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 이완용이 죽기 직전 아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
이완용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 체결하고,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한일합방조약 체결을 주도한 인물로,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들어가있는 가장 대표적인 '매국노'이다.
이완용은 친일파로 알려져 있지만 일본어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원래 이완용은 당시 강대국으로 이름을 날리던 러시아를 신봉하던 '친러파' 였는데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 친일파로 급격히 돌아선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을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일본이 강대국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편을 들었던 것이다.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로 강대국 반열에 올랐다
이러한 이유로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완용을 "기회주의자이며 박쥐 같은 인간"이라고 평가하는데 이완용이 아들에게 남긴 유언에서도 박쥐 같은 면모가 잘 드러난다.
이완용은 1926년 죽기 직전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내가 보니까 앞으로 미국이 득세할 것 같으니 너는 친미파가 되거라"였다.
이완용 유언을 남긴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고, 그의 장례는 1,300여명의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에 '성대하게' 치뤄졌다.
사후는 생전보다 더 화려했는데, 일본인과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50명의 장례위원들이 참석했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정2위대훈위 후작 이 공 지 구란 휘황찬란한 깃발을 들고 장례가 치뤄젔다. 그의 장례 행렬은 그의 3천 평짜리 집 옥인동부터 광화문까지 이어졌는데 고종 사후 이후 최대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그의 묘는 전라북도 익산군(現 익산시) 낭산면에 있었는데 매국노다 보니 지속적인 훼묘사건이 빈번이 일어났다. 그나마 일제강점기 때는 양반이었고 광복 이후에는 매우 심하게 훼손되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훼묘 사건이 발생한 데다 수풀이 너무 무성하게 자라 관리가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러 1978년에 이완용의 증손자 이석형은 파묘를 하고 유골을 화장했다. 오늘날 이완용의 묘가 있었던 곳은 채석장으로 바뀌었으며 위치는 육군부사관학교에서 매우 가깝다.
파묘할 때 지속적으로 훼손된 묘였지만 붉은 명정에 쓰인 '조선 총독부 부의장'이란 글은 상하지도 않고 그대로였다고 한다. 이완용의 관(정확히는 관뚜껑)은 당시 인부가 바둑판을 만들기 위해 가져갔다가 원광대학교 박물관에서 사들인 것을 이완용의 손자뻘 친척이라고 상당 기간 오해받던 국사학자 이병도가 사비로 구입해 자택에서 불태워 버렸다고 전해진다. 결국 부관참시로 이완용의 무덤은 사라지고 관과 유해는 불타 버렸다. 한 마디로 말해서 매국노의 말로.
직함 하나는 엄청나게 많이 받아서 조선귀족원 회원, 농사장려회 회장, 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 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평의원, 조선귀족회 부회장, 농림주식회사고문, 교육조사위원, 총독부산업조사위원, 조선미술전람회심사원, 조선사편찬위고문, 조선농업교육연구회고문, 선만노몽(조선, 만주, 러시아, 몽골) 연구협회고문 등을 지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그는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당연히 포함되어 있고,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완용과 그의 손자인 이병길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하여 환수작업이 진행 중이다.
또한 2009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이완용의 이름이 당연히 그리고 당당히 들어가 있다.
이완용은 1910년대 토지, 임야 등 확인된 것만 여의도 면적의 약 2배에 해당하는 1,300여 필지, 1,600만㎡를 소유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완용은 일제때에 구입한 토지를 현금화하였으나 총 규모는 아직까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완용의 증손자인 이윤형은 친일파 후손 중 최초로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하여 1997년 7월 승소하였으며, 반환된 북아현동 일대의 토지는 당시 시가로 30여억원에 달하였다.
이윤형은 곧바로 이 토지를 처분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놀랍게도 한 방송사의 추적 결과 이민은 이윤형 혼자 떠났으며 본인 이외의 국내에 남은 자손들은 궁핍하게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