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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4-18 14:30
[기타] 굴욕 끝판왕 .....3명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3,023  

3위)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트 1


티무르제국을 건국한 티무르와 앙카라에서 맞붙어 그는 포로가 되었다. 티무르는 그를 가두어 두고 온갖 학대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정중하게 대우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바예지트 1세가 이 패배와 구금으로 인한 울화로 사망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티무르의 성격으로 보든, 기록으로 보든 특별히 학대하지는 않았다는 게 현재의 통설이다. 그러나 당시 30세였던 세르비아 출신의 황후 올리베라 데스피나도 앙카라 전투 당시 바예지트와 함께 포로가 되었는데 잔치 때마다 불려나와 발가벗은 채 와인을 따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이 사실은 단순히 세르비아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거짓말이라는 말도 있지만 수많은 그림이 남을 정도로 바예지트 1세는 굴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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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체로 술을 따르는 황후와 포로로 잡혀 새장에 갖혀 황후의 수치를 지켜보는 바예지트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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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 송 휘종


금나라가 건국되자 이이제이책으로 금나라와 협력하여 요나라를 박살낸 후에 또 요나라 패잔병들과 협력하여 금나라를 박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상대의 힘 및 자신의 세력의 규모 정도는 확인하고 이이제이를 해야 하는데 머리가 나쁜 휘종은 그런 건 관심이 없었고, 역시나 요나라 마지막 황제로 여기저기 도망치던 천조제가 결국 패하여 붙잡히면서 이런 진실이 드러나고 만다. 게다가 대비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으니...

 

이에 분노한 금태종이 군대를 파견하자 깜짝 놀라 적장자이자 황태자인 조환(흠종)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도군황제(道君皇帝)가 되어 현실의 모든 책임을 아들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동관, 채경 등을 데리고 장강 이남의 안전한 남쪽으로 도망쳐 종교적인 믿음에 의존하려 하였다. 결국 금나라와의 화의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시간을 끄는 사이 흠종은 영토할양, 배상금 지급 등의 요구를 수용해서 황실종친, 절 등에서 금은보화를 각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면서 사태수습을 했고, 병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남쪽으로 도망쳤던 휘종을 개봉으로 다시 데려오는 바람에(...) 죽어도 같이 죽읍시다. 아버지!! 결론적으로 위험한 개봉에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무너진 군대가 전직 황제 하나 새로 데려온다고 진정될 리 만무했으니, 결국 송군은 깨끗하게 갈려 나가고 뒤이어 개봉이 함락당하고 아들 흠종과 함께 금나라의 포로로 붙잡혔다. 이 때 황자, 황녀, 황후, 후비, 제왕, 왕비 등의 여러 황족들, 역대에 걸쳐 모든 재물, 금은보화, 그림, 서적 등등의 전리품과 함께 북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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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끌려간 황족들은 그나마 두 황제는 남송과의 관계를 감안한 금 태종의 지시로 전직 황제 취급은 받아서 그나마 처지가 나았지만 나머지는 그야말로 지옥행 그 자체
. 특히 휘종의 딸이나 황후를 제외한 후비들은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그나마 도망이라도 치거나 뒤늦게 유해라도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해당 사항이 없었고, 운이 좋아야 황제 금태종, 금희종, 황족, 장군의 첩이 되었다. 이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금나라 관기들의 기방인 세의원으로 보내져 창기(娼妓)가 된 경우도 많았다. 서진 시대의 영가의 난처럼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손들의 굴욕적인 몰락이었다. 개중에는 여러 남자들의 성노예가 되어 끌려다니다 간신히 남송으로 도망쳐 온 공주가 진짜를 사칭한 가짜라 해서 처형당하는 일도 일어났다. 그러나 이 공주가 사실은 진짜인데 그녀와 같이 금나라에서 돌아온 고종의 모후 위씨가 자신이 금나라에서 다른 남자를 모신 사실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공주를 모함해 죽인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국 땅에서 온갖 수모를 겪다 간신히 돌아왔는데 계모에게 모함당해 죽임을 당한 게 된다. 사실이라면 진짜로 불쌍하다. 원래 송태종의 자손들은 귀해서 수가 적었는데 이렇게 금나라로 끌려나고 훗날 남송을 세운 송고종마저 자손없이 사망하면서 남송은 동생에게 자리를 빼앗긴 것으로 추정되는 송 태조의 자손들이 대대로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송 태조의 자손들에게 송 태조만한 역량은 없었으니, 결국 비슷한 짓을 하다가 망했다.

 

금태종은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휘종의 정신이 혼미하기 때문이라면서 혼덕공(昏德公)이란 작위를 내려 조롱하였다. 사실 금으로 끌려가면서 휘종은 '기생 이사사와 함께 끌려가고 싶다'라는 말을 했다. 이처럼 나라가 망하고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마당에 기생과 함께 가게 해달라는 말을 주절대는 꼬락서니가 금에서 보기에는 혼덕공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었을 것이다. 휘종 때문에 북송이 망했다는 주장도 사실 틀린 것도 아니고. 그 외에도 그를 금나라로 끌고 갈 때 한 백성이 술과 고기를 올리자 호송하던 금나라 대장은 그 술과 고기를 땅에 버린 다음 강제로 주워먹게 했다

결국 금나라의 땅 오국성에 끌려가 한 칸자리 방에 수감되어 망국의 한을 품다 1135년 숨을 거뒀다. 그나마 아들 고종이 협상 끝에 유해를 송환받을 수 있었다. 남송으로 송환된 휘종의 유해는 고종이 황릉 지대로 정한 소흥 일대에 마련한 영우릉에 묻혔다. 고종 역시 이 일대에 묻혔으며, 이 후 도종까지 남송의 역대 황제, 황후, 후비, 제왕 등 황족들은 대대로 이 지역에 묻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휘종의 무덤인 영우릉은 남송이 멸망한 후 원나라 세조때 다른 남송 황릉과 함께 라마승이었던 강남 석교 총통 양련진가에 의해 도굴당했다. 그의 유해는 다른 황제들의 유해와 함께 황야에 버려졌고 소뼈, 말뼈와 함께 섞여 상자에 담겨져 진남탑(鎭南塔) 아래에 묻혔다.


1위) 송 흠종


흠종이 금나라 군대의 포로로 송환되어 끌려갈때, 금나라는 이들을 여러 무리로 나눈 뒤 데리고 갔다. 이때 휘종은 4번째로, 흠종은 7번째로 출발했는데 흠종은 출발 당시 검은 옷을 입고 머리에는 모직물로 된 전립이 씌워진 채 검은 말에 태워져 전담 병사들의 감시 아래 이동하게 됐다. 가는 길에 흠종은 망국의 짐을 짊어진 자신의 신세와 굴욕 등을 한탄하며 하늘을 쳐다보며 곡을 했지만 그때마다 옆에 있던 금나라 군사들에게 크게 질책받고 제지되어 곡소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로 끌려가게 되었다. 여기에서 흠종의 비극은 그치지 않았다. 자신과 함께 이동하던 사람들이 다치거나 병에 걸려 죽어나갔고 흠종의 황후인 주씨(시호: 인회황후(仁懷皇后)) 역시 치욕을 경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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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가 예쁜 편이었던 황후 주씨에게 금나라 장수가 그녀에게 노래를 부르라 시키자주씨는 자신의 비참한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금나라 장수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해 오히려 흥겨워하며 다시 노래를 부르라 재촉했다. 그 후에는 아예 술 시중까지 들라고 했고 주씨가 당연하게 이를 거부하자 금나라 장수 택리가 주씨를 아예 강제로 끌어당기면서 강제로 술 시중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에 주씨는 술자리 시중 들기를 거부하며 격렬하게 저항했고 분노한 택리에게 기절할 때까지 맞았다. 흠종이 결국 참다 못하여 분노를 터트렸는데, 오히려 포로가 반항을 한다고 열받은 택리가 흠종을 죽이려 들었다. 이때 현령이 "폐하(금 태종)께서는 저 놈을 생포해오라 했습니다. 죽이면 장군님만 손해입니다."라고 택리를 설득해서 흠종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황후 주씨는 이 때 당한 치욕과 폭행으로 인해 결국 몸져 누웠고 흠종은 눈물을 흘리며 치료를 해달라 요청을 했음에도 철저하게 무시당하여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더 비참한 것은 한 때 일국의 황후였던 그녀의 시신이 금나라 군에게 멍석으로 대충 말아져 지나가던 중 아무 곳에 묻혀 버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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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부르고, 술을 따르며, 상의를 벗게한 치욕을 당한 주황후 

 

여기에서 흠종의 굴욕은 끝나지 않았는데 압송되어 금태종 앞에 끌려온 뒤 실컷 맺어놓은 강화 조약을 주전파 신료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파토낸 것은 흠종의 정신이 혼미하였기 때문이라면서 중혼후(重昏候)라는 칭호를 부여하여 조롱받았다. 아울러 굴욕적인 항복의식도 치뤄야만 했다. 이후 흠종은 휘종과 함께 금나라 수도에서도 다시 이송되어 귀양살이를 해야만 했는데 그 곳은 하얼빈 이란현 근방으로 당시에는 오국성이라고 불린 지역이다. 당연히 오국성과 남송과의 거리는 엄청나게 멀었기 때문에 탈출하지도 못했다. 이 후 남송의 고종이 나서서 금나라와 협상한 끝에 부모님(송휘종)의 유해와 많은 황실 일족, 대소 신료들이 살아남은 사람은 송환되고, 죽은 사람은 유해의 일부라도 송나라로 귀환할 수 있었던 상황 속에서 동생 고종과 남송 조정은 흠종만큼은 끝까지 언급되지도 않았고 송환 절차도 밟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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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애초에 고종은 넌지시 흠종의 송환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을 금나라 조정에 전달하기까지 했다. 이는 고종은 흠종의 이복 동생이자 휘종의 9번째 아들에 불과했고 더구나 서자였다. 반면 흠종은 적자이자 장남이었기 때문에 송나라 예법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던 적장자 계승원칙에 따르면 확고한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흠종이 돌아오면 고종은 제위를 흠종에게 당연히 양도해야 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흠종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황제에 올랐기 때문에 문책을 받을 수 있었기에 고종은 자신의 제위를 지키기 위해 형을 적국에 방치해둔 것이다. 결국 흠종은 금나라 땅인 오국성에서 30년 가까이 억류당했다가 1161년 숨을 거두고 영원히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휘종이 금나라에서 묻혔던 묘는 북한의 고령진역 근처에 있고 흠종의 묘는 두만강 건너에 위치한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에서는 오국성의 위치를 함경도가 아니라 헤이룽장성 의란현으로 보고 있다. 거기다 얼마 되지 않는 흠종의 자손들은 모두 금의 폭군 해릉왕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그의 대는 끊겼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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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롱콘 18-04-18 14:57
   
[[이에 분노한 금태조가 군대를 파견하자 깜짝 놀라 적장자이자 황태자인 조환(흠종)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
.
금나라가 송을 쳐들어갈 당시는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는 이미 죽은 이후이고.... 2대인 태종 오걸매 치세였습니다.

한때 조선 북변의 두만강변에 위치한 회령 일대가 송 휘종과 흠종이 유배당했던 오국성으로
오인되어 왔습니다. 특히 조선후기 영정조 시기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당시 임금과 신하가 회령의
두 황제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대해 주고받은 대화들이 언급됩니다.
     
히스토리2 18-04-19 06:40
   
아! 태종의 오타입니다...감사합니다...앞으로는 좀 더 살피겠습니다.
히스토리2 18-04-18 15:21
   
송의 휘종과 흠종을 보며느 저렇게 까지 하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황후가 맞아서 죽은것과 다름없는데...자신의 딸들을 창기로 팔려나가고

이런말 해서, 지나친 듯한 생각이 들지만, 지나라는 민족성 자체가 이렇게 그냥 노예상태 로라도, 길게 사는게 그들의 성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여진이 가혹하기는 했지만, 이 상황에서 자결하지 않은 군주는 휘종과 흠종 말고는 세계사적으로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촐라롱콘 18-04-18 15:55
   
그러고보니 마지막 이미지는 휘종과 흠종이 상의를 탈의하고 양가죽을 뒤집어 쓴 상태에서
치르는 항복의식인 "견양례"에 대한 이미지인 것 같군요....!!!

전제왕조시대에 수많은 비빈과 부인들을 거느렸던 제왕-황제들이 그들의 부인에게 향한
감정은... 오늘날 일부일처제하에서 부부간의 감정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애틋한 감정은
약할 것입니다.

일례로 조선말기 고종도 을미사변으로 30년 조강지처인 명성황후를 비극적으로 잃었어도
불과 몇일 지나지 않아 엄상궁(후에 영친왕을 낳고 귀인-귀비로 격상된)을 불러들인 것을 보면...

그리고 흠종의 황후가 위의 글처럼 맞아서 죽었다는 내용은 정사가 아닌 야사에 가까운 내용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휘종의 경우에는 금나라로 끌려간 이후에 낳은 자식들도(중년 이후의 비교적
많은 나이임에도) 7~8명에 달할 정도이며... 비록 송나라황제 시절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말년에는 휘종의 많은 딸들과 며느리들이 금나라 황제, 황족, 장군.. 등의 금나라 최고권력층들의
첩이 되었기 때문에(이는 다시말해 금나라 최고권력층 상당수가 휘종의 사위가 되었다는 논리^^)
그들이 지원해주는 패물과 물자로 인해 경제적으로는 넉넉한 여생을 누렸습니다.

사실 보위를 이을 직계 장자나 장손자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자식들이야 황제시절의 입장에서
그냥 씨만 뿌려놓고, 키운건 주로 유모들이 키웠을 것이니(황후-부인들이야 낳은 정이라도 있다지만)
더구나 휘종의 자식들만 해도 무려 수 십명에 달하니... 자녀들에 대한 애틋한 감정 또한
요즘같은 한 두명만 낳아 키우는 부모의 심정보다는 훨씬 약할 것입니다.
히스토리2 18-04-18 16:00
   
네 혼덕공이나 중혼후 대신 새로운 칭호도 내려 준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어쩌면 거란의 천조제가 더 비참했을 수도 있습니다...다만, 저 정도가 되었으면 비루한 인생을 계속 살아가야 하느냐는 것 입니다. 아무튼 그들의 삶은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대변할 수 있는데, 너무 자존심 없는 삶이 아니었나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위구르 18-04-18 20:43
   
금나라가 송을 엄청나게 증오했나 보군요, 황제에 대한 대우가 ㄷㄷ
     
촐라롱콘 18-04-19 09:29
   
증오라기보다는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 자체가 바로 이전까지만 해도
워낙 야성이 강한 부족이었던지라....

자기들이 굴복시킨 부족장 또는 왕들은 저런 대우를 하는 것을 당연시 여겼지요~~~

금나라를 계승했다고 하는 훗날의 후금-청나라는 바로 이전의 건주여진시절부터
중국과 한반도에 상대적으로 가까워서 보고배운 것이 있는지라 여진중에서는
가장 개명한 축에 속하고 따라서 어느정도 격식과 예절을 갖춘 상태였지요....!!!
6시내고환 18-04-18 22:49
   
금과 송은 진짜...인조는 양반대우는 해준 정도로 보이네요
히스토리2 18-04-19 06:47
   
인조는 사실, 정문 대신 쪽문으로 그리고, 푸른색 옷을 입게 한 것 말고 딱히 뭐 심한 굴욕이랄것도 없지요...머리에 피가 흥건하게 이마를 땅에 박은것 도 아니고요......그것은 훗날의 과장
     
운드르 18-04-19 10:41
   
앞에 나온 글과는 다른데요?
히스토리님과 히스토리2님은 무슨 관계인가요?^^;
히스토리2 18-04-19 15:52
   
운드르님 슬픈 기억인데요...제가 해외반응과 해외뉴스 번역 등 가생이의 번역하는 곳에서 일명'도배'를 했어요...하루에 번역글을 한 40-50개(사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암튼 좀 많이?)  올렸나 그랬어요 ㅠㅠ 뉴스위크나 타임 위주로 그래서 운영진에게 밴 먹고, 다시 아이디를 만들었어요...둘다 저 입니다. 가생이 운영진도 좀 불쌍한지 12포인트 주었구요...그래서 현재 15포인트 입니다. 지금은 하루에 번역물 5-10개 이상은 안올리기로 경고받고 착하게 살고 있습니다(실업자는 아니구요.....직업이 좀 그런 번역하기에 적합한 업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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