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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4-18 06:50
[한국사] 성덕왕 시기 서라벌(3D 사진)과 일본정벌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373  


신채호에 따르면, 신라는 진한 6부의 총칭이 아니고, 6부 중의 하나인 사량부이다. 신라나 사량은 다 '새라'로 읽을 것이요, '새라'는 냇물 이름이니, '새라'의 위에 있으므로 '새라'라 일컬은 것이고 사량은 사훼(沙喙: 진흥왕 비문에 보임)라고도 기록하였으며, 사훼는 '새불'이니 또한 '새라'위에 있는 '불'(들판)이기 때문에 일컬은 이름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신라의 처음 이름을 '서라벌(徐羅筏)'이라 하였으나, 서라벌은 '새라불'로 읽을 것이니 또한 '새라'의 '불'이라는 뜻이다. 고허촌은 곧 사량부이니, 소벌공의 '소벌(蘇伐)'은 또한 사훼와 같이 '새불'로도 읽을 것이므로 지명이고 , 공(公)은 존칭이니 , 새불 자치회(自治會)의 회장이므로 '새불공'이라 한 것이다. 말하자면 소벌공은 곧 고허촌장이라는 뜻인데, 마치 사람의 이름같이 씀은 역사가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새라 부장(部長)소벌공(蘇伐公)의 양자인 박혁거세 거서간이 6부의 총왕(總王)이 되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새라'라 하고 이두자로 신라(新羅)로 쓴 것이다

신라의 최전성기 성덕왕) 

문무왕이 난세를 끝내 평화 시대를 열고 신문왕이 내부를  통일신라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명군고려에 문종대왕조선에 세종대왕이 있다면 신라에는 성덕대왕이 있다.

31대 신문왕(神文王)의 둘째 아들이자 32대 효소왕의 동복 아우로, 효소왕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국인(國人, 나라 사람들)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 시기에는 왕권이 강화되어 집사부의 중시가 정치의 중심이 되었으며, 상대적으로 귀족들의 화백회의의 의장이었던 상대등의 권한은 약화되었다.  

722년에 정전 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성덕왕의 대표적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 이는 실제로 국가가 토지를 수여한 것이 아니라 자영 농민의 토지 소유를 인정했다는 뜻으로 이를 바탕으로 국가는 많은 세를 거둬들일 수 있게 되어서 국가 재정의 안정을 가져와주었다. 율령제와 조용조 조세 방식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이다. 


717년 의박사(醫博士)와 산박사(算博士)를 창설해 의학과 수학을 장려하기도 했고 718년 한국사 최초로 물시계(漏刻)를 설치하고 관련 부서를 설치하는 등 실용적 학문 진흥에 관심이 많았던 왕이었다.

720년에는 해동제국기에 따르면 신라가 서일본(오사카)을 공격했다고 전하고 있다.

731년, 일본에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지휘 아래 300척의 군함을 이끌고 쳐들어왔으나 격퇴하였다.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의 원인이 된 '왕성국 사건'도 734년인 이 때 벌어졌는데, 이는 일본을 정벌했다는 자부심 때문으로 보인다. 

(유례왕12년, 진평왕 5년에도 오사카를 정벌함, 안정복의 동사강목)


절영도와 오사카(나니와) 위치.jpg




1) 서라벌의 원경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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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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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최근 복원된 월정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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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임해전(동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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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반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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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성덕왕 19년[서력 720년]이지만 그 사실이 이 동사에는 다 빠지고 없다. 지금 동래(東萊) 바다 절영도(絶影島)에 옛 진지가 있는데, 세상에 전해 오는 말로 신라 태종이 왜국을 정벌할 때 쌓은 것이라 하여, 이에 태종대(太宗臺)라고 불린다(안정복)


일본 지역에 백마총이 있는데 / 白馬塚在日域
왜인들이 대를 이어 그 무덤을 손질하며 하는 말이 / 倭人世世勤封築
옛날에 신라 왕이 쳐들어 올 때 / 謂昔羅王憤侵軼
수만 명 정병이 바다에 떠 밀려오니 / 精兵數萬浮海伐
물귀신도 뒤로 주춤 해신(海神)도 길을 비켜 / 馮夷淪易海若奔
큰 바다 동쪽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네 / 大海以東無涯藩
용 깃발을 휘날리고 타고를 울리면서 / 揚龍旆擊鼉鼓
선발대가 곧바로 명석포를 공격하니 / 前茅直擣明石浦
왜왕이 겁에 질려 화친을 청하고는 / 倭王失色事和親
짐승 잡아 맹세 쓰고 신명께 고하였네 / 刑牲載書告明神
그 후로는 오랜 기간 바다가 조용했고 / 從此鯨波久不涌
천고의 유적으로 저 무덤이 남았다네 / 千古勝蹟留遺塚
그 옛날 진터가 절영도에도 있는데 / 絶影又有古壘寨
이것이 태종대라고 뒷사람들 말을 하지 / 後人說是太宗臺
총알만한 신라 땅 한쪽에 있었으면서 / 彈丸羅地在一隅
장하여라 병력이 어찌 그리 강했던가 / 猗歟兵力何壯哉
어쩌다가 후세 들어 옛날과는 정반대로 / 歸來後世事反古
우리 나라 전역이 적의 침략 늘 당하고 / 大東全地受侵侮
지금도 해상에는 허구 많은 공갈배가 / 至今海上多虛喝
제 욕심 채우려고 해마다 손 벌린다네 / 穀帛年年充其欲
생각하면 그리 된 것 까닭이 왜 없겠는가 / 靜思其故豈無因
서생이 부질없이 국경을 안정시킬 계책 짜본다네 / 書生謾有安邊策


참고) 일본정벌 기사 

1. 안정복 동사강목 제2상
을묘년 신라 유례왕 12년, 고구려 봉상왕 4년, 백제 책계왕 10년(진 혜제 원강 5, 295) 
봄 계림이 왜를 정벌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신라 왕이, 왜인이 자주 침범하고 백성을 편안히 살지 못하게 함을 분히 여겨, 백제와 함께 동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에 들어가 칠 것을 도모하니, 서불한(舒弗邯) 홍권(弘權)이 간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하여 험난을 무릅쓰고 원정(遠征)하면 생각지 않은 위험이 있을까 두려운데, 하물며 백제는 속임수가 많고 항상 병탄할 욕심을 가지고 있음에리까? 더불어 도모할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좋은 말로 여겼다.
【안】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해사록(海槎錄)》에는,
“일본은 극동에 멀리 떨어져 있고 사면이 큰 바다로 둘려 있어, 외국의 군사가 들어갈 수가 없다. 단지 그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 응신(應神) 22년에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명석포는 대판(大阪)에서 겨우 1백 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의 동쪽에 한 구롱(丘隴)이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이것이 백마분(白馬墳)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쳐들어오니,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 주기를 청하여 백마(白馬)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다 묻었다.’ 한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응신 12년[22년] 신해가 바로 유례왕 8년에 해당되니, 이 해와는 조금 차이가 있으나 대개 같은 때의 사건인데, 東史에는 보이지 않는 것은 글이 빠진 것이다. – 유례왕 8년 신해는 서력 291년임, 신해년은 응신 22년임

동사강목 제3상
계묘년 신라 진평왕 5년, 고구려 평원왕 25년, 백제 위덕왕 30년(진(陳) 후주(後主) 지덕(至德) 원년, 583)
2월 신라가 왜(倭)의 서변(西邊)을 토벌하였다. 왜사에서 보충
【안】 《해동기(海東記)》에는,
“왜황(倭皇) 민달(敏達) 12년 계묘(癸卯)에 신라가 서변을 토벌하였다.” – 서력 583년임
고 적혔으나 신라와 백제가 왜와 접경하여 그 환(患)을 자주 입었는데 교빙과 정벌에 대하여는 사적(史籍)에 드물어서, 바다를 건너서 왜국을 정벌하였다는 일은 듣지 못하였다. 왜사(倭史) 《연대기(年代記)》에는,
“응신천황(應神天皇)이 신라의 유례왕(儒禮王) 때를 당하여,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와서 흰 말을 죽여 맹서를 받아 간 일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나라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백마총(白馬塚)이 있다.”
하고, 또
“신라가 토벌하여 온 일이 두어 곳이[번] 있었다.”
적혔으나, 우리 역사에는 전하여지지 않는다. 지금 동래(東萊)의 절영도(絶影島)에 태종대(太宗臺)가 있는데 속전(俗傳)하기를 ‘신라의 태종(太宗)이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할 때 주필(駐蹕)하였던 곳’이라 한다. 신라는 조그마한 한 구석진 땅이로되, 육지로는 능히 고구려와 백제에 대적하고, 바다로는 왜국을 정벌하였으니, 그 병력의 웅대함이 삼국을 통일할 만한 것임을 생각할 수 있겠다. 후세에 해동의 온 땅덩어리가 섬나라 오랑캐[島夷]들에게 곤욕을 당한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위정자(爲政者)들은 의당 그 방어책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3. 부상록(扶桑錄)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 
정사년(광해 9, 1617) 10월 18일(기묘)
일본은 아득하게 하늘 동쪽에 있어 사방이 큰 바다이므로 외국 군사가 들어가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연대기’를 보니, 소위 ‘응신천황(應神天皇) 22년[서력 291년]에 신국(新國) 군사가 왔다.’ 하였고, 딴 본(本)에도,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 했다. 명석포는 대판까지 겨우 1백여 리다.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구롱(丘壟) 하나가 있는데, 왜인들이 가리키면서, ‘이것이 백마분(白馬墳)이라는 것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들어왔으므로 일본 사람이 화친하기를 청하여 백마를 잡아 맹세하고 말을 여기에다 묻은 까닭이다.’ 하였다. 이세(李稅)의 일을 추적(追跡)해 알았으나 밀교(密敎 임금의 비밀 전교(傳敎))에 관계된 것이므로 별도로 계초(啓草 계본(啓本)의 초고)를 만들고 여기에다 다시 갖추어 기재하지 않는다.
日本邈在天東。四面大海。外兵不入。但見其年代記。其所謂應神之二十二年。新國兵軍來。一本則曰。新羅兵入明石浦。石浦距大坂纔百有餘里。赤間關之東有一丘壟。倭人指之曰。此是白馬墳。新羅兵深入日本。日本人請和解兵。刑白馬以盟。埋馬於此故云。跟尋李稅之事。係是密敎。故別具啓草。不復具載於此。

4. 안정복/ 순암선생문집 제1권 
시(詩) 
우리 역사를 보다가 느낌이 있어 악부체를 본떠 읊다[觀東史有感 效樂府體] 
백마총행(白馬塚行)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사상록(槎上錄)에 이르기를, “일본의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倭皇) 응신(應神) 22년에 신라 군대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오니 대판(大阪)과의 거리가 겨우 1백 리 정도였다.’라 하였다.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무덤이 하나 있는데 왜인들이 그 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기가 바로 백마(白馬)의 무덤인데, 신라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일본 사람들이 화의를 청하여 군대를 풀고 백마를 잡아 맹약한 후 그 말을 저 곳에 묻었다.’고 한다.” 하였고,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의하면, 응신 22년은 신라 유리왕(儒理王) 8년[유례왕 8년이 맞음]에 해당하고, 중국으로는 진(晉)의 혜제(惠帝) 원강(元康) 원년이 되는 해[서력 291년]인데, 그 사실이 동사(東史)에는 실려 있지 않다. 해동기(海東記)에 의하면, 달민천황(達敏天皇) 계묘년[서력 583년]에 신라가 서비(西鄙)를 쳐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그 해는 신라 진평왕 5년에 해당하고, 또 원정천황(元正天皇) 경신년에도 신라가 서비를 쳐들어왔다고 했는데, 그 때는 신라 성덕왕 19년[서력 720년]이지만 그 사실이 이 동사에는 다 빠지고 없다. 지금 동래(東萊) 바다 절영도(絶影島)에 옛 진지가 있는데, 세상에 전해 오는 말로 신라 태종이 왜국을 정벌할 때 쌓은 것이라 하여, 이에 태종대(太宗臺)라고 불린다.
일본 지역에 백마총이 있는데 / 白馬塚在日域
왜인들이 대를 이어 그 무덤을 손질하며 하는 말이 / 倭人世世勤封築
옛날에 신라 왕이 쳐들어 올 때 / 謂昔羅王憤侵軼
수만 명 정병이 바다에 떠 밀려오니 / 精兵數萬浮海伐
물귀신도 뒤로 주춤 해신(海神)도 길을 비켜 / 馮夷淪易海若奔
큰 바다 동쪽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네 / 大海以東無涯藩
용 깃발을 휘날리고 타고를 울리면서 / 揚龍旆擊鼉鼓
선발대가 곧바로 명석포를 공격하니 / 前茅直擣明石浦
왜왕이 겁에 질려 화친을 청하고는 / 倭王失色事和親
짐승 잡아 맹세 쓰고 신명께 고하였네 / 刑牲載書告明神
그 후로는 오랜 기간 바다가 조용했고 / 從此鯨波久不涌
천고의 유적으로 저 무덤이 남았다네 / 千古勝蹟留遺塚
그 옛날 진터가 절영도에도 있는데 / 絶影又有古壘寨
이것이 태종대라고 뒷사람들 말을 하지 / 後人說是太宗臺
총알만한 신라 땅 한쪽에 있었으면서 / 彈丸羅地在一隅
장하여라 병력이 어찌 그리 강했던가 / 猗歟兵力何壯哉
어쩌다가 후세 들어 옛날과는 정반대로 / 歸來後世事反古
우리 나라 전역이 적의 침략 늘 당하고 / 大東全地受侵侮
지금도 해상에는 허구 많은 공갈배가 / 至今海上多虛喝
제 욕심 채우려고 해마다 손 벌린다네 / 穀帛年年充其欲
생각하면 그리 된 것 까닭이 왜 없겠는가 / 靜思其故豈無因
서생이 부질없이 국경을 안정시킬 계책 짜본다네 / 書生謾有安邊策

5. 이긍익/연려실기술 별집 제18권 
변어전고(邊圉典故) /서쪽 변방[西邊]
○ 보충. 일본 신응(神應) 22년[서력 291년]에 신라의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가니, 대판(大板)과의 거리가 1백 리라,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달라고 애걸하며 흰 말을 잡아서 맹서하였다. 호원(胡元)이 크게 군사를 동원하였으나 겨우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러 마침내 크게 패했으니, 역대로 깊이 쳐들어가 왜인에게 이긴 나라는 오직 신라뿐이었다. 신경준(申景濬)《여암고(旅菴藁)》

6. 이덕무/ 청장관전서 제65권 
병전 兵戰 /여몽정벌(麗蒙征伐
응신 22년(291)에 신라의 군사가 대판(大阪 오오사까)에서 1백 리 떨어진 명석포(明石浦 아까시[明石])까지 깊이 들어오니, 일본이 강화하고 적간관(赤間關) 동쪽 땅에서 백마(白馬)를 죽여 맹약(盟約)하였는데, 지금도 그 백마총(白馬塚)이 있다. 흠명(欽命 540~571) 때에 신라가 일본을 치고 임나를 멸망시켰다. 

7. 金世濂(1593-1646) /海槎錄/聞見雜錄
일본은 멀리 하늘 동쪽에 있고, 사면이 큰 바다이므로, 다른 나라의 군사가 침입하지 못한다. 다만 그들의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이른바 응신(應神 응신천황을 일컬음) 22년(222)[291년]에 신라(新羅)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 하였는데, 명석포는 대판(大坂)에서 겨우 1백 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 동편에 큰 무덤 하나가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말하기를, ‘이는 백마분(白馬墳)인데, 신라 군사가 깊이 들어오니, 일본 사람이 화호(和好)를 청하여 군사를 해산하고, 흰 말을 베어서 맹세하고, 여기에 말을 묻었다.’ 한다.

8. 일본서기 
"응신 22년[291년], 갑자기 등장한 어우별[御友別] 세력에게 응신왕이 여섯현을 떼어주었다
日本書紀』巻十応神天皇二二年(辛亥二九一)秋九月辛巳朔庚寅《十》
庚寅。亦移居於葉田〈葉田。此云簸娜。〉葦守宮。時御友別參赴之。則以其兄弟子孫。爲膳夫而奉饗焉。天皇。於是看御友別謹惶侍奉之状。而有悦情。因以割吉備國封其子等也。則分川 嶋縣封長子稻速別。是下道臣之始祖也。次以上道縣封中子仲彦。是上道臣。香屋臣之始祖也。次以三野縣封弟彦。是三野臣之始祖也。復以波區藝縣封御友別弟鴨別。是笠臣之祖也。即以苑縣封兄浦凝別。是苑臣之始祖也。即以織部縣賜兄媛。是以其子孫於今在于吉備國。是其縁也。

9. 일본 덕천막부 초기에 쓰여진 "이창일본傳" – 원문 미확인
"진 원강 원년 신라병이 일본을 공격하매[여], 깊이 명석포에 들어왔다." - 元康원년은 서력 291년, 신라 유례왕 8년, 일본 응신 22년

10. 신경준/旅菴遺稿卷之三/ 序 /送使之日本序 
昔百濟臨政太子。乘舟入日本。都周防州。號大內殿。傳四十七世而絶。其從者之裔。代襲其土。都安藝州。卽秀吉驍將輝元之祖也。余竊以臨政爲王子豐。豊甞質於日本。百濟亡。百濟宗室。迎立爲王。豐乞師於日本以拒唐。及敗不知所之。是必與倭俱東也。方蘓烈以十三萬兵。杖鉞而來合新羅。共滅百濟。而豊以覆巢餘卵。嬰孤城而號咷。其亡不日。誰肯與之同其禍乎。然而白江之敗。血戰四合。海水盡赤。倭船焚者。四百餘艘。其不焚而逃者。不知幾艘。其致兵何其多也。其得死心。又何以至此也。百濟六百五十年之間。倭寇史無一見。至其亡救不得。則以王子歸。分土存祀。此不可謂只以利結也。新羅昔于老。儐倭使言曰。早晩以汝王爲塩奴。王妃爲爨婢。此戱耳。而侮之則深也。于老以是爲倭所焚。而于老之妻。又焚殺倭使以復讎。羅人之易倭可知。日本神應之二十二年。新羅兵入明石浦。浦距大阪纔百里。日本人乞和解兵。刑白馬以盟。今赤間關之東。有白馬墳云。日本環以重溟。外兵莫加。胡元大擧。廑至日歧島而卒大敗。歷代能深入取勝者。惟新羅而已。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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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내고환 18-04-18 23:16
   
삼국시대 각나라 궁궐이 잘 고증되어서 복원됬으면 좋겠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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