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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4-15 18:17
[중국] 중국역사책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중국의 역사(중국이라는 거짓말)
 글쓴이 : history2
조회 : 1,192  

중국 역사책이 가르치지 않는 중국 역사

 

1. 60년 동안 흉노에게 비단과 식량을 바친 한나라

 

역사학자가 자기 나라에 불리한 사실을 기사나 논문을 통해 공개하면, 그는 불이익이나 압력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인들은 단순한 선물로 받은 경우에도 그것을 조공으로 포장한다. 19세기 초 청나라가 인정한 공식적인 조공국은 조선,유구(오키나와),베트남,라오스,태국,술루(핀리핀),미얀마,네팔,카자흐한국,코칸드한국,네덜란드,포르투갈,영국,로마교황청 등이다.

 

그런데 네덜란드부터 로마교황청까지는 중국에 조공무역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선물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중국은 이를 조공으로 표현했다.

 

반면 중국인들은 나라가 흉노에게 바친 조공을 기억하지 않는다.

 

나라의 통일 후 만리장성의 축성은 몽골 초원에서 흉노족을 중심으로 거대제국이 형성되는데 일조했다.

 

고조는 기원전 202년 이후 흉노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200년 겨울 그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와의 전쟁에 나섰다.

 

그러나 고조는 흉노의 유인에 말려 포위되었고, 흉노족 선우 묵돌의 황후에게 뇌물을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포위를 빠져 나갈 수 있었다.

 

기원전 198년 평화조약에서 고조는 불리한 조건을 수용해야 했다. 중국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시집보내고, 매년 비단과 식량을 보내야 했다.

 

이는 서로가 주고받은 조공무역이 아니라, 나라가 흉노에게 일방적으로 바치는 조공이었다.

 

그에 비해 흉노의 의무사항은 만리장성을 넘지 않는다는 것 뿐이었다. 이런 관계는 7대 황제인 무제 때까지 상당기간 계속되었다.

 

나라가 60년 이상이나 흉노에 대해 굴종의 자세를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교과서는 이런 사실은 은폐되어 있다.

 

미녀 조공의 대표적 사례는 왕소군이다. 왕소군은 10대 황제인 원제의 후궁으로, 황명으로 흉노족 선우인 호한야에게 시집간 인물이다.

 

호한야의 아들을 낳은 왕소군은 호한야가 죽자 그의 아들인 복주루가 선우가 되자 그의 부인이 되어 딸 둘을 낳았다.

 

원제는 왕소군이 절세미인인 것을 모르고 흉노에 넘겼다. 당시 후궁들은 수가 너무 많아 황제를 만나기가 어려웠다.

 

황제는 후궁들의 초상화를 보고 그 날의 상대를 선택했다. 후궁들은 자신의 초상화가 아름답게 그려지도록 화가들에게 뭔가를 줘야만 했다.

 

왕소군은 화가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다. 그녀의 초상화는 실제보다 못했고, 이 때문에 황제에게 무명의 존재로 남았던 것이다.

 

나중에 왕소군의 미모가 황제에게 알려졌고, 왕소군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참수형에 처해졌다.

 

南宋 군주는 금나라 황제의 책봉을 받아야 했고, 매년 은 25만 냥과 비단 25만 필을 조공했다.

 

중국의 교과서는 거란족이나 여진족 모두 중국의 일원이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기록해 이러한 굴욕을 자국 내 문제로 덮어 버렸다.

 

 

2. 조공을 받는다는 것은 중국에게 때로는 고통이었다.

 

조공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양방향적인 것이었다. 한족이 중국을 차지한 경우 중국은 주변국가와의 조공무역에서 대체로 적자를 봤다.

 

중국의 교과서는 주변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고, 중국은 주변국의 왕을 책봉하고 상을 하사했다고 표현한다. 중국은 한마디로 체면문화의 나라다.

 

역사적으로 조공무역을 둘러싼 중국의 태도에서는 실제로는 부담스러운 반응이 강하게 나타난다.

 

의 주원장은 고려에게 연 3회 공식적인 조공무역을 하도록 했다. 적자무역을 연 3회나 허용한 것은 전략적 중요성을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진 직후, 조선 해적이 중국 연안을 침범하고 조선이 여진족과 제휴하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은 조선과의 관계에서 뒤통수를 얻어맞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때 주원장이 선택한 카드가 조공무역 횟수를 제한시킨 것이었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1393년 태조2년 때, 주원장은 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사신 남재에게 "앞으로는 3년에 한 번씩만 찾아오라."고 말했다.

 

이 말은 해마다 세 번 하던 무역을 3년에 한 번씩만 하겠다는 의미였다. 무역 횟수를 대폭 줄인 것이다.

 

이는 조선에 경제적 불이익을 줌과 동시에, 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물론 주원장은 그런 속내를 숨겼다.

 

이에 대해 조선은 연 3회 조공무역을 견지했다. 의 무역축소 조치를 거부한 것이다. 이는 양국간의 무역분쟁으로 비화되었다.

 

이런 상황을 모르고는 조선의 사대가 심각했다고 오해할 수 있다.

 

3회 조공무역을 고집한 주인공은 이 지배하던 요동을 정벌하자고 주장한 정도전이었으니, 이 문제는 사대주의와는 무관함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문제는 1398년 요동정벌의 기수인 정도전이 제거된 이후에야 해결되었다.

 

조선에서 정도전이 제거되고 요동정벌 움직임이 사라지자, 1400은 무역손실을 감내하면서까지 조선의 요구를 수용했다.

 

경제적 손실을 인정하는 대신, 안보상의 이익을 얻는 선에서 문제를 마무리했던 것이다.

 

이로써 조선은 정월 초하루(하정사), 황제 생신(성절사), 황태자 생신(천추사)에 사신을 보내고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유구(오키나와)2년에 1, 안남(베트남)과 섬라(태국)3년에 1, 일본은 10년에 1회와 비교하면 조선은 상당히 큰 특혜를 받은 셈이다.

 

1531년부터는 동짓달에 보내는 동지사까지 추가되어, 4회 무역하는 나라가 되었다.

 

물론 조선은 무역흑자의 대가로, 이 여진족을 정벌할 때마다 군대를 파견해 공동작전을 수행해야 했다. 피의 대가로 무역흑자를 얻었다.

 

조공무역은 에 손실이 컸다. 사신이 국경에 들어가면 사신이 지나가는 지방의 관청과 백성이 사신을 접대하는 게 관행이었다.

 

입국 이후 도성에 들어가기까지 술과 음식은 물론 선물까지 접대해야 했다. 거리가 멀수록 의 손실이 커졌다.

 

옥스퍼드동양학연구소 제임스 루이스 교수는 한국학술지 <대동문화연구> 68집에 발표한 <문명의 가격? 17~19세기 조선의 일본으로의 사절의 역할과 비용>이란 논문에서, 17세기 일본이 조선통신사 접대에 사용한 비용이 전국 농업생산량의 3% 정도라고 추산했다.

 

조선통신사가 방문할 때마다 일본 경제가 휘청거렸던 것이다. 부담을 느끼기는 대마도나 일본 사신을 맞아야 하는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경상도 농업생산량의 22% 정도를 소비했다.

 

은 일본과의 조공무역을 10년에 1회로 제한했다. 이 조치는 왜구의 활동을 늘리게 했고, 1523년에는 닝보에서 왜구들끼리 무력충돌이 있었다.

 

1547은 일본과 외교관계 단절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결국 1551년에 일본과의 관계를 중단했다.

 

당연히 일본에서는 중국 감정이 커졌다. 이런 분위기의 결정판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복을 기치로 내걸었다.

 

하지만 그의 실질적 목적은 과의 무역을 재개해 일본 경제의 활로를 모색하는 데 있었다.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은 요동에서 여진족을 지키던 부대를 지원군으로 보냈다. 이틈을 타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을 압박했다.

 

무역분쟁으로 인한 1551년 명과 일본과의 외교 단절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이어지고, 이것은 다시 1644의 멸망으로 이어진 것이다.

 

3. 중국 역사의 절반도 되지 않는 한족 왕조

 

魏晉南北朝 시대는 五胡十六國 시대와 남북조시대를 총칭하는 표현으로 이 시대만큼 漢族이 이민족의 영향에 심하게 노출된 적은 없을 것이다.

 

"後漢 말기 이래 중원에는 흉노족,선비족,갈족,저족,강족 등의 소수민족은 漢族과 더불어 400여 년간 결혼하고 잡거하는 과정에서 상호학습하고 상호생산을 도왔다. 그래서 북조 말년에 이르러서는 胡族漢族의 차이가 점차 사라지면서 민족대융합이 실현되었다." - <중국고대사> 2006.

 

五胡가 중국영토를 점거했지만 중국에 동화되었다고 중국 교과서는 기술하고 있다. 이는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보는 오류다.

 

漢族이 중국을 지배한 것은 나라 때부터다. 선비족의 후예들은 나라와 나라를 세웠다.

 

(209), 後漢(195), 北宋(167), 南宋(152), (276), 신중국은 2015년 현재 103년으로, 도합 1,102년에 불과하다.

 

漢族의 관점으로 중국대륙의 역사를 획일화하는 것은 중국 땅에서 벌어진 진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4. 몽골과 티베트 역사는 중국 역사인가?

 

"몽골은 우리 국경 안에 있는 오래된 소수민족의 하나로... 1206년 테무친을 대칸으로 추대해 몽골정권을 수립했다... 1276년 원나라 군대는 남송을 멸망시켰다.... 원나라의 통일은 우리나라의 통일적 다민족 국가의 발전과 민족의 융합을 촉진했다." <중국역사> 1987.

 

중국의 교과서는 칭기즈칸의 정복사업을 몽골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을 위해서 벌였다고 보고 있다.

 

이런 식의 서술은 漢族의 치욕을 숨기고, 동시에 몽골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중국 학자들은 "우리의 위대한 조국은 국내 각 민족이 공동으로 창건한 것이며, 역사적으로 중국의 범위는 중원 왕조의 관할지역 외에도 각 소수민족,부족이 건립한 지방 왕조의 관할지역도 포괄한다."라고 中國의 개념을 말한다.

 

漢族 뿐 아니라 소수민족,부족도 중국 역사공동체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5. 수나라 멸망의 진짜 이유, 고구려 침공

 

공자가 동아시아 역사 서술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상당수 한국인들은 김부식이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역사를 망쳐 놓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자가 역사 서술에 미친 부정적 영향을 그보다 훨씬 더 컸다. 공자가 <춘추>에 반영한 역사서술 방식을 春秋筆法이라 부른다.

 

우리말 사전에는 春秋筆法'오직 객관적인 사실에만 입각해서 엄정하고 비판적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설은 실제와는 다르다. 春秋筆法은 객관적 서술방식이 아니다. 春秋筆法은 대의명분에 입각한 역사서술법이다.

 

무엇이 대의고 무엇이 명분인지에 입각해서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다. 대의나 명분이 객관적인 것인가? 결코 아니다.

 

대의나 명분을 세우는 이들은 흔히 정치적 입장을 가진 자들이다. 대의명분은 상대편에서도 갖고 있다. 이는 상대적 세계관을 반영할 뿐이다.

 

춘추필법의 궁극적 목적은 악을 경계하고 선을 권장하는 것이다. 즉 권선징악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선과 악은 중국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춘추필법에 따르면 자신의 전쟁은 정복,정벌,토벌로 표현한다. 상대의 전쟁은 침략,침입 등으로 표현한다.

 

자신의 살인은 응징,징벌로 표현한다. 승리한 전쟁은 상세히 수록하고, 패배한 전쟁은 간략기 기술하거나 숨긴다.

 

현실이 무엇인지 판별하지 못하도록 숨기거나 왜곡하기도 한다. 나라의 고구려 침공 실패로 결국 가 멸망했음에도 그 중요성이 누락되었다.

 

 

6. 해적이 이끈 명나라 부흥운동

 

왜구가 약해진 16세기 후반 이후에는 정지룡,정성공 부자, 정을,정일수 부부, 장보자,삼응차이 등 중국인들이 동아시아 바다의 무법자였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교과서는 중국인들이 이런 짓을 했다는 것은 언급하지 않는다. 중국 교과서에서 해적질은 일본인들의 몫이다.

 

 

7. 중국은 세계 문명을 주도하지 않았다.

 

중국인들 중에는 거의 모든 문명이 중국에서 형성되고 문화교류도 중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실제로 중국이 그런 역할을 한 지는 2천 여 년 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무제 이전 중국은 세계적으로 그렇게 유명한 나라가 아니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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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 18-04-15 20:51
   
오죽하면 로씨야어로 중국을 뜻하는 말이 거란으로부터 유래된 키타이... 송나라의 명복을 빕니다
6시내고환 18-04-19 23:26
   
몽골은 우리 국경 안에 있는 오래된 소수민족의 하나로
드런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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