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회에 속은 얼간이........
무식한 자가 신념을 가져, 최악의 결과를 낸 대표적인 케이스 이용구
이용구 : 나는 바보였나 봅니다. 혹시 속은 게 아닐까요.
우치다 료헤이 : 뒷날 모든 것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오늘은 어리석은 자이지만 뒷날 반드시 현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보이자 매국노로 끝이나버린, 이용구............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 흑룡회와 현양사를 만든 일본의 국가주의자, 극우 인사이다.
이용구를 농락하여 속인 우치다 료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는 곧 헝가리 왕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제국에 긴요한 업무인 국방, 재정, 외교만 동일한 대신이 관장하고 나머지 사항은 두 나라가 따로 내각과 각료를 두어 처리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재정 분담금과 관세 따위의 사안은 10년마다 조정하기로 합의하였다.
*대동국: 일본의 흑룡회 등이 구상한, 일/한/몽/만 연합연합 왕국으로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하여 이 4국가가 하나가 되어 대동아시아 국가를 만들자는 이상론적 국가관으로, 훗날 대동아 공영권의 바탕이 되었다. 상당수 한국의 개화파 지식인들의 이 감언이설에 넘어가서 적극적인 친일정책을 수행하게 된다.
대동아 공영권 - 대동국
동학 포교활동 중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된 진보회를 결성하였다가 친일파 송병준의 권고로 일진회와 합병하여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친일 행위를 시작하게 되었고 러일전쟁 때는 일본을 지지하기도 했다.
1905년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강화 및 포교하게 되면서 동학시절 옛 동지였던 손병희의 천도교에 맞서, 친일파 성향의 신흥종교인 시천교(侍天敎)를 창시하여 시천교 교주가 되었다. 일진회를 만들고 동 단체의 회장이 된 뒤, 일본의 극우인사 우치다 료헤이와 그의 단체 현양사의 도움으로 친일행위에 나서게 된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모티브로 조선과 일본이 1:1로 대등합방 하자는 생각 하에 백성들에게 일본의 아시아주의 사상(러시아의 침입에 맞서, 일/한/만/몽의 동등한 결합에 의한 대아시아 국가 창조)을 전파하고, 그러한 확신아래 친일행위를 찬양하였으며, 한일병합을 제창하고 고종에게까지 병합건의서를 제출하는 등 민족반역자로 변신하게 되었다.
즉 그가 생각한 국가모형은, 사실, 실제 국제정세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그만의 상상의 산물이었다.(그리고 그 생각은 일본의 흑룡회의 사기이기도 했다)
그는 한일병합의 모델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을 염두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1.국가원수는 일본천황으로 하되, 한일의 내정은 각각이 수행을 한다
2.한국, 일본, 몽골, 만주가 하나가 되어 대동국을 만들어 서양 특히 러시아의 침략에 맞선다.
3.일진회가, 한국의 주요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중추가 된다.
4.일진회는 일본이 주는 자금을 중심으로 만주로 미리 건너가서, 만주를 대동국의 영토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수행한다.
5.그가 추진하는 한일이 병합된 국가는, 상호 존중과 동등한 위치를 갖는다.
그러나 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을 당하게 되자 이토의 장례식 당일부터, 독립관에서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를 주관해 오는 도중에, 1910년 한일병합이 단행된다.
일진회의 본부인 독립관
그리고 합방 후, 일본은 일진회의 즉시 해산을 명령하자, 이용구는 크게 낙삼하게 된다.
쉽게 말해 일진회는 1주일 내에 해산하라는 것이니 일진회가 합방 후 한국의 내정에 어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것이라는 그의 생각은 한낱 춘몽에 불과했던 것 이다.
즉, 이 말은
1. 그가 생각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국가나, 한/일/만주/몽골이 동등하게 합방하여 국가를
건설하자는 대동국의 꿈이 사라지고, 한일간에는 어떠한 형태로도 동등한 합방이 불가능함
을 깨닫게 된 것 이고
2. 이로 인해 일진회가 한국내정에서 전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단체가 될 수 없다는 말이며
(당시 일제는 친일, 반일을 막론하고 어떠한 형태의 조선인 정치체를 허락하지 않았다)
3. 또한 일본의 지원금도 없으니, 그가 생각한 일진회의 만주진출과 대동국의 설립도 좌절된
다는 의미였다.
그는 한일합방 이전, 1909년 12월 일본 수상인 가쓰라 다로에게 합방 청원에 소요되는 비용 3백만엔을 상의했는데, 이때 가쓰라 다로는 그에게 "3백만이 아니라 3천만이라도 주겠다."라고 했다. 그러나 막상 1910년 일진회를 해산하고 나니 일본정부가 일진회에게 준 돈은 달랑 15만엔이었다.
그것도 이용구 개인에게 준 게 아니라 일진회 회원들 전체에게 준 것. 그야말로 일진회와 이용구는 토사구팽 당한 셈이였다.
참고로 3백만엔이 필요했던 이유는, 앞서 말했듯 친일 활동 때문에 일진회 회원들은 집이 전부 테러를 당하는 등 사회적으로 완전히 배척받고 있었기 때문에, 단체로 만주 특히 간도로 이주해서 만주를 개척하면서 대동국의 기반을 마련하며, 살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단순한 돈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걸린 문제였는데 여지없이 버림받은 셈이다.
결국 그는 일본이 준 조선귀족 작위도 거절하고 허탈함과 격분에 빠진 나머지 몸져 눕고 만다. 그리고 결핵으로 그리 길지 않은 생을 마무리 한다.
1912년 죽기 얼마 전 문안차 찾아온 우치다 료헤이에게 "우리는 바보짓을 했어요. 처음부터 속았던건 아니었을까요?"라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1911년에 일본 스마(須磨) 지방으로 건너가 요양생활을 하게 되었다가 1912년 병고(病苦)로 44세에 죽었다. 죽은 후 일왕으로부터 훈(勳) 1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그의 아들인 이석규도 친일파이자 일진회 고문 출신으로 아버지와 함께 이완용, 송병준을 위한 한일병합 공로자 합동 위령제를 지내는 등 친일 행위를 해 왔으며, 해방 후에도 이용구 전기 등을 저술하였다가 1986년 일본에서 참 편하게 죽었다. 이 사람은 평생을 자기 아버지 이용구가 송병준의 농간 속에 이용만 당했다고 주장하였다.
뭐, 그나마 아주 약간 참작할 게 있다면 죽기 직전에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아채고 참회하는 기색을 조금이나마 보였던 것이겠지만 역사의 평가는 냉정한 법. 지금까지도 이용구 하면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대명사 중 하나인 것은 자명하다.
ps) 이 대동아 공영권을 구상한, 흑룡회가 생각하는 사상 이론의 집약체가, 사실은 환단고기이다.
1) 흑룡회와 환단고기: 흑룡회의 뿌리는 천우협이라는 단체까지 올라간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천우협은 일본의 낭인단체로 동학농민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동학농민운동은 외세 배격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웠고 그 외세에 일본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데, 배격의 대상인 일본의 단체와 동학이 협력했다니 무슨 말인가? 그러나 천우협이 동학농민군을 지원하고자 조선으로 들어온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일본 정부에 의해 위험분자로 지목되어 체포되기도 했다.
이들 중 일부는 후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에도 참여했다. 1901년 결성된 흑룡회는 대일본제국의 영토를 흑룡강까지 도달케 하자는 목적으로 단체 이름을 흑룡회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미 쓴 글(흑룡회 등의 글)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들 낭인들은 단순 무뢰배가 아니라, 이론적 배경을 만들 학식을 가진 인간들이었다. 그럼 흑룡회의 사상적 토대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이들이 기초하고 있던 사상은 ‘동이·북적 문명론’과 ‘동일 혈통론’이었다. 이 이론에 근거해서 일본, 조선, 만주, 시베리아를 하나의 권역으로 설정했다. 즉, 같은 황인종이라 해도 동이가 아닌 중국은 이 권역에서 제외되었다. 본래 동이족은 중국 동북방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서역 지방에서 이주해 온 한족에 의해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다퉈왔다고 설명한다.
2) 흑룡회가 환단고기를 통해 하고 싶은 말: 유사역사가들의 주장을 들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바로 황제-치우의 탁록대전 이후 한족과 한민족이 허구한 날 싸웠다는 그들의 주장과 동일한 이야기 구조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은 중국 문명이 중동 문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이론은 우리나라의 유사역사가에 의해 중국 한족의 이름을 ‘한민족’으로 바꿔치기하여 되풀이되었다. 물론 당시 일제의 유사역사가들은 그 자리에 ‘일본’이라는 이름을 넣었다. 이들은 일본이 서양의 신문명을 받아들여 동이·북적 민족 중 가장 발전한 만큼, ‘고대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일본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당연하게도 조선과 일본의 합방이 이들의 과제가 되었다. 이들은 아시아, 특히 동이족의 영토에 쳐들어오는 러시아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시베리아 등지에 많은 낭인들을 보내 정찰하게 했다. 이들의 선전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실제로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의 대러 전쟁은 아시아 평화를 위해 짊어진 수고로움이라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만들어진 친일단체가 바로 이용구의 ‘일진회’였다. 일진회는 흑룡회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이들은 표면적으로 한일 간의 동등한 합방을 요청하는 척했지만, 일본 정부는 한국 측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강제병합을 하였고, 곧바로 한국인 최대의 정치단체인 일진회를 해산시켜버렸다. 친일이건 뭐건 어떤 한국인 정치단체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용구도 죽으면서 자기가 속았다고 한탄했을 정도였다.
흑룡회의 이론은 결국 동이족의 영토를 모두 차지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사상적 토대로 활용되었다. 흑룡회를 만들고 흑룡회의 이론을 창안한 우치다 료헤(內田良平)의 이론을 보자. 그는 아세아라는 이름 자체가 일본의 옛 이름인 ‘위원(葦原)’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 아시아가 일본의 옛 영토였다고 주장한다.따라서 일본과 만주, 몽골, 조선은 다 같은 혈통이라는 것이다. 바로 내선일체론이다. 이런 점을 우리나라 유사역사가들도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조선이 종가이고 일본은 분가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천황의 신격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대일본제국, 대아시아주의, 대동아공영론이 등장했는데, 이들의 등장에도 역시 이런 이론이 어느 정도 기여한 바 있다고 보겠다. 천황을 유교적 가부장 체제의 정점에 놓고 혈연공동체로서 국가를 건설해 나가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