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간도 알박기 계획.
출처 http://hyukjunseo.egloos.com/3559307
성종실록 276권, 성종 24년 4월 14일 무신 6번째기사 1493년 명 홍치(弘治) 6년 성준 등에게 장성을 쌓는 일을 하서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영안도 관찰사(永安道觀察使) 성준(成俊)과 북도 절도사(北道節度使) 변종인(卞宗仁)에게 하서(下書)하기를,
"여자신(呂自新)이 아뢰기를, ‘미전진(美錢鎭)으로부터 조산보(造山堡)에 이르기까지 장성(長城)을 쌓지 아니한 곳이 거의 3백 리입니다. 그런데 무이보(撫夷堡)로부터 경흥(慶興)을 지나 조산보(造山堡)에 이르기까지 장성을 쌓으려면 서로의 거리가 90리가 되니, 그 공역(功役)이 지극히 무거울 것입니다. 그리고 바다에 포구가 있는데,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들어가서 가로로 죽 뻗어 있고 바닷물이 가득 차 있습니다. 무이보를 서로 바라보게 되는데, 이름을 야춘해(耶春海)라 합니다. 두만강(豆滿江)과 사이에 육지(陸地)로 되어 있고, 거리가 30리에 지나지 아니하니 성(城)을 여기에 쌓으면 공역이 가볍고 쉬울 것입니다. 조산보를 동쪽머리에 옮기고 경흥을 중앙(中央)에 옮겨 무이와 연결하여 배치하면 방어하기에 편하여 이른바 그 목을 움켜잡는 형세가 될 것인데, 그 안은 토지가 비옥하고 평평하고 넓어서 만여 결(結)이 될 만하니, 백성은 낙토(樂土)를 얻을 것이요, 방수(防戍)하기에도 또한 쉬울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그 편부(便否)를 함께 살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성종실록 283권, 성종 24년 10월 6일 정묘 6번째기사 1493년 명 홍치(弘治) 6년 영안도 관찰사 성준 등이 야춘의 축성과 함께 사목을 올리다
영안도 관찰사(永安道觀察使) 성준(成俊)과 북도 병마 절도사(北道兵馬節度使) 원중거(元仲秬) 등이 야춘(耶春)에 축성(築城)하여 진(鎭)을 옮기는 것이 적당하지 못한 일을 치계(馳啓)하고, 아울러 사목(事目)을 올리기를,
"1. 병조(兵曹)에서, ‘경흥(慶興)에 1백 호, 무이(撫夷)·조산(造山) 두 보(堡)에 각각 50호를 뽑아 들여보내는 일은 이미 수교(受敎)하였습니다. 무이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경흥과 조산은 적(賊)의 소굴과 멀리 떨어져서 방어(防禦)가 가장 헐(歇)하고, 성내(城內)에 사는 백성이 적지 아니하니, 조산은 뽑아 들여보내지 말고, 경흥은 50호를 감하여 들여보내게 하소서.
1. 아오지보(阿吾地堡) 안에 사는 백성은 비록 본디 경원(慶源)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경흥 지역으로 보를 옮겼으니 마땅히 경흥에서 수역(戍役)하게 하소서.
1. 경흥 이하 장성(長城)의 구참(溝塹)을 마치지 못한 곳은 내년 봄을 기다려서 지난 봄에 빠뜨려진 군정을 사역(使役)시켜 파기를 마치도록 하소서.
1. 보이덕보(甫伊德堡)와 진파보(榛坡堡)를 합보(合堡)하는 것과 영건보(永建堡)를 개축(改築)하는 일은 갑인년1388) 까지 역사를 마치기를 기약하고, 보이덕보와 진파보를 합보하면 마땅히 보를 쌓아야 할 것인데, 영건보는 그 무너진 곳을 새 만호(萬戶)가 날마다 조금식 쌓아도 몹시 낮지는 않겠지만, 후년(後年)에 고쳐 쌓는 것이 적당합니다. 옥련보(玉蓮堡)는 옛터를 버리고 부령진(富寧鎭) 아래 10여 리(里) 거리의 허통동(虛通洞)으로 옮겨서 설치하게 하소서.
1.운총(雲寵)·혜산(惠山) 남보(南堡)의 성자(城子)는 후년(後年)을 기다려서 물려 쌓을 것이며, 인차외(仁遮外)에서 혜산까지 내왕하는 강변 2, 3리(里) 땅은 모름지기 내년 봄에 장성(長城)을 쌓게 하소서.
1. 도내(道內)에 금년 농사가 잘 되지 못하였는데, 사민(徙民)한 처자(妻子)를 일시에 함께 들어오게 하면 비록 포화(布貨)가 있다고 하더라도 식량을 바꾸기가 어려우니, 금년에는 호수(戶首)만 먼저 들여보내어 전지(田地)를 절급(折給)하게 하고, 인하여 군적(軍籍)에 기록해 넣어서 그 처자는 내년 봄에 모두 들어오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議政府)와 변경의 일을 아는 재상(宰相)들을 명소(命召)하여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윤필상(尹弼商)·이극배(李克培)·노사신(盧思愼)·윤호(尹壕)·이철견(李鐵堅)·이극돈(李克墩)·정문형(鄭文炯)·신준(申浚)·이봉(李封)·변종인(卞宗仁)·이계동(李季仝)·신주(辛鑄)·이병정(李秉正)·조간(曹幹)·박암(朴巖)이 의논하기를,
"야춘(耶春)에 성을 쌓는 일은 조종조(祖宗朝)에서 처음 육진(六鎭)1389) 을 설치할 때 두만강(豆滿江)을 한정하여 장성(長城)을 쌓고, 봉수(烽燧)를 나열시켜 두어서 방비하는 방법이 지극히 정밀하고도 엄하였습니다. 그러나 얼음이 얼거나 물이 얕을 때에는 호인(胡人)이 그래도 틈을 타서 침입하여 약탈하였는데, 이제 장성의 험함을 버리고 오랑캐의 지역에 깊숙이 들어가서 수고롭게 성보(城堡)를 쌓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땅에 군사와 백성을 두면, 이는 바로 고기를 굶주린 호랑이의 입에 던지는 것이니, 계책으로는 훌륭한 것이 아닙니다. 성준(成俊) 등의 아뢴 바가 옳습니다. 또 그 사목(事目)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의논해서 아뢰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병조 당상(兵曹堂上)이 된 자가 영안도(永安道)의 일을 어찌 다 알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지금 이 사목 가운데 사민(徙民) 등의 일이 한둘이 아니므로, 마땅히 의논하기를, ‘어느 일은 옳고 어느 일을 그르다.’고 해야 할 것인데, 이제 다만 의논하기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의논해서 아뢰게 하소서.’ 하였으니,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윤필상 등이 아뢰기를,
"이 일은 해조로 하여금 의논해 아뢰게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 뒤에 신 등도 마땅히 그 옳고 그름을 의논하겠습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가하다."
하였다.
뭐 이러함
여기서 야춘은 훈춘.
그당시 훈춘은 조선이 사실상 간접지배하던 지역.
그래서 알박을까 하다가 과거에 알박지 않은 이유가 있겠지 하고 알박기를 포기.
하지만 이것이 육진방어선에 매우 큰 문제로 되돌아온 듯.
지도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육진은 정말 억지로 개간한 티가 나는데, 바로 옆의 연변과 훈춘은 두만강 이남지역보다 광활함.
육진은 조선시대 거의 내내 자급자족이 힘들어서 억지로 인구를 올리고 식량을 수송해야 했던 지역임.
둔전병과 번상병 및 번호로 방어를 하는 시스템인데 만약 바로 건너편인 훈춘에만 진출해도 인구부양력이 확 높아짐.
여기에 연변까지 진출하면 더더욱 높아지고.
그럼 방어는 어이 하냐는 말에선.
고구려 연변-훈춘 장성을 다시 보수하고 세우면 됨.
너무 낮은 토담수준이라 보수가 빡쎄야겠지만.
그리고 역으로 고구려도 이지역은 강보다는 장성방어가 낫다고 판단한 것으로 볼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