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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4-18 08:05
[한국사] 신라에게 괴롭힘 당하던 일본…신라정벌 거짓역사 꾸며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398  

절영도와 오사카(나니와) 위치.jpg

* 신라의 오사카 정벌(현 나니와) 


일본이 고대에 한반도를 정벌하고 지배했다고 있지도 않은 역사를 말하나 이것은 그들의 고대 역사가 우리의 지배하에 있었음을 감추기 위한 그들의 고심의 흔적이다. 오히려 가야,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일본을 정복하고 지배한 사실은 고대 역사가 그 진실을 말해준다.
 
일본은 광개토태왕 비문(廣開土太王 碑文) 조작을 계기로 앞뒤가 맞지 않은 역사위조를 감행해 우리 역사를 왜곡시켜 왔다.
 
일본은 제멋대로 역사를 조작해서 역사교재에 써 넣는 나라다. 그들은 “일거에 신라, 백제를 격파하여 신민을 삼았다” 하나 백번을 말한다 해도 이는 전부 허구이다. 당시 일본은 백제, 신라를 복속시킬 국력도 능력도 없었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더구나 고구려까지 갑진년(甲辰年. 서기 404년) 평양 부근까지 왜군이 북상해서 격전을 전개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고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일본의 역사 왜곡이 어느 정도인 것을 짐작하게 한다.
 
광개토태왕이 왜를 칠 때의 수도는 한반도의 평양도 아니다. 와가모리타로(和歌森太郞) 교수는 “광개토태왕 비의 발견은 청조시대인 1882년에 발견됐다”며 일본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광개토태왕 비문에 나타난 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일본의 사학가 나가스카(中塚氏)씨도 “당시 일본은 통일이 완성되지 못했다. 그런데 대군을 보내었다함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큰 거짓말은 통한다 하나 거짓은 밝혀지게 마련이다.
 
와가모리타로 교수는 “확실히 4세기에 일본이 군을 조선에 보내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고 했다.(日本每日新聞 1971, 8, 9, 日本史の虛像と實像).
 
고대 일본의 국가 상황을 고찰하면 왜가 백제, 신라를 격파할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해진다. 이번 글은 광개토태왕 비문의 왜곡한 것을 정벌 역사를 중심으로 가야, 백제, 고구려 순으로 다뤄보고 져 하는데 신라가 일본을 정벌하고 지배한 그 진위를 분명하게 가리려 한다.
 
일본서기의 신공황후는 가공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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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일본이 얼마나 역사를 제멋대로 하고 있는가는 일본역사서가 8세기에 나온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4~5세기의 천황의 즉위나 사망한 연대가 서로 다르게 나와 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때문에 에도시대(江戶時代)의 후반 이래 이에 관해서 여러 가지 이론이 나와 있으나 광개토태왕 비문이 알려지자, 왜가 바다를 건너서 백제와 신라를 격파했다는 신묘년(辛卯年. 서기391년)에 따라 일본 고대 사상의 기년(紀年)이 재연(再燃)했다.
 
그것은 ‘일본서기’의 대 조선관계의 기사(記事)와 ‘고사기’의 분주(分註), 천황사거(死去)의 간지(干支) 등이 각각 이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가 여러 각도로 문제에 매달려 오늘에는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가 가공의 허구임도 밝혀지고 4~5세기의 후반부터 대 조선관계의 기사에 관해서 거의 사실을 바로 잡아가며 이 사실들을 전하고 있다.
 
일본은 최근까지도 “야마도 조정의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복했다”고 했으나 4세기말~5세기 초의 왜는 고구려에 대한 문제로 가장 고심했는데 삼한 정벌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우리유민에 의해 신석기시대를 겨우 면한 일본이 고대 우리나라를 정벌했다는 것은 난센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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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본이 삼한 정벌을 말하지만 이것은 주로 신라에 대한 전쟁으로 집약돼 왔다. 그리고 신공황후는 실제 인물이 아닌 가공 인물이다.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은 일본학자들도 받아들이고 있는 일반적인 견해이다.
 
신공황후에 대한 일본사가의 견해를 종합하면 과거 일제 군국시대에 일본사가가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복, 통치했다 함은, ‘군국주의의 침략적 사기를 북돋기 위해 위조한 것’이라는 것이 다 알게 됐다.
 
신라가 일본을 정복했고 일본은 신라를 두려워했다
 
야마도 조정의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복했다는 것은 일본학계의 학자들도 납득하고 있지 않다. 와가타로 교수와 나오기 고지로(直木孝次郞) 같은 이들은 “4~5세기 초에 왜는 고구려에 시달려 매우 고심했는데 삼한 정벌은 주로 신라에 대한 전쟁으로 집약돼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다. (日本每日新聞, 1971,8,16 日本の虛像と實像).
 
‘신라정벌설’은 일본이 신라에 대한 문제로 고난을 당한 까닭에, 있지도 않은 정벌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지금은 아무리 억지로 역사를 왜곡해도 그들 자신들도 신공황후는 실제인물이 아니라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이노우에(井上光貞)씨도 황실계도(皇室系圖)는 일본의 첫 번째 왕인 오진(應神)까지 대략 신용했다. 오진의 부모인 츄아이(仲哀. 356~362)와 신공황후는 허구라는 쓰다(津田)씨가 주장한 이래 정설로 돼 있다. (日本國家の起源, 204面).
 
한편 나카무라 신타로(中村新太郞)는 그의 저서에서 “일본이 당나라에 보내는 스가하라(菅原道具)가 상주(上奏)한 조건 중에 일본해에서 신라 해군에게 피습될 위험이 큼으로 견당사(遣唐史)를 폐지하여야 한다”고 까지 했다. [日本と中國の2千年 260(面)].
 
이는 신라가 일본을 지배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신라가 실지로 일본을 지배했다. 당시 바다의 제해권을 장악한 것은 신라이지 일본이 아니었다. 일본은 신라를 정벌할 만큼 그런 국가체계나 국력도 갖추어 있지 않았다.
 
‘일본문화사’는 “신라의 태도가 오만해 천평(天平) 6년(734년) 12월에 신라 사절이 오고 그 이듬해 2월에 입경했는데 신라를 왕성국(王城國=天子의 國)이라 칭했음으로 이를 책하고 그 사절을 거절했다”고 전했다. 즉, 신라가 8세기에도 일본의 상국(上國)이라 칭한 것이다.
 
9세기에 와서도 일본은 신라를 두려워했다. 서기811년 신라 해적선이 대마도(對馬島) 사세보(佐須浦)에 출현함으로 태재부(太宰府) 관내(管內)와 장문(長門), 석견(石見), 이즈모(出雲)등 각국에 경호령(京護令)을 내렸다. “신라의 적선(賊船)이 자주 우리의 변경을 위협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본은 신라를 매우 두려워했다.
 
또 “신라인이 상업을 빙자하고 일본에 들어 와서 일본국정을 정탐했다”, “승화(承和) 10년 8월에 태재부가 정월 중순으로부터 8월 6일까지 멀리 신라측으로 부터 북소리가 들리고 황혼이 되면 또한 불이 보인다”고 했다.
 
실은 신라가 출병하지 않았으나 신라의 침략에 너무 과민신경을 쓴 탓이다. 그들은 또한 사자(使者)를 대신궁 외에 여러 신궁과 불상과 산릉에 파견해 신라의 퇴각과 국내의 평안을 기도 하였다.
 
신라내습 두려워 전국신사, 불각에 기원당부
 
신라의 내습을 두려워한 일본은 이를 방위하기 위해 정병(精兵)을 동원해 추토(追討)하고 져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두려워서 도피함으로 부득이 죄수를 징발해 방위했다고 했다. (日本文化史, 第14章 百濟,高句麗及ぴ新羅との交涉,203面~4面).
 
일본역사서 ‘일본과 조선의 2000년/신화시대(神話時代)와 근세(近世)’에는 “886년에 건아(健兒) 이하의 병사를 동원해 신라의 내습을 방위할 뿐만 아니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서국(西國-구주지방을 지칭한 듯) 각지에 배치하고 신라를 바라볼 수 있는 고지에 사원을 세우고 최승왕경(最勝王經)을 독경해 불(佛)의 보호에 의하여 신라의 침입을 방위하고자 했다”고 돼있다.
 
또 “869년 5월에 신라의 해적선 2척이 하카다항에 침입해 견(絹), 면(綿)을 탈취해가니 일본정부는 신라에 대한 공포심이 더욱 높아서 태재부의 관리를 질책해 이 방면의 군비를 증강하고 이세대신궁(伊勢大神宮), 석청수팔번궁(石淸水八幡宮)에 칙사를 보냈다”며 신라의 공격에 대처토록 했다고 적혀 있다.
 
아울러 “전국의 신사에 폐면(弊綿)을 봉수(奉修)하고 각지 사원에 금강반약경(金剛般若經)을 수법(修法)해 신라의 침입을 방위코자 했다”라고 씌여 있다. 이상은 일본의 학자도 그들의 저서에서 인정하고 있는 사실들이다. (日本と朝鮮の2千年/神話時代, 近世 83~84面).
 
이와 같이 신라를 두려워 할 때에 “신라에 잡혀갔다가 도탈(逃脫)해 돌아온 자가 ‘신라가 대선을 만들고 병사를 훈련 중’이라고 보고하니, 신라를 두려워하던 일본정부는 우사팔번궁(宇佐八幡宮)을 비롯해 전국 신사와 불각에 칙사를 파견해 신라의 내습을 방위하는 기원을 했다”고도 적혀있다.
 
이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일본이 신라를 정복한 것이 아니고 반대로 일본이 도리어 신라의 정벌에 고심(苦心)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일본이 신라를 크게 두려워 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신라가 일본을 크게 정벌 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다면 일본이 그렇게 신라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김세염(金世溓)의 ‘해사록(海槎錄)’에도 “오진덴노(應神天皇) 22년에 신라가 일본을 정벌해 오사카 근처 명석포(明石浦)까지 들어가니 일본이 항복해 백마를 잡아 맹세했다”고 했다.
 
이와 같이 일본이 신라를 정벌한 것이 아니라 신라가 일본을 크게 정벌한 일이 있었음으로 일본이 신라를 그렇게 두려워한 것이다. 여기서 ‘신공황후 정벌설’은 허구이고 시전비궁장(詩傳閟宮章)과 같은 기원사(祈願辭)일 뿐이다.
 
시전비궁장은 “노(魯)나라가 중국을 1000년 동안 호령하던 예맥(銳麥=濊貊)을 정복했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예맥(銳麥=濊貊)이 도리어 노를 정복하고 지배했다. 이것은 예맥의 정벌에 고민하는 노나라가 예맥의 정벌을 막아내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그와 같은 기원사(祈願辭)를 지은 것이었다.
 
일본은 가야를 필두로 고구려·백제·신라에 대항치 못하고 언제나 우리의 도움을 받아 발전해온 일본이 8세기에 와서 720년에 ‘일본서기’를 편찬했다. 그 역사서에는 마치 일본이 신라를 정벌하고 지배한 양 조작하였다. 이것은 허구이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시전비궁장도 일본이 신라의 정벌을 저항치 못해 전국 신사, 전국 불각에 기도 할 때에 신의 조화로서 신라의 정벌을 막아내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그와 같은 기원사를 지어 읊은 것이다.
 
일본이 신라를 정벌했다는 ‘신공황후 정벌설’도 삼류소설만도 못한 허구의 역사일 뿐이다. 이를 믿는 학자는 연구를 하지 않은 자다. 시전비궁장도 노나라가 역사를 조작, 왜곡한 것과 같이 일본도 이를 모방, 조작하여 일본의 인력으로 신라의 정벌을 막아내지 못한 고심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 신라의 왜 정벌의 역사 

1. 안정복 동사강목 제2상

신라 왕이, 왜인이 자주 침범하고 백성을 편안히 살지 못하게 함을 분히 여겨, 백제와 함께 동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에 들어가 칠 것을 도모하니, 서불한(舒弗邯) 홍권(弘權)이 간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하여 험난을 무릅쓰고 원정(遠征)하면 생각지 않은 위험이 있을까 두려운데, 하물며 백제는 속임수가 많고 항상 병탄할 욕심을 가지고 있음에리까? 더불어 도모할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좋은 말로 여겼다.
【안】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해사록(海槎錄)》에는,
“일본은 극동에 멀리 떨어져 있고 사면이 큰 바다로 둘려 있어, 외국의 군사가 들어갈 수가 없다. 단지 그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 응신(應神) 22년에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명석포는 대판(大阪)에서 겨우 1백 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의 동쪽에 한 구롱(丘隴)이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이것이 백마분(白馬墳)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쳐들어오니,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 주기를 청하여 백마(白馬)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다 묻었다.’ 한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응신 12년[22년] 신해가 바로 유례왕 8년에 해당되니, 이 해와는 조금 차이가 있으나 대개 같은 때의 사건인데, 東史에는 보이지 않는 것은 글이 빠진 것이다. – 유례왕 8년 신해는 서력 291년임, 신해년은 응신 22년임

2.동사강목 제3상
계묘년 신라 진평왕 5년, 고구려 평원왕 25년, 백제 위덕왕 30년(진(陳) 후주(後主) 지덕(至德) 원년, 583)
2월 신라가 왜(倭)의 서변(西邊)을 토벌하였다. 왜사에서 보충
【안】 《해동기(海東記)》에는,
“왜황(倭皇) 민달(敏達) 12년 계묘(癸卯)에 신라가 서변을 토벌하였다.” – 서력 583년임
고 적혔으나 신라와 백제가 왜와 접경하여 그 환(患)을 자주 입었는데 교빙과 정벌에 대하여는 사적(史籍)에 드물어서, 바다를 건너서 왜국을 정벌하였다는 일은 듣지 못하였다. 왜사(倭史) 《연대기(年代記)》에는,
“응신천황(應神天皇)이 신라의 유례왕(儒禮王) 때를 당하여,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와서 흰 말을 죽여 맹서를 받아 간 일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나라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백마총(白馬塚)이 있다.”
하고, 또
“신라가 토벌하여 온 일이 두어 곳이[번] 있었다.
적혔으나, 우리 역사에는 전하여지지 않는다. 지금 동래(東萊)의 절영도(絶影島)에 태종대(太宗臺)가 있는데 속전(俗傳)하기를 ‘신라의 태종(太宗)이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할 때 주필(駐蹕)하였던 곳’이라 한다. 신라는 조그마한 한 구석진 땅이로되, 육지로는 능히 고구려와 백제에 대적하고, 바다로는 왜국을 정벌하였으니, 그 병력의 웅대함이 삼국을 통일할 만한 것임을 생각할 수 있겠다. 후세에 해동의 온 땅덩어리가 섬나라 오랑캐[島夷]들에게 곤욕을 당한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위정자(爲政者)들은 의당 그 방어책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3. 부상록(扶桑錄)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 
정사년(광해 9, 1617) 10월 18일(기묘)
일본은 아득하게 하늘 동쪽에 있어 사방이 큰 바다이므로 외국 군사가 들어가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연대기’를 보니, 소위 ‘응신천황(應神天皇) 22년[서력 291년]에 신국(新國) 군사가 왔다.’ 하였고, 딴 본(本)에도,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 했다. 명석포는 대판까지 겨우 1백여 리다.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구롱(丘壟) 하나가 있는데, 왜인들이 가리키면서, ‘이것이 백마분(白馬墳)이라는 것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들어왔으므로 일본 사람이 화친하기를 청하여 백마를 잡아 맹세하고 말을 여기에다 묻은 까닭이다.’ 하였다. 이세(李稅)의 일을 추적(追跡)해 알았으나 밀교(密敎 임금의 비밀 전교(傳敎))에 관계된 것이므로 별도로 계초(啓草 계본(啓本)의 초고)를 만들고 여기에다 다시 갖추어 기재하지 않는다.
日本邈在天東。四面大海。外兵不入。但見其年代記。其所謂應神之二十二年。新國兵軍來。一本則曰。新羅兵入明石浦。石浦距大坂纔百有餘里。赤間關之東有一丘壟。倭人指之曰。此是白馬墳。新羅兵深入日本。日本人請和解兵。刑白馬以盟。埋馬於此故云。跟尋李稅之事。係是密敎。故別具啓草。不復具載於此。

4. 안정복/ 순암선생문집 제1권 
시(詩) 
우리 역사를 보다가 느낌이 있어 악부체를 본떠 읊다[觀東史有感 效樂府體] 
백마총행(白馬塚行)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사상록(槎上錄)에 이르기를, “일본의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倭皇) 응신(應神) 22년에 신라 군대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오니 대판(大阪)과의 거리가 겨우 1백 리 정도였다.’라 하였다.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무덤이 하나 있는데 왜인들이 그 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기가 바로 백마(白馬)의 무덤인데, 신라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일본 사람들이 화의를 청하여 군대를 풀고 백마를 잡아 맹약한 후 그 말을 저 곳에 묻었다.’고 한다.” 하였고,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의하면, 응신 22년은 신라 유리왕(儒理王) 8년[유례왕 8년이 맞음]에 해당하고, 중국으로는 진(晉)의 혜제(惠帝) 원강(元康) 원년이 되는 해[서력 291년]인데, 그 사실이 동사(東史)에는 실려 있지 않다. 해동기(海東記)에 의하면, 달민천황(達敏天皇) 계묘년[서력 583년]에 신라가 서비(西鄙)를 쳐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그 해는 신라 진평왕 5년에 해당하고, 또 원정천황(元正天皇) 경신년에도 신라가 서비를 쳐들어왔다고 했는데, 그 때는 신라 성덕왕 19년[서력 720년]이지만 그 사실이 이 동사에는 다 빠지고 없다. 지금 동래(東萊) 바다 절영도(絶影島)에 옛 진지가 있는데, 세상에 전해 오는 말로 신라 태종이 왜국을 정벌할 때 쌓은 것이라 하여, 이에 태종대(太宗臺)라고 불린다.


일본 지역에 백마총이 있는데 / 白馬塚在日域
왜인들이 대를 이어 그 무덤을 손질하며 하는 말이 / 倭人世世勤封築
옛날에 신라 왕이 쳐들어 올 때 / 謂昔羅王憤侵軼
수만 명 정병이 바다에 떠 밀려오니 / 精兵數萬浮海伐
물귀신도 뒤로 주춤 해신(海神)도 길을 비켜 / 馮夷淪易海若奔
큰 바다 동쪽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네 / 大海以東無涯藩
용 깃발을 휘날리고 타고를 울리면서 / 揚龍旆擊鼉鼓
선발대가 곧바로 명석포를 공격하니 / 前茅直擣明石浦
왜왕이 겁에 질려 화친을 청하고는 / 倭王失色事和親
짐승 잡아 맹세 쓰고 신명께 고하였네 / 刑牲載書告明神
그 후로는 오랜 기간 바다가 조용했고 / 從此鯨波久不涌
천고의 유적으로 저 무덤이 남았다네 / 千古勝蹟留遺塚
그 옛날 진터가 절영도에도 있는데 / 絶影又有古壘寨
이것이 태종대라고 뒷사람들 말을 하지 / 後人說是太宗臺
총알만한 신라 땅 한쪽에 있었으면서 / 彈丸羅地在一隅
장하여라 병력이 어찌 그리 강했던가 / 猗歟兵力何壯哉
어쩌다가 후세 들어 옛날과는 정반대로 / 歸來後世事反古
우리 나라 전역이 적의 침략 늘 당하고 / 大東全地受侵侮
지금도 해상에는 허구 많은 공갈배가 / 至今海上多虛喝
제 욕심 채우려고 해마다 손 벌린다네 / 穀帛年年充其欲
생각하면 그리 된 것 까닭이 왜 없겠는가 / 靜思其故豈無因
서생이 부질없이 국경을 안정시킬 계책 짜본다네 / 書生謾有安邊策

5. 이긍익/연려실기술 별집 제18권 
변어전고(邊圉典故) /서쪽 변방[西邊]
○ 보충. 일본 신응(神應) 22년[서력 291년]에 신라의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가니, 대판(大板)과의 거리가 1백 리라,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달라고 애걸하며 흰 말을 잡아서 맹서하였다. 호원(胡元)이 크게 군사를 동원하였으나 겨우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러 마침내 크게 패했으니, 역대로 깊이 쳐들어가 왜인에게 이긴 나라는 오직 신라뿐이었다. 신경준(申景濬)《여암고(旅菴藁)》

6. 이덕무/ 청장관전서 제65권 
병전 兵戰 /여몽정벌(麗蒙征伐
응신 22년(291)에 신라의 군사가 대판(大阪 오오사까)에서 1백 리 떨어진 명석포(明石浦 아까시[明石])까지 깊이 들어오니, 일본이 강화하고 적간관(赤間關) 동쪽 땅에서 백마(白馬)를 죽여 맹약(盟約)하였는데, 지금도 그 백마총(白馬塚)이 있다. 흠명(欽命 540~571) 때에 신라가 일본을 치고 임나를 멸망시켰다. 

7. 金世濂(1593-1646) /海槎錄/聞見雜錄
일본은 멀리 하늘 동쪽에 있고, 사면이 큰 바다이므로, 다른 나라의 군사가 침입하지 못한다. 다만 그들의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이른바 응신(應神 응신천황을 일컬음) 22년(222)[291년]에 신라(新羅)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 하였는데, 명석포는 대판(大坂)에서 겨우 1백 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 동편에 큰 무덤 하나가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말하기를, ‘이는 백마분(白馬墳)인데, 신라 군사가 깊이 들어오니, 일본 사람이 화호(和好)를 청하여 군사를 해산하고, 흰 말을 베어서 맹세하고, 여기에 말을 묻었다.’ 한다.

8. 일본서기 
"응신 22년[291년], 갑자기 등장한 어우별[御友別] 세력에게 응신왕이 여섯현을 떼어주었다
日本書紀』巻十応神天皇二二年(辛亥二九一)秋九月辛巳朔庚寅《十》
庚寅。亦移居於葉田〈葉田。此云簸娜。〉葦守宮。時御友別參赴之。則以其兄弟子孫。爲膳夫而奉饗焉。天皇。於是看御友別謹惶侍奉之状。而有悦情。因以割吉備國封其子等也。則分川 嶋縣封長子稻速別。是下道臣之始祖也。次以上道縣封中子仲彦。是上道臣。香屋臣之始祖也。次以三野縣封弟彦。是三野臣之始祖也。復以波區藝縣封御友別弟鴨別。是笠臣之祖也。即以苑縣封兄浦凝別。是苑臣之始祖也。即以織部縣賜兄媛。是以其子孫於今在于吉備國。是其縁也。

9. 일본 덕천막부 초기에 쓰여진 "이창일본傳" – 원문 미확인
"진 원강 원년 신라병이 일본을 공격하매[여], 깊이 명석포에 들어왔다." - 元康원년은 서력 291년, 신라 유례왕 8년, 일본 응신 22년

10. 신경준/旅菴遺稿卷之三/ 序 /送使之日本序 
昔百濟臨政太子。乘舟入日本。都周防州。號大內殿。傳四十七世而絶。其從者之裔。代襲其土。都安藝州。卽秀吉驍將輝元之祖也。余竊以臨政爲王子豐。豊甞質於日本。百濟亡。百濟宗室。迎立爲王。豐乞師於日本以拒唐。及敗不知所之。是必與倭俱東也。方蘓烈以十三萬兵。杖鉞而來合新羅。共滅百濟。而豊以覆巢餘卵。嬰孤城而號咷。其亡不日。誰肯與之同其禍乎。然而白江之敗。血戰四合。海水盡赤。倭船焚者。四百餘艘。其不焚而逃者。不知幾艘。其致兵何其多也。其得死心。又何以至此也。百濟六百五十年之間。倭寇史無一見。至其亡救不得。則以王子歸。分土存祀。此不可謂只以利結也。新羅昔于老。儐倭使言曰。早晩以汝王爲塩奴。王妃爲爨婢。此戱耳。而侮之則深也。于老以是爲倭所焚。而于老之妻。又焚殺倭使以復讎。羅人之易倭可知。日本神應之二十二年。新羅兵入明石浦。浦距大阪纔百里。日本人乞和解兵。刑白馬以盟。今赤間關之東。有白馬墳云。日本環以重溟。外兵莫加。胡元大擧。廑至日歧島而卒大敗。歷代能深入取勝者。惟新羅而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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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isent 18-04-18 09:06
   
잘보고 갑니다.
가남 18-04-18 09:26
   
이 게시판에 올라왔었는데 하나 기억 나는 것이 절 보수하는데도 신라의 허락이 필요했다던 ㅋㅋㅋㅋ
6시내고환 18-04-18 23:16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신공왕후는 아직도 이야기가 나오나요? ㅋㅋㅋ
에초에 나타날수 없는 가상인물...
제 생각에는 신라에게 나라가 멸망한 백제인들이 굴욕감을 만회하려고 만들어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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