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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4-20 12:27
[기타] 고구려의 마지막 군주 보장왕
 글쓴이 : 응룡
조회 : 1,385  

고구려 멸망 후 나라로 압송되었고, 당태종의 묘에 참배를 시켰다. 연씨가 정권을 잡았지 자신이 정치를 한 것이 아니고 전쟁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 한 것을 당나라에서 인정해 (당나라 입장에서) 그의 죄를 용서하고 사평대상백원외동정(司平大常伯員外同正)에 책봉되었다. 과거 고구려의 중심 지방이였던 요동 지방에서 고구려 부흥 운동이 거세자[3] 그를 요동주도독 조선왕(遼東州都督 朝鮮王)[4]에 봉하고 안동도호부로 부임하게 하여 부흥 운동을 무마시켜보려 했으나 오히려 보장왕은 말갈과 손을 잡고 고구려 부흥을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는 실패하였고, 681년(신문왕 1년) 고구려와는 대륙 반대편인  땅(지금의 쓰촨성)에 유배당했으며, 죽은 후 위위경에 봉해졌고, 돌궐 힐리가한의 무덤 옆에 묻혔다고 한다.

그 후 당은 기만 정책으로 보장왕의 손자가 요동에 봉해진다. 이후 계속 세습되어 독립적인 정권인 소고구려가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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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2 18-04-20 12:55
   
소고구려(小高句麗, 686년 ~ 820년)는 고구려 유민들이요동반도 지역에 설립한 왕국이다. 정식 국호는 고구려(高句麗) 또는 고려(高麗)였으나, 같은 국호를 사용한 다른 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통칭, 소고구려라고 부른다.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셋째 아들 고덕무가 실질적으로 건국하였다.
고구려 멸망 후 약 120년간 요동 지역에 존재하다가 발해에 병합되었다.
고구려국이라는 국호를 택한 것은 안동도호부의 도독을 지냈던 고덕무로, 보장왕의 3번째 아들이었다. 당나라로부터 고려군왕에 임명된 고덕무는 699년에 요동반도에서 고구려 부흥을 위한 나라인 소고구려를 건국했다 .
사실 이 소고구려의 역사는, 고구려 멸망 후 요동지역의 정치적 상황과 이 지역 유민의 동향 그리고 요동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동 등을 통해 추론을 통해 알 수 밖에는 없다. 이, 요동지역은 원래부터 고구려인들이 수백 년간 토착해 온 지역이다.
이 지역은 고구려와 수나라·당나라 간 전쟁의 중심무대였으며, 고구려의 중심지였지만, 청야작전이라는 고구려의 전술을 통해, 고구려 멸망 무렵에는 극히 피폐한 상태로 변해 버렸다.
(사실 웅장한 요양의 평양도, 요동의 장안성도 모두 사라져 버린 상태로, 고구려를 승계한 발해 조차도 이 요동지역이 아닌, 현 만주의 장춘 지역과 그 인근으로 중심지역을 이동한 상태였다)
거기다 청야작전 으로 피례한 이 지역을, 복구를 해야할 주민들이, 669년 당에 의해 대거 당 내지로 강제 이주되었고, 안시성 등지에서 반당운동이 맹렬하여 전란이 계속되었으므로 더욱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히스토리2 18-04-20 12:55
   
1) 먼저, 당은 676년 신라에 쫓겨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요동에 옮긴 후, 중국 내지로 옮겼던 고구려 유민 집단을 요동에 귀환시키고, 보장왕을 요동도독조선군왕(遼東都督朝鮮郡王)에 봉하는 등의 조처를 취해 이 지역을 충실화하고 다시금 요동지역의 안정을 도모하려 하였다.
이 때 당에 끌려 갔던 백제 유민들도, 요동에 보내어 건안성에 부여융으로 하여금 소백제국을 건설하게 하였다. 그러나 보장왕이 속말말갈족과 은밀히 내통하여 반란을 기도하자, 당은 그를 유배보내고, 요동지역 유민들을 재차 대규모로 강제 이주시켜 중국 내지의 각 지역으로 옮겼다. 그 뒤 요동의 유민사회는 크게 위축되어 빈약한 호구만 남게 되었다.

2) 특히 당의 요동 지배는 696년 거란족의 반란(이진충 등)에 의해, 북중국에서 요동으로 통하는 육로가 차단되고 동북방지역에 대한 당의 지배력이 동요됨에 따라 난관에 봉착했다. 이 때 일시 요동포기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당은 요동의 안동도호부를 도독부로 격하시키고,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과 서자고덕무(高德武)를 안동도독에 봉하여 동요하는 유민사회를 안정시키면서, 한편으로는 발해만을 건너 해로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여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두 왕 모두 독립을 시도하려 했고, 2대 고덕무에 이르러 실질적인 소고구려 왕국이 성립되었다.

3) 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당의 요동지역 고구려 유민에 대한 지배는 실제적으로는 매우 제한 적인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서쪽의 토번의 성장과 돌궐과의 마찰 그리고 당 내부의 문제 등이 겹치면서 실질적으로 안동도독부는 폐지 상태에 이르렀고, 소고구려국은 거의 자치를 이루게 되었다,
(물론 기미주의 성격을 완전히 벗어난 상태는 아니었지만, 이는 같은 종족인 발해국의 서진의 압박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이 지역 유민들이 사방으로 이산하여 호구 수가 크게 감소하여, 독립적인 정권을 창출할 만큼의 인구를 갖추기 힘들어 졌기 때문이기도 한다.
(즉, 680년대 후반 재흥한 돌궐이 흥안령 이동에까지 세력을 뻗쳐 오고, 8세기 들어 발해가 급속히 발전해 나감에 따라 이 지역 고구려 유민들은, 중동부 만주지역 즉, 발해지역으로 이산해 갔다. 따라서 인구는 극히 희박해졌다.)
752년의 기록인 구당서 舊唐書 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요동의 고구려 유민은 4도독부 10주의 기미주(覊縻州)로 편제되어 있었고, 인구는 5,718호 1만 8,156명에 불과하였다. 이 호구 수는 당시 요서지방의 호구 수와 비교할 때 너무나 적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그러나 “요동지역의 호수가 감소하여 빈약한 무리만 남게 되었다.”는 기록과 연결되어 당시 요동지역의 일반적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히스토리2 18-04-20 12:55
   
4)그 뒤 발해의 팽창에 따라 그에 쫓긴 일부 말갈족들이 요동으로 이주해 왔고, 4대 문원왕 시기인, 755년 평로절도사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을 고비로 당의 영향력은 전면적으로 붕괴되었다. 이 틈을 타 발해가 진출해 와 목저성(木低城)과 현토성 일대를 병합하여 요동평야를 압박하는 형세가 되었다.
안록산의 난이 제압된 뒤,  당의 세력이 요서지역에 재차 세력을 펼치려 했짐나, 발해세력에 막혔고, 요동지역 유민들은 점차 정치적으로 세력을 결집하여 독자적인 국가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818년에는 고려국으로서 당에 사신을 보내고 악공(樂工)을 바치기도 하였다(818년 당회요)

5)소고구려국의 주민 구성은 (1)고구려 유민이 중심이 되고 (2)건안성에 교치되어 있던 일부 백제계 유민 집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또한 (3)말갈족  주민들이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소고구려국은 전체 인구가 적었을 뿐더러 사방이 트인 평원인 요동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방어에 크게 난점이 있었다. 요서를 장악한 발해와 다시 요서,요동에 진출하려하는 당 사이에서, 독자적인 소국을 일정시간 형성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은 매우 취약한 것이었다.
즉, 요서를 완전히 장악한 제10대 선왕 대인수(大仁秀)의 치세 때(818∼830) 발해가 크게 팽창하여, 요동을 완전히 병합함으로서, 소고구려는 멸망을 하게 되었다.
본국이 발해에 병합되자, 당시 당에 가 있던 소고구려국 승려 구덕(丘德)은 요동으로 가지 않고 827년 불경을 가지고 신라로 건너가기도 하였다. 그 뒤 요동의 고구려 유민은 발해의 현으로 편제되어 그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6)10세기 초 거란이 동진해 오자 요서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발해와 쟁투가 벌어졌으나, 926년 발해의 멸망으로 요서는 완전히 거란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어 거란은 동부 장춘~연해주지역의 발해인을 대거, 구 소고구려 지역에 이주시키고, 동단국을 만들었지만, 곧 붕괴되었고, 거란 역시 연운16주 문제로 중국과 갈등이 심해지면서, 이 지역은 북진하는 왕씨 고려와 정안국이 실질적으로 양분하다가, 정안국이 거란에 의해 멸망하면서, 요동지역은 왕씨 고려와 거란사이에서, 분쟁의 지역이 된다.
바로 그 지역이 소위 강동8주이며, 현 요양과 심양을 경계로 거란과 고려사이에 국경선이 그어지게 된다.
히스토리2 18-04-20 12:56
   
* 소고구려국의 한계는 요동의 경제가 고수,고당 전쟁에서 완전히 파괴된 상태에서 그 주민들 마저, 중국각지로 사민되어 다시 부흥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또한 같은 동족인 발해의 성장은 소고구려국의 멸망을 가져오게 됨으로, 당으로 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는데 한계를 지니는, 상태에 놓여있었다. 결국 안녹산에 난을 계기로, 당의 요서에 대한 지배권이 완전히 발해로 넘어가고 발해에 포위됨으로서 자연스럽게 소고구려국은 발해에 합병되었으나 699~820년이라는 상당한 시기를 요동에서 세력을 행사하였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ps) 소고구려왕국의 수도로 '단동 봉황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성둘레가 10,000m에 달하는데, 만주에서 제일 큰 산성山城이다. 평지성까지 치면 5위 정도의 규모이다.

그러나 그렇게 성이 큰 데도 불구하고, 고구려 수도가 여기 있었던 적이 없다

(북한은 이 지점은 고구려의 평양이 한 때 있었다는 주장을 내 놓은 적이 있다. 필자역시 서안평 지역에 고구려의 평양이 한 때 있었다고 추정을 했었다 )



다만, 당나라 안동도호부 도독으로 임명받아 자립하였던 고덕무의 소고구려(699~820년) 때에 도성으로서 이 단동 봉황성이 건설되었을 수도 있다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713년 당나라가 고려대수령高麗大首領으로 인정한 고정전高定傳은 그 고덕무의 후예다.당나라 사자 최흔은 대련 땅을 가졌던 고정전의 소고구려를 거쳐서, 발해에 들어가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고 돌아간 것이 된다.
히스토리2 18-04-20 12:56
   
소고구려의 주요 국왕

1. 보원왕(668~699): 보원왕은 고구려 보장왕의 손자이자, 태자 복남(福男)의 아들이었다. 668년 평양성 함락 후 당나라에 끌려갔으며, 당나라에서 귀족의 대우를 받고 자랐다. 당나라는 보장왕을 안동도독으로 파견하여 고구려 유민들을 다스리게 하였으나 효과가 없자, 보장왕을 다시 장안으로 소환했다.685년 당나라 조정은 보장왕의 손자 보원을 소고구려국왕으로 삼아 고구려로 보내어 항쟁을 잠재우려고 했다. 그러나 이 책략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 후 다시 요동 주변 지역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이 전개되자 당황한 당나라 조정은, 686년 보장왕이 죽자, 보장왕의 손자 보원(寶元)을 충성국왕으로 봉하고 요동반도에 파견하였다. 당나라는 보원왕을 좌응양위대장군 충성국왕으로 봉했다. 그러나 보원은 꼭두각시 노릇이 싫어 고구려 항쟁을 배후에서 지원하다가 끝내 왕위를 버리고 항쟁에 뛰어들었다. 결국 반당군(反唐軍)에 합류하였다. 이후 보원왕은 자립하여 고구려왕이라 하였다. 698년 측천무후는 다시 그에게 작위를 내렸다. 698년에 이르러 좌응양위대장군으로 임명했다가 다시 충성국왕으로 봉하고 안동의 옛 주·군을 통치하려고 했으나 가지 않았다. 이후 측천무후는 보원의 세자 보덕을 후임 고구려 군주로 임명하여 파견했으나, 보덕 역시 고구려 부흥군에 투항해 버렸다.

2.덕무왕 (699~718): 고덕무는 660년 경 혹은 662년에 고구려 보장왕의 3번째 아들(혹은 서자)로 태어났다고 한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부왕과 함께 당나라 낙양으로 끌려갔다. 고구려가 멸망했으나, 각지에서는 고구려 부흥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당나라를 크게 격파하자, 당나라는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요동 지방을 다스리기에도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699년 요동에 두었던 안동도호부를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로 격하시킨 뒤, 699년에 고덕무를 안동도독부 도독(安東都督府 都督)에 임명하여 요동지역의 통치권을 위임하였다. 699년에 안동도독에 임명된 고덕무는 소고구려를 실질적으로 건국하였으며, 소고구려는 고덕무 사후에도 백 년 이상 유지되었다. 그러다 820년 경, 발해 선왕에 의해 합병되어 발해에 흡수되었다.

3.문간왕 (718~721): 고연(고연은 덕무의 동생이다)

4.문원왕 (721~773): 고진
G마크조심 18-04-20 18:25
   
에혀 어떤 지 주제도 모르던 국가 때문에 이기 뭐꼬
     
6시내고환 18-04-21 23:29
   
신라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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