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부도지에 나오는 은나라에 대한 이야기다.
(부도지는 단군의 적통을 신라가 계승하고 있으며 오행은 부도의 법이 아니라고 한다)
은 의 망명자 기자가 패한 군사와 난민을 이끌고 부도의 서쪽에 도망하여 왔다, 당우의 법을 행하고 오행삼정을 써서 천지대법의 무도를 시행하였다 천웅의 도와는 절대로 서로 용납할수 없었다
은의 군사와 백성이 무력으로 부도의 남은 백성을 억압하므로 그들은 마침내 명지의 단을 봉해버리고 동해의 물가로 피하여 살았다
즉, 옛날 사례벌 의 빈 터였다 곧 육촌을 설치하고 인접한 종족들과 나누어 함께 지키되 각각 한 이라 하고 보위 하였다 북의 마한, 남의 변한과 동의 진한의 삼한 부족이 자치를 행하고
선세의 도를 굳게 지켜 이후 천 년 사이에 기자의 법을 받아 들이지 아니하고 보위 방비하는 일에 전념하여 거의 여력이 없었다
이떄 하나라 땅에 쟁탈의 바람이 점차 격심하여 동요화 혼란이 삼한에 파급되므로 육촌사람들이 서쪽의 화가 점차 임박하여 지켜내기가 어려우니 마침내 경계를 정하고 요새를 세워 혁거세를 추대하여 다스리는 일을 위임하였다
다른 종족들도 역시 수령을 추대하여 방비 하였다 (남은 백제요. 북은 고구려였다) 고구려가 곧 북쪽 성의 땅을 회복하고 서침하는 사람들을 쫓아버리고 그 지역을 완전하게 지켜 내었다
기자 조선 청주한씨 계보
한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져야할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소홀이 대접받는 나라가 있다 . 그 나라는 바로 부여다
부여가 우리역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바로 고구려 백제의 뿌리가 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피터지게 싸운것…… 그 이유는 바로 부여의 정통을 누가 이어 받았냐는 것으로 당시 고구려와 백제에 있어 부여는 자신들의 뿌리였다.
백제는 부여의 시조 동명을 제사지내는 동명묘를 건립했으며, 고구려는 부여의 동명신화를 차용할 정도로 이 두 나라는 자국이 부여를 계승했다는 뿌리 의식이 강했다
부여… 부여의 역사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여는 [사기] [산해경] 등에 그 모습을 보일 정도로 이른 시기에 활동했다. 학자들은 부여가 BC 4세기에
건국 되었다고 본다, 부여가 멸망한 해는 서기 494년 이므로 거의 800년을 이어온 장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였다. (기자조선의 900년과 얼추 비슷..)
부여는 서기 3세기경에 모용선비의 공격으로 부여의 의려왕이 자 살하고, 그 주민이 모용선비의 포로로 끌려갔을 뿐 아니라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의 침공으로 부여의 현왕이 포로로 잡히고 부여주민 5만이 다시 전연의 포로가 되었을 정도로 쇠약해 졌지만, 한 떄 북방의 강국 고구려에 맞서 끊임없이 고구려를 괴롭히고, 중국 한나라 로부터 옥갑을 조공 받았을 뿐 아니라 동쪽의 읍루를 속국으로 거느리는 등 대국으로서의 위용을 과시하기도 했다.
부여의 강역은 대체로 남쪽으로는 송화강 유역에서 고구려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읍루와 북만주의 장광재령에 접하고 서쪽으로는 선비와 서요하 유역에 경계하고, 북으로는 흑룡강에서 끝난다 이로 미루어 보아 부여의 중심지역은 오늘날의 장춘 농안, 길림들, 광할한 평원이 펼쳐진 삼각지대였다.
고등학교 국사시간 떄 부여는 우제점을 쳤다고 달달 외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부여의 제사문화가 은나라의 것과 거의 똑같다는 점은 놀라울 따름이다….
고대 중국의 상나라(은나라)는 부여처럼 우제점으로 나라의 길흉화복을 점쳤다, 선문대 이형구 교수는 부여와 은이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이는 신석기시대 발해 연안에서 발생한 갑골문화가 상인(商 人)들의 선조들이 황하 하류지역으로 이동함으로써 상나라에 갑골 문화가 성했했다고 보고 있다.
갑골은 발해연안에 분포하여 생활하던 동이족들이 사용하던 생활습관인데 이 종이족들이 황하 하류로 남하하여 상왕조를 건설하고 갑골문화를 발전 시켰다고 추정할수 있다
부여와 은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는 또 하나의 근거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에 부여에서 은나라 정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 지낸다고 한 문구를 들 수 있다. 은 나라 정월…이는 은나라 역법에 따른 정월을 뜻하는 것으로 부여에서는 은대 역법을 따른 정월인 축월(음력2월)에 제사 지낸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