사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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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옥선과 세키부네의 차이

 

전투는 오전 11시경에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조류의 흐름을 안고 싸우는 불리한 형세였다. 130여 척과 맞닥트린 조선 수군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순신의 대장선이 앞으로 치고나가는데도 뒤에서 머뭇거리며 공격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이순신은 머뭇거리는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金應咸)의 배를 가까이에 불러 돌격하지 않으면 군법에 따라 처형하겠다고 호통을 쳤다. 그제서야 안위 등은 적장 마다시(馬多時)가 탄 배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조류가 바뀌면서 조선 수군에게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안위 등이 마다시의 배를 공격하는 것을 지켜보던 이순신은 직접 가세하여 마다시의 배 후미를 공격하였다. 인근에 있던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鄭應斗)의 배까지 합세하자 순식간에 마다시의 배를 포함해서 적선 3척이 격파되었다. 물에 빠진 마다시의 시신은 끌어올려져 적들이 보는 앞에서 토막토막 잘라졌다. 이를 본 적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반면에 사기가 오른 조선 수군은 그 기세를 몰아 적선 31척을 격파하였다. 일본 수군은 물러났고 조선 수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이순신은 이기는 전투가 아니면 시작하지 않았으며, 전투는 승리를 확인하는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명량해전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상황은 절대적으로 불리하여 승리의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는 일본 수군을 막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본 수군이 서해안으로 진출하면 조선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신세가 된다. 절대적인 불리함 속에서도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이순신으로서는 죽음을 각오하고 전투에 임하지 않을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절대적인 열세의 상황에 처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방법을 찾아냈고, 마침내 승리했다. 이순신이 다만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기 때문에 승리하였다고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순신이 용기만을 앞세우는 장수였다면 1212승의 위업을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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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에서의 승리로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이 저지되었다
. 일본군의 수륙병진전략은 와해되었고 전라도, 경기도, 충청도에 대한 일본군의 침탈을 막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한 조선 수군은 명량해전에서의 승리로 자신감을 되찾는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 수군은 이후 명국 수군과의 합동작전을 전개하게 된다.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기에는 그 힘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명량대첩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 전쟁에서 조선에게 가장 중요한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초에 일본 참모본부에서 펴낸 <일본전사조선역(日本戰史朝鮮役)>은 명량해전에서 일본 수군 수십 척이 참전하였으며 침몰된 것은 몇 척뿐이었다고 사실을 왜곡하였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것 같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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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내고환 18-04-12 23:42
   
지금으로치면 DDH랑 참수리? 아니 참수리도 안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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