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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4-15 18:23
[일본] 일본역사책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일본의 역사
 글쓴이 : history2
조회 : 1,450  

일본 역사책이 가르치지 않는 일본 역사

 

1. 한반도에서 문명을 전수받은 고대 일본

 

1498년 연산군 시절 유자광 등의 고변으로 무오사화 정변이 발생했다. 사림파의 정신적 지주 김종직이 수험생 시절에 쓴 弔義帝文이 문제였다.

 

같은 해인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 가마는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동쪽으로 항해하는 항로를 열었다.

 

초원길,비단길 등 육로로 문명교류가 이루어진 인류사회에서 이것은 혁명을 알리는 신호였다. 소외되었던 해양권 국가들의 성장속도가 빨라졌다.

 

해상 루트를 통한 문명교류의 비중이 커지면서 대서양 연안국과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힘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과 중국은 임진왜란이라는 충격을 겪고도 여전히 해양의 중요성을 무시했고, 두 나라는 세계 문명의 새로운 흐름을 놓쳤다.

 

에가미 나미오는 부여,고구려 등 북방 기마민족(유목민족)이 한반도 남부를 거쳐 일본에 진출해 야마토 조정을 세우고 열도 선진화에 기여했다고 했다.

 

18세기까지 일본인들은 어떻게든 조선문화를 수용하고 싶어 안달을 했다. 20세기에는 한국과의 관련성을 어떻게든 부인하려고만 한다.

 

일본 교과서에는 한반도에서 전파되었다는 표현 대신 대륙에서 전파되었다는 표현을 쓴다.

 

 

2. 일본 신국 건설과 백제 유민

 

한국인들에게 낯선 일본의 모습 중에 대표적인 것이 神道라는 신앙이다. 고등종교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 온통 신의 나라인 일본은 낯설다.

 

하지만 100년 전만 해도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마을 입구마다 솟대,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성황당,돌무더기,정화수 등을 볼 수 있었다.

 

옛날 한국의 신앙과 일본의 신앙 사이에는 얼마든지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현대 일본의 神道 신앙은 사실은 낯선 게 아니다.

 

일본의 무사 문화도 마찬가지다. 고려시대 문과 위주의 과거시험이 정착된 이래 한국인은 무인보다는 문인의 통치에 보다 익숙해졌다.

 

그 이전의 삼국시대 삼국의 문화는 무인의 기상이 사회적으로 널리 수용되었다. 화랑,조의선인 등이 그 사례다.

 

1170년 정중부 등이 무신정변을 일으킨 건, 무신에 대한 차별 뿐 아니라, 이전의 기득권을 차지하고자 한 응전의 차원에서 벌인 일이었다.

 

일본은 660년 백제의 멸망을 계기로 새로운 나라로 바뀌었다. 당시 일본의 원래 국명은 倭國이다.

 

倭國日本으로 바뀐 시점은 백제 멸망 직후인 671(문무왕1012)이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문무왕 편에 일본 국호변경의 순간이 기록되어 있다.

 

"문무왕1012. 倭國이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었다. '해 뜨는 곳과 가까워서 이렇게 이름을 붙인다'고 스스로 말했다."

 

이 조치가 일본 율령에 반영된 시점은 30년 뒤인 701년이다.

 

왜국이 671년에 국호를 바꾼 이유는 백제 멸망과 관련이 깊다.

 

백제와 왜국의 동맹은 오늘날의 한미동맹 이상으로 견고했다. 660倭國 지배층은 백제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662년에 백제부흥운동의 주역인 복신에게 군수물자를 지원했고, 663년에는 백강(금강)에 군대를 보내 나당연합군에 맞서게 했다.

 

백강 전투에서 패배한 뒤 倭國 지도층은 "백제란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에 어찌 돌아갈 방법이 있으리요!"라고 한탄했다.

 

백강 전투 직후 백제 난민 구출작전을 목적으로 일본 수군이 전라도 해안에 상륙했다.

 

665년 난민 400여 명에게 정착지를 제공했고, 666년에는 난민 2000여 명에게 집터를 지원했다. 671년에는 약 70명의 백제인에게 관직을 부여했다.

 

백제가 멸망하고 일본 국호가 채택되던 시기에 倭國에서는 중대 혁신이 발생했다.

 

日本이라는 국호는 백제인들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태양 쪽에 있다고 해서 日本을 채택했다.

 

倭國人들의 눈에는 자기 나라가 해 뜨는 곳일 수 없다. 倭國을 해 뜨는 곳으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은 倭國의 서쪽에 사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3. 쇼군은 명나라 황제의 책봉을 받았다.

 

1873년 소에지마 다네오미 일본 외무대신이 청나라 외부부인 총리각국사무아문을 방문했다.

 

소에지마는 총리아문 대신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귀국은 조선이 속국이기는 하지만 내치,법률에 대해서는 간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렇습니까?"

 

총리아문 대신은 "속국의 내정과 외교에 대해서는 간여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소에지마는 "그렇다면 조선이 외국과 평화를 하든 전쟁을 하든 귀국은 간여하지 않는 겁니까?"라고 되물었다.

 

총리아문 대신은 "간여할 바가 아니다."라고 힘 주어 말했다.

 

이를 근거로 일본은 1875년 운양호 사건을 일으키고, 1876년 조선을 강박해서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청나라 입장에 꺼림칙한 데가 있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강화도조약 제1조였다.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국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하지만 조선과 청나라의 반응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조선은 자주국인데 일본이 그런 조항을 고집한 이유는 뭘까?

 

일본이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데는 1551년 명과 일본의 국교단절 사건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이 관계를 다시 가동시킨 것은 1871년이었다. 이 해에 일본과 청나라와 청일수호조규를 체결했고, 이 조약은 1873년부터 발효되었다.

 

1873년 소에지마가 청나라 총리아문을 방문한 것은 이 조약의 비준문을 교환하기 위해서였다.

 

1551~1871년까지 일본은 근린국 가운데 조선과 오키나와 두 나라와만 외교관계를 맺었다. 일본은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무딜 수 밖에 없었다.

 

일본 교과서는 쇼군이 명나라의 책봉을 받고 조공무역을 허락받은 것을 기록하지 않았다.

 

 

4. 일본이 조선통신사를 환대한 이유

 

1551과의 외교단절 이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의존도는 다시 높아졌다. 일본이 조선통신사를 극진히 환대한 이유다.

 

일본경제가 상당 수준에 도달한 18세기 후반부터 조선통신사를 과도하게 대접하는 데 회의적인 목소리가 막부 내부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온 방안이 통신사를 일본에 부르지 않고 대마도까지만 부르는 것이었다. 지역을 바꿔 빙례(聘禮), 즉 선물증정의식을 치른다는 의미다.

 

이를 易地聘禮라고 했다. 역지빙례는 1797년 조선에 통고되었다. 당시 정조는 이 제안에 불쾌감을 느껴 거절했다.

 

외교적 줄다리기는 1811년이 되어서야 일본측 제안대로 대마도에서 통신사에 대한 빙례가 거행되었다. 이때가 마지막 통신사였다.

 

일본 경제가 한민족에게 의존한 기간은 18세기 후반까지 수천 년이었다.

 

 

5. 일본 경제 도약의 밑거름이 된 임진왜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일본이 동아시아를 상대로 가혹한 만행을 저지른 데는 이전까지 소외되었던 일본의 경험도 한 몫 했다.

 

일본이 동아시아 무역에서 소외되었음에도 19세기 후반 동아시아를 능가할 수 있었던 것은 16세기부터 통합된 지구적 차원의 바닷길 때문이었다.

 

해상무역으로 인해 뒤쳐졌던 서유럽과 일본이 빠르게 성장했다.

 

1543년 광저우로 가던 포르투갈 선박이 태풍에 휩쓸려 일본까지 표류하다가 구조되었다.

 

포르투갈 선원들은 현지인들에게 조총 두 자루를 선물했다. 훗날 일본이 임진왜란 때 선보인 신무기는 이렇게 일본에 소개되었다.

 

이후 제한된 동아시아 무역에서 벗어나 일본은 세계시장으로 운신의 폭을 넓히게 되었다.

 

17세기 일본은 조선 도공들의 도움으로 도자기 산업을 일으켜, 중국의 3대 수출품인 도자기,,비단 중 도자기 수출에서 중국을 앞질렀다.

 

 

6. 오키나와는 1879년까지 독립왕국이었다.

 

대만과 일본 열도 사이에 동지나해(동중국해)가 있다. 여기에 기다란 섬들이 있다. 오키나와 섬이다.

 

오키나와는 대만이나 일본열도를 견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국과 한반도의 태평양 진출까지도 견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1876년 런던에서 발행된 잡지에는 "영국이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적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오키나와를 점령해야 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잡지의 보도는 일본의 대외정책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로 일본이 1879년에 오키나와 점령을 서둘러 강행한 것이다.

 

 

7. 20세기 초 일본 근대화의 비밀

 

17~18세기 일본의 경제성장의 자신감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건 1811易地聘禮. 조선은 이것의 숨은 경제적,정치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조선은 정조가 죽은 후 1804년부터 안동 김씨 일파가 주도하는 세도정치 시대에 들어갔다. 당시 정권은 세계정세에 무지했다.

 

일개 당파의 운명에만 골몰한 그들은 이웃 일본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일의 의미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일본에게 역전당했다는 사실을 조선이 깨달은 것은 1875년 운양호 사건과 1876년 강화도조약을 겪으면서였다.

 

19세기 중국은 영국,러시아,프랑스,독일 등의 유럽 국가들에게 수모와 치욕을 당했다.

 

하지만 서양 국가들보다 훨씬 더 큰 상처를 중국에게 안긴 나라는 바로 일본이다. 일본은 더 강도 높게 중국을 침탈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서구화 노선을 추구한 일본은 1873년 청일수호조규 발효를 계기로 중국 무대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1511년 이래 단절된 대중국 교역의 길을 300여 년 만에 다시 연 것이다.

 

1902년 중국에 투자된 외국자본 15930만 달러 중에서 일본 자본은 5,360만 달러로 전체의 3.6%에 불과했다.

 

1914년에는 12.9%, 1930년에는 40.5%, 1936년에는 48.9%, 1941년에는 74.5%로 뛰었다. 40년 만의 일이다.

 

후발주자인 일본이 얼마나 집요하게 중국의 뼈와 살을 뜯어 갔는지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일본이 조선병합,만주사변,태평양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약탈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일본 경제의 급부상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게 바로 고액의 전쟁 배상금이다.

 

1895년 청일전쟁을 마무리하는 마관조약(시모토세키조약)에서 일본이 얻은 것이 2억 냥의 배상금이다.

 

이는 청나라의 3년 치 예산, 일본의 4년 반 치 예산에 해당되는 거액이었다. 이 돈은 일본의 군비와 산업을 일으키는 밑천이 되었다.

 

4년 반 동안이나 쓸 돈에 힘입어 일본은 경제개발과 조선 강탈에 필요한 준비작업을 본격화할 수 있었다.

 

두둑한 배상금은 조선,만주,중국본토를 공략한 일본의 침략속도와 힘을 제공해 준 셈이다.

 

 

8. 정당방위로 포장된 일본의 침략전쟁

 

독일과 일본은 시대의 전범 국가들이다. 독일은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데, 일본은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있다.

 

두 나라가 서로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에 대한 전후처리가 서로 달랐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전후 패권국이 된 미국은 독일은 범죄자로 다루었지만, 일본은 그렇게 다루지 않았다.

 

독일은 동서로 분할 했지만, 일본은 분단되지 않았다. 독일은 기존 정치체계가 와해되었지만, 일본은 유지되었다.

 

중국에서 국민당이 패배할 것이 확실해지자, 미국은 중국을 포기했다. 대신 일본으로 눈을 돌렸다.

 

패전국 일본을 동아시아 파트너로 삼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덕분에 일본은 독일처럼 가혹한 대우를 받지 않았다.

 

일본은 미국의 동아시아 대리인으로서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승전국 못지않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본은 전범으로 처벌받은 게 아니라, 오히려 경제성장을 구가하면서 그 혜택을 누렸다.

 

2000년대 일본우익은 19세기 말부터 일본의 행보를 동아시아의 서양침략을 타파하고 일본이 세계사의 주역으로 떠오르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영국이 제1차 아편전쟁을 통해 홍콩에 거점을 마련하고, 2차 아편전쟁을 계기로 러시아가 조선과 국경을 마주 한 상황에서 일본이 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대륙침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열도를 방어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일본의 대외침략 과정을 오로지 정당방위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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