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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4-11 11:18
[한국사]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멍청한 친일파 이용구
 글쓴이 : history2
조회 : 1,496  

흑룡회에 속은 얼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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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식한 자가 신념을 가져, 최악의 결과를 낸 대표적인 케이스 이용구 

 

 

이용구 : 나는 바보였나 봅니다. 혹시 속은 게 아닐까요.

우치다 료헤이 : 뒷날 모든 것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오늘은 어리석은 자이지만 뒷날 반드시 현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보이자 매국노로 끝이나버린, 이용구............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 흑룡회와 현양사를 만든 일본의 국가주의자, 극우 인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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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구를 농락하여 속인 우치다 료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는 곧 헝가리 왕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제국에 긴요한 업무인 국방, 재정, 외교만 동일한 대신이 관장하고 나머지 사항은 두 나라가 따로 내각과 각료를 두어 처리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재정 분담금과 관세 따위의 사안은 10년마다 조정하기로 합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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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국: 일본의 흑룡회 등이 구상한, ///만 연합연합 왕국으로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하여 이 4국가가 하나가 되어 대동아시아 국가를 만들자는 이상론적 국가관으로, 훗날 대동아 공영권의 바탕이 되었다. 상당수 한국의 개화파 지식인들의 이 감언이설에 넘어가서 적극적인 친일정책을 수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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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아 공영권 - 대동국

 

동학 포교활동 중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된 진보회를 결성하였다가 친일파 송병준의 권고로 일진회와 합병하여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친일 행위를 시작하게 되었고 러일전쟁 때는 일본을 지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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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강화 및 포교하게 되면서 동학시절 옛 동지였던 손병희의 천도교에 맞서, 친일파 성향의 신흥종교인 시천교(侍天敎)를 창시하여 시천교 교주가 되었다. 일진회를 만들고 동 단체의 회장이 된 뒤, 일본의 극우인사 우치다 료헤이와 그의 단체 현양사의 도움으로 친일행위에 나서게 된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모티브로 조선과 일본이 1:1로 대등합방 하자는 생각 하에 백성들에게 일본의 아시아주의 사상(러시아의 침입에 맞서, ///몽의 동등한 결합에 의한 대아시아 국가 창조)을 전파하고, 그러한 확신아래 친일행위를 찬양하였으며, 한일병합을 제창하고 고종에게까지 병합건의서를 제출하는 등 민족반역자로 변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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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그가 생각한 국가모형은, 사실, 실제 국제정세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그만의 상상의 산물이었다.(그리고 그 생각은 일본의 흑룡회의 사기이기도 했다)

 

그는 한일병합의 모델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을 염두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1.국가원수는 일본천황으로 하되, 한일의 내정은 각각이 수행을 한다

2.한국, 일본, 몽골, 만주가 하나가 되어 대동국을 만들어 서양 특히 러시아의 침략에 맞선다.

3.일진회가, 한국의 주요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중추가 된다.

4.일진회는 일본이 주는 자금을 중심으로 만주로 미리 건너가서, 만주를 대동국의 영토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수행한다.

5.그가 추진하는 한일이 병합된 국가는, 상호 존중과 동등한 위치를 갖는다.

 

그러나 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을 당하게 되자 이토의 장례식 당일부터, 독립관에서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를 주관해 오는 도중에, 1910년 한일병합이 단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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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진회의 본부인 독립관

 

그리고 합방 후, 일본은 일진회의 즉시 해산을 명령하자, 이용구는 크게 낙삼하게 된다.

쉽게 말해 일진회는 1주일 내에 해산하라는 것이니 일진회가 합방 후 한국의 내정에 어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것이라는 그의 생각은 한낱 춘몽에 불과했던 것 이다.

 

, 이 말은

 

1. 그가 생각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국가나, //만주/몽골이 동등하게 합방하여 국가를

건설하자는 대동국의 꿈이 사라지고, 한일간에는 어떠한 형태로도 동등한 합방이 불가능함

을 깨닫게 된 것 이고

2. 이로 인해 일진회가 한국내정에서 전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단체가 될 수 없다는 말이며

(당시 일제는 친일, 반일을 막론하고 어떠한 형태의 조선인 정치체를 허락하지 않았다)

3. 또한 일본의 지원금도 없으니, 그가 생각한 일진회의 만주진출과 대동국의 설립도 좌절된

다는 의미였다.

 

그는 한일합방 이전, 190912월 일본 수상인 가쓰라 다로에게 합방 청원에 소요되는 비용 3백만엔을 상의했는데, 이때 가쓰라 다로는 그에게 "3백만이 아니라 3천만이라도 주겠다."라고 했다. 그러나 막상 1910년 일진회를 해산하고 나니 일본정부가 일진회에게 준 돈은 달랑 15만엔이었다.

 

그것도 이용구 개인에게 준 게 아니라 일진회 회원들 전체에게 준 것. 그야말로 일진회와 이용구는 토사구팽 당한 셈이였다.

 

참고로 3백만엔이 필요했던 이유는, 앞서 말했듯 친일 활동 때문에 일진회 회원들은 집이 전부 테러를 당하는 등 사회적으로 완전히 배척받고 있었기 때문에, 단체로 만주 특히 간도로 이주해서 만주를 개척하면서 대동국의 기반을 마련하며, 살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단순한 돈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걸린 문제였는데 여지없이 버림받은 셈이다.

 

결국 그는 일본이 준 조선귀족 작위도 거절하고 허탈함과 격분에 빠진 나머지 몸져 눕고 만다. 그리고 결핵으로 그리 길지 않은 생을 마무리 한다.

 

1912년 죽기 얼마 전 문안차 찾아온 우치다 료헤이에게 "우리는 바보짓을 했어요. 처음부터 속았던건 아니었을까요?"라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1911년에 일본 스마(須磨) 지방으로 건너가 요양생활을 하게 되었다가 1912년 병고(病苦)44세에 죽었다. 죽은 후 일왕으로부터 훈() 1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그의 아들인 이석규도 친일파이자 일진회 고문 출신으로 아버지와 함께 이완용, 송병준을 위한 한일병합 공로자 합동 위령제를 지내는 등 친일 행위를 해 왔으며, 해방 후에도 이용구 전기 등을 저술하였다가 1986년 일본에서 참 편하게 죽었다. 이 사람은 평생을 자기 아버지 이용구가 송병준의 농간 속에 이용만 당했다고 주장하였다.

 

, 그나마 아주 약간 참작할 게 있다면 죽기 직전에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아채고 참회하는 기색을 조금이나마 보였던 것이겠지만 역사의 평가는 냉정한 법. 지금까지도 이용구 하면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대명사 중 하나인 것은 자명하다.


ps) 이 대동아 공영권을 구상한, 흑룡회가 생각하는 사상 이론의 집약체가, 사실은 환단고기이다. 


1) 흑룡회와 환단고기: 흑룡회의 뿌리는 천우협이라는 단체까지 올라간다이상하게 들리겠지만천우협은 일본의 낭인단체로 동학농민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동학농민운동은 외세 배격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웠고 그 외세에 일본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데배격의 대상인 일본의 단체와 동학이 협력했다니 무슨 말인가그러나 천우협이 동학농민군을 지원하고자 조선으로 들어온 것은 사실이다이들은 일본 정부에 의해 위험분자로 지목되어 체포되기도 했다.

이들 중 일부는 후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에도 참여했다. 1901년 결성된 흑룡회는 대일본제국의 영토를 흑룡강까지 도달케 하자는 목적으로 단체 이름을 흑룡회라고 지었다고 한다이미 쓴 글(흑룡회 등의 글)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들 낭인들은 단순 무뢰배가 아니라이론적 배경을 만들 학식을 가진 인간들이었다그럼 흑룡회의 사상적 토대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이들이 기초하고 있던 사상은 동이·북적 문명론과 동일 혈통론이었다이 이론에 근거해서 일본조선만주시베리아를 하나의 권역으로 설정했다. 즉, 같은 황인종이라 해도 동이가 아닌 중국은 이 권역에서 제외되었다본래 동이족은 중국 동북방에 거주하고 있었는데서역 지방에서 이주해 온 한족에 의해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다퉈왔다고 설명한다.


2) 흑룡회가 환단고기를 통해 하고 싶은 말: 유사역사가들의 주장을 들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이것이 바로 황제-치우의 탁록대전 이후 한족과 한민족이 허구한 날 싸웠다는 그들의 주장과 동일한 이야기 구조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또한 이들은 중국 문명이 중동 문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이 이론은 우리나라의 유사역사가에 의해 중국 한족의 이름을 한민족으로 바꿔치기하여 되풀이되었다물론 당시 일제의 유사역사가들은 그 자리에 일본이라는 이름을 넣었다이들은 일본이 서양의 신문명을 받아들여 동이·북적 민족 중 가장 발전한 만큼, ‘고대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일본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당연하게도 조선과 일본의 합방이 이들의 과제가 되었다이들은 아시아특히 동이족의 영토에 쳐들어오는 러시아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고시베리아 등지에 많은 낭인들을 보내 정찰하게 했다이들의 선전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실제로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의 대러 전쟁은 아시아 평화를 위해 짊어진 수고로움이라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만들어진 친일단체가 바로 이용구의 일진회였다일진회는 흑룡회와 불가분의 관계였다이들은 표면적으로 한일 간의 동등한 합방을 요청하는 척했지만일본 정부는 한국 측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강제병합을 하였고곧바로 한국인 최대의 정치단체인 일진회를 해산시켜버렸다친일이건 뭐건 어떤 한국인 정치단체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이용구도 죽으면서 자기가 속았다고 한탄했을 정도였다.

흑룡회의 이론은 결국 동이족의 영토를 모두 차지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사상적 토대로 활용되었다흑룡회를 만들고 흑룡회의 이론을 창안한 우치다 료헤(內田良平)의 이론을 보자그는 아세아라는 이름 자체가 일본의 옛 이름인 위원(葦原)’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 아시아가 일본의 옛 영토였다고 주장한다.따라서 일본과 만주몽골조선은 다 같은 혈통이라는 것이다바로 내선일체론이다이런 점을 우리나라 유사역사가들도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다만 조선이 종가이고 일본은 분가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천황의 신격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대일본제국대아시아주의대동아공영론이 등장했는데이들의 등장에도 역시 이런 이론이 어느 정도 기여한 바 있다고 보겠다천황을 유교적 가부장 체제의 정점에 놓고 혈연공동체로서 국가를 건설해 나가고자 한 것이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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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 18-04-11 11:57
   
이 대동아 공영권을 구상한, 흑룡회가 생각하는 사상 이론의 집약체가, 사실은 환단고기이다. 이 내용은 어디에 근거한 내용인가요??
     
mymiky 18-04-11 12:28
   
[만선사관]이라고 아세요?
스리랑 18-04-11 12:01
   
유사역사가들의 주장을 들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바로 황제-치우의 탁록대전 이후 한족과 한민족이 허구한 날 싸웠다는 ??

1) 한족과 한민족이 허구한 날 싸웠다는 주장은 누가 그렇게 주장한 것이지요?


 그들의 주장과 동일한 이야기 구조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은 중국 문명이 중동 문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이론은 우리나라의 유사역사가에 의해 중국 한족의 이름을 ‘한민족’으로 바꿔치기하여 되풀이되었다.



2) 유사역사가에 의해 중국 한족의 이름을 '한민족'으로 바꿔치기하였다고요. 어떤 유사역사가가 저렇게 주장했는가요??



물론 당시 일제의 유사역사가들은 그 자리에 ‘일본’이라는 이름을 넣었다.

3) 유사역사가들이 '일본'이라는 이름을 넣었다?? 어떤 유사역사가들인가요?



이들은 일본이 서양의 신문명을 받아들여 동이·북적 민족 중 가장 발전한 만큼, ‘고대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일본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history2 18-04-11 13:11
   
제가 흑룡회관련 글은 이미 게재를 했습니다....그리고 학계에 널리 통용되는 것이고요...참고로 이문영씨 글을 보시면 더욱 세밀히 아실 수 있습니다...개인적으론 이문영 씨 글을 좋아하지는 않지만요...이용구가 이용당한게 이 한,일,만,몽족 연합론인데.....저도 환단고기를 수 차례는 읽은 사람으로서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던데요 ...님이 환단고기를 좋아하시니 좀 죄송스러운 마음이지만, 사실은 사실이기에 적습니다...이유립 님과 이완용간의 관계도 수상적고요...
     
스리랑 18-04-11 14:31
   
저도 이문영씨 글은 안읽습니다.

네, 저도 그에 대응하는 글 하나 올려보겠습니다.
          
스리랑 18-04-11 14:37
   
규원사화(揆園史話),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정사(正史)로 인정하지 않는 한국 강단사학계와 대륙삼국설(大陸三國說)을 주장하는 재야사학계 간의 대립은


특히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작업인 동북공정 파문에 발맞추어 강단사학계에서 지금껏 단군조선의 역사를 만들어진 신화로 규정하고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기술해오던 강단사학자들이

중국 측에 대응할만한 논리를 찾지 못하자 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어처구니없는 언행을 일삼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그런 와중에 강단사학계가 사대모화사상과 친일식민사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구태의연한 연구방식을 고수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히려 규원사화(揆園史話), 환단고기(桓檀古記)가 친일 만선사관(親日滿鮮史觀)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제도권 사학자들이 있다.
               
스리랑 18-04-11 14:42
   
규원사화(揆園史話)가 1675년 북애자(北崖者)에 의해 씌여진 서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들은 규원사화의 저작시기가 조선조 숙종(肅宗)대라는 사실조차 부정하고 있는데 그 근거는 만설(漫說)에 있다고 한다.

若天假余以再生, 使置數百年之後, 則余可服東服而操淸語, 跨駟馬而說淸帝, 談同祖, 陳利害, 與朝鮮倂據遼滿 幽營之地, 北誘野人而爲前驅, 東聯倭而使撓其南鄙. 夫! 然後, 朝鮮之强可復, 而漢之慢可挫矣. 不然者, 今朝鮮之勢, 滔滔日下, 只管虛弱而不思奮勵, 不出數百年, 朝鮮必復敗於强 矣, 頹然孰能支之乎.


(만약 하늘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여 수백 년 뒤로 놓아두기만 한다면, 곧 나는 우리나라 옷을 입고 청나라 언어를 구사하며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에 올라앉아 청나라 황제를 설복하여 우리가 같은 조상임을 얘기하고 그 이해 득실을 나열할 것이니,


조선과 더불어 요만(遼滿)과 유영(幽營)의 땅에 나란히 웅거하여, 북으로는 야인(野人)을 꾀어 선봉으로 삼고 동으로는 왜(倭)와 연합하여 그들로 하여금 남쪽의 천한 종족들을 휘어잡게 하자고 할 것이다.



무릇 그러한 후에야 조선의 강성함은 다시 살아날 것이요 한나라의 거만함은 좌절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조선의 형세가 저무는 해를 따라가듯 하기에 단지 허약함만을 돌보아서는 떨치고 나와서 힘을 쓰는 것은 생각도 못해 볼 것이며,


수백 년이 지나지 않아 조선은 반드시 강한 이웃에게 다시 패망할 것이니,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누가 능히 지탱하겠는가!)




만설(漫說)의 이 부분에서 규원사화가 1675년대에 씌여진 책이 아니라 근대에 쓰여진 것이며 친일 만선사관을 연상하게 하는데 충분하다는 지적이다.


규원사화가 씌여질 당시는 이미 한족(漢族)의 국가인 명나라가 사라진지 오래인데 청나라와 손잡고 왜국과 협력하여 한족의 세력을 몰아낸다는 이 부분이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따라서 규원사화가 1675년에 저작된 것은 신빙성이 떨어지며


당시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전쟁의 패배로 조선은 청의 속국으로 전락함과 동시에 수많은 처녀들을 공녀로 바쳐야 하는 상황인데, 이러한 청나라 황제에게 여진족과 조선 민족이 같은 민족임을 설복하고 청나라와 손을 잡는다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에 만선사관을 주입시키려 노력했던 조선총독부의 논리와 같다는 것이다.


일제의 만선사관은 1932년 일제가 중국 침략을 위해 건설한 괴뢰국가 만주국(滿洲國)이 형성됐을 때에 등장했던 논리이다.


조선 민족과 만주족은 일본인과 같은 뿌리이기 때문에 일본의 영토확장에 협력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규원사화 만설부분에서 조선 민족이 청나라 황실과 같은 뿌리이기 때문에 청나라 언어를 구사하며 동쪽의 왜국와 더불어 남쪽의 천한 종족(이미 사라진 한족의 국가 명)을 휘어잡게 하자는 것은 일제가 패권주의 팽창정책의 정당성을 설파하기 위해


조선 민족과 만주족이 일본의 중국 침략에 협조하라고 선동하는 만선사관과 똑같다는 주장이다.


또 규원사화 만설부분에서 청나라와 협력하지 않는다면 "수백 년이 지나지 않아 조선은 반드시 강한 이웃에게 다시 패망할 것이니..."라는 부분은 힘이 약한 조선 민족이 강대국에 협조하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한다는 뜻으로

일제강점기에 친일파들이 당시 조선인들에게 일제의 침략정책에 동조하라는 논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조선 민족이 자주적인 독립주권을 갖지 말고 강대국에 빌붙어 강대국의 뜻대로 살아야 멸망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어찌 친일 만선사관과 연관시키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 규원사화의 저작연대 의심을 품는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인 것이다.
                    
스리랑 18-04-11 14:53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의 패배로 청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조선의 현실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조선 민족과 청 황실이 같은 조상의 후예임을 설복하여 힘을 합쳐 당시에 이미 사라진 한족의 세력을 몰아낸다는 부분도 그렇지만



차칫 잘못하면 일제강점기 때의 종군위안부도 과거 조선이 청의 신국(臣國)으로서 해마다 처녀를 공녀로 바쳐야 했던 과거처럼 그 정당성을 충분히 주장할수 있는 위험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또 환단고기 범례에도 친일 만선사관의 냄새가 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인데, 문제삼는 부분은 이것이다.


'또 홍범도 오동진의 두 벗이 돈을 내어 여러분에게 부탁하여 인쇄해 내는 바, 환단고기가 씌여졌던 1911년은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시기로써 강대국이 약소국을 식민지로 삼는 국제정세에


 '민족문화의 이념, 세계인류의 공존'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이 또한 조선 민족과 만주족이 일본인과 그 뿌리가 같으므로 일본의 중국 침략에 협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친일 만선사관과 충분히 연관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재야사학자들은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민족 패배주의 사관을 고수하려는 강단사학계의 계략."이라고 일축한다.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를 편찬한 저자가 살고 있는 그 당시 시대 전후에서 제국주의를 포장한 평화 논리가 유행하고 있었다. 일례로 스페인이 믿음을 전파하기 위해 그리고 "평화"를 전해주기 위한 논리로서 포장하면서 잉카 제국에 처들어가 멸망시킨 경우가 그것이다.


먼저 규원사화의 저자 북애노인이 어째서 만주족, 일본과 연합하여 중국이라는 문화적 실체를 누르자고 했는지, 북애노인의 정세인식과 그 배경을 탐구하는 것이 더 유효한 것이라고 본다.


역사는 정(正) 반(反) 합(合)의 과정을 거쳐서 끊임없이 쇄신되는 학문이라고 하였다. 어느 한 가지 설을 고집하며 금과옥조로 여기는 것은 '경학(經學)'이지 '사학(史學)'이 아니다.

이덕일 선생이 쓴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보면 당시의 시대상황을 자세히 알수 있다. 1600년대 후반~1700년대까지의 사회상을 보다보면 규원사화의 저자나 당시 재야지식인들의 심정이나 말이 절로 이해가 갈 것이다.



송시열(宋時烈)에게 대일통은 조선 자신이 아니라 명나라를 높이는 타인 중심적 사상이라는 점이다.


사상면에서 볼때 송시열의 북벌론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명나라를 따르자는 대일통 사상이다. 명나라는 천자의 나라요 조선은 제후의 나라이므로 제후의 나라인 조선이 임금인 명나라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 송시열의 대일통 사상이다.



“우리 태조 고황제(명나라 시조 주원장)께서는 우리 태조 강헌대왕(이성계)과 같은 시기에 창업하시고 즉시 군신의 의를 맺으시는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가 충정의 절개를 지킨지 3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불행히 지난번에 추한 오랑캐가 방자하게 온 나라를 삼켜서 당당한 예의의 나라가 다 비린내 나는 더러운 것에 더럽혀졌으니 그때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하겠습니까?”


조선 태조 이성계가 신하로서 명 태조 주원장을 임금으로 섬긴 것이 변할 수 없는 군신의 의리라는 주장이 송시열의 의리론이다. 즉 그에게 의하면 조선은 명나라를 임금의 나라로 섬기는 것이 삼강의 의리이다.

“우리 나라는 실로 신종황제(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명나라 임금)의 은혜를 입어 거의 빈 터가 된 종묘사직이 다시 있게 되고 생민이 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우리 나라의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와 생민의 털 한 터럭에 황은이 미치지 않은 바 없습니다.


그런즉 오늘날 온 천하에서 명나라가 망한 것이 우리만큼 억울하고 분한 자가 또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광해군이 이런 분함을 잊고 강홍립을 시켜 전군을 포로로 만들어서, 천하 사람들이 우리 나라도 오랑캐가 되어버렸다고 조롱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우리 대행대왕(인조)께서 의를 주창하시고 반정하셔서 대의를 밝히시니 세상이 해와 달같이 밝게 되어, 온 나라 사람들이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거듭 대행대왕께서 지성으로 위(명나라)를 섬기셔서 매양 은총과 칭찬을 받음이 종시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묘호란 이후 갑자기 북쪽 오랑캐의 협박을 당해 충성된 절개를 밝히지 못했으니 그 이후의 일은 신된 자로써 차마 말할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송시열은 이처럼 우리 나라가 치욕을 받은 사실보다 명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는 것을 구구절절 더 슬프게 생각하고 있었다. 송시열에게 있어 북벌은 청나라를 물리쳐 명에 대한 은혜를 갚는 것이었다. 그에게 대일통, 즉 북벌은 청나라를 물리쳐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갚는 구체적인 수단이었다.



이렇게 송시열의 현실에 뒤떨어진 주장이 진리로 여겨지고 있는 당시 조선 사회에서 조선 역사의 시작을 단군에서 찾은 홍만종(洪萬宗)이나 규원사화의 저자 등 주체성을 가진 당대 재야 선비층들의 심정이 어땠으리라 생각되는가?



16세기 조선의 시인이었던 임제(林悌)가 황진이의 무덤 앞을 지나다가 읊은 시의 내용이 있다.

“사해제국이 황제라 칭하지 못한 자가 없는데 우리나라만이 그럴수 없다. 이런 미천한 나라에 태어나 어찌 죽음을 애석해 하겠는가?“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자.

규원사화가 만선사관을 종용한다면 책에 담긴 전체의 내용이 그러해야하고 왜(倭)에 대한 진한 애정과 호의가 곳곳에 담겨있어야 할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규원사화의 저자가 만선사관을 부르짖고 있는지, 조선의 주체성을 강조하여 조선이 당당히 기립하는 방향에 서서 박수를 보내고 있는지 그 여부를 판단해보기 바란다. 왜 “조선이 강국이 되어 왜구를 배척하여 그 바다를 봉쇄해야 하는” 내용의 글이 동책에 나오는지 설명해보기 바란다.




환단고기 범례 부분도 마찬가지다.

이 책의 발간으로 세가지 기쁨을 표현한 것은 민족의 주체성을 발견하여 그 주체성을 담보로 당당하게 다른 나라와 어깨를 견주리라는 예상에서 기쁘다 한것인데 강단사학자들이 이걸 어떻게 이해를 했길래 친일 만선사관과 연관성이 있다고 하는 것인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연구자라면 이런식의 해명은 곤란하다.



'하나는 자아이간의 주체성을 발견하기 위함이니 크게 기쁘고...' (단재 신채호 선생이 일제에 의해 잃어버린 민족혼을 되찾자는 주장과 유사하게 보면 된다.)

'하나는 민족문화의 이념을 표출하기 위함이니 크게 기쁘고...' (김구 선생이 문화 대국을 추구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하나는 세계인류의 공존을 발맞추어 이뤄가기 위함이니 크게 기쁘다...' (고립적인 민족주의가 아닌 다른 민족의 주체성도 함께 인정하면서 동양의 공동 번영을 이끌어야 한다는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과 같은 맥락이다.)



아무튼 역사서를 편찬할 때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편찬자의 주관적인 시각이 반드시 들어가게 된다. 서토 지나국 역사서와 임나일본부설에 이용하는 왜국 역사서, 그리고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을 살펴보면 편찬자의 주관적인 시각이 강하게 녹아져 있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를 살펴보면, 불교의 색체가 강하게 짙은 것은 편찬자가 불교에 종사하는 승려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에도 편찬자의 시각이 들어간다.


다만, 서토 지나국 및 왜국 역사서와 엄연히 다른 점은 편파적으로 왜곡한 것과는 달리 현실적이며 직설적으로 기록한 것이 바로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이다. 왜냐하면,


지나국의 역사서와 왜국의 역사서, 그리고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서로 비교하여 조사해 볼때, 공통적으로 들어맞은 것이 가장 많은 역사서이기 때문이다. 환단고기를 과학적 근거와 지리적 근거, 그리고 유적 및 유물적 근거를 놓고 살펴볼 때, 타 역사서와 달리 거의 사실에 근접한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기록한 것과 편찬자의 시각이 따로 두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봐야 한다.



또 병자호란 이후의 상황을 명나라가 사라지고 조선이 청의 신하국이 되어 치욕스러운 주종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과거를 보는 것 같다.

청과 조선이 동일하다는 인식은 조선조 세조 때 이징옥의 난에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징옥은 스스로 대금 황제라 칭하고 함길도에 도읍을 정하고 연호를 썼다. 이는 기득권과 다른 세력에서는 여진족과 조선족을 동일하게 본다는 의미도 된다.


비록 이징옥의 난은 실패하여 당사자가 피살당했지만 이징옥의 난을 일으킨 주동자들이 대거 만주로 이동하여 후일 후금을 세울 기틀을 마련한다. 그리고 조선의 조정 즉 기득권자들은 청나라를 오랑케라 하고 오직 성리학에 빠져 조선은 명나라와 중화족들의 신하로 세뇌당해 다른 피 기득권자들을 멸시했었다.



중화주의를 표방해야 과거에 급제하고 기득권이 되는데 반골 야인체질로 실력은 있지만 기득권들의 저항으로 과거에 떨어져 천지를 떠도는 낙방거사 북애자의 심정에서는 일본이 중국을 멸하기 위해 조선에게 길을 열러 달라고 외친것과


오랑케로 멸시받던 여진족이 중국을 점령한 것을 보면 통쾌하기 이를 데 없고 우리 조선도 그러한 것을 못할바가 없다고 조선 제일주의 입장에서 그런 만설을 썻다고 생각한다. 조선과 만주족을 동일하게 보았기 때문에 북애자와 비슷한 시기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은 만주고라는 역사서를 저술한 것이다.



야사에 속하는 선가서 청학집을 보면 조선의 선인 백우자의 제자로 몽골인과 여진족이 조선 사람과 동일하게 제자가 되어 도를 수도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렇게 볼때 산중 선가인들과 소외된 지식층 사이에는 중화 사대주의의 반감에 따라


여진족과 일본인들에 대한 동질성이 훨씬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청나라 만주족은 비록 중국을 정복했지만 한족들로부터 여전히 오랑캐 취급을 당하고 멸시당했다.


오죽 했으면 청나라 황제가 한족보다 만주족이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위해 흠정만주원류고를 편찬토록 했겠는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세계 어디를 가나 지나인들은 중화주의로 자기들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비록 타인의 집에서 하인노릇을 하고 청소부를 하더라도.... 오히려 주인을 멸시하는 습성이 있다.


이러한 시대성을 감안하지 않고 목표를 정해놓고 오직 글자의 유권해석에 매달려 강단의 사대식민 실증사학이 오히려 재야민족 대륙사관을 일제강점기 친일 만선사관으로 몰아부쳐 역공을 펼치는 것은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졌다고 볼 수 있다.
관심병자 18-04-11 16:10
   
본문글쓴이의 주장중
"중국 한족의 이름을 ‘한민족’으로 바꿔치기하여 되풀이되었다."

여기서 유사역사학자들이 바꿔치기 했다는 한족은 漢족이 아닌 韓족입니다.
원래 조선인들이 자신들을 韓족이라 불렀는데,
근대 들어서면서 음이 같은 한(漢)족과 차별을 두기위해 민자를 붙여 한(韓)민족이라 칭하게 된것이죠.
韓족이 중국인이면.
조선을 포함한 그 이전에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도 중국인이라는 말로,
우리 韓민족의 역사는 근대 대한민국이 최초의 민족국가가 되는것으로,
역사가 100년도 되지않게 되는것이죠.

한글로 똑같이 한족이고 같은 음이라고 해도 漢, 韓 다른 뜻의 글자입니다.
글쓴이는 "한(漢)족은 중국인이다." 라는 일반적인 지식을 이용해서,
"한(韓)족 역사를 중국인 역사인데 유사역사학자들이 한민족사로 끌어들이는것이니 잘못됐다"
라고 본문에서 주장을 했습니다.

글쓴이가 유사학자들이 한민족사에 끌여들이려 한다는 동이 한족은 한(韓)족이지, 한(漢)족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반도에 살던 한반도인들이 스스로 한(韓)족이라고 했었구요.
예를들어 삼한(三韓)도 있고, 지금의 대한민국(大韓民國), 한반도(韓半島)등.
중원 기록상에서도 한(韓)족에 대해 그들과 다른 집단으로 인식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스스로의 국적을 가리키는 한국사람(韓國)을 이용해,
한국(韓國)을 한국(漢國)이라며 중국인 이라고 하는것과 같습니다.
지수신 18-04-12 17:17
   
이용구나 일진회 같은 '얼간이'들은
세계 어디에나, 지금도 널리고 널려 있습니다.

'대동아공영권'의 달콤한 이상과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던 자들.

오늘날 만연한 반일감정에 기대 친일파라는 타이틀을 내세워서
말 없는 죽은 자들을 그렇게 까대고 선동질하기야 쉽겠지만
알고보면 그 선동꾼들도 자기가 까대는 자들과 같은 부류의
'얼간이'인 경우가 대다수더군요.
윗 댓글중에 수차례 언급되는 삼류 소설가 이모씨 같은 경우가 아주 대표적입니다.

'세계화' '글로벌' '동아시아' '민족통일'(요건 요즘엔 구닥다리가 됐는지 잘 안쓰는 모양입니다만)
등등의 달콤한 표어와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들.

한 국가 내에서도 계급 갈등 파벌 갈등 이념 갈등 지역 갈등에 바람 잘 날 없는데
국제정치를, 세상 일을 참 쉽게 생각합니다.
'얼간이'들은 말이죠.
선풍 21-07-04 09:15
   
해방후 청산되야할 치일파가 소위 냉엄한 국제정치 현실이라 표현한 것처럼 독립운동하던 세력을 청산해 버렸죠.그리고 권력과 재력을 누리며 살다 갔습니다. 그리고 어떤놈들은 죽어 국립묘지에  있기도하니
제대로된 청산이단 한번도 없었죠. 그래서 죽어서도 욕을 먹는 겁니다.
청산하자 하면 화합을 해친다고 합니다. 그래봐야 자기 자식에게로 미루는거죠.

그리고 소위 냉엄한 국제정치 현실이란것 때문에 남에의해 갈라진 민족이 통일하는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힘이 없던시절 불행한 과거를 하루빨리 되돌이는것은 우리 세대의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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