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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4-15 18:41
[한국사] 한국역사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1
 글쓴이 : history2
조회 : 1,354  

한국 역사가 가르치지 않는 한국 역사

 


1. 조공은 물물교환 형식의 무역 행위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무역은 원칙상 군주 혼자만 할 수 있었다. 군주국가에서는 영토와 백성 전체를 군주의 사유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사무역은 국가가 인정하는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허용되었다.

 

군주들 사이에는 힘의 우열에 따라 당사국 간에 서열이 정해졌다. 예컨대 한국은 중국에게는 상대했지만, 여진과 대마도에는 하대했다.

 

下國上國에게 바치는 것을 朝貢, 上國下國에 하사하는 것을 回謝라고 했다. 이는 실질적으로는 물물교환이었다.

 

장수왕처럼 조공무역을 많이 한 인물도 드물다. 三國史記에 기록된 것만 해도 79년 통치기간 동안 48회로, 0.6회에 달한다.

 

재위 60년인 472년부터는 연 1.6회에 달한다. 3년에 1회만 조공을 해도 자주하는 편이었으므로, 장수왕은 상당히 자주 한 편이다.

 

강국의 군주가 조공을 많이 한 까닭은 그것이 실은 무역이었기 때문이었다.

 

"북위에 보내는 조공이 전보다 배가 되자 북위의 回謝도 더 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조공의 수량을 늘린 것은 더 많은 회사를 받기 위해서였다. 무역흑자를 늘릴 목적이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군사적으로는 중국을 능가했지만 경제적으로는 뒤졌기 때문에, 조공무역을 통해 경제적 실익을 챙겼던 것이다.

 

이런 배경을 모르고 三國史記를 읽게 되면 고구려의 강력한 국력과 강한 군주인 장수왕에 대해 오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이 조공을 한 사례 못지않게 조공을 받은 사례도 많다. 여진족, 대마도 등이 한국에 조공을 했다.

 

1107년 고려 예종 때 윤관은 여진족을 토벌해 동북9성을 확보했다. 그러나 1109년 다시 반환했다. 이때 여진족이 맹세한 것이 있다.

 

"이제부터 나쁜 마음을 버리고 대대로 조공을 드릴 것이다." - <고려사절요> 예종 편. <고려사절요>는 조선 초기 김종서 등이 편찬한 고려시대 역사서다.

 

여진족은 점차 부상해 1125년에는 거란족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1127년에는 北宋을 멸망시켰다. 여진족 금나라는 동아시아 최강으로 떠올랐다.

 

13세기에 여진족은 몽골족에 진압되면서 이후 고려 말과 조선에 조공을 하게 되었다.

 

"여진족이 조공하러 올 때마다 반대급부로 조선산 종이를 요구합니다." - 예조판서 신상. <세종실록>.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조공은 국가간 상하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과 류큐(오키나와),시암(태국),자바는 조선과 대등한 관계에서 선물을 가져왔고, 도선도 답례품을 내주었다.

 

조선 정부에서 그것을 조공으로 기록했을 뿐, 실제로는 조공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기록에도 마찬가지다.

 

 

2. 사대를 한 경우보다 받은 경우가 더 많다.

 

사대는 事大字小의 약칭이다.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고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보살펴야 한다는 과거의 국제관계 이데올로기다.

 

사대관계는 두 나라간의 개별적 관계에서만 작동되었다. 고려와 조선은 여진과 대마도에게는 皇帝國이었다.

 

 

3. 고구려 太王은 황제의 다른 표현이다.

 

우리 교과서에서 한민족이 공식적인 皇帝國이었던 시기는 대한제국 때 뿐이다. 공식적인 황제는 고종과 순종 뿐이다.

 

그러다 보니 한민족과 皇帝國을 연결시키는 것에 거부감을 갖는 한국인들이 적지 않다. 국수주의를 조장한다며 무시하는 한국인들도 많다.

 

고구려 군주의 칭호는 太王이었다. 414년에 제작된 광개토왕릉비문에는 고구려 군주 담덕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나 영락태왕으로 불렀다.

 

423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북 충주시 중원고구려비에서는 장수왕을 태왕이라고 불렀다.

 

고구려에는 太王 밑에 이 있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대주류왕이 동부여 대소왕의 친족을 왕으로 책봉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고구려의 정치구조가 중국식 皇帝國과 유사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고구려 太王皇帝로 번역해야 마땅하다.

 

만주지역의 패권을 기반으로 중국과 대립각을 세운 나라의 군주가 중국 군주보다 낮은 위상을 가졌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고구려는 여러 민족이 어우러진 대제국이었다. 이런 국가에서 중앙의 통치자가 제국의 모든 영역을 직접 관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각 지방의 왕들을 통합하는 것은 황제와 동격인 太王이었다.

 

三國史記를 편찬한 김부식은 고구려 군주를 폄하한 <구당서><신당서> 같은 당나라 역사서를 참고했기에 으로 표현했다.

 

고구려 뿐만 아니라 신라나 백제도 皇帝國과 같은 위상을 갖고 있었다. 三國史記에는 신라 군주 밑에 이란 칭호를 가진 이들이 나온다.

 

7세기 김춘추 이전의 이사금,마립간은 제후급인 이 아닌 다른 글자로 번역해야 마땅하다.

 

청나라 정부에서 편찬한 <만주원류고>에는 고구려가 쇠퇴하고 발해가 일어서기 전에 신라가 만주를 점령한 사실이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두 군데에서나 언급하면서, 그 증거로 吉林이란 지명을 들었다. 신라, 즉 계림(鷄林)이 이곳을 점령한 뒤 계림이란 지명을 붙였고, 계림이란 발음이 길림이란 발음으로 바뀌었다는 게 청나라 정부의 공식적 판단이었다. 현대 중국어에서는 鷄林吉林 모두 지린으로 발음된다.

 

이같은 내용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길림유력기>라는 또 다른 책에도 수록되어 있다.

 

청나라에서도 인정한 신라의 만주 점령을 김부식이 인정하지 않은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김부식은 한반도 중심주의자였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진덕여왕4(650) 기사에는 "이 해에 비로소 중국 연호인 영휘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문장이 있다.

 

신라는 650년 이전에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거나 외국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신라가 皇帝國 위상을 갖고 있었음을 뜻한다.

 

견훤의 후백제나 궁예의 후고구려도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이는 두 나라가 皇帝國의 위상을 갖추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두 나라는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중시하지 않았다. 중국을 皇帝國으로 받들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도 김부식은 두 나라 군주를 으로 통일했다.

 

고려 역시 皇帝國이었다. 몽골 간섭기 이전의 고려 통치자들이 같은 묘호를 받은 것은 이들이 황제의 위상을 띠었음을 의미한다.

 

대마도나 일본에서는 조선 주상을 황제로 불렀다. <세조실록> <성종실록>에 실린 일본 측 공문서에는 조선 주상이 朝鮮國皇으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우리 교과서에는 역대 국가의 군주들이 그저 이라는 통일적 표현으로 불리고 있다.

 

 

4. 역사에서 사라진 백제의 요서 점령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근초고왕은 평양에서 고구려군을 격퇴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뒤 도읍 이전을 단행했는데, 새로 옮긴 도읍이 漢山이다.

 

그런데 漢山漢城에 있는 산이란 뜻이다. 따라서 한산은 곧 한성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백제는 원래 도읍이 한성이었다.

 

따라서 근초고왕이 평양성에서 승리한 뒤 한성에서 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말이 된다. 이는 상식적이지 않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한반도에는 한성 외에 식성(息城)으로도 불렸던 또 다른 한성이 있었다. 황해도 재령군의 옛 지명이다.

 

이 점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도 확인된다. 재령군이 고구려의 식성이었으며, 한성군으로도 불렸다고 했다.

 

평양성에서 승리한 백제는 한성에서 황해도의 한성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것이 자연스럽다.

 

고대에는 지명이 땅을 가리키는 명칭이 아니라 지배집단을 가리키는 명칭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지배집단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기존의 지명을 새로운 곳에 부여했다.

 

백제의 영토는 중국에도 있었다. <宋書> <梁書> <南史> 등에 기록되어 있다. 남중국의 역사서들이다.

 

"고구려는 요동을 빼앗고 백제는 요서를 빼앗았다." - <宋書> 이만 열전.

 

"고구려가 요동을 빼앗자, 백제도 요서,진평 2군을 소유하고 직접 백제군을 두었다." - <梁書> 제이 열전.

 

"고구려가 요동을 빼앗자, 백제도 요서,진평 2군을 소유하고 직접 백제군을 두었다." - <南史> 이맥 열전.

 

백제에게 요서를 빼앗긴 북중국의 역사서에는 이런 사실이 언급되지 않는데, 이는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다.

 

<宋書> <梁書> <南史>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 존재했던 남중국 왕조들의 역사를 담고 있다.

 

하지만 <宋書>를 제외한 <梁書> <南史>는 북중국이 중국 전체를 통일한 뒤에 편찬된 책이다. 즉 북중국을 계승한 당나라 때 편찬되었다.

 

백제의 중국 점령이 중국 역사서에 엄연히 기록되어 있는데도, 이런 사실이 우리 교과서에 서술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김부식은 신라가 만주를 점령했다는 사실도 은폐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백제의 중국 지배를 은혜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백제는 북중국의 요서 지역만 점령했던 게 아니다. 일시적이나마 남중국의 일부까지도 점령했던 적이 있다.

 

이 점은 사대주의자 최치원이 당나라에 가서 작성한 '대사시중에 올리는 글'에 나타난다.

 

이 글에서 최치원은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와 중국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고구려,백제의 전성기에 강병 백만이 남쪽으로는 吳越을 침범하고 북쪽으로는 유,,,노를 흔들어 중국의 두통거리가 되었습니다."

 

문맥상으로 볼 때 중국의 북쪽을 공략한 쪽은 고구려이고 남쪽을 공략한 쪽은 백제다.

 

'강병 백만'이란 표현은 그만큼 숫자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고대에는 백,,만 등의 숫자가 매우 많음을 뜻하는데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당나라 관료에게 보낼 목적으로 위의 글을 작성했다. 당연히 역사적 사실이었음은 틀림없다.

 

백제가 吳越을 상습적으로 괴롭히려면 강남 땅과 가까운 동지나해(동중국해)에 군사기지가 있어야 한다.

 

외국 역사서에 명확히 기술되어 있는 이런 역사가 우리 교과서에는 제대로 서술되어 있지 않다. 우리 교과서는 백제의 전성기를 숨기고 있다.

 

5. 백제 유민들이 운영한 신라방과 신라소

 

현실적으로 대한민국은 사실상 섬나라나 다름없다. 반면 역사속의 한국은 사실상 대륙과 관련되어 있다. 해양세력으로서도 만만치 않았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신라의 해외무역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통일 후 과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산동반도와 양자강 하류에 거주지인 신라방/신라촌, 신라인을 다스리는 신라소, 여관인 신라관, 절인 신라원이 만들어졌다."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다. 신라는 전통적으로 바다에 취약한 나라였다. 툭하면 왜구의 공격에 시달린 나라였다.

 

바다에 익숙하지 못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9세기 초에도 신라는 남해안에서 일본 해적을 제어하지 못했다.

 

이는 백제 출신의 바닷사람들을 제도권으로 제대로 포용하지 못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백제 유민들이 바다 공간에서는 신라의 지배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장보고가 등장하자 신라 흥덕왕은 청해진대사라는 특별 관직을 주었다. 이는 정부의 기존 지휘체계에서 독립된 직책이었다.

 

장보고는 828~846년까지 18년 동안 1만 명의 군사를 지휘했다. 이는 장보고에게 독자적 권한을 주지 않고는 해상관리가 불가능했음을 의미한다.

 

장보고는 국적상으로는 신라 겸 당나라 사람이었다. 이중국적자다. 하지만 그는 백제 유민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인물이다.

 

당나라에 신라방,신라소 등이 생긴 원인은 신라의 해상 능력에서 찾을 게 아니라 백제 멸망과 관련해서 찾아야 마땅하다.

 

신라방,신라소가 가장 많은 곳은 주산군도 쪽이었다. 백제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던 지역이다.

 

백제 멸망 후 신라방,신라소 등을 운영한 주체는 원래의 신라인들이 아니라 백제 유민들임을 알 수 있다.

 

당나라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들을 신라인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장보고 역시 이들 백제 유민일 가능성이 크다.

 

동지나해에서 백제 유민들의 활약은 적어도 14세기 후반까지 계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왜구가 두각을 보이기 전에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한 것은 한민족이었다.

 

 

6. 한반도 본토 일부를 점령한 섬나라 탐라

 

한국사 교과서에는 섬의 역사가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제주도를 본거지로 둔 독립왕국 탐라의 역사가 대표적인 예다.

 

탐라는 제주 뿐 아니라, 비록 한때이긴 했지만 한반도 본토에까지 영토를 둔 적이 있는 나라였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따르면, 동성왕이 등극하기 4년 전인 475년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고 웅진성(공주)으로 도읍을 옮겼다.

 

남쪽으로 밀려난 백제는 동성왕 때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당시 탐라는 백제에게 조공을 하던 나라였다. 그런데 조공을 등한시하기 시작했다.

 

동성왕은 탐라를 제압해둘 필요가 있었다. 재위 20년째인 498년 동성왕은 군대를 이끌고 탐라를 향해 진격했다.

 

백제군이 무진주(광주)까지 진군했을 때 탐라는 위협을 느껴,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철군을 요청했다.

 

백제군이 광주에 당도하자 탐라 왕이 항복을 결심했다는 것은 탐라의 북방 경계선이 광주 이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고려는 938년에 탐라국의 성주와 왕자를 책봉했다. 1105년 숙종 때 탐라는 형식적으로나마 고려에 편입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1402년 태종 때 탐라는 스스로 성주와 왕자의 칭호를 버리고 조선의 관직을 받아 갔다.

 

제주 고씨의 족보인 <제주고씨보>에 수록된 '탐라국왕세기'에 따르면, 나라의 침공을 당한 고조선 유민들이 해로를 통해 탐라로 들어와 이곳 주민의 일부가 되었다고 한다. 같은 한민족이란 의미다.

 

탐라가 본토에 편입되기 이전의 역사는 국가로 이해되어야 한다.

 

 

7. 한민족 해적,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하다.

 

일본인에 대해 한국과 중국이 갖고 있는 이미지 중 하나는 그들이 과거 오랫동안 해적질을 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일본 해적이 동아시아 바다를 주름잡은 기간은 14세기 중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200여 년에 불과하다.

 

왜구가 득세한 기간은 일본의 분열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1333년 가마쿠라 막부가 붕괴되고, 1336년 무로마치 막부가 개설되었다.

 

이때 두 명의 일왕이 남과 북에 양립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것이 일본의 남북조 시대의 시작이다.

 

남북조 시대는 1392년 무로마치 막부가 일본을 통일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왜구의 활동은 일본이 분열을 겪던 14세기 중반, 바로 남북조 시대에 본격화되었다.

 

혼란기 중앙정권의 부재로 인한 국제교역의 곤란을 틈타 지방세력들이 해적이 되어 무역이나 약탈활동에 나섰다.

 

일본 해적이 사라진 때는 센고쿠 시대의 혼란이 진정되던 16세기 중,후반 무렵이다.

 

14세기 중반 이전에 동아시아 해양을 지배한 사람들은 바로 한민족이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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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파이어 18-04-15 18:46
   
나가자! 싸우자! 우리의 베어스 두산의 승리를 위하여
history2 18-04-15 18:50
   
님은 어떻게 제가 두산베어즈 팬인지 아셨나요????? 오 신기!!! 나가자 싸우자 두산의 승리를 위하여 동감 ^^
6시내고환 18-04-19 20:53
   
발해도 황제국이였죠ㅎㅎ그런데 이것 안가르쳐요 학교에서 참 ㅋㅋㅋ실제로 칭호가 전해지고있는 상황인데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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