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8-04-12 18:51
[한국사] 웅진-사비기 왕릉급 무덤은 지역유지(?)무덤이란 말에 대한 글
 글쓴이 : 그만혀
조회 : 1,892  

신수무량님께서 현재까지 딸랑 하나만 발굴되었고(추가로 발굴한다고 했는데 하고 있는 것인지...그 이외에 발굴된 무덤의 주인공은 지역유지(?)의 무덤이었습니다. 라고 말씀하셨길래 이에 대해 제가 아는 것을 써봅니다.

1. 현재까지 딸랑 하나만 발굴되었고(아뇨 많이 발굴되었습니다 자료도 대부분 존재하구요. 도면 또한 볼 수 있어서 왕릉급무덤들의 발전양상은 어떤지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2. 그 이외에 발굴된 무덤의 주인공은 지역유지(?)의 무덤이었습니다(이 것은 제가 아래 자료로 반박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xxxxxx연구원에 재직중인 고고학자입니다. 이름과 기관명은 밝히지 못하는 점. 죄송합니다.

아래는 제가 대학원에 다닐 때 쓴 글이며 고-이남석 선생님의 글을 재정리한 것입니다.

제 글의 출처가 궁금하신다면 14편 정도의 논문을 보시면 되는데 그정도 읽기는 어려우실테니 가장 중요한 논문 제목만 올려봅니다.



이남석, 2003, 백제 횡혈식 석실분의 연구, 고문화 42 · 43

최완규, 2002, 백제성립의 발전기와 금강유역 묘제 양상, 한국상고사학보 제37

이남석, 2000, 능산리 고분군과 백제왕릉,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백제문화 29.

이남석, 1999, 百濟_橫穴式石室墳_受容樣相_하여, 한국고대사연구 16, pp

이남석, 1992, 百濟 初期 橫穴式 石室墳과 그 淵源, 선사와 고대 통권 제3, pp


웅진-사비지역 고분군에 관한 글

웅진백제지역 횡혈식석실분은 평면형태장방형세장방형으로 변천하는데, 평면형태가 방형에서 장방형으로 바뀐 것은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 등의 전실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천장도 궁륭식평천장으로 변하되, 과도기에는 터널식 천장이 일시 유행하였다.

천장석의 수는 1매에서 터널식이 되면서 3~4매로 증가하였고, 세장방형인 석실은 5~6매로 더욱 증가하였다. 웅진백제 석실 규모는 피장자의 사회적 위치에 의해 결정되는데, 7세기에 들어서면서 극도로 작아진다. 이와 같은 변천은 도읍이 사비로 천도되고 웅진지역이 지방으로 전락하면서 사비지역의 거주자들보다 사회적 위계가 낮기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비로 천도되고 나서도 웅진지역에도 그 지방의 관리자급인 고위관리는 존재했겠지만 천도 이후 시기 웅진지역에서는 왕릉급 무덤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하신 지역유지(?)의 무덤이 어느정도 규모를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웅진 중기-사비시기에는 중앙에 왕릉급 무덤을 제외한 타 무덤들의 양식이 간소화되고, 규모가 작아지는 양상이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왕릉급 무덤이 지역유지의 무덤이라고 밝혀졌다면 무령왕릉조차도 지역유지의 무덤이어야 합니다.  why? 그정도 규모 무덤이 지역유지의 무덤이면 같은 규격인 무령왕릉도 지역유지의 무덤이 되어야 하거든요)

사비지역 횡혈식석실분은 웅진지역 횡혈식석실분이 두 번의 변화를 겪은 것과 다르게 장방형만 주로 나타난다. 천장은 웅진지역에서 한 때 유행했던 터널식 천장도 일부 보인다. 하지만 웅진백제 터널식처럼 천장석 3~4매를 사용하지 않았고, 고임식 천장처럼 1매만 사용한 터널식도 존재하는 것으로 볼 때 터널식 천장구조는 사라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터널식 천장구조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발전하여 고임식 천장으로 변모하게 된다.

고임식 천장은 사비백제시기 주 천장구조인데, 7세기 초에 수평식 천장구조가 등장하면서 수평식과 고임식 천장은 공존하게 된다.

웅진백제말기 중국 전축분의 영향을 받은 터널식 천장구조가 사비백제로 들어오면서 백제화를 거친 고임식 · 수평식 천장구조로 변화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다. 중국의 문화가 선진문물이라 하여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아래는 발굴자료입니다. 무령왕릉만 발굴되었다는 것에 대한 반박이죠.

1) 공주 송산리 왕릉급 무덤 총정리

고분

천장

구조

묘실

규모

(길이*너비*높이)

형태

장축

부석시설

연도

위치

공주 송산리 1

궁륭식

302*287*56

장방형

북동

할석

우편재

공주 송산리 2

궁륭식

258*177*100

장방형

북서

할석

우편재

공주 송산리 3

궁륭식

333*279*312

장방형

북서

할석

우편재

공주 송산리 4

궁륭식

345*305*280

방형

북서

할석

우편재

공주 송산리 5

궁륭식

340*270*260

방형

북서

할석

우편재

공주 송산리 29

궁륭식

345*272*190

장방형

북서

할석

우편재

2) 능산리 왕릉급 무덤 총정리(복사가 잘 안되네요 계속 짤립니다.. 제가 인용한 논문들에 자세하게 나와있습니다)

고분

천장

구조

묘실

규모

(길이*너비*높이)

형태

장축

바닥

입구형태

연도

동상총

고임식

325*200*211

장방형

남북

관대

현문식

단연도

동하총

수평식

250*112*122

장방형

남북

판석관대

현문식

단연도

중상총

고임식

325*145*170

장방형

남북

관대

현문식

단연도

중하총

터널식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도배시러 18-04-12 19:46
   
백제 고고학에 대해 궁금한 점
백제는 기존 고구려 귀족들, 백가를 이끌고 분리하여 국가를 만들었는데...
한동안 고구려-백제 문화는 동일했어야 하는게 정상. 2국의 문화 차이가 발생한 시점은 언제인가 ?
-. 특히 묘제의 차이가 시작된 시기
     
그만혀 18-04-13 19:17
   
묘제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제와 고구려의 묘제가 비슷하던 시기는 석촌동 고분군 시기입니다. (적석총)
고구려는 건국전부터(기원전 1~2세기) 초기 단계의 적석총이 등장합니다. (고고학적으로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지만 문헌에서 나타나는 '졸본세력'과는 관계가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고구려에서 백제가 떨어져 나온 시기는 기원전인데 백제의 적석총은 3세기 말에나 등장하게 됩니다. 무려 300년 후에나 갑자기 등장하게 되는 것이죠. 물론 이전단계의 백제의 유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적석총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지역-고구려 지역어디에도 석촌동 고분과 같은 양식을 지닌 적석총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백제와 고구려의 묘제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고고학적으로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이죠)

전에도 제가 글을 쓴 것 같은데
3~4세기에 백제에 고구려계의 세력이 유입된 것 같습니다. 아니면 고구려의 문화를 받아들였다던지(그러나 이것은 토기, 기와로 볼 때도 연관성이 전혀없고, 같은 적석총이라고 해도 연도-천정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 고구려의 내란(왕위계승쟁탈전) 등으로 남하한 세력이 백제고위귀족이 되지 않았을까... 란게 제 어이없는 추측입니다.

요즘 용인에 있는 청동기시대 주거지를 발굴하느라 제가 글을 쓰고도 답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칼리S 18-04-12 20:13
   
애당초 대륙백제의 환상에 빠진 분들은 논문같은거는 외면합니다.

그럼 반대로 대륙에 백제의 유적이 있을까요?

무녕왕릉이 도굴을 면해서 다행이지, 이것마저 안 나왔으면 소설쟁이들 신났을거죠.
     
그만혀 18-04-13 19:24
   
대륙백제에 관해서는 부분적으로 인정하고는 있습니다만, 큰 규모는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경제적인 예속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why?
1) 요서-중국동부해안에서 백제계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음.
2) 유물이 발견되지 않더래도 백제식의 주거지는 나와야 하는데 이또한 발견되지 않음
3) 남제서를 신봉하시는 분들에 따르면 백제가 중국동부를 다먹었다고 하는데, 최소한 관인이나 백제의 은제 혹은 금제관식이 나왔어야 합니다. 고고학계에서는 은제관식 = 백제의 영역화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저를 식민사학자라고 욕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규원사화, 환단고기, 만주원류고, 일본서기, 조선상고사, 이덕일 책 모든 종류  봤습니다. 중학생때부터 사서 읽은 환단고기, 규원사화 ... 정독으로 7번은 봤구요, 만주원류고는 고고학적으로 접근하고 싶었기에 각주까지 달면서 봤습니다. 일본서기는 백제 고분연구 때문에 봤죠.
 개인적으로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선상고사와 규원사화 고조선 멸망이후입니다.
history2 18-04-12 21:07
   
저도 사실 백제의 왕실의 무덤이 잘  발견되지 않는점이 이해가 가질 얺습니다....그래서 한편으론 일본의 거대 전방후원분을 백제왕의 능침으로 생각해 보다가도, 또 그렇다고 하기엔, 백제멸망 후 왜 천황의 애닯은 하소연, 이제는 성묘하러 갈 땅을 잃었다는 그러한 읇조림을 보면 분명 백제 땅에 있을 것도 같구요...그런 생각입니다....중국에 있다면, 글쎄요 있어도 발견되기 힘드지 않을지요....!
     
그만혀 18-04-13 19:33
   
신라 마립간기 고분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비정이 끝난 상황(이견이 존재합니다만 거의 모든 마립간들이 언급되었죠)인데 백제같은 경우에는 무령왕릉을 제외하고 밝혀진 것이 없죠
  근데 무령왕릉이 밝혀졌기 때문에 오히려 공주시기 백제왕릉이 정립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정이상의 규모를 지니며 궁륭식 천정구조를 가진 것은 무령왕릉 이전시기의 왕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공주초기 백제의 왕권이 약한시기는 왕릉의 규모는 당연히 작았을 것입니다. (문주왕-삼근왕의 무덤)
 문주왕-삼근왕의 무덤을 확실하게 비정할 수 만 있다면, 공주시기 왕릉을 찾는 것은 무리는 아닐 듯 합니다.
비좀와라 18-04-12 21:20
   
본문에 있는 무덤들이 백제의 무덤이라고 추정하는 근거가 뭔지도 모르겠고요.

무녕왕릉은 남북조 시대의 남조 형식의 무덤이고 당시 남조는 한漢족의 국가라 무녕왕은 한화된 어떤 존재 이거나 한족 그 자체란 것을 추정 할 수 있단 말이죠. 여기서 백제는 한화된 종족이거나 한족이라고 추정이 되는 것이 공손씨 집안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거나 대방군과도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을 가정하면 말이 되죠.

이 논리를 좀 더 발전하면 현재의 한국인과 한족과 아무런 연관 없는 존재라면 백제는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 정말로 한족의 지방정부가 되는 것이죠. 따라서 백제의 유물이 중국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유물이라는 것이 백제의 유물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중국 남조의 문화와 백제의 문화가 다를까요? 같았단 말이죠. 그럼 어느 시기에 백제의 문화가 한화 되었는 가를 연구하는 것이 연구자의 도리죠.
     
그만혀 18-04-13 19:42
   
무녕왕릉은 남북조 시대의 남조 형식의 무덤이고 당시 남조는 한漢족의 국가라 무녕왕은 한화된 어떤 존재 이거나 한족 그 자체란 것을 추정 할 수 있단 말이죠.(어떤 방식으로 하면 이러한 추정이 나오는 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백제는 한화된 종족이거나 한족이라고 추정이 되는 것이 공손씨 집안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거나 대방군과도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을 가정하면 말이 되죠.
(백제 고분에 대해서 잘 모르시나 본데, 무령왕 이시기에만 전축분이 유행하고 그 이후에는 수평식 천정구조로 바뀌게 되는데, 수평식 천정구조는 백제가 중국의 영향에서 어느정도 벗어나 자기만의 묘제를 구축했다고 판단하는 근거입니다. 그리고 공손씨, 대방군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제 전공이 원삼국입니다. 공손씨 유물? 서북한지역에서도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전혀 근거가 없는 추론입니다. 대방군이라.. 백제는 오히려 낙랑군과 관련이 큽니다. 낙랑군의 제철정련방식만 봐도 낙랑군과 백제는 연관성이 큽니다. 특히 화성인근에서 발견되는 제련소는 낙랑과 백제의 관계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키죠)

그러면 중국 남조의 문화와 백제의 문화가 다를까요? 같았단 말이죠..(중국 남조의 문화와 백제의 문화가 어딜봐서 같았다는 겁니까ㅋㅋㅋ 주거지-양상-양상-무기-마구-가마-제련소 전부 다른데 그냥 추측성 글 쓰지 마세요. 공부안한 티납니다)
 그럼 어느 시기에 백제의 문화가 한화 되었는 가를 연구하는 것이 연구자의 도리죠.(4~6세기 전부 중국 북방의 영향이지만 남조의 영향은 무령왕시기 잠깐뿐입니다. 그 이후는 백제의 고유의 규격이 나타나며 중앙과 지방간의 규격차가 발생합니다. 오히려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백제만의 양식을 갖추고 있는데요? 공부좀 하세요 제발..)
history2 18-04-12 21:32
   
너무 담론이 크게 나가는데요,,,,,그러면 백제가 잘못하다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는 결과도 가능합니다...우리에게 일단은 유리한 해석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중국에서 백제의 유물이 왕창 발견된다고 해도 사실은 문제가 심각해 집니다..아무튼 비좀와라 님이 백제의 한화에 대한 지적은 사실 공감을 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잘 못 헛발을 디디면 동북공정의 천길 낭떨어지도 빠지게 됩니다.
비좀와라 18-04-12 22:20
   
동북공정에 빠질일이 없습니다.

제가 분명히 말했죠? 민족이나 족을 구분하는 것은 패션으로 구분 한다고요.

이미 한족은 조나라 무령왕이 호복(구리족 옺)을 채용해서 바지를 입고 이 패션이 전 중국에 퍼지는 순간 한족은 사라진거란 말입니다.

거기다가 청나라 만주족이 자신들이 패션(옷과 머리모양)을 강요하는 순간에 이미 한족은 유물이 된것이고요. 일반 사람들이 만주족이 사라지고 한족화 된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한족이 사라지고 만주족만 남게 되는 것 입니다.

여기에서 손문등이 주장하는대로 변하게 되는 것은 서양의 것을 따라 한 것이란 말입니다. 인민복이 한족의 의상이에요? 아님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개념과 언어가 한족의 것인가요? 이미 사라지고 멸족되어서 유물이 된 한족을 되살려서 정치적으로 이용 할려고 하는 것이 우스운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또 그대로 받아서 전달하는 한국의 쓰레기 같은 무리들이 우스운 것 이고요.

한국은 한족도 되고 몽골족도 되고 왜족도 되요. 우리는 그 모든 풍습과 패션을 다 가지고 있거든요. 이게 한족韓族이란 말입니다. 비빔의 문화와 혼합된 패션을 가진 존재요.

고구려 신라 백제와 가야와 현대 한국인의 관계에서도요. 한국인은 신라의 문화를 절대적으로 영향받고 있거든요? 고구려는 형수취사제와 데릴사위제란 말입니다. 그럼 한국의 풍습은 무얼까요? 민며느리제로 옥저의 풍습이고 옥저가 바로 신라 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구려와 현대 한국인은 혈통은 같지만 문화가 많이 틀리단 말이에요. 오히려 일본 동북지방의 문화가 고구려의 문화와 같단 말이죠.

집안 어른이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일본 유학시의 경험을 이야기 하는데 당시 1940년경에 같이 공부하고 있던 동북지방 출신의 한 사람이 당시 까지 남아 있었던 형수취사제로 인해서 형수와 결혼하는 것이 싫어서 먼 곳으로 공부하러 왔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1940년 까지도 고구려의 풍습이 일본 동북지방에 남아 있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형수취사제는 지금도 중동지방에 남아 있습니다. 고구려 문화는 현 한국인 보다는 중동과 일본에 더 남아 있단 말이죠.

그리고 측천무후는 이 형수취사제로 인해서 황후가 된 케이스로 당나라 황실은 고구려계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당나라와 고구려는 다르다고 한단 말이죠. 무얼 근거로? 그러니깐 당나라 /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부류고 신라는 옥저계로 혈통은 같지만 문화가 다른 집단 이었다는 것 입니다.

조금만 근본을 가지고 해석하면 현재의 해석이 얼마나 폐쇄적이고 한심 한지 알수 있단 말이죠.
     
Attender 18-04-12 22:42
   
신라=옥저

측천무후=고구려계 당나라인

한국=신라

일본 동북지방=고려?

띠요오오옹~!?
     
history2 18-04-12 22:59
   
조금 당황스럽네여...암튼 백제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이미 시작 되었습니다.
     
그만혀 18-04-13 19:43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부류고 신라는 옥저계로 혈통은 같지만 문화가 다른 집단 이었다는 것 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 양상은 다르다니까요?? ????? 그리고 신라랑 옥저랑 뭐가 같아요 주거지부터가 다른데)
관심병자 18-04-12 23:35
   
백제 왕릉의 위치와 백제의 영역이 일치해야 한다는 법은 없죠.
신라를 봐도 통일한후 백제와 고구려의 영역의 일부를 흡수해 통치했지만 수도는 그대로 경주였고,
로마제국 역시 제국으로 성장한 이후에도 중심지는 여전히 로마였습니다.
현대까지 남아있는 영국을 봐도,
확장을 시작하기전의 수도는 런던이었고, 대영제국 시절 전세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 중심지는 런던, 식민지들이 모두 독립한후에도 그대로 런던이죠.
     
그만혀 18-04-13 19:44
   
백제의 해외영토에 대해서 아주 부정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큐슈지역과 월주지역 일부는 거점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은 합니다. 특히 큐슈지역은 있었을 것 같아요 문화적으로 유사한 것이 많이 나타나요 특히 저장공과 부뚜막시설은 거의 같죠
신수무량 18-04-13 10:12
   
저의 댓글은 아래와 같습니다.
"무령왕릉이 그것을 뒷받침해주지는 못합니다. (첫번째 이유가 현재까지 딸랑 하나만 발굴되었고(추가로 발굴한다고 했는데 하고 있는 것인지...그 이외에 발굴된 무덤의 주인공은 지역유지(?)의 무덤이었습니다. 둘째로 그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인 것을 지석을 통해 알겠는데 무덤(왕릉)을 아들인 성왕이 만들었는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 만들었지는 모릅니다. 아들이 만들었다면 지석의 내용이 (아들인 장수왕에 의해 세우진 광개토태왕비와 비교했을 때) 매우 의심스럽다는 의견들이 있습니다.-저는 이 의심에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장문의 글과 논문을 인용하여 괄호 안의 내용을 반박하기 위해 노력하셨군요.
괄호 안의 내용에ㅐ서 딸랑하는 무령왕릉을 의미한 것인데 잘못 이해하셨나요? 릉의 주인공이 밝혀진 것은 그거 하나밖에 없는 걸로 아는데...
-----
국보만 17점 출토된 백제 무령왕릉… 삼국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주인 확인
http://blogs.chosun.com/pichy91/2013/07/16/%EA%B5%AD%EB%B3%B4%EB%A7%8C-17%EC%A0%90-%EC%B6%9C%ED%86%A0%EB%90%9C-%EB%B0%B1%EC%A0%9C-%EB%AC%B4%EB%A0%B9%EC%99%95%EB%A6%89-%EC%82%BC%EA%B5%AD%EC%8B%9C%EB%8C%80-%EC%99%95%EB%A6%89-%EC%A4%91/
-----

그리고 ''추가'로 발굴한다고 했는데 하고 있는 것인지......그 이외에 발굴된 무덤의 주인공은 지역유지(?=호족, 지방의 상당한 권력가)의 무덤이었습니다.'
발굴관련해서, 이 부분은 제가 어느 기사에 스치듯 본 것이 있어서 언급했던 겁니다. 무덤을 전혀 발굴한적이 없다는 의미로 쓴 것이 아닙니다. (괄호의 내용은 무령왕릉에 대한 부가적 설명이었는데,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었다면 제가 좀더 자세하게 썼어야 했는데 부족했군요..)

다시 찾아보니 이런 계획이 있군요. 이번 (재)발굴 때 보다 더 정확한 발굴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백제왕도 핵심유적 ‘부여 능안골 고분군’ 발굴조사 착수
http://english.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jsessionid=IFgyP1TUfWDxMJggPet2246X6T84gJaSwoXYwlmX8xhrn1MOMx1sH3B1YiOgR5d7?newsItemId=155700674§ionId=b_sec_1&pageIndex=1&pageUnit=10&strWhere=&strValue=&sdate=&edate=&category=&mn=NS_01_01

'그 이외에 발굴된 무덤의 주인공',  금동관관 금동신발이 발견된 대부분이 호족(그 지역 권력가)인걸로 알고 있어서 표현한 것입니다.

원점에서....
글쓴이의 글 표현도 '왕릉급'이지 왕릉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백제 '왕'을 한번 볼까요..
-----
일본 사카모토 오시타네(坂元義種) 교수의 논문 「5세기의 百濟大王과 그 王侯」라는 논문에는 『옛날 百濟에는 불사후(弗斯侯), 팔중후(八中侯), 도한왕(都漢王), 아착왕(阿錯王), 매려왕(邁廬王), 피중왕(避中王) 등 지명을 곁들인 왕후가 있었다』고 했다.
《남제서(南齊書)》라는 중국 역사책의 〈百濟國傳〉에 더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무제(武帝) 영명(永明) 8년(490년)에 백제의 동성왕(東城王)이 신하들의 논공행상을 한 내용의 표를 올려 『영삭장군(寧朔將軍) 면중왕(面中王) 저근(姐瑾)을 관군장군(冠軍將軍) 도장군(都將軍) 도한왕(都漢王)에, 건위장군(建威將軍) 팔중후(八中侯) 여고(餘古)는 영삭장군(寧朔將軍) 아착왕(阿錯王)에, 건위장군(建威將軍) 여력(餘歷)은 용양장군(龍驤將軍) 매려왕(邁廬王)에, 광무장군(廣武將軍) 여고(餘固)는 건위장군(建威將軍) 불사후(弗斯侯)에 임명했다』고 했고, 495년에는 침략한 (선비족의) 위군(魏軍)을 무찌른 공로로, 『사법명(沙法名)을 행정노장군(行征虜將軍) 매라왕(邁羅王)에, 찬수류(贊首流)를 행안국장군(行安國將軍) 피중왕(辟中王)에, 해례곤(解禮昆)을 행무위장군(行武威將軍) 불중후(弗中侯)에, 목간나(木干那)는 행광위장군(行廣威將軍) 면중후(面中侯)에 임명했다』고 썼다.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6&mcate=M1060&nNewsNumb=20141115967&nidx=13837
-----
백제에는 왕이 엄청 많았군요...

학문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의심(why)'을 가져야 합니다. 이 의심이 없다면 학문할 필요가 없죠...
백제 왕릉급...좋습니다. 빨리 그 주인공들이 밝혀지길 저도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문은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무령왕릉의 지석관련해서도 학자 또는 그 영역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의심이 들지 않나요?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
(제가 왕이 제 아버지(선대 왕)의 무덤을 축조한다면 저런 표현은 안쓸 거 같은데....백제왕인지 아닌지 아들이 쓸필요가 있을까....
반대로 아들이 그렇게 표현했다고 치면 '왜' 저렇게 표현해야 했을까...뭐 이런 의문이 저는 들겠습니다.)
 




백제왕도 핵심유적 ‘부여 능안골 고분군’ 발굴조사 착수
http://english.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jsessionid=IFgyP1TUfWDxMJggPet2246X6T84gJaSwoXYwlmX8xhrn1MOMx1sH3B1YiOgR5d7?newsItemId=155700674§ionId=b_sec_1&pageIndex=1&pageUnit=10&strWhere=&strValue=&sdate=&edate=&category=&mn=NS_01_01
     
그만혀 18-04-13 20:32
   
국보만 17점 출토된 백제 무령왕릉… 삼국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주인 확인
무령왕이라는 것이 직접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 된 것이지, 다른 고분들이 누구의 것인지 아예 모르는 상황이 아닙니다.  특히 고구려의 경우 발굴이 많이 되어서 연구가 거의 완료단계에 이른지 오래입니다.  이 비정에는 무기-마구-갑주-토기양식-묘제-절대연대 측정이 동원되었습니다.

 고구려 (강현숙)
서천왕 칠성산 211호, 미천왕 서대총or천추총, 고국원왕 우산하 992호 태왕릉, 소수림왕 임강총 마선구 2100호 천추총, 고국양왕 천추총 태왕릉, 광개토왕 장군총 태왕릉, 장수왕 장군총-전 동명왕릉 경신리 1호, 문자왕-토포리 대총, 양원왕-호남리 사신총, 평원왕 강서대묘, 영양왕-강서중묘

다 맞다고 생각은 안합니다만, 서대총or천추총, 장군총, 강서대묘, 강서중묘만큼은 거의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름이 안나와서 정확하게 교과서에 싣지 못하는 것이죠.(물론 이견들이 존재합니다만 몇 개의 왕릉들은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금동관관 금동신발이 발견된 대부분이 호족(그 지역 권력가)인걸로 알고 있어서 표현한 것입니다.
(금동관, 금동신발 등이 나오면 초상위 귀족or왕실입니다 지역 권력가나 호족수준이 아니에요. 님이 말씀하신 왕(백제왕 밑에 있는 왕들)급들이나 사용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왜냐구요? 백제는 금제 관식을 아무에게나 뿌리지 않아요. 왕가와 관련된 유적에서만 출토됩니다. 지역의 수장급이라고 해도 은제관식이 출토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은제관식 = 백제 영역화 = 지역 수장 or 지역 관리수장이라는 인식이 일반화 된 것은 90년대~00년대 극렬하게 일어난 영산강 유역의 발굴 덕분입니다.  6세기 중후엽에 이르면 출토되기 시작하는데, 극히 일부 무덤에서만 출토됩니다. 출토된 무덤은 영산강 유역에서 최상위에 해당하는 무덤이죠.
 백제 영토의 3분지 1(한반도 백제영역 기준)에 해당하는 거대한 영토인데 이 지역의 최상위 계층조차도 은제관식을 썼습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경기도+충청도지사 급 되는 사람이 은제관식을 썼어요. 당대 백제에 그 사람보다 높은 위치에 있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8대 대성? 왕실?  님이 말하는 백제왕 예하의 왕? 8대 대성의 대다수도 영산강 유역을 관리하는 사람보다 높지는 않았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왕릉급이라고 해서 오해가 발생한 모양인데 백제왕 예하의 왕은 전 왕으로 치지 않습니다. 백제에 그러한 왕들이 있었다는 것이 문헌상으로 나타나있죠.
 자 먼저 상식선에서 접근해보죠.  행안국장군(行安國將軍) 피중왕(辟中王)을 예로 들겠습니다. 행안국..이라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봉을 받았다는 거겠죠? 다른 장군들도 분봉과 같은 위치를 받았을 것이구요. 이들은 모두 백제 중앙에 있었을까요? ? 그럴리가 없죠 다는 아니어도 몇명이라도 한반도 내에 자기의 거점을 지녔겠죠? 자 여기까지는 문헌에 따른 상식적인 접근입니다.
 근데 그 분봉을 받았다던 시기에 백제의 무덤은 규격화가 시작이 됩니다. 지방 최상위 고분이라고 해도 중앙 최상위 고분에 비하면 규모, 구조, 부장품 측면에서 질이 매우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중앙보다 질이 떨어지는 지방 고분 중에는 님이 말씀하신 백제왕 예하의 왕들이 무덤이 있었겠죠? 그럼 그들의 무덤이 중앙에 있는 왕릉급 무덤일 수 있을까요?
 상식선에서 같은 예하 왕끼리 고분은 급이 같아야겠죠? 그리고 백제왕과는 급이 달라야겠죠? 무슨말이냐면, 님이 말하는 예하왕의 무덤을 왕릉급 무덤에 비정하는 것 자체가 오류인 겁니다.

 제가 말한 '왕릉급'고분은 중앙에서도 최상위 고분을 말한 것인데(고고학계에서는 그렇게 부르는 것이 일반적임) 왕릉급 고분은 웅진에는 6개~7개, 사비에는 13~14개 정도가 있어요. 그마저도 크게 쳐서 그런거지 웅진에는 5~6개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고 사비에는 8~9개 정도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아 손아프기도하고.. 여기까지만 써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실테니까 그만쓸래요..
 
 
Total 19,980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5758
19818 [한국사] [FACT] "강감찬" 이지 "강한찬" 이 아니다. (3) 아비바스 11-15 688
19817 [기타] 강감찬 / 강한찬 (2) 관심병자 11-14 514
19816 [한국사] [FACT] 15년전, MBC에서 방영했었던 대제국 고구려 참역… (2) 아비바스 11-13 750
19815 [한국사] 역사학자가 말하는, 광개토대왕이 10년을 더 사셨다… (3) 아비바스 11-13 626
19814 [한국사] 역사학자가 말하는 고구려가 삼국 통일을 한다면? (1) 아비바스 11-13 545
19813 [기타] 인도 타밀 고고학 발굴성과 (ft.아라가야 도부호)및 … (5) 조지아나 11-13 574
19812 [일본] [FACT] 일본에서 올린 논란의 영상 "This is a Pen" (1) 아비바스 11-12 605
19811 [한국사] [FACT] 이 세상 모든 발음을 정복하자! – IPA(국제음성… (3) 아비바스 11-12 528
19810 [기타] 일제 잔재중 가장 시급하게 정리되야 할것 (7) 관심병자 11-12 618
19809 [기타] 일본계 인도인추정 85만유투버. 일본인 논문을 내세… (4) 조지아나 11-12 796
19808 [한국사] [FACT] 일본의 가타카나는 한국의 구결에서 왔다 (1) 아비바스 11-11 539
19807 [한국사] [FACT] 한중일 언어의 변화 (1) 아비바스 11-11 510
19806 [한국사] [FACT] 고대 한국어, 만주어와 일본어 속의 옛 한국어 … (2) 아비바스 11-11 555
19805 [한국사] [FACT] 인도어(타밀어, 드라비다어)와 한국어 비교 검… (6) 아비바스 11-11 477
19804 [한국사] 옛 한글중 일부가 사라진 배경이 일본정부에 의해… (2) 조지아나 11-11 538
19803 [한국사] [FACT] 세계적 과학저널 "네이쳐(NATURE)" 한국어의 기원… (1) 아비바스 11-10 601
19802 [한국사] [FACT] 세계적 과학저널 "네이쳐(NATURE)" 트렌스유라시… (1) 아비바스 11-10 449
19801 [한국사] [FACT] 세계적 과학저널 "네이쳐(NATURE)" 요하문명은 트… (14) 아비바스 11-10 497
19800 [한국사] 사실은 유전자전쟁중인 5000년 한국사 (3) 금성신라 11-09 928
19799 [한국사] [충격] 연구가 필요한 태극과 금성 (1) 금성신라 11-09 673
19798 [한국사] 티벳 장족" 그리움 " 곡 도입부 "아리랑"과 유사 (1) 조지아나 11-08 1038
19797 [한국사] 성헌식 인터뷰 - 산서성의 지배자 고구리 하늘하늘섬 11-08 499
19796 [한국사] 티벳의 Relpa dance ( 삼태극 소고 무용) (3) 조지아나 11-08 497
19795 [기타] 딱 걸린 조작 ! 중국왕조 영토지도 관심병자 11-08 636
19794 [기타] 5백년전 명나라 지도, 明과 高麗 등 지명 분석 관심병자 11-06 1224
19793 [한국사] 합단의 침입 경로로 살펴본 고려의 동북 영토 (지도 … (4) 보리스진 11-04 997
19792 [한국사] 고려 후기 의주의 영토: 형제산, 청수구자 (지도 첨부 (3) 보리스진 11-03 1001
 1  2  3  4  5  6  7  8  9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